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에르베 캄프 지음 | 에코리브르
부자들이 지구를 어떻게 망쳤나
에르베 캄프 지음
에코리브르 / 2008년 2월 / 183쪽 / 12,000원
1. 파국이 도래할 거라고, 그래서?19세기가 도래하자마자 발견된 지구 온난화에 대한 과학 이론은 1970년대에 다시 제기되었고, 1980년대부터는 좀 더 구체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후 과학자들은 강도 높은 토의를 계속해왔다. 이러한 기후 변화는 온실 효과의 증진에서 기인하는데, 만약 우리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지구 온난화는 지속될 것이다.
기후 체계는 아주 미세한 기온 차이만으로도 급속한 변화를 맞는다. 이를테면 오늘날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가진 6000~8000년 전 충적세와 지금의 기온 차이는 3도쯤밖에 나지 않았으며, 지금으로부터 2만 년 전인 빙하기의 기온도 지금보다 겨우 5도 정도 낮았을 뿐이다. 아무튼 오늘날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면 우리는 온실 효과의 주범인 가스 배출의 급속한 증가 속도를 늦춰나갈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안이다.
한편 세계적인 생물 다양성의 위기는 기후 변화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덜 걱정해도 되는 분야는 아니다. 가장 잘 드러나는 생물 다양성의 지표는 생물 종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세계자연보건연맹(IUCN)은 해마다 위기에 처한 생물 종 목록인 '레드리스트'를 발표했는데, 이 리스트에 의하면, 2006년에 조사한 생물 종 4만 177종 중 1만 6119종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었다.
생물 종 멸종의 주요 원인은 인간들에 의한 서식지의 훼손이나 파괴인데, 이 멸종은 반세기 전부터 놀라운 속도를 보이고 있다. 글로비오의 연구원들에 따르면, 지구 표면의 3분의 1이 경작지로 탈바꿈했고, 또 다른 3분의 1 이상의 지표면은 경작지, 도시, 철도나 건축물 따위의 기초 공사장으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공화는 단지 개발도상국들이 필요에 따라 추진하는 현상만은 아니다. 선진국들 역시 아무렇게나 공간을 훼손한다. 즉 생물체가 살고 있는 모든 공간은 이러한 생물 다양성 위기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생태계, 즉 모든 대양은 현재 우리가 느낄 수 있을 만큼 훼손되고 있다. 즉 지구 표면의 71퍼센트를 덮고 있는, 그리고 이제껏 우리가 마치 깊이가 무한한 우물처럼 여겨온 전체 대양은 인간 활동으로 인한 폐기물들을 소화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상한점에 다다랐던 어획량의 감소는 대양의 쇠퇴를 보여주는 가장 눈에 띄는 징후이다. 아무튼 생물 다양성의 보고인 난바다와 대양의 바닥이 어업, 새로운 종의 보호, 유전 탐사 등으로 착취당해 혼란에 빠져 있다.
한편 과학자들은 좀 더 전반적으로 물이나 음식 또는 공기를 통해 흡수되는 화학 물질들로 인한 오염과 암 발생의 규칙적인 증가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다. 사실 인구통계학자들과 공중보건 전문가들은 인류 진보의 가장 일반적인 척도 중 하나인 인간의 수명 연장이 앞으로 멈출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인간의 평균 수명 역시 감소할 것인데, 그 책임은 화학 물질에 의한 오염이나 불균형한 식사와 과식, 대기 오염, 방사선과 전자파 노출, 텔레비전과 자동차로 인한 운동 부족 등에 돌아갈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지구 생태학적 위기의 중대성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기후 변화가 그 위기를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보충 설명하면 서로 다른 생태학적 문제들이 현실에서는 유일하게 기후 변화로만 드러나고 있으나, 이 기후 변화는 가장 두드러진 한 단면일 뿐, 생물 다양성의 빠른 감소와 생태계의 일반적인 오염이 드러내는 위기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위기는 현실에서 서로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은 연구의 편의상 각각의 생태학의 위기를 애매하게 고립시킨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들은 모두 같은 현상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기들이 분리되어 있고 이것들을 독립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런 사고는 단지 특정인들에게 이익을 제공할 뿐이다. 이를테면 핵 관련 산업을 증진시키기 위해 기후 변화를 이용하는 원자핵 관련 로비스트 같은 사람들 말이다. 반대로 위기들의 뒤얽힘과 상호작용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리 달갑지 않은 현상도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 이 시너지는 그 어떤 것도 무너뜨리지 못할 것 같은 한 강력한 파괴자와 더불어 현재 악화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모든 것이 명확한데도, 왜 체제는 그토록 고집스럽게 부동 상태를 유지하는 것일까? 암암리에 퍼진 공통된 견해는, 실질적으로 이 위기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주의력 있는 시민들이 도처에서 수많은 경보 신호들을 관찰한다 해도, 대부분의 일반 언론들은 그것들을 상대화의 물결 속으로 가라앉히고 만다. 그리고 아주 노련한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모든 것이 과장되었다는 쪽으로 논쟁을 이끌어간다. 그나마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있는 또 다른 견해는, 새로운 기술을 통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그것에 적응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 위기 상황의 심각성을 단순화시키는 데는 세 가지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첫째, 오늘날 이 세상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견해인 경제 논리다. 국내총생산(GDP)과 국제 무역의 발달로 한 사회의 외적 번영을 인식하는 그런 식이다. 하지만 '세계 경제'라는 기업은 '생물권 훼손'을 보상하지 않는다. 즉 그들이 이용하는 자연 자본의 대체를 위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둘째, 생태학 분야에 관한 지도층 엘리트들의 지식 부족인데, 그들은 대개 경제, 공학, 정치를 전공했기 때문에 기초 과학 분야에 문외한인데다, 생태학의 최소한의 개념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셋째,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요인으로서 자신들을 둘러싼 현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부유층의 삶의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서구인들은 닫힌 공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자동차를 이용하고, 실내 온도 조절 장치가 갖추어진 공간에서 살고, 그들을 사회적 접촉과 단절시키는 이동 코스 - 공항, 비즈니스 지역, 주택 단지 - 를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 막연하기만 한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토록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생태학적 위기 상황에 돌입했음에도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생태학적 위기와 사회 위기가 한 재앙의 두 단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재앙이 지도층의 특권 유지에 급급한 권력 체제의 결과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2. 환경 위기, 사회 위기오늘날 빈곤과 불평등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 고리는 없다. 그러나 빈곤은 사회 내부뿐 아니라, 국가 내 조직들 사이에, 마치 불평등의 확대를 반영하듯 그 의미를 부연한다.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가장 잘사는 세대 20퍼센트의 순 평균 소득이 가장 가난한 세대 20퍼센트의 소득보다 7.4배 더 높다"고 한다. 이처럼 불평등 정도가 심화되는 현상은 모든 서구 사회에 만연해 있다. 참고로 경제학자 토마스 피케티에 따르면, "불평등의 심화는 미국과 영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사실 1980년대 들어 모든 나라에서 임금 불평등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한편 서구 사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은 훨씬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예를 들어 1997년 과테말라에서는 부유층 20퍼센트가 국가 자본의 61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 일반적으로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이 아시아나 선진국들에 비해 훨씬 더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난한 나라들과 부유한 나라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마어마한 격차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로 1990년에 평범한 미국인이 평범한 탄자니아인보다 38배 더 부유했다면, 오늘날에는 61배 더 부유하다.
아무튼 빈곤에 대한 세계 불평등의 이 간략한 묘사를 통해, 두 가지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빈곤은 절대적인 상황이 아니라, 늘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같은 사회에서, 사람들은 부유한 자들보다 덜 부유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불평등의 감소가 빈곤의 감소임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중간 소득을 낮추어야 하는데, 만약 부유층의 수가 줄어든다면 중간 소득은 낮아질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이전에 빈곤층으로 분류되던 사람들은 소득의 변화 없이 빈곤층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관찰은 빈곤이 생태학적 파괴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빈곤층은 오염이 심한 곳, 공업 지역 근처, 도로 옆, 식수 공급이 잘 되지 않거나 쓰레기가 쌓인 지역 등에서 사는데, 금전적인 개념 이외의 빈곤을 걱정하는 또 다른 방식은 이처럼 인간 존재의 환경적 조건에 대한 묘사와 관련된 것이다. 더구나 생태학적 위기로 인한 결과들을 우선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빈곤층이다. 밀레니엄 생태계 평가의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회를 위해 자연 체계에 가해진 압력으로 인한 생태학적 서비스의 손실로 고통 받는 사람은 바로 빈곤층이다. 예를 들어 댐은 전력을 공급받는 도시들을 위한 것인 반면, 시골 사람들에게는 경작이나 고기잡이의 기회를 빼앗는 것일 수 있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빈곤과 생태학적 위기의 관계는 농업 분야를 거치게 되는데, 세계적인 차원에서 빈곤은 주로 농민들과 연관되어 있다. 예로 농업 정책의 미약성은 토지의 악용, 토양 침식, 미경작 농지의 확산을 부추기고, 한계에 다다른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도시는 더 이상 약속된 부의 장소가 아니다. 굶주린 농민들의 발길은 그들을 또다시 도시 빈민가의 비참한 생활로 이끌 것이다. 결국 빈곤과 생태학적 위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서로 다른 생태학적 위기들 사이에 시너지 효과가 존재하는 것처럼, 전반적인 생태학적 위기와 사회적 위기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위기들은 상호 유기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상호 비례적으로 악화되기도 하면서 한 쌍을 이루고 있다.
3. 이 세상의 권력자들과두정치의 사전적인 의미는 "몇몇 막강한 힘을 가진 집안의 손에 권력이 쥐어지는 정치 체제나 정부"인데, 오늘날 지구는 19세기 후반 미국의 '거물 도둑들'의 시대 이후 전례가 없는 소득ㆍ상속ㆍ권력을 탐욕스럽게 축적하는 과두정치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런데 최고 부유층 집단에는 애국심이라는 게 없다. 예로 최빈국에서는 특권 계급이 위정자들에 의해 서구 사회의 특권 계급과 연계되어 있고, 이 지도층들은 다국적 기업들이 천연 자원에 접근하도록 돕거나 사회적 규율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 대가로 전 지구적인 수탈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옛 소련에서는 체제 붕괴 이후 위정자들이 국가 전리품을 횡령함으로써 국가적인 차원에서 재정적인 과두정치가 등장했다. 아시아의 경우, 과두정치는 그것에 순응하면서 지역적 경제 발전 위에 꽃을 피우고 있다. 특히 중국은 노동자 착취와 농민 수탈의 결과 이런 체제가 성립되었다. 또한 세계적인 과두정치는 상속세와 재산세 그리고 또 다른 재산에 대한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는 조세 피난처, 즉 재산을 보호해줄 은닉처를 원하는데, 조세 피난처들은 국가에게 부유층에 대한 세금 감면을 압박하기 위한 유용한 방법이다.
한편 부유층은 사회에서 분리된 세습적 사회 계급으로서, 유산과 특권 그리고 권력 네트워크를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독특한 방식으로 재생산되는데, 이 부유층은 스스로를 새로운 귀족이라 여긴다. 또한 학식을 갖추면 갖출수록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이 세습 제도에 젖어든다. 이러한 부유층들만의 성문에 빗장을 걸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일반적으로 두뇌가 명석한 개인들이 지도자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 고등교육기관의 교육비를 아주 비싸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예로 최고의 대학들은 더 이상 가난한 계층이 다가갈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등록금을 요구하고, 이제 중산층 자녀들조차 이러한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추세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의 부는 프랑스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구체제) 때처럼 세습의 형태로 실현 가능한 것이 되었다.
아무튼 과두정치를 주도하는 권력자들은 평민들과는 분리된 삶을 사는데, 그들은 빈곤층과 평범한 직장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신경 쓰지 않으며,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최고 부유층은 사회에서 분리된 채로 살아가는 한편, 그들을 부러워하는 일반 부유층은 그들만의 공동생활 공간에서 최고 부유층을 모방하기도 한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점점 더 많은 부유층들이 서로 멀리 떨어진 여러 도시의 주거 단지에서 살고 있는데, 이는 먼저 울타리를 친 각각의 주택들이 하나 둘씩 모여서 형성되며, 이미 1000만이 넘는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주거 단지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인류에게 근본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요구하는 역사의 아주 중요한 순간,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지금부터 100만 년도 더 전에 출현한 인류는 처음으로 경이로운 생명력을 가진 생물권의 한계에 부딪히게 됐다.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우리가 공동으로 인류의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주 멋진, 그러나 어려운 도전이다. 그런데 이 약탈자이면서 탐욕에 눈먼 지도층은 자신들의 직책을 남용해 얻은 수입을 낭비하고 권력을 이리저리 재면서 이 길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들은 그 어떤 계획이나 이상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약속도 내놓지 않는다.
소련 붕괴 이후 오늘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오직 자축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모든 권력과 세력을 가진 자들은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으며 불평등은 운명일 뿐, 그 어떤 변화도 불가능하다는 가짜 현실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이 자칭 현실주의는 불길할 뿐만 아니라 눈까지 멀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불의의 폭발적인 위력을 보지 못하고, 물질적인 부의 증가로 발생한 생물권의 파괴도 보지 못하는데, 이 파괴는 결국 인류의 삶의 조건을 망치고 미래 세대들의 기회를 박탈할 것이다.
4. 어떻게 과두정치가 환경 위기를 악화시키는가여러분은 아마도 소스타인 번드 베블런(Thorstein Bunde Veblen)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 사실 많은 경제학자들도 베블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니까. 베블런의 사상은 현 시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유한 계급론』은 프랑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책이 되었고, 그는 대학의 경제학 분야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경제학자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저서『유한 계급론』은 1899년 출간되었고, 곧바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며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분명 이 현상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 기인한 것이리라. 20세기 초 미국은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천민자본주의(유럽에서는 또 다른 형태였던)가 절정에 다다른 시기였다. 이후 베블런은 잊혀졌다. 20세기 내내 소득은 급격히 감소했고, 그로 인해 그의 분석에 대한 관심 역시 줄어들었다. 그러나 심각한 불평등의 귀환과 정신을 잃고 악화된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체제는 이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에게 날카로운 신선함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