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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사다리

이옥수 지음 | 사계절
꽃마을



"윤제야, 학교 가자." "아유, 저 새끼 또 왔어!" 기철이가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깬 혁제가 신경질을 부리며 소리를 질렀다. 윤제네가 이 동네로 이사를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윤제네가 이사 와서 가장 신나는 사람은 기철이다. 기철이는 생긴 모습부터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흔히들 눈이 작은 사람을 보고 단춧구멍이라 하지만, 기철이 눈은 단춧구멍이 아니라 숫제 검은 색연필로 금을 찍 그어놓은 것처럼 겨우 구멍만 뚫려 있다. 둘이 친구가 된 건 전학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태욱이라는 아이가 대장인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고 있던 기철이를 윤제가 구해줬기 때문이다.

기철이는 좀 덜떨어지긴 했지만 윤제 덕분에 자기가 아이들에게 시달림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형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윤제를 찾아오는 것이다. 윤제는 엄마가 차려 놓고 간 밥상머리에 앉아서 형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엄마는 빌딩 청소를 하러 가고 아버지는 새벽에 '인간 시장'에 나갔다.

윤제는 기철이와 함께 학교에 가다가 서초 지하철역 지하도를 빠져나와 농협 앞에 이르자 말했다. "야, 메뚜기(기철이의 별명), 갈라져. 빨리 가! 우리 반에 오지 마!" 여기서부터는 학교 앞 동네였다. 이 동네에는 같은 반 아이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윤제는 기철이 같은 애랑 다니는 것을 보이는 게 창피했다. '그래도 형보다는 낫지 뭐!' 형은 아침 저녁 꼭 죄지은 사람처럼 다른 동네로 돌아서 숨어다닌다. 윤제는 그런 형이 비겁해보였다. '빙신같이, 하우스에 사는 게 뭐 그렇게….' 윤제는 발끝에 차이는 돌맹이를 힘껏 걷어찼다.

아카시아꽃 향기



윤제의 담임 선생님은 양쪽 볼이 쪼글쪼글한 할머니였다. 30년이 넘도록 교직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 할머니 선생님은 성격이 꼬장꼬장해서 책상이 한 줄이라도 삐뚤어져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별명이 '똑바로'이고, 말끝마다 '도대체'가 붙어서 또 하나의 별명은 '도대체'였다.

1교시 수학 시간이었다. "넌 왜 책이 없어? 도대체가…. 손바닥 대." 윤제가 일어나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때 아카시아꽃 향기가 코끝으로 물씬 풍겨왔다. 윤제는 자기도 모르게 꽃향기를 좇아 고개를 돌렸다. "야 김윤제, 넌 매를 맞으면서도 정신 못 차리고 멍청하게 바깥만 내다보니?" 윤제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선생님은 윤제에게 엄마 좀 학교에 오시라고 한 다음, 안되겠던지 윤제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그러나 선생님은 윤제네가 전화가 없다는 것도, 하우스에 산다는 것도 모른다. 하우스는 무허가 건물이라 주민등록 전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생활기록부를 뒤져서 주소를 알아내도 집을 찾을 수는 없을 터였다. "너 오늘 공부 끝나고 남아라. 나하고 너희 집에 같이 가 보자. 너네 부모님은 뭘 하시는지, 도대체." 윤제는 가슴이 철렁했다. 2, 3교시 공부 시간에도 윤제의 마음은 바윗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비닐하우스, 좁은 방안에 벌여놓은 밥상, 널브러져 있을 이불, 그리고…. 그걸 선생님이 보신다니….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다. 윤제는 점심 후 교문 밖으로 나왔다. '사라져야 한다!'

밖에서 시간을 보낸 윤제는 오후가 되어 집에 들어갔다. 혁제가 소리를 질렀다. 윤제는 배가 고파서 형이 뭐라고 하든 말든 귓등으로 들으며 밥상보를 벗겼다. 아침에 먹던 반찬이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 두고 온 책가방이 윤제 눈에 들어왔다. "너 임마, 엄마 아빠 오면 다 이른다. 점심 시간에 도망쳤다며? 니네 선생님이 우리 집 찾느라고 아이들한테 다 물어보고 다녔대. 아유, 쪽팔려서 장말…." 윤제는 깜짝 놀라서 목구멍이 꽉 막혔다.

아지트



윤제는 내일 학교에 갈 생각이 태산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벌써 아침이었다. 윤제는 형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그날 같은 동네에 사는 호성이를 꾀어 학교에 가지 않았다. "나만 따라와." "학교는?" "땡땡이치고." "야 안 돼, 우리 엄마가 알면 죽음이야!" "쪼다 새끼, 잔말 말고 따라와." 윤제는 호성이를 데리고 예술의 전당 공사판 쪽으로 올라갔다. 숲으로 접어들어 한참을 오르자 소나무 세 그루가 둘러선 곳이 보였다. 윤제는 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떡갈나무 가지를 꺾었다. "야, 여기다가 우리 아지트 만들자. 야 뭐해. 너도 꺾어 와." 호성이가 체념을 했는지 떡갈나무 가지를 꺾기 시작했다. 소나무 둥치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떡갈나무 가지를 걸쳐놓으니 제법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지금쯤 도대체가 날 찾을까?" 호성이도 겁이 나서 볼멘소리를 했다.

둘은 아지트에서 간질이기도 하고 하면서 낄낄댔다. "야 장호성, 왜 넌 태욱이 똘마니냐?" "태욱이 걔, 새대가리파 부두목이야." "뭐? 새대가리파?" "그래, 걔가 그러는데 자기네 두목 형은 담뱃불로 팔을 지지면서도 웃는대. 동네 애들은 다 걔 무서워해."

호성이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방문을 열자, 혁제가 읽고 있던 책을 던지며 소리쳤다. "야 김윤제, 니 오늘도 학교 안 갔지? 이 새끼, 니 오늘 죽을 줄 알아!" "왜 때리고 지랄이야!" 윤제가 대들자 혁제가 뺨을 때렸다. 윤제는 눈물을 훔치며 씩씩거렸다. 뺨이 얼얼하고 화끈거렸다. 그러나 형한테 맞고 나니 오히려 한 구석이 저리고 꽉 막힌 것 같았던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다.

비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날 저녁 아버지가 사온 통닭을 먹던 중 호성이 엄마가 악다구니를 부리며 방문을 열었다. "윤제 어데 있노? 이놈의 자슥, 왜 남의 아를 꼬여서…." 호성이 엄마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방에 침을 튀기며 악을 썼다. 싸움은 엄마와 호성이 엄마로 시작되어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데까지 나갔다. 집을 나간 아버지는 한참 뒤에 술이 잔뜩 취해서 들어왔다. 윤제와 혁제는 공터로 갔다. 텅 빈 공터에서 전구 한쪽이 검게 변해서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 같은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불이나 확 질러 버릴까! 나는 이 꽃마을도 훨훨 타고, 학교도 타고, 아예 이 세상이 통째로 훨훨 다 탔으면 조옿겠다."

복부인



집집마다 하수구에서 물이 솟구쳐 부엌 바닥에 물이 흥건하고, 변소 드럼통에서 물이 차서 똥물이 골목으로 넘친 장마가 끝나자. 동네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 철거가 시작된다는 소문과 함께 낯선 사람들이 하우스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엄마, 못 보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복부인들이라고 하더라. 하우스를 사러 다닌다던데." 하우스를 산 사람들은 더욱 이상한 일들을 했다. 한 집이 살던 하우스를 판자로 막아서 두세 칸으로 나눴다.

엄마는 어느 날 부터인가 빌딩 청소와 식당 일을 집어치우고 복부인이라는 사람들한테 "사모님, 사모님."하고 굽신거리며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엄마가 하는 일은 그 사람들에게 하우스를 소개하는 일이었다. 엄마는 좀더 신속하게 일을 하기 위해 집에 전화까지 놓았다. 엄마는 이렇게 나간다면 금방 목돈을 쥘 수 있을 거라고 신이 나서 싱글벙글했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윤제가 투정을 부리면 무조건 "알았다, 알았다."하면서 돈을 주었다. 엄마는 집안 일을 챙기지 못하는 미안함을 돈으로 땜질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법원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윤제도 가방을 멘 채 아이들과 함께 뛰었다. 법원 앞은 벌써 아수라장이었다. 노란 모자를 쓴 철거반들이 한쪽에서는 살림살이를 들어내고 다른 쪽에서는 망치로 하우스를 부수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어떤 할머니가 다리를 뻗고 앉아서 땅바닥을 치며 울었다. 그때였다. 뜯긴 하우스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청바지에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쪼그려 앉아서 울고 있는 아이는 분명히 혜미였다. 정혜미. 그 아이는 윤제네 반 부반장이었다. 윤제는 깜짝 놀랐다. 부잣집 아이, 재수없는 계집애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혜미였기 때문이다.

비밀



"젠장, 없는 놈들이 벌어야 먹고살지, 데모한다고 그놈들이 눈 하나 깜빡할 줄 아나?" 아버지는 하우스 철거 반대 시위를 하러 가는데 의무적으로 한 집에 한 명씩 참석해야 한다는 말에 역정을 냈다.

태욱이가 다시 공터에 나타났다. 태욱이는 가게가 잘 되어 배달꾼을 따로 쓰기로 했다지만, 엄마는 태욱이 엄마도 불안해서 집 보라고 들여보낸 거라고 말했다.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태욱이가 다시 나타난 것은 윤제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태욱이가 돌아오자 아이들은 윤제 눈치를 슬슬 보더니 태욱이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뒤에서 태욱이가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혜미도 있었다.

"참, 너네 같은 학교잖아." 태욱이가 새로운 사실을 기억해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혜미와 윤제를 번갈아 보았다. "응, 같은 반이야. 그런데 난 얘랑 별로 얘기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몰라." "혜미야, 얘 주먹도 세고 괜찮은 얘야. 물론 내 꼬붕이고." 멀어져가는 태욱이와 혜미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윤제는 땅바닥을 발로 찼다. 태욱이의 건방진 태도와 혜미 앞에서 멍청하게 서 있던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다. "야, 메뚜기, 너, 혜미 알아? 정혜미 말이야." "몰라." "야, 혜미가 지금 태욱이라고 같이 가는 거 봤거든. 너 혜미가 어디 사는지 알아볼 수 있어?" "어떻게?" "야 인마, 그걸 알면 왜 너한테 시키겠냐? 그리고 내가 혜미 얘기했다는 말 절대 하면 안 돼. 알았어?"

'왜 내가 그깟 지지바 때문에 이러지?' 이런 마음은 처음이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참 이상하다. 혜미의 해사한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떠오르고 무엇을 해도 생각의 꼬리들은 혜미에게로 이어진다.

골목길



자신에 대한 관심을 눈치챘는지, 혜미가 윤제에게 쪽지를 남겼다. '김윤제, 오늘 저녁 6시에 공터에서 만나. 할 얘기가 있어.' 그러나 윤제의 기쁨과 달리 공터에 나온건 태욱이와 꼬붕들이었다.

화가 난 윤제는 태욱을 다짜고짜 때리지만 태욱이 한 수 위였다. 태욱과의 싸움으로 얻어터진 윤제는 아버지에게 밖에서 얻어터지고 들어왔다고 욕을 먹는다. 윤제는 엄마가 일하는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스쿠터 소리가 나더니 누가 윤제의 어깨를 탁 쳤다. "어, 너 얼굴이 왜 그래? 난 용호야. 그냥 용호라고 불러." 용호는 윤제를 중화관 뒤 조그마한 골방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윤제는 깜빡 잠이 들었다가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눈을 떴다. 용호가 윤제만한 아이 둘을 데리고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여기 있든지 집에 가든지 네 맘대로 해."

윤제는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갔다. 집 가까이 이르니 문 앞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윤제는 그날 밤 중화관에 있던 아이들과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따라 우면산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저녁 때쯤 마을로 내려와 돌아다니면서 지나가는 아이들 돈을 뺏기도 하고, 가게에 들어가서 도둑질도 했다. 윤제는 문득문득 집 생각도 나고 엄마 생각도 났지만 아이들과의 생활에 어느 정도 재미를 붙여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옅어졌다.

윤제는 용호의 요구로 똘마니 역할을 할 친구를 한 명 불러내려다 기다리고 있던 엄마에게 결국 잡혔다. "이놈의 새끼야. 아주 오늘 니하고 내하고 죽자." 다음날 엄마는 윤제를 앞세워 훔친 물건들을 모두 주인에게 돌려줬다. 돌려줄 수 없는 것은 돈으로 갚았다. 그 다음날부터 엄마는 모든 일을 팽개치고 윤제와 함께 학교에 갔다. 그리고 잠시도 윤제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입학



윤제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같은 학교로 배정받은 기철이가 일찌감치 교복을 차려입고 윤제네 집으로 왔다. "야 너희들, 이제 우리 학교에 다니게 됐으니 이 선배님을 깍듯이 모셔라." 형이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윤제와 기철이를 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교문 옆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 6교시 수업을 마친 뒤 친구들과 교문을 나서던 윤제는 되돌아와서 개나리꽃 한가지를 꺾었다. "야, 김윤제!" 낯익은 목소리에 윤제는 가슴이 철렁했다. "용호 형이 너 데리고 오래." 아이들 힘에 밀려서 학교 앞 골목까지 끌려간 곳에 용호가 스쿠터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김윤제 오랜만이다. 야 이 새끼, 교복이 제법 잘 어울리는데!"

다음날도 아이들이 교문 앞에 서 있었다. 토요일 마지막 시간이 끝나자 윤제는 마음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용호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길모퉁이에 있었다. "야, 오늘 저녁에 한 번만 나와라. 사실은 이 형님이 좀 어렵거든.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도와주라."

오해



윤제가 파출소에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파출소에 도착한 엄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진우와 혁제가 함께 학원을 마치고 진우네 집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웬 아이들이 문을 따는 걸 본 옆집 사람이 신고를 했고, 경찰차가 온 바로 그때 학원에서 돌아온 진우와 혁제가 아이들과 마주친 것이다. 혁제는 윤제가 경찰에 잡혀가는 것을 보고 엉겁결에 동생을 따라왔다.

진우네 엄마에게 애걸복걸하여 겨우 윤제를 빼낸 엄마는 파출소 마당에 나오자 속이 끓어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윤제를 두들겨 팼다. "이놈의 새끼야, 아주 죽어 뿌래라! 엄마가 그렇게 말했는데 왜 또 도둑놈들하고 어울려서…."

집으로 돌아온 윤제를 보고 아버지는 못 본 척 돌아누워 있었다. 혁제가 윤제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혁제가 윤제의 뺨을 갈겼다. "이 새끼야. 왜 하필 진우네 집이야? 이 나쁜 새끼야!" "나는 몰랐단 말야!" 윤제가 얻어맞으며 소리쳤다. "형, 정말이야. 난 몰랐어." "형이라고 부르지도 마, 이 새끼야!"

새대가리파



아버지에게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요즘은 술만 취하면 윤제를 앞에 불러 앉혀 놓고 몇 시간씩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봄꿩이 제 설움에 운다고, 이야기에 취해서 울기도 했다. 윤제는 공터로 나와 평상에 걸터앉았다. 하수구 냄새며 가로등으로 달려드는 하루살이와 나방들이며 후끈거리는 더운 바람에 속에 메슥거렸다. "야 김윤제, 오랜만이다." 태욱이였다. 지난번에 얻어맞고 처음 보는 거였다. 태욱이를 본 순간 윤제는 가슴에 분이 치받치며 열이 팍 올랐다. 윤제는 벌떡 일어나며 다가오는 태욱이를 다짜고짜 냅다 찼다. 언제든 한번 붙어 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태욱이에게 얻어터지던 일, 아버지에게 쫓겨나 중화관 형들한테 끌려가서 도둑질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이 새끼야."

태욱이는 힘을 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윤제야, 나 본드 했어." "본드?" 윤제는 가슴이 철렁했다. 말로만 듣던 본드였다. "나 너한테 얻어맞아도 하나도 안 아파. 아니야. 그냥 마음만 조금 아프지. 나 새대가리파야. 두목 그 새끼가 새대가리거든. … 우리 아빠 감방 가고 참을 수가 없었어. 참 혜미 그 계집애 말이야. 정혜미네 아빠, 걘 나하고 엄마는 다른데 아빠는 같거든. 웃기지? 그런데 그 계집애가 우리 집에 온 뒤로 시시콜콜 나를 간섭하면서 아빠처럼 되지 말라는 거야…. 그런데 나 오늘 안 나가면 내일 두목한테 죽었다." '혜미가 태욱이와 남매라고?' "김윤제, 난 네가 좋았어. 하우스 새끼들은 내 얘기만 들어도 빌빌 기는데 넌 용감해. 나 지금 가야 된다. 안 그러면 죽거든…." 윤제는 태욱이가 용감하다고 한 말에 괜히 우쭐해졌다. 윤제는 문득 이 기회에 자기가 어떤 아이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내가 갈까?" 태욱이를 집에 데려가자 혜미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왔다. "혜미야, 태욱이보고 내가 대신 갔다고 말해줘."

화물터미널역은 한산했다. 누가 윤제에게 물었다. "태욱이가 가라고 했니?" "네." "그럼 따라와." '두목은 누굴까?' 그러나 윤제의 기대와 달리, 새대가리 두목은 용호였다. 윤제는 집에 보내달라고 말했지만 용호는 윤제에게 도둑질 망을 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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