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사다리
이옥수 지음 | 사계절
자신에 대한 관심을 눈치챘는지, 혜미가 윤제에게 쪽지를 남겼다. '김윤제, 오늘 저녁 6시에 공터에서 만나. 할 얘기가 있어.' 그러나 윤제의 기쁨과 달리 공터에 나온건 태욱이와 꼬붕들이었다.
화가 난 윤제는 태욱을 다짜고짜 때리지만 태욱이 한 수 위였다. 태욱과의 싸움으로 얻어터진 윤제는 아버지에게 밖에서 얻어터지고 들어왔다고 욕을 먹는다. 윤제는 엄마가 일하는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스쿠터 소리가 나더니 누가 윤제의 어깨를 탁 쳤다. "어, 너 얼굴이 왜 그래? 난 용호야. 그냥 용호라고 불러." 용호는 윤제를 중화관 뒤 조그마한 골방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윤제는 깜빡 잠이 들었다가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눈을 떴다. 용호가 윤제만한 아이 둘을 데리고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여기 있든지 집에 가든지 네 맘대로 해."
윤제는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갔다. 집 가까이 이르니 문 앞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윤제는 그날 밤 중화관에 있던 아이들과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따라 우면산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저녁 때쯤 마을로 내려와 돌아다니면서 지나가는 아이들 돈을 뺏기도 하고, 가게에 들어가서 도둑질도 했다. 윤제는 문득문득 집 생각도 나고 엄마 생각도 났지만 아이들과의 생활에 어느 정도 재미를 붙여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옅어졌다.
윤제는 용호의 요구로 똘마니 역할을 할 친구를 한 명 불러내려다 기다리고 있던 엄마에게 결국 잡혔다. "이놈의 새끼야. 아주 오늘 니하고 내하고 죽자." 다음날 엄마는 윤제를 앞세워 훔친 물건들을 모두 주인에게 돌려줬다. 돌려줄 수 없는 것은 돈으로 갚았다. 그 다음날부터 엄마는 모든 일을 팽개치고 윤제와 함께 학교에 갔다. 그리고 잠시도 윤제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입학윤제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같은 학교로 배정받은 기철이가 일찌감치 교복을 차려입고 윤제네 집으로 왔다. "야 너희들, 이제 우리 학교에 다니게 됐으니 이 선배님을 깍듯이 모셔라." 형이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윤제와 기철이를 보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교문 옆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 6교시 수업을 마친 뒤 친구들과 교문을 나서던 윤제는 되돌아와서 개나리꽃 한가지를 꺾었다. "야, 김윤제!" 낯익은 목소리에 윤제는 가슴이 철렁했다. "용호 형이 너 데리고 오래." 아이들 힘에 밀려서 학교 앞 골목까지 끌려간 곳에 용호가 스쿠터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김윤제 오랜만이다. 야 이 새끼, 교복이 제법 잘 어울리는데!"
다음날도 아이들이 교문 앞에 서 있었다. 토요일 마지막 시간이 끝나자 윤제는 마음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용호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길모퉁이에 있었다. "야, 오늘 저녁에 한 번만 나와라. 사실은 이 형님이 좀 어렵거든.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도와주라."새대가리파아버지에게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요즘은 술만 취하면 윤제를 앞에 불러 앉혀 놓고 몇 시간씩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봄꿩이 제 설움에 운다고, 이야기에 취해서 울기도 했다. 윤제는 공터로 나와 평상에 걸터앉았다. 하수구 냄새며 가로등으로 달려드는 하루살이와 나방들이며 후끈거리는 더운 바람에 속에 메슥거렸다. "야 김윤제, 오랜만이다." 태욱이였다. 지난번에 얻어맞고 처음 보는 거였다. 태욱이를 본 순간 윤제는 가슴에 분이 치받치며 열이 팍 올랐다. 윤제는 벌떡 일어나며 다가오는 태욱이를 다짜고짜 냅다 찼다. 언제든 한번 붙어 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태욱이에게 얻어터지던 일, 아버지에게 쫓겨나 중화관 형들한테 끌려가서 도둑질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이 새끼야."
태욱이는 힘을 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윤제야, 나 본드 했어." "본드?" 윤제는 가슴이 철렁했다. 말로만 듣던 본드였다. "나 너한테 얻어맞아도 하나도 안 아파. 아니야. 그냥 마음만 조금 아프지. 나 새대가리파야. 두목 그 새끼가 새대가리거든. … 우리 아빠 감방 가고 참을 수가 없었어. 참 혜미 그 계집애 말이야. 정혜미네 아빠, 걘 나하고 엄마는 다른데 아빠는 같거든. 웃기지? 그런데 그 계집애가 우리 집에 온 뒤로 시시콜콜 나를 간섭하면서 아빠처럼 되지 말라는 거야…. 그런데 나 오늘 안 나가면 내일 두목한테 죽었다." '혜미가 태욱이와 남매라고?' "김윤제, 난 네가 좋았어. 하우스 새끼들은 내 얘기만 들어도 빌빌 기는데 넌 용감해. 나 지금 가야 된다. 안 그러면 죽거든…." 윤제는 태욱이가 용감하다고 한 말에 괜히 우쭐해졌다. 윤제는 문득 이 기회에 자기가 어떤 아이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내가 갈까?" 태욱이를 집에 데려가자 혜미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왔다. "혜미야, 태욱이보고 내가 대신 갔다고 말해줘."
화물터미널역은 한산했다. 누가 윤제에게 물었다. "태욱이가 가라고 했니?" "네." "그럼 따라와." '두목은 누굴까?' 그러나 윤제의 기대와 달리, 새대가리 두목은 용호였다. 윤제는 집에 보내달라고 말했지만 용호는 윤제에게 도둑질 망을 보게 했다.태욱이학교에 갈 시간이 지났는데도 윤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귀에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다음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윤제는 용호가 게임을 하고 있는 오락실로 끌려갔다. 초등학교 뒷문 쪽에 이르자 용호가 담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물었다. "너 아무한테도 말 안 했지? 이번 일 까발리기면 하면 너도 이렇게 만들어 줄게." 용호가 한 애의 소매를 걷어올려서 윤제 코앞에 쑥 내밀었다.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여기저기 옴팍옴팍 나 있었다. 용호는 윤제에게 '네가 일한 값'이라며 2만 원을 억지로 줬다. 용호는 윤제에게 지나가는 초등학생에게서 돈까지 갈취하게 시켰다. "오늘 단합 대회 하자. 야, 가서 소주 두 병 사와."
용호가 놀이터 벤치에 앉더니 소주 뚜껑을 이빨로 땄다. 그리고 소주를 병째로 한 모금 마시더니 윤제를 한참 동안 쏘아보았다. "씨발, 나는 엄마가 죽고 없어. 야, 김윤제, 너네 엄마 맹모더라. 맹자 엄마 말이야. 좋겠다. 새끼야." 용호는 자기가 새엄마에게 학대받았던 일들을 말해주고 울었다. 용호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아이들이 왔다. "어, 김윤제!" 태욱이가 윤제를 보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윤제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자, 새대가리파의 신입 똘마니 김윤제를 위하여!" 태욱이가 인상을 쓰며 반대했다가 용호한테 걷어채였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이 쪼다 새끼가 내 말 안 듣고…. 빨리 꺼져!" 줄곧 윤제를 노려보고 있던 태욱이가 다짜고짜 윤제에게 달려들며 주먹으로 쳤다. 윤제도 맞받아쳤지만 태욱이는 멈추지 않았다. "윤제야, 쟤들하고 어울리면 안 돼. 넌 빨리 집에 가." 윤제 귀에 태욱이의 작고 빠른 목소리가 들렸다.촉법소년"얘가 김윤제에요." 집에 막 들어가려는데 아이들 서넛이 다가오며 손가락으로 윤제를 가리켰다. "김윤제?" 재빨리 다가온 남자가 윤제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윤제는 깜짝 놀라서 손을 빼려고 했다. "경찰이다. 같이 가야겠다."
윤제는 반항할 틈도 없이 경찰관에게 끌려서 경찰차에 태워졌다. "윤제야!" 아이들이 소식을 전했는지 엄마가 허겁지겁 쫓아왔다. "어머니도 같이 타시죠. 아이가 미성년자라서 부모가 동행해야 합니다." 경찰서에는 이미 아이들이 잡혀와 있었다. "이놈들은 큰일을 낼 도둑놈들입니다. 얘들은 아무리 미성년자라 해도 죄질이 형사 처분에 해당하기 때문에 촉법소년으로 분류됩니다. 이런 아이들은 관할 소년부로 보내게 되지요."
윤제는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엄마가 윤제에게 다가와서 윤제 손을 잡았다. "윤제야, 이놈의 자슥아…." 윤제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꿈오해윤제가 파출소에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파출소에 도착한 엄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진우와 혁제가 함께 학원을 마치고 진우네 집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웬 아이들이 문을 따는 걸 본 옆집 사람이 신고를 했고, 경찰차가 온 바로 그때 학원에서 돌아온 진우와 혁제가 아이들과 마주친 것이다. 혁제는 윤제가 경찰에 잡혀가는 것을 보고 엉겁결에 동생을 따라왔다.
진우네 엄마에게 애걸복걸하여 겨우 윤제를 빼낸 엄마는 파출소 마당에 나오자 속이 끓어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윤제를 두들겨 팼다. "이놈의 새끼야, 아주 죽어 뿌래라! 엄마가 그렇게 말했는데 왜 또 도둑놈들하고 어울려서…."
집으로 돌아온 윤제를 보고 아버지는 못 본 척 돌아누워 있었다. 혁제가 윤제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혁제가 윤제의 뺨을 갈겼다. "이 새끼야. 왜 하필 진우네 집이야? 이 나쁜 새끼야!" "나는 몰랐단 말야!" 윤제가 얻어맞으며 소리쳤다. "형, 정말이야. 난 몰랐어." "형이라고 부르지도 마, 이 새끼야!"윤제의 담임 선생님은 양쪽 볼이 쪼글쪼글한 할머니였다. 30년이 넘도록 교직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 할머니 선생님은 성격이 꼬장꼬장해서 책상이 한 줄이라도 삐뚤어져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래서 별명이 '똑바로'이고, 말끝마다 '도대체'가 붙어서 또 하나의 별명은 '도대체'였다.
1교시 수학 시간이었다. "넌 왜 책이 없어? 도대체가…. 손바닥 대." 윤제가 일어나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때 아카시아꽃 향기가 코끝으로 물씬 풍겨왔다. 윤제는 자기도 모르게 꽃향기를 좇아 고개를 돌렸다. "야 김윤제, 넌 매를 맞으면서도 정신 못 차리고 멍청하게 바깥만 내다보니?" 윤제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선생님은 윤제에게 엄마 좀 학교에 오시라고 한 다음, 안되겠던지 윤제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그러나 선생님은 윤제네가 전화가 없다는 것도, 하우스에 산다는 것도 모른다. 하우스는 무허가 건물이라 주민등록 전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생활기록부를 뒤져서 주소를 알아내도 집을 찾을 수는 없을 터였다. "너 오늘 공부 끝나고 남아라. 나하고 너희 집에 같이 가 보자. 너네 부모님은 뭘 하시는지, 도대체." 윤제는 가슴이 철렁했다. 2, 3교시 공부 시간에도 윤제의 마음은 바윗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비닐하우스, 좁은 방안에 벌여놓은 밥상, 널브러져 있을 이불, 그리고…. 그걸 선생님이 보신다니….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다. 윤제는 점심 후 교문 밖으로 나왔다. '사라져야 한다!'
밖에서 시간을 보낸 윤제는 오후가 되어 집에 들어갔다. 혁제가 소리를 질렀다. 윤제는 배가 고파서 형이 뭐라고 하든 말든 귓등으로 들으며 밥상보를 벗겼다. 아침에 먹던 반찬이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 두고 온 책가방이 윤제 눈에 들어왔다. "너 임마, 엄마 아빠 오면 다 이른다. 점심 시간에 도망쳤다며? 니네 선생님이 우리 집 찾느라고 아이들한테 다 물어보고 다녔대. 아유, 쪽팔려서 장말…." 윤제는 깜짝 놀라서 목구멍이 꽉 막혔다.아지트윤제는 내일 학교에 갈 생각이 태산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벌써 아침이었다. 윤제는 형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그날 같은 동네에 사는 호성이를 꾀어 학교에 가지 않았다. "나만 따라와." "학교는?" "땡땡이치고." "야 안 돼, 우리 엄마가 알면 죽음이야!" "쪼다 새끼, 잔말 말고 따라와." 윤제는 호성이를 데리고 예술의 전당 공사판 쪽으로 올라갔다. 숲으로 접어들어 한참을 오르자 소나무 세 그루가 둘러선 곳이 보였다. 윤제는 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떡갈나무 가지를 꺾었다. "야, 여기다가 우리 아지트 만들자. 야 뭐해. 너도 꺾어 와." 호성이가 체념을 했는지 떡갈나무 가지를 꺾기 시작했다. 소나무 둥치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떡갈나무 가지를 걸쳐놓으니 제법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지금쯤 도대체가 날 찾을까?" 호성이도 겁이 나서 볼멘소리를 했다.
둘은 아지트에서 간질이기도 하고 하면서 낄낄댔다. "야 장호성, 왜 넌 태욱이 똘마니냐?" "태욱이 걔, 새대가리파 부두목이야." "뭐? 새대가리파?" "그래, 걔가 그러는데 자기네 두목 형은 담뱃불로 팔을 지지면서도 웃는대. 동네 애들은 다 걔 무서워해."
호성이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방문을 열자, 혁제가 읽고 있던 책을 던지며 소리쳤다. "야 김윤제, 니 오늘도 학교 안 갔지? 이 새끼, 니 오늘 죽을 줄 알아!" "왜 때리고 지랄이야!" 윤제가 대들자 혁제가 뺨을 때렸다. 윤제는 눈물을 훔치며 씩씩거렸다. 뺨이 얼얼하고 화끈거렸다. 그러나 형한테 맞고 나니 오히려 한 구석이 저리고 꽉 막힌 것 같았던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다.
비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날 저녁 아버지가 사온 통닭을 먹던 중 호성이 엄마가 악다구니를 부리며 방문을 열었다. "윤제 어데 있노? 이놈의 자슥, 왜 남의 아를 꼬여서…." 호성이 엄마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방에 침을 튀기며 악을 썼다. 싸움은 엄마와 호성이 엄마로 시작되어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데까지 나갔다. 집을 나간 아버지는 한참 뒤에 술이 잔뜩 취해서 들어왔다. 윤제와 혁제는 공터로 갔다. 텅 빈 공터에서 전구 한쪽이 검게 변해서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 같은 가로등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불이나 확 질러 버릴까! 나는 이 꽃마을도 훨훨 타고, 학교도 타고, 아예 이 세상이 통째로 훨훨 다 탔으면 조옿겠다."복부인집집마다 하수구에서 물이 솟구쳐 부엌 바닥에 물이 흥건하고, 변소 드럼통에서 물이 차서 똥물이 골목으로 넘친 장마가 끝나자. 동네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 철거가 시작된다는 소문과 함께 낯선 사람들이 하우스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엄마, 못 보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복부인들이라고 하더라. 하우스를 사러 다닌다던데." 하우스를 산 사람들은 더욱 이상한 일들을 했다. 한 집이 살던 하우스를 판자로 막아서 두세 칸으로 나눴다.
엄마는 어느 날 부터인가 빌딩 청소와 식당 일을 집어치우고 복부인이라는 사람들한테 "사모님, 사모님."하고 굽신거리며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엄마가 하는 일은 그 사람들에게 하우스를 소개하는 일이었다. 엄마는 좀더 신속하게 일을 하기 위해 집에 전화까지 놓았다. 엄마는 이렇게 나간다면 금방 목돈을 쥘 수 있을 거라고 신이 나서 싱글벙글했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윤제가 투정을 부리면 무조건 "알았다, 알았다."하면서 돈을 주었다. 엄마는 집안 일을 챙기지 못하는 미안함을 돈으로 땜질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법원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윤제도 가방을 멘 채 아이들과 함께 뛰었다. 법원 앞은 벌써 아수라장이었다. 노란 모자를 쓴 철거반들이 한쪽에서는 살림살이를 들어내고 다른 쪽에서는 망치로 하우스를 부수고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어떤 할머니가 다리를 뻗고 앉아서 땅바닥을 치며 울었다. 그때였다. 뜯긴 하우스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청바지에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쪼그려 앉아서 울고 있는 아이는 분명히 혜미였다. 정혜미. 그 아이는 윤제네 반 부반장이었다. 윤제는 깜짝 놀랐다. 부잣집 아이, 재수없는 계집애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혜미였기 때문이다.비밀"젠장, 없는 놈들이 벌어야 먹고살지, 데모한다고 그놈들이 눈 하나 깜빡할 줄 아나?" 아버지는 하우스 철거 반대 시위를 하러 가는데 의무적으로 한 집에 한 명씩 참석해야 한다는 말에 역정을 냈다.
태욱이가 다시 공터에 나타났다. 태욱이는 가게가 잘 되어 배달꾼을 따로 쓰기로 했다지만, 엄마는 태욱이 엄마도 불안해서 집 보라고 들여보낸 거라고 말했다.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태욱이가 다시 나타난 것은 윤제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태욱이가 돌아오자 아이들은 윤제 눈치를 슬슬 보더니 태욱이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뒤에서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