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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의 섬

한창훈 지음 | 사계절
서이가 지금까지 기억하는 육지에서 이곳 섬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섬에서 자살을 하거나 육지에서 온 경찰이 잡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달랐다. 미역 공장에서 일하는 아줌마들과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그 여자가 섬에 들어온 지 넷째 날, 이제 슬슬 얼굴을 익힌 청년들 중 배짱 있는 이가 산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에게 말을 걸었고, 그날 여자와 섬 청년들은 함께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술이 여러 잔 돌아 다들 발그스레한 얼굴이 되었을 때 청년들은 여자에게 노래를 권했고, 여자는 노래 대신 바이올린을 켰다. 처음 켠 곡은 심심했지만, 나중에는 흘러간 유행가를 쳐서 아주 듣기 좋았다는 이야기를, 서이는 담벼락 아래에서 쪼그려 앉아 담배 피우는 청년들에게 들었다.만남큰이모가 두고 간 산나물들을 손질하던 서이는 늘 하던 손짓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내내 별 이상 없다가 한순간에 가슴 깊은 곳이 두근대기 시작하면서 별 볼일 없는 나물 하나도 차분히 손질하기가 어려웠다. 서이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잔뿌리 무성한 것을 잡아 칼을 들이댔다. 하지만 아무래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자꾸 멍해지다가 어떤 기운에 이끌려 걷다 보니 곧 바다가 나타났다. 방파제를 지나니 여자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무슨 음악인데 이렇게 마음이 울렁거리지?' 급소를 찌르고 들어오는 침처럼 바이올린 소리는 아주 가늘고 날카롭게 서이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그 음악은 살아 있어서 고통을 느껴야 하는 슬픔 그 자체였다. 울고 있는 서이에게 다가온 여자는 이름을 묻고는 서이가 알지 못하는 곡들을 연주하면서 서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이는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렀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온 서이는 여자의 연주를 들은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그 연주를 생각하자 척추부터 떨림이 돋아나면서 예리한 바이올린 선율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여행하는 이유서이는 아줌마에게 운동복을 빌려주고, 겉옷을 빨아주었다. 그러면서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줌마가 여행을 시작한 계기, 다녀본 세계 여러 나라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아줌마의 연주에 흥을 맞추고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아줌마와 함께 바닷가를 걷다보니 동굴의 입구가 나타났다. 그곳으로 들어간 여자는 서이에게 네팔에 있는 티벳 사원에서 알게 된 스님이 준 물고기 모양의 나무 조각을 보여주었다. "이걸 가지고 떠도는 이들의 마음을 찾으라고 하셨거든. 닳아버린 신발이 열 켤레가 넘도록 늘 어디론가 가긴 했는데, 왜 가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어. 너도 무작정 이곳을 떠나고 싶댔지? 하지만 이것이 싫어서 어딘가로 가면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하더라. 어딘가로 이동을 한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되는 거지. 어떻게 보면 나는 그냥 정신없이 싸돌아다닌 것 뿐이야."큰이모서이는 큰이모와 함께 콩대를 뽑다가 아줌마 얘기를 꺼냈다.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것,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는 얘기, 여자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겪은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큰이모는 서이의 엄마가 육지로 나가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나가길 잘한 거라는 생각도 든다며 언젠가는 엄마를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말도 했다. 서이의 엄마와 아줌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일을 끝마치자 어둑어둑해졌고, 큰이모는 서이에게 콩과 다른 먹을거리를 싸내왔다. 아줌마에게 줄 것과 함께. 그리고는 언제 집에 한번 같이 오면 밥 한 끼 차려주겠다고 했다. "우리 조카한테 좋은 이야기도 해주는 선생님이니 내가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야지. 낼 모레 물 때 좋은 날, 갯것 다녀올 테니까 그 때 모시고 와. 손님인데, 소라라도 잡아 와야지." 이 말을 들은 서이는 무척 기뻐했다.이별서이는 여자와 함께 급한 비탈길을 타고 고개에 올랐다. 섬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은 높낮이에 따라 색깔이 서로 달랐다. 바다를 바라보며 서이는 슬프거나 우울할 때는 상상을 하는 자신의 습관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아줌마 연주를 듣고 있으면 아주 다른 상상이 돼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상상을 해요. 이곳에 어쩌다 오는 관광객들은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부러워하지만, 곧 진저리를 치거든요. 그러니 태어나서 하루도 빠짐없이 보는 건 얼마나 지겹겠어요." "그래, 이해한다. 내가 만난 네 또래 아이들도 그랬어.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모두들 너처럼 어딘가로 나가고 싶어했지. 그러고 보면 네 나이 또래의 공통점인지도 모르겠다." "아빠 뒤치다꺼리해야 하는 게 갈수록 괴로워요. 아줌마가 부러워요.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잖아요." 서이의 말을 들은 여자는 서이가 부럽다며 웃었다.



빠져나가는 깊은 썰물을 따라잡지 못한 소라가 보였다. 소라를 먹어본 여자가 맛있다고 말하자 서이는 오늘 큰이모가 소라를 많이 잡아온다고 했으니 많이 드시게 될 거라고 했다. 여자와 서이가 한참동안 바닷가에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슬슬 가보자며 일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대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선 곳은 이배네 집. 서이를 보고는 반가워하다가 여자를 보면서는 샐쭉해하는 이배. 울리는 전화를 받아든 이배는 오늘 갯것하러 갔다 온 사람 중에 서이의 큰 이모가 안 보인다며 서이에게 이모 오셨나 확인해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서이는 서이의 집과 큰이모 집을 구석구석 찾아보았지만 큰이모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따라 물안경을 가지고 와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 소라를 따더라는 큰이모와 친한 초산 할머니의 말을 듣자 서이는 더욱 불안해졌고, 큰이모를 찾기 위해 비가 내려 옷이 다 젖는 줄도 모르고 바닷가로 뛰어갔다. "큰이모오" 넘실거리는 파도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서이는 바위 위에 서서 울었다. '나 때문에 큰이모가, 나 때문에 큰이모가 저 바닷속 어딘가에서…….' 그 생각만 풍선처럼 부풀었다.

큰이모는 다음날 발견됐다. 물이 점점 나자 밤 사이 숨어 있던 바위들이 해초와 따개비를 달고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큰이모는 방파제 바위 사이에 쪼그려 누운 채 발견됐다. 외삼촌 집에서 초상을 치르는 동안 서이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지 못했다. 서이는 아무래도 큰이모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조르지만 않았어도." 자책하는 서이를 보며 여자는 말했다. "네가 스스로를 탓한다면 큰이모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수없이 많아. 우선 나 때문이기도 하고, 신경 안 쓰고 먼저 와 버린 다른 아주머니들도 그럴 테고, 일기 예보를 듣고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이들도 그렇고, 나를 태워준 여객선 선원들도 원인 제공을 했고, 심지어는 물안경을 만든 회사 사장한테도 책임이 있고……. 그렇게 따진다면 큰이모가 돌아가신 책임은 살아 남아 있는 모든 이에게 다 있게 돼. 그러니 어느 누구 책임도 아니야. 큰이모는 돌아가실 때가 돼서 돌아가신 거야." "그래도 제 자신이 원망스러워요. 정말 우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미워요." 여자는 한동안 서이가 울게 두었다. 서이의 울음이 잦아들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가방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레퀴엠〉을 연주했다. "헝가리라는 나라에서 연주를 했거든. 이 아줌마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때 그곳에서처럼 이것 하나밖에 없구나. 미안하다. 고작 악기 하나 연주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도 너무 가슴이 아퍼."



여자는 여행 도중 헝가리 변방 작은 도시에 있는 한 성당에서 도시 고아와 빈민 아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안나는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고 있는 아이였는데, 대식구에다 가난한 형편이어서 성당에서 나눠준 빵과 버터를 입도 안 대고 집으로 가지고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 생일에 선물을 살 돈이 없어 꽃을 꺾으러 뒷산으로 간 동생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며 동생의 묘 앞에서 동생을 위해 연주를 해달라고 찾아왔다. 그때 무덤 앞에서 연주한 것이 〈레퀴엠〉이었고, 연주가 끝나자 안나는 밤 기차를 타고 부다페스트로 돈을 벌러 간다면서 울면서 역으로 갔다.



큰이모는 어디에 있을까. 큰이모가 외롭지만 않으면 좋을 것 같다. 여자는 죽은 아이를 며칠째 안고 있는 아이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중에 시체를 태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오자 그 아이를 주고는 어디론가 갔지. 그걸 보고는 가슴속에다 완벽하게 묻었으니 이제 어디를 가도 같이 다니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니 육신과 헤어지는 게 슬프기만 한 일도 아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서이는 생각했다. '맞아. 나는 큰이모를 가슴에 묻은 거야. 그러니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큰이모는 나랑 함께 있는 거야. 내 가슴속에 있는 거야.'바이올린서이는 밤 바닷가에 혼자 서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그러면서 서이는 보고 싶었던 큰이모를 만났고, 큰이모가 건네주는 바이올린을 받아 연주도 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빈손으로 허공을 휘젓는 것이었다. 서이를 찾아다니던 이배가 서이를 발견하고는 불러도 대답이 없자 서이의 아버지를 데려왔다. 서이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이게 다 악사라는 그 여자 탓이라며 여자를 찾아가려 했다. 그때 이배가 자신에게 와서 서이를 찾길래 걱정이 된 여자가 이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자를 보자마자 당장 떠나라며 소리를 질렀다. 서이와 친해져서 같이 다닌 건 사실이지만 나쁜 짓을 한 건 아니라며 설명하는 여자에게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자 서이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혼낸다면 받겠어요. 하지만 이 아줌마한테는 뭐라고 하지 마세요. 아빠는 그럴 자격 없어요. 아빠가 나한테 아빤가요? 내 말 들어보기나 했어요? 처음으로 이 아줌마가 내 말을 다 들어줬어요. 아빠한테서는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거예요." 이 말을 듣자 아버지는 서이의 엄마가 지금 서이처럼 바람이 들어서 떠난 거라며 다같이 죽자면서 주먹으로 근처에 있는 바위를 쳤다. 손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서이가 가장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주먹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고 있던 서이가 순식간에 아버지가 쳤던 바위를 주먹으로 쳤다. 손 한쪽이 찢어지면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격 말하지 않을 테니까 아빠도 아빠 소리 하지 말아요."



다음날, 서이와 여자는 여객선 부두에 섰다. 미안함과 아쉬운 마음에 두 사람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여자가 타고 떠나는 여객선이 가까이 오자 여자는 가방에서 바이올린을 싼 보자기를 꺼내 서이에게 건넸다. "나는 이제 필요 없어. 가지고 다니던 것이라 너무 낡아서 미안하다. 새 것이라면 좋을 텐데." "하, 하지만 이건, 아줌마의, 아줌마의……" 서이는 말을 맺지 못했다. 배가 곧 떠난다는 것을 알리는 선원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지자 여자는 이배의 손을 잡고는 서이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고, 이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배에 올라타자 여객선은 부두에서 허리를 떼고 후진하기 시작했다. 난간에 기대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 여자는 서이에게 맨 처음 들려주었던 〈사막의 허무〉를 입으로 소리내기 시작했고, 서이도 따라 소리를 냈다. 그리고 여자와 서이는 두 손을 올려 바이올린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여객선은 서서히 속도를 내며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생선 손질하는 소녀서이는 이배가 물이 흐르지 않도록 신문지로 싼 후 봉지에 넣어 냉장고에 둔 생선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서이는 손질이 번거롭기도 하고, 종종 생선을 얻어 먹는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이배네의 유일한 벌이가 고기잡이인데, 이렇게 자주 갖다 주면 손해가 날 게 뻔하다. 하지만 생선이 흔한 섬이라 해도 이배가 갖다주지 않으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소한 것에도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하고, 무슨 말을 하면 버럭 화를 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입을 꾹 다물고 있기 일쑤인 아버지. 서이는 아버지에게 "매운탕 할까요?"라고 물어봤지만, 예상대로 대답이 없다. 날을 세워 비늘을 긁고 칼끝을 아가미에서 아랫배까지 죽 밀어서 생선을 손질하다가 우럭의 가시에 손끝을 찔리고 말았다. 친구들은 컴퓨터가 있는 연희네 집에 모여 만화영화를 보고 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해서 짜증이 나 있던 서이였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예리한 통증이 상처를 천천히 파고들었고, 얻어먹는 처지에 할 소리가 아닌 줄은 알지만 서이는 한마디 내뱉었다. "아예 큰 놈으로 좀 잡아 오지." 오래 전 사고가 난 뒤부터 아버지는 배를 타지 않았다. 친구들이 바쁘다며 도와 달라고 할 때만 배를 탔다. 그런 날은 늘 잔뜩 취해 돌아왔지만 아버지가 돈벌이를 하는 때는 그런 때뿐이었다.



이배가 놓고 간 나머지 생선들을 손질하고, 국거리와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을 준비했다. 기본적인 반찬은 5년 전까지 물안경을 쓰고 바다에 들어가 해녀 일을 했던 큰이모가 갖다 주었다. 오래 전에 바다에서 죽은 이모부 때문에 이모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억척스럽게 일을 해서 지금도 진통제가 없으면 버티지를 못한다.



생선 손질을 마친 후에는 연희네 집에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생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손을 들여다보고는 꼭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며 마음을 돌린다. 밥부터 안칠까 싶지만 가슴이 하도 답답해서 대문을 나섰는데, 문가에 까까머리를 한 이배가 서 있다.이배서이 얼굴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이배가 조심스럽게 마을에 이상한 여자가 들어왔으니 조심하라며 말을 건넸다. 그런 말도 모두 귀찮아진 서이는 내처 달려 큰이모가 고등학교 갈 때 팔아서 돈 만들라고 준 염소 두 마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멍하니 서 있다가 강아지 풀밭을 발로 차고는 털썩 주저앉고는 아버지와 함께 그물 손질을 해야 하는 이배에게 가보라고 했다. 몇 년 전 병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가 없는 이배. 이배 아버지는 내년에 이배를 육지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시키기 위해서는 열심히 돈을 모아야 하므로 꼭 바다로 나가야 했다. 이배도 아버지를 돕기 위해 배로 가야 했다.



서이는 하늘로 날아올라 섬을 벗어나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큰이모가 마음에 걸렸다. 서이가 여섯 살 때 어머니는 어린 서이를 큰이모에게 맡기고 언니 둘만 데리고 육지로 가버렸다. 그 이래로 큰 이모가 서이의 엄마 노릇을 해왔다. 술을 마시는 아버지의 욕설과 신경질 때문에 주눅 들어 있는 서이를 보고서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달래는 사람도 이모였다. 이모는 서이에게 아버지가 쓸쓸해서 그러는 거라며 이해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배는 이런저런 궁리를 하느라 눈물을 흘리는 줄도 모르고 있던 서이를 보며 말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내가 지켜주겠다." 서이와 자기는 이제 애인이라고 말하는 이배에게 서이는 징그럽다고 말하고 고등학교는 못 가도 좋으니 꼭 이곳을 뜨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어서 아버지에게 가보라고 이배를 재촉한다.다른 세계로 가는 길서이의 특기는 공상하기이다. 아름다운 어머니와 인자한 아버지가 있는 집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마을 앞에 도착한 황금배가 서이를 데려가는 것, 성공한 두 언니와 어머니를 만나는 것. 그런 공상이 서이 특기였다. 누가 뭐래도 공상 속에 빠져 있는 순간은 행복했다. 그게 다른 세계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아직도 가지 않은 이배에게 어서 가라고 말하고 있는데, 자그마한 참나무 숲 옆으로 나 있는 길에 제법 큰 가방을 멘 낯선 여자가 보였다. 이배는 수상하다며 형들에게 알려야겠다 말하고, 서이는 염소 고삐를 붙들고 이배 뒤를 따라 내려갔다.육지에서 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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