외로운 지미
김일광 지음 | 현암사
지미는 풀무치지미는 학교 뒷산에서 버스 소리를 들었다. 멀어져 가는 버스 꽁무니는 지미의 가슴에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해 주었다. 설움에 북받치는 가슴을 쓸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풀무치, 또 지각이야? 나가서 바지 털고 와." 선생님은 지미에게서 늘 풀 냄새가 난다며 풀무치라 불렀고 아이들도 아예 별명으로 이름을 대신하였다. 이슬과 풀잎으로 젖은 바지를 털고 들어온 지미에게 순이가 또 놀리기 시작했다. "세수했어? 안 한 것 같애." "했어." 지미의 얼굴은 때가 낀 것처럼 유난히 가무잡잡했고, 큰 눈은 움푹 들어가기까지 했다. "너 우리나라 애 맞니?" 사람들이 이렇게 물을 때마다 지미는 "저어, 상엿골 외딴집이 우리 집인데요." 하면서 애써 이 땅에서 태어난 것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한마디씩 했다. "쟤 아빠가 외국인 노동자라 카더라. 순자가 맡겨 놓고 갔다더라." 이런 일이 잦아지면서 사람들이 모인 곳을 지날 때는 먼 길을 돌아가는 버릇이 생겼다.
선생님은 모두에게 다가오는 학교 운동회에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당부하였다. 기껏 전교생 50명인 학교에서 아이들만으로 하루 종일 시간을 채우기가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지미는 어떡해요? 엄마가 없잖아요." 순이였다. 어떤 일에라도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우리 엄마 올 거야." 참고 있던 지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꼭 어머니를 데리고 와서 순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할머니이! 아이 참, 엄마가 와야 되는데. 빨리 엄마 데려와요오." 저녁마다 지미는 앙앙대며 졸랐다. 할머니는 대답 대신 멀거니 지미를 바라보기만 했다. 요즘 들어 할머니는 더욱 기운이 없고 아파서 눕는 날이 많았다. 지미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도 다가오는 날짜 때문에 그냥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을 어귀에서 버스 소리가 들렸다. 부르릉대는 차 소리는 자꾸만 지미를 부추겼다. 친구들이 보란 듯이 어머니를 데려오고 싶었다. 재빨리 버스에 올라탄 지미는 맨 뒤쪽 의자에 앉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산 그림자 속으로 곳집이 보이더니 산등성이를 돌면서 외갓집도 보였다. 그제야 집을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버스는 이미 내리막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전에 할머니가 알려줬던 어머니의 전화번호에는 어머니가 없었다. "여보세요, 유순자 씨 계세요?" "그런 사람 없다니까요. 하루 종일 귀찮게 구네." 얼마나 울었을까. 퍼뜩 홍이 삼촌이 떠올랐다. 돌아가신 옆집 할머니 아들인 홍이 삼촌은 전에 시골에 한번 내려와 인사를 하고 가면서 지미에게 도시로 가면 엄마를 찾아보겠다며 전화번호를 주고 갔었다. "홍이 삼촌! 저예요, 지미." "응, 그래 니가 웬일이고?" "엄마 찾으러 왔다가 그만…." 홍이 삼촌은 지미가 혼자서 어머니를 찾으러 왔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당황하였다. 홍이 삼촌은 길에서 떠도는 아이 몇 명과 구두닦이로 살고 있었다. 홍이 삼촌 심부름으로 지미를 데리러 온 현우와 함께 간 삼촌의 집은 곧 쓰러질 것처럼 얼기설기 지어 놓은 판잣집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지미는 구두를 닦는 현우의 일을 조금 도왔다. 그리고 현우와 함께 어머니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전화해 봐." 현우가 재촉했다. "그런 사람 없대애." "전화번호 이리 내 봐." 현우는 지미의 말에 아랑곳없이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사람을 찾는 데요. 혹시 유순자 씨 그곳에 없나요? 잠깐요, 잠깐. 그곳이 어딥니까? 식당요? 식당 이름이 뭐예요?" 현우와 지미는 전화 속에서 알려준 식당을 찾아나섰다. 그런 사람 없다던 아주머니는 지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얘 좀 봐. 그때 그 외국인 노동자와 닮았잖아. 오래 전에 우리 집에서 일한 아줌마와 살던 사람 말이야." "우리 아빨 아세요?" "너희 엄마 여기 없어, 장흥동 공단 앞에서 장사하는 걸 봤다던데…. 우리도 확실히는 몰라. 포장마차를 한다고 들었어"
현우와 지미는 장흥동 초등학교 앞에서 내렸다. 어둑어둑해진 길 위로 포장마차가 드문드문 있었지만 가는 곳마다 허탕이었다. 그때 현우가 다급하게 소리질렀다. "지미야, 지미야! 포장마차에 네 이름이 적혀 있어!" 망설임도 없이 곧장 비닐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 어머니의 눈이 점점 커졌다. 잠시도 잊은 적이 없는 지미였다. 희미하게 기억나던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지미와 어머니는 서로 부둥켜안고는 아무런 말을 못했다.
수니의 앙상한 손"엄마, 아빠는 어디 계셔?" "응, 회사 숙소에. 일주일에 한 번씩 오셔." 어머니는 훌쩍 커 버린 아들을 보면서 혼자서 자라준 지난날을 생각하였다. 잠시 맡겨 두었다가 바로 데리고 올 생각이었는데 수니의 병치레를 감당하느라, 또 아버지의 일자리가 늘 불안한 바람에 어머니도 일을 나가야만 했다. 어머니는 지미를 동생 수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갔다. "수니야, 오빠 왔어, 오빠." 수니는 고개를 잘 가누지도 못했고, 야위고 파리한 모습은 오랫동안 앓은 걸 그대로 보여주었다. 앙상한 손과 팔은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수니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심해. 벌써 여섯 살인데 아직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수니는 호적이 없어 의료보험이 되지 않아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아버지의 월급은 그나마도 아버지의 고향집으로 송금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혼자서 그 많은 병원비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새로 전학 간 학교는 모든 게 낯설었다. "유지미! 아버지 이름은 뭐야? 뭐하시는 분이지? 어느 나라 사람이지?" 지미는 발끝만 내려다보고 시원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이었다. "얘, 네 이름 영어식이지? 아빠가 영어학원 하시는 거 맞지?" 옆 짝이 된 자연이가 물었다. "아닐 꺼야. 지미 얼굴을 봐. 너네 아빠가 외국 사람이지, 그렇지?" 머뭇거리는 사이 또 한 아이가 끼어들었다. "얘들아, 전학 온 애 아빠가 외국인이래. 그럼 너네 아빠도 영어 잘하는 그 아저씨들처럼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야?" 지미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그냥 빙긋 웃어 주었다. 아이들은 지미와 친해지려고 틈만 나면 모여들었다. 지미의 얼굴도 활짝 밝아졌다. 지미도 어느새 아이들이 말하는 그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학 서류가 시골 학교에서 도착한 날이었다. 생활기록부에는 부모가 모두 한국인으로 나와 선생님은 당황하였다. "유지미, 유정식씨는 누구야?" "외, 외할아버지요."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선생님, 그럼 지미 아버지는 없어요? 에이,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말도 다 거짓말이잖아." 선생님 책상 옆까지 기어와 몰래 엿듣던 병호가 불쑥 튀어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은 병호를 나무랐지만 병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댔다. "순 거짓말쟁이야. 미국 사람도 아닐 거야. 그러니까 저렇게 못생겼지." 지미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담임 선생님은 저녁 늦게 어머니를 찾아왔다.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야기하였다. 일찍부터 돈을 벌겠다고 무작정 고향을 떠난 어머니와 외국인 노동자 아버지는 서로 외롭게 만나서 결혼을 했지만 많은 일들이 힘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아버지는 여전히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였고, 지미는 분명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하고, 한국 음식을 먹고 자랐지만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출생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외할아버지는 지미를 학교에 넣기 위해 아들이라고 속여 출생신고를 하였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아들로 말한 것이 부끄러워 차마 밝은 낮에는 마을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며 소리내어 울었다.
아빠 이름은 '히론 페루키'일요일 아침, 오늘은 아버지가 오시는 날이다. 문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지미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와락 껴안았다. 그런데 지미는 자꾸만 낯설었다. 한국말도 영 서툴렀다. "지미, 미안, 미안." 아버지는 외가에 맡겨 두고 찾지 않았던 일이 마음에 걸려 자꾸 미안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미의 마음에 다가가고 싶었다. "아버지 이름은 뭐예요?" "히론 페루키. 너는 지미 페루키. 우리 돈 많이 벌어서 돌아가면 그렇게 불러. 그러나 한국에서는 유지미." "히론 페루키? 지미 페루키?" 아무리 되뇌어도 낯선 이름이었다. 아버지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수니에게 다가갔다. "아니, 수, 수니야!" 수니의 고개는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숨조차 힘겹게 몰아쉬고 있었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외국인 노동자 쉼터의 원장 수녀님이 달려와 수녀님이 알고 있는 동네 병원으로 수니를 데려 갔다. 앙상한 수니의 몸을 보며 의사 선생님은 혀를 쯧쯧 찼다. "심한 감기입니다. 수니는 작은 환경 변화도 이기지 못할 만큼 면역력이 떨어져 있어요. 정밀 검사를 빨리 받아 보는 게 좋겠습니다. 장애가 점점 심해지는 걸 봐서는 단순히 뇌성마비 장애가 아닌 것 같아요." 어머니는 그만 병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일주일 만에 수니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느닷없이 회사를 옮기겠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큰 병원에 가서 치료도 하고, 지미 공부도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아버지를 무겁게 눌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음먹은 대로 회사를 옮길 수 없는 불법 체류자였다. 지미는 밖에 앉아 달을 보며 할머니를 생각했다. 아버지도 지미 옆에 앉았다. "미안, 지미." "괜찮아요, 아빠." "우리 수니, 거, 걱정이야. 저 달처럼 바, 밝게 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 나라 다, 달 저렇게 밝아." 아버지는 고향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늘 가슴을 부여안고 숨차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스물이 지나자마자 한국으로 돈을 벌러 왔다. 두고 온 지미의 친할머니 생각에 아버지의 흐느낌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회사를 옮긴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일주일 내내 어머니는 아버지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요일 아침 나절, 아버지는 고약한 냄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아유, 이런 냄새 속에서 일한다고요?" "다 잘 일해요. 가죽 가공 약품, 냄새나도 모, 몸 괜찮아." "그걸 믿어요? 냄새가 이렇게 고약한데 몸에 괜찮을 리가 있어요? 이러다 병이라도 얻으면 어떡할 거예요?" 어머니는 화를 내다 부엌에로 휑하니 나가 버렸다. 조금 후 다시 들어온 어머니는 물었다. "지난 번 공장에서 돈 받았어요? 밀린 월급과 퇴직금." "못 받았어요. 나중, 사장 오면 준대요." "나중에? 그게 다 거짓말이라고요. 안주려는 수작이에요. 내가 지금 당장 가서 받아 내고 말 거야." 시골에서 올라와서 처음 본 어머니의 모습과 달리 어머니는 어느새 싸움꾼으로 변해 갔다. 지미는 어머니를 따라 낯선 길을 나섰다. 공장에서는 경비 아저씨와 과장이 어머니에게 되려 협박하였다. "히론 페루키? 아, 그 불법! 외국인 근로자는 허락 없이 공장을 옮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요? 내 그간 신고 않고 참았는데 다른 곳으로 가버렸으니 신고해야겠소. 그 사람이 갑자기 옮겨가는 바람에 우리 회사는 엄청난 손해를 입었어요. 오히려 우리한테 끼친 손해를 배상해야 할 거요." "손해라니, 거짓말 마세요. 그런 말에 겁먹지 않을 거야. 일한 돈을 주세요. 돈." 어머니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어머니가 다시 공장으로 나가 따질 채비를 하자 아버지는 달래며 자신이 가보겠다고 했다. "꼭 가야 해요. 물렁하게 하지 말고요." "아, 알았어요. 알았어."
저녁에 돌아온 아버지는 얼굴이 퉁퉁 부어 있고 오른팔에는 붕대까지 동여매고 있었다. 조퇴를 하고 돈을 받으러 갔더니 사장이 자리에 없다며 돈을 주지 않았다. 돌아가지 않고 아버지가 계속 버티자 나중에는 나무 막대기로 두들겨 팼다고 한다. 그들은 팔이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아버지를 공장 밖으로 밀어내며 이 일을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나 수녀님에게 알릴 때는 출입국 관리소에 바로 신고하겠다며 아버지의 입을 막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럽게 소리내어 울었다. 지미는 숨이 막힐 만큼 가슴이 미어져 왔다. 신고가 두려운 아버지는 병원에도 못 가고 열흘 넘게 방 안에 누워 지냈다. 그러면서도 수니를 빨리 큰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버지는 오른팔이 완쾌되지 않았는데도 애써 공장으로 나가려고 했다. 걱정스런 마음에 출근을 말리는 어머니에게 오래 쉬면 쫓겨난다며 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전세방 있음후텁지근한 날씨가 며칠째 계속되었다. 방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시멘트 담벼락 때문에 지미네 집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야말로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문을 열자 갇혀 있던 무더운 공기가 몰려나왔다. "수니야!" 지미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니의 얼굴을 살피자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큰일 났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응급 처치로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만 정밀 검사를 해보고,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발달 장애를 비롯한 여러 장애가 동반된 걸로 봐서 오래 전에 발병한 것 같습니다. 자칫 호흡 곤란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고래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입원과 수술 신청을 하려 했지만 어머니에게는 당장 돈이 없었다. 수녀님의 주선으로 서류를 먼저 접수했다. 아버지는 바윗덩이처럼 굳어져 있었다. "지미야, 집에 가서 '전세방 있음'이라고 써서 문간에 붙여라. 잊지 말고." 어머니에게는 달리 병원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같이 공장으로 나갔고, 어머니는 아침 일찍 커다란 종이판을 안고 병원을 나섰다. 공장 정문 앞에서 종이판을 가슴 앞에 펼쳤다. '일한 품삯을 주시오. 외국인 근로자도 똑같은 사람이다.' 시간이 지나자 공장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어머니를 밀쳐내려고 하였고 어머니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사코 버티다가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다. 남자들은 어머니의 팔을 비틀었다. 그때까지 겁먹고 있던 지미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우리 엄마 건드리지 말아요!" 그 소리에 사람들이 잠깐 멈칫했으나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미와 어머니가 몸부림쳤지만 여러 사람의 힘을 당해 내지는 못했다. "도대체 뭐하는 짓이요!" 때마침 글라라 수녀님이 달려왔다. "몹쓸 사람들 같으니. 이 공장 사장을 내가 만나야겠소." 과장이란 사람은 수녀님 앞을 가로막으며 눈을 부라렸다. "안 됩니다. 지금 사장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자꾸 이러시면 수녀님이라도 힘으로 끌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수녀님은 사장이 올 때까지 공장 앞에서 기다리겠다며 순순히 정문 앞으로 물러 나왔다. 어머니는 수녀님에게 미안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른 새벽인데 병원에 있던 어머니가 집으로 왔다. 집주인이 바로 방이 나갔다고 전세금을 주었다. 어머니는 가족이 옮겨갈 곳이 막막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바로 병원으로 가야한다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지미는 라면을 끓여 천천히 먹었다. 그리고 신발 끈을 단단히 졸라매고 어머니의 종이판을 목에 걸고 공장으로 갔다.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정오가 훨씬 지난 시간이었다. 개학을 했는데도 결석이 계속되자 선생님이 지미를 찾아 나섰다. 병원으로 간 선생님은 마침 병원에 와있는 홍이 삼촌과 현우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듣고 지미가 공장 앞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지미의 모습을 보면 곤란하겠다 싶었지만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미를 보고 가겠다며 떼를 쓰는 것이었다. "지미야, 왜 여기 서 있어?" "목에 매단 건 뭐야?" "누가 이 일을 시켰어?" 아이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선생님이 지미 아버지가 당한 일과 지미가 이렇게 서 있는 까닭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럼, 이 공장 주인이 나쁜 사람이잖아요?" "나도 지미와 함께 서 있을 꺼야." 아이들이 몰려들어 웅성대자 경비실에서 사람들이 나오더니 철문을 꼭꼭 닫아걸었다. 선생님이 그만 화가 나 철문을 흔들어 대니 홍이 삼촌이 선생님을 말렸다. 그 사이 공장 사람들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하였는데 경찰들도 아이들을 보더니 그냥 돌아갔다. 해가 지자 지미는 종이판을 접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아이들 가슴마다 차곡차곡 쌓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