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나무 아랫집 계숙이네
윤기현 지음 | 사계절
상이 용사가 되다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가을이 가고 겨울도 지나갔다. 올 봄에 계숙이는 6학년이 되었다. 계성이도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고통도 겹쳐오고 기쁜 일도 겹쳐서 온다고, 오랫동안 침울했던 계숙이네 집에 기쁜 일이 생겼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부지인 증조할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간 아들을 살리겠다고 논 팔고 밭 팔아 돈을 싸 짊어지고 다니면서 할아버지를 제대시켜서 부상을 당했는데도 상이 용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현충일을 맞아 상이 군인으로 인정받아 국가 유공자로 지정되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옆집 할머니의 아들인 만석이 아저씨가 6·25 때 자료를 뒤져서 계숙이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찾아 내고 그걸 정부에 건의해서 바로잡은 것이었다. 이제 연금도 나오고, 증조 할머니도 나라에서 무료로 치료를 해준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몸 속의 살과 뼈에 박힌 파편을 여섯 개나 들어 냈다. 저녁이 되자 할아버지의 퇴원을 축하한다며 고모들이 다 모였다. 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이 웃고 이야기하는 소리로 온 집 안이 떠들썩했다. 할머니 장례식 뒤로 처음 있는 화목한 분위기였다.거친 땅에서 자란 나무들판 가장자리로 야트막한 산자락이 둘러싸듯 한곳에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월평, 고래등, 팔산, 다산, 쑥댕이, 방아다리…. 올망졸망한 동네에서 사람들이 땅을 갈고, 가축을 기르고, 곡식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들을 건너 마주 보이기는 하지만 시오 리도 넘어 걸어다니기에는 벅찬 길이다. 계숙이는 이 길을 걸어 집에 온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일찍 왔다. 밥상을 차려 놓고 아이들을 찾으러 나온 할머니는 계성이와 계숙이를 보고 끌끌 혀를 찼다. "불쌍한 것들." 할머니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한창 어리광부릴 나이에 한 다리가 만 리라고, 할미 할애비가 암만 잘해 줘도 지 부모만 헐까?" 할머니의 혼잣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토방에 올라서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팽개치고 마루를 쿵쿵 울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벽에 기대고 앉은 증조할머니와 계숙이 할아버지 앞에 상하나가 놓여 있고, 부엌 쪽문 가까이 다른 상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위에 김치며, 나물 몇 가지, 밥이 소복하게 담신 밥그릇 두 개와 양푼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계성이는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곁으로 가서 앉았다. "우리 집 증손 오는가. 오늘도 잘 놀았어?" 증조할머니는 계성이의 엉덩이를 두어 번 두들겨 주고는 생선을 발라서 입에 넣어 주었다.
점심을 먹고 계숙이와 할머니는 밭에 가려고 대문을 나섰다. 대나무밭 안쪽에는 상철이 할머니가 살고 있는 조그마한 양옥이 한 채 있는데, 상철이 할머니가 밭에 가려는지 호미를 담은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나오다가 계숙이네와 마주쳤다. "할머니, 안녕하시지라우?" 계숙이가 인사를 했다. "꼴좋다. 그리 못되게 굴더니 손주 대에 벌을 받는구만, 흥." 상철이 할머니는 찬바람이 휙 나도록 매정하게 쏘아붙이고 험상스런 얼굴로 노려보았다. "할머니, 상철이 할머니가 왜 저러셔?" "전쟁 통에 생긴 일 땜시 저라제. 느그 할아버지 잘못이제. 저 할머니가 뭐라든 니는 꼬박꼬박 인사 잘허고 예의바르게 해야 쓴다잉."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휴우, 허리야." 할머니가 호미를 쥔 손으로 등을 툭툭 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구부러진 허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아 거북이 서 있는 꼴 모양 엉거주춤했다. "할머니, 허리 좀 똑바로 펴 보랑께." "나이 들고 늙어서 글 않냐!" "그랄수록 똑바로 펴 보고 해야제, 그래야 좋아지제." 계숙이는 허리 굽은 할머니가 보기 싫고 부끄러워 잔소리를 하면서도 할머니 허리가 똑바로 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답답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계숙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계성이가 얼굴이 개범벅이 된 채 대문 밖에서 울고 있었다. "누나, 할머니가 농약통 지고 고추밭에 갔는디. 딸꾹. 점심때가 한참 넘었는디도 안 온께 할아버지랑 내가 밭에 갔어. 딸꾹. 그란디 할머니가 쓰러져 있잖여. 딸꾹. 동네 사람들이 업고 병원차에 싣고 갔어. 딸꾹. 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도. 딸꾹딸꾹."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할머니는 그토록 힘들게 일하면서도 원망 한번 하지 않았다. '불쌍한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시믄 어찌께 살까?'금같이 귀한 아침 시간결국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더위가 가시고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 왔다. 계숙이는 할아버지와 계성이의 밥상을 먼저 들여 주고 밥이 담긴 쟁반을 들고 증조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구린내와 지린내, 썩은 냄새가 지독하게 났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증조할머니, 식사하쇼잉." 계숙이는 증조할머니를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혔다. "아-아." 계숙이는 찌개 국물에 만 밥을 떠서 호호 불어 증조할머니의 입에 대며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얼렀다. 증조할머니는 아이처럼 입을 벌리고 받아 먹었다. 입을 벌릴 때면 아래턱이 심하게 떨려 입 속으로 들어간 밥이 흘러내리곤 했다. 그때마다 계숙이는 숟가락을 받쳐 흘린 밥을 받아 다시 먹이곤 했다. 계숙이는 할머니의 밥을 먹이고 부엌에서 허겁지겁 몇 숟가락을 떠 먹고 학교갈 준비를 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는 계숙이에게도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속내가 있었다. 바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나쁜 놈의 자석 같으니라고. 내가 지를 어찌께 키웠는디, 그라고도 지들이 잘 되고 복받을 줄 알어."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계숙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역정을 냈다. 계숙이는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눈물을 훔치거나 당산나무에 가서 두 손을 잡고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상철이 할머니계숙이에게는 이런 마음고생말고도 또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상철이 할머니 때문이었다. 상철이 할머니는 계숙이를 볼 때마다 험한 소리를 퍼부었다. 어느 날 계숙이는 찾아온 재윤이 할머니에게 상철이 할머니에 대해서 물었다. 재윤이 할머니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천히 들어봐라 잉. 사연이 긴께. 상철이 할머니가 처음 시집 왔을 때는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했지야. 그 집 남편이 참 사람이 좋았어야. 부지런하고 자상해서 동네 궂은일도 도맡아서 했지야. 그란디 난리가 터져서 남정네들이 전부 전쟁터에 끌려갔는디, 상철이 할아버지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마누라와 자식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어 대나무 밭에 구덩이를 파고 숨어서는 군대에 가지를 않았어야. 그라고 인민군이 여그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 잠깐 나와 살았는디, 인민군이라고 그대로 두었겄냐. 불러다 탄약도 나르게 하고, 짐도 져 나르게 했지야. 나중에 후퇴할 때는 식량을 지고 산에까지 가자고 해싸서 따라갔어야. 그란디 용케 거그서 도망을 나와 다시 대밭에 숨었제. 그란디 이번에는 국군이 다시 들어오고 휴전이 되었어야. 그때까지도 잘 숨어 있었는디 어찌께 탄로가 나 잽혀가게 되었지야. 그란디 얼매나 끔찍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집에 와서 사흘도 못 가서 숨이 끊어졌제. 그런 꼴을 당했으니 상철이 할머니 죽네 사네 했는데 만석이랑 만순이 두고 죽을 수도 없은께 그때부터 지독하게 일했어야. 근디 그 남편이 빨갱이 짓 한 것도 아닌데 빨갱이 가족이라고 사람들도 박해허고 애들도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당했제. 어느 날 아이들이 만석이를 또 발로 차고 못살게 구는디 동생 만순이가 악을 쓰고 달려들다가 일이 꼬일라고 그랬는지, 옆에 구경하던 경순이가 만순이한테 발길질을 했제. 경순이는 느그 할아버지 누이동생이여. 너헌티는 고모할머니제. 그때까지 참고 있던 만석이가 아이들을 제치고 경순이헌티 달려가서 귀싸대기를 몇 대 때렸다고 하더라야. 경순이가 오래비인 느그 할아버지헌티 일러바쳤는디 느그 할아버지가 빨갱이 자석이 군인 가족을 때린다고 눈알이 돌아 부러 군홧발로 사정없이 걷어차고, 지끈지끈 밟고…. 만석이는 어깨뼈가 부러지고, 허벅지 살이 찢어지고, 만순이는 갈비뼈에 금이 갔어야. 이런 자석을 보는 그 어매 맴이 어땠겄냐? 피눈물을 뿌렸지야. 만석이와 만순이는 한 달이 넘게 누워 있었어야. 한 달 뒤에 만석이는 학교에 갔는디 만순이는 늑막염에 걸려 고생하다가 7년 만엔가 죽어 부렸제. 꼭 느그 할아버지헌티 맞아서 죽었다고야 할 수 없지만 느그 할아버지가 빌미는 주었지야. 느그 할아버지 상이 군인이라며 걸핏하면 사람 패고, 참 못할 짓 많이 했지야. 늙고 기운 빠진께 인자 쪼깐 사람이 되었지만 그 간에 지은 죄가 많지야." 계숙이는 할아버지가 그런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상철이 할머니한테는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돌아온 아버지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계숙이가 집에 와 보니 아버지가 와계셨다. "인자 오냐? 인자 느그 엄마는 없응께, 니들과 나를 버리고 가 부렀은께. 다시는 찾지 마라." 계숙이는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계숙이는 행주를 빨아 밥솥이고 찬장이고 그릇 들을 보이는 대로 닦았다. 정신 없이 일을 하자 터질 것 같던 가슴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그러나 머릿속은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늦게까지 누워만 있었다. 어른들 말로는 어머니가 식당에 오는 단골 손님과 눈이 맞아 바람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싸우고 이혼을 했다는 것이다. 계숙이는 화가 나고, 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중국 교포 새어머니농번기가 지나고 조금 한가해지자 할아버지는 집을 고치자고 했다. 다달이 나오는 연금을 모으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친척들과 자식들이 조금씩 모아 준 돈으로 집에 수세식 화장실과 목욕탕을 들이고 부엌도 입식으로 하고 기름 보일러도 놓자고 했다. 두 달 동안은 집을 고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을 다 정리하고 나자 할아버지는 아들의 재혼을 서둘렀다. 아버지는 몇 번인가 선을 보았는데 그때마다 딱지를 맞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선이 번번이 깨지자 큰고모가 내려와 할아버지에게 따졌다. "아부지, 계숙 애비 새장가 들일 것이요, 말 것이요? 장가를 보내려면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야 한당께요." "안 되어. 우리는 안 늙는다냐? 늙어 기운 없고 정신이 좀 혼미하다고 엄니를 보낼 순 없다!"
아버지는 술꾼이 되어 갔다. 하루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취해 돌아왔다. 계숙이는 아버지의 잠자리를 봐 주고 마당으로 나갔다. 어디서 슬픈 울음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울음소리는 증조할머니 방에서 흘러나왔다. "엄니! 엄니는 지가 전쟁에서 부상당해 돌아왔을 때 지를 위해 징그러운 뱀도 잡아 오고 동네 변소에서 똥물도 걸러 오고 했는디… 이 아들을 살리려고 죽으라면 죽기까지 했을 것인디… 이 아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엄니, 지를 용서해 주시오. 이 불효 자석을 용서해 주시오. 으흐흑." 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를 붙들고 울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며 늘어놓는 사설이 너무나도 슬퍼 계숙이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계숙이가 학교에 갔다 집에 와 보니 증조할머니는 없었다. 증조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나자 다시 중매쟁이가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중매쟁이가 중국 교포에 참한 여자가 있다고 소개를 했다. 결혼을 하고 나자 아버지는 사람이 달라졌다.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몰라보게 부지런해졌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새어머니는 웃음이 없었다. 부엌 살림을 맡아 하면서도 양념을 아낀다거나 하지 않았고, 가끔 먼 허공을 쳐다보다 돌아앉아 눈물을 훔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계숙이도 새어머니와 쉽게 친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웃집 강성댁 할머니가 드나들면서 우연히 알게 된, 뜻밖에도 엄청난 사실이 숨어있었다.새어머니의 비밀강성댁 할머니가 드나들자 새어머니의 말수도 점차 늘었다. "나는 못된 여자에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계숙이는 윗방에 있었다. 마침 일요일이라 밀린 공부를 하려도 앉아 있는데 강성댁 할머니가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새댁이 아니고 애를 둘이나 낳은 애엄마예요. 지금 중국에서 남편과 애들이 친정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내가 돈을 벌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뭣이여?" 새어머니의 말에 강성댁 할머니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계숙이도 입이 딱 벌어졌다. "제 남편은 일은 하지 않고 한번에 돈을 왕창 벌겠다는 꿈을 꾸는 건달이지요. 그런데 마침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고 한국에서 사람들이 들어와 돈을 물 쓰듯 쓰면서 바람을 일으키더라고요. 그리고 한국에 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어느 날 남편이 '당신은 한국말도 잘하고 얼굴도 곱상해서 한국에 가면 돈을 잘 벌 수 있을 꺼야. 거기 가서 한 일년 고생하면 여기서 십 년 고생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데 가서 돈 좀 벌어 오구려.' 이렇게 말하며 자꾸 나보고 한국에 가라는 것이었어요. 아이들도 있고 해서 오기 두려웠지만 결국 오게 되었죠. 한국에 오는 데 남편과 어머니는 집을 저당잡히고 빚을 얻어 경비를 대주었어요. 밀항선을 타고 왔어요. 후에 남편한테 소식이 왔는데, 빨리 돈을 보내지 않으면 빚 때문에 아이들하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는 거에요. 그러던 차에 한국에서 결혼하면 급한 돈을 마련할 수 있고 한국 국적을 얻어 합법적으로 살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처음에는 나도 결혼해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계숙이 아버지한테 너무나 큰 죄를 진 것 같아 가슴이 아파요. 계숙이와 계성이를 보니 나도 애가 있는데 저 애들이 상처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망설이게 되더군요." 계숙인 얼굴이 달아오르고 고민에 빠졌다. '그라믄 아부지는 또 이혼을 해야 하나?'함박눈 내리는 날아버지는 낮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들일을 하고, 밤에는 송아지를 돌보고, 새벽에 일어나 하우스에 나갔다. 정말 쉴새없이 일했다. 새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부지런히 일을 거들었다. 그런 새어머니를 보며 계숙이는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아 좋았다. 해가 바뀌고 보름쯤 지났을 때였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들이고 길이고 지붕 위에 새하얗게 덮였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눈이 많이 와서 하우스가 쓰러질지도 모른다며 눈을 털러 함께 나가셨다. 그런데 그 날 저녁 새어머니 혼자 들어와 흐느끼고 계셨다. "아부지하고 싸웠어야?" 계숙이가 묻자 그제야 새어머니는 울음을 그쳤다. "계숙아, 내가 네 아부지와 식구들을 속였어." "알고 있었어라. 전에 강성댁 할머니허고 이야기할 때 들었어라." 새어머니는 깜짝 놀라면서도 말을 이었다. "처음 네 아버지와 결혼하고 무슨 핑계로 나갈까만 생각하다가 너희들도 불쌍하고 네 아버지도 너무 순진해서 망설였지. 아무 소리 없이 떠나면 큰 죄가 될 것 같아 언젠간 말하려고 했는데 마침 오늘 할아버지도 안계시고해서 들에 나가 솔직히 말했더니 느이 아버지가 충격을 받은 모양이야. 화가 나서 가버렸는데 집에도 오지 않고…. 모두에게 너무 미안하구나. 용서해 다오." 새어머니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증조할머니를 보러 가셨던 할아버지가 돌아왔다. 집안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묻는 할아버지에게 계숙이는 모든 것을 말했다. 할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불러 이야기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돈을 벌려고 한국에 왔고, 제가 돈을 보내 주지 않으면 애들은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가려고 합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드려 죄송합니다." 새어머니는 일어나 큰절을 드렸다. 그러나 곧 할아버지는 새어머니에게 보내줘야 할 돈이 얼마인지 물은 후, "백만 원만 부치면 우리랑 살 수 있겄냐? 물론 그 돈은 우리 집 형편으로 굉장히 큰 돈이여. 그렇지만 니가 온 뒤로 계숙 애비가 사는 맛을 들였는디, 느그들이 부지런히 일하믄 그 돈 못 벌겄느냐? 너도 어디 가서 일을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라고 나는 애정으로 두 사람이 합쳐졌으면 쓰겄다." 이튿날 할아버지는 돈을 마련해서 새어머니에게 건네주고 중국에 있는 식구들에게 부치라고 했다.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죽음새어머니는 마음을 다잡고 일에 전념했다. 밖에서 보기에 여느 부부보다 다정해 보였지만 그 사이 흐르는 긴장은 계숙이네 식구들만 아는 비밀이었다. 봄이 되자 계숙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여름이 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