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BC 금융제국
류스핑 지음 | W미디어
HSBC 금융제국
류스핑 지음
W미디어 / 2008년 3월/ 319쪽/ 13,000원
1. 기업의 창조사1864년 홍콩 왐포아선박의 서덜랜드Thomas Sutherland는 동인도회사의 배를 타고 홍콩에서 푸저우로 가는 배 안에서 중국에 은행을 세울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홍콩과 상하이는 무역확대에 따른 금융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몇 달간의 준비 작업을 거쳐 1865년 3월 3일 HSBC는 홍콩 퀸즈 로드 1번지에 위치한 워들리사의 빌딩에서 첫 영업을 시작했고, 이후 140년 동안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HSBC 임시위원회를 처음 이끈 기업은 아편 판매로 돈을 벌어 금융업에 진출한 영국계 덴트 사였다. 두 번째 위원회는 해운업을 하는 미국계 오거스트허드 사가 맡았다. 이 밖에 HSBC 설립에 참여한 회사들은 홍콩은 물론 광저우나 상하이에서 유명한 회사들이었다. 또한 HSBC는 상하이에 설립된 외자은행에서 우수한 금융가들을 스카우트해 왔다. 이처럼 HSBC에 투자한 기업과 인사들은 상당 기간 중국에서 다양한 영역의 경력이 있었기에 HSBC는 중국을 중심으로 경영할 수 있었다. 또 HSBC가 세계화를 목표로 활동을 전개할 때 이들 기업의 도움으로 미국이나 유럽 대륙 및 동남아, 인도 등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할 수 있었다.
HSBC는 홍콩과 상하이에서 의욕적인 첫발을 내딛었지만 앞을 가로막은 것은 세계를 뒤덮은 금융공황이었다. HSBC가 설립되기 전 반 세기동안 영국 금융업은 급속히 팽창했고, 식민지 은행 역시 급속히 팽창했다. 그러다가 1866년 영국에서 시작된 금융공황의 도미노가 닥치면서 홍콩과 상하이 외자은행들의 연쇄도산 사태가 일어났다. 그 결과 중국에는 외자 은행이 5곳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중에 HSBC가 포함되어 있었다. HSBC의 창립을 도왔던 회사들이 여전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더러, 홍콩 정부가 뒤를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았던 HSBC는 재정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었다.
파도를 넘고 나니 다음 파도가 도사리고 있었다. 1867년 최대 주주인 덴트 사가 금융공황의 여파로 도산한 것이다. 실력발휘도 못해본 HSBC에게 덴트 사의 파산은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HSBC에게 시급한 일이라면 덴트 사의 파산으로 외국 상사의 1위를 차지한 자댕매서슨과 좋은 관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자댕매서슨은 인도를 거점으로 하는 은행을 세우고 활동범위를 홍콩과 상하이로 확대하였기 때문에 HSBC가 자신들의 영업활동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금융공황 위기를 극복한 HSBC는 다른 은행들과 달리 공격적인 영업에 돌입해 업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켰다. 환어음을 비롯한 예금, 대출, 화폐 발행 같은 분야에서 공격 경영은 먹혀 들어갔고 중국 내 지위가 점점 높아졌다. 또한 HSBC는 국제 환어음 업무에만 치중하지 않고 중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예금을 유치하였다. 예금을 끌어들이고 화폐를 발행하면서 HSBC 금고에는 거액의 유동자금이 모였다. 이 자금은 대부분 청 조정에 제공하는 차관으로 쓰였다. 차관은 회계 단위를 영국 파운드로 정하고 이자지급이나 상환 때는 파운드 환율에 따라 은화로 환산하였다. HSBC로서는 좋은 조건이었다. 매달 꼬박꼬박 이자를 받을 수 있었고, 은화 환율로 인한 손실은 청 조정이 메워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HSBC는 환어음이나 예금, 차관 분야에서 강한 경쟁력으로 금융네트워크의 틀을 갖추었다.
무엇이 HSBC만의 금융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했을까? 답은 세계화와 현지화를 긴밀히 연결한 데 있다. 홍콩에 본부를 설립하고 상하이를 중심으로 중국 경제를 경영한 현지화 전략이 주효했다. 본사를 홍콩에 둔 덕분에 HSBC는 홍콩 정부와 남다른 관계를 맺었다. 설립허가를 받을 때는 총독이 힘을 써 주었고, 화폐 발행권 확대에도 도움을 주었다. 본사를 홍콩에 둔 것은 본사가 영국이나 인도에 있는 다른 은행보다 엄청난 이점이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업원조 시장에서 경영자들이 중국 시장 변화에 즉각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지화와 세계화 이것이 바로 HSBC가 상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2. 잭슨의 시대1866년부터 HSBC에서 일하기 시작한 잭슨Thomas Jackson은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일본 요코하마 분점 행장, 상하이 분점의 행장을 거쳐 1876년 HSBC의 CEO가 된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1876년은 팽팽하던 중국과 영국의 세력이 영국으로 기울기 시작한 때였다. 또한 수에즈운하가 개통되고 국제통신이 발달하면서 무역과 금융에도 변화가 있었다. 영국 수입상들이 중국 수출품의 시장가격을 제어하면서 중국의 대외무역 수지가 크게 악화되었다. 1870년대부터 외자은행은 중국에 콜머니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이는 중국금융이 외자은행에 의해 점점 더 통제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모든 변화는 HSBC의 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잭슨은 이 상황을 이용해 HSBC를 경영해나갔다.
잭슨이 재임 중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청 조정에 차관을 제공한 일이었다. HSBC는 1874년 청 조정에 '푸젠 군사비 차관'을 제공했는데 이는 중앙정부 차원의 첫 번째 대규모 차관이다. 당시 500만 냥의 차관을 따낸 HSBC는 시장에서 채권자를 모집해 차관을 제공했고, 협상 중개 수수료와 더불어 시장에서 발행한 채권에서 이자를 받는 등 여러모로 이득을 볼 수 있었다.
HSBC는 청 조정에 1878년과 1884년에도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였다. HSBC는 청 조정뿐 아니라 중국 제일의 실력자 자댕매서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자댕매서슨도 HSBC가 필요했다. 1870년대 들어 자댕매서슨이 장악하던 무역대금 외환업무가 몰락의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877년 HSBC와 자댕매서슨은 힘을 합치기로 하고, 이후 양사는 긴밀하게 연계하여 사업을 운영하게 된다.
1870년대 이후로 국제 시장에서 은값은 장기간 큰 폭으로 하락한다. 은값이 큰 폭으로 떨어지자 은행들은 환전에 바빴다. 금고에 있던 은화를 꺼내 파운드로 환전해 은 재고량을 최저 수준으로 낮추었다. 그러나 HSBC는 반대였다. 오히려 정부로부터 위탁받은 자금을 운용해 창고에 은을 가득 쌓았다. HSBC는 이것을 청의 조정이나 지방정부에 단기 고리의 대부를 제공해 큰 이윤을 얻었다. 은값이 계속 하락하는 상황에서 이런 전략은 자칫 재정난에 빠질 수 있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환율 전략의 일인자임을 자처하는 잭슨이 있어 HSBC는 큰 위험 없이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모험심 많은 잭슨이 재임 10년 동안 한 일은 금융네트워크를 짜고 확장한 일이었다. 그는 중국 내에 베이징, 타이완, 주장에 이르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샌프란시스코, 싱가포르 등 중국 이외 지역에도 화교 생활권을 중심으로 사무처나 분점을 세워 세계적 금융네트워크의 초석을 만들어갔다. 이 와중에 1883년 세계금융대공황이 발생하였지만 HSBC의 실적은 오히려 상승곡선을 그렸다. 예금 증가와 지폐 발행이 1884년에서 5년 동안 45%가 늘어난 것이다.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면서 세계열강은 중국을 나눠먹으려고 혈안이 된다. 1901년 신축조약을 체결하면서 열강은 중국에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재정이 바닥난 청 조정은 배상금 대신 채권발행을 제안한다. 이때 영국이 받을 배상금 750만 파운드를 관리할 은행으로 HSBC가 지목된다. 이를 통해 영국을 대표하는 은행으로 HSBC는 홍콩 은행계에서 수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1902년 퇴임하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잭슨을 향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잭슨의 재임기간 중에 HSBC는 총자산이 6배, 예금 총액이 10배 늘었다. 무엇보다 그로 인해 HSBC가 중국에서 최고의 은행이 되었다.
3. 민국으로 달리는 열차1898년은 중국 철도 부설권을 두고 열강들의 싸움이 치열한 때였다. HSBC와 자댕매서슨이 합작한 BCC(중영은회사, British & Chinese Corporation)는 그중 두각을 나타내었다. 1899년 BCC가 차관을 제공하여 경봉노선 부설권을 따냈다. 제공하는 차관만도 230만 파운드였다. HSBC는 수수료 4.6만 파운드를 받았고, 자댕매서슨은 철도 부설에 필요한 원자재 공급으로 수익을 남길 수 있었다.
1902년 잭슨을 대신해 HSBC를 맡은 스미스R. M. Smith는 재임 8년 동안 BCC를 통해 철도 부설 차관을 제공해 높은 실적을 올렸다. 1904년 닝후선 철도 부설권(차관규모 325만 파운드), 1907년 지우광 철도 부설권(차관규모 150만 파운드), 1908년 텐진-지푸 노선 부설권(차관규모 500만 파운드) 등이 HSBC가 참여한 철도 부설 차관들이다. BCC 대표가 HSBC 대표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시의 회상이 담겨있다. "차관 제공에 힘을 쏟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HSBC의 지위가 확고해 지기를 바랐던 겁니다.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스차일드은행이나 러시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베어링브라더스 은행처럼 말이죠."
1909년 중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3국과 철도 부설을 위한 차관협상을 벌여 HSBC, 인도-차이나 은행, 독일-아시아 은행에 공동 차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미국이 자국을 제외하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협상 참여를 요구하였다. 결국 1909년 중국 정부는 주권과 이권을 희생하여 미국을 포함한 4개국 은행이 제시한 협정에 조인하였다.
이어 중국정부는 협정 이행을 위해 1911년 철도국유화 정책을 발표했다. 그러자 각 지방에서 철도보호운동이 일어났다. 운동은 겉으로는 차관을 반대했지만 실제로는 청 조정의 붕괴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우창에서의 봉기를 시작으로 15개 성이 독립을 선언했고, 결국 1912년 1월 1일 청은 막을 내리고 난징 임시정부가 시작된다. 내우외환의 중국 열차는 청 왕조를 지나 민국으로 향한 것이다. HSBC등에서 나온 차관은 철도보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는 청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4. 위안스카이의 황제의 꿈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수립이 선포되고 쑨원이 난징으로 돌아와 임시 정부의 총통을 맡았다. 난징 정부는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가 연합해 만든 은행 신디케이트에 200만 냥을 대출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 등의 은행은 수립된 지 얼마 안 된 난징정부에 차관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중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청 조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위안스카이를 보고 있었다.
청 조정의 총리대신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의 청 조정과 난징 임시 정부를 동등한 지위로 인정하는 행동을 한다. 1912년 2월 12일 청의 선통 황제가 하야하고 13일 쑨원이 임시총통에서 사직한다. 1912년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 임시총통에 취임한다. 이후 그는 정식 총통이 된 후 국회를 해산하고 1916년 스스로를 중화제국의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가 황제가 되려면 꼭 필요한 것이 구미 열강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것이었다. 4개국 은행 신디케이트는 위안스카이가 애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
4개국 은행 신디케이트는 담보물로 염세를 지정했다. 염세는 전국적으로 거둬들이는 가장 안정적이고 거대한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돈이 급했던 위안스카이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를 수락했다. 여기에 신디케이트는 중국 정부 차관을 독점하는 조건과 재정 감독권까지 요구하였다. 그러자 혁명당은 위안스카이가 부당한 차관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고 질책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913년 4월 위안스카이는 차관계약에 서명한다. 2500백만 파운드를 연 5%에 제공받는 대가는 컸다. 열강은 이를 통해 중국의 경제와 정치를 제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차관에서도 HSBC가 큰 역할을 했다. 베이징 HSBC는 위안스카이 정권과 직접 접촉하면서 협상을 진행했고 런던 분점은 은행 간에 일어날 수 있는 소모전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율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HSBC는 은행 신디케이트에서 자연스럽게 수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차관을 통해 황제에 오르려고 했던 위안스카이였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1916년 일부 군관들을 중심으로 독립이 선포되었고, 전국이 민중 봉기로 벌겋게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3월 황제자리를 내놓고 공화정으로 돌아가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황제의 꿈이 산산조각 난 그는 6월 6일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게 된다.
5. 급변하는 베이양 정부와 HSBC1916년 리위안홍이 중화민국 총통직을 승계한다. 리위안홍은 군권을 장악한 두안치뤼를 몰아내기 위해 군벌 장쉰을 끌어들인다. 장쉰의 엄호를 받으며 1917년 7월 1일 예전의 청 황제 푸이가 황제의 보위에 오른다. 그러자 왕정복구를 거부한 리위안홍은 두안치뤼 군대를 다시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7월 11일 장쉰은 항복하고 보좌에 오른 지 2주밖에 안 된 꼬마 황제는 자리에서 쫓겨났다.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두안치뤼는 구미 열강뿐 아니라 일본과도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했다. 1917년 두안치뤼는 일본에서 5백만 엔의 차관을 빌린다. 차관제공에서 큰 재미를 보았던 HSBC로서는 이즈음의 차관을 모두 일본에 빼앗기는 일이 속 쓰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영국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극동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HSBC는 중국에서 예금, 단기자금 대출, 환어음 등 금융서비스에서 여전히 짭짤한 이익을 보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은행 규모를 보면 HSBC는 아시아에서 단연 톱이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의 4개국이 새로운 신디케이트를 구성하여 중국을 대상으로 차관이나 대출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중국에서 장기간 일을 주도했던 HSBC가 은행 신디케이트에서 영국 기업들을 대표하여 업무를 진행했다. 하지만 신디케이트는 실제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공인된 정부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누구를 대상으로 차관을 제공하고 어떤 담보를 확보해야 할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2년 1월 중국 정부는 신디케이트에 9,600백만 파운드의 차관 제공을 요구했다. 신디케이트를 대표해서 베이징을 방문했던 HSBC 런던 분점의 아디스는 베이징 정부 총리였던 량스이에게 국정의 은밀한 얘기를 듣게 된다. 군벌 장줘린과 남방의 쑨원이 연합하여 베이징 정부의 우페이푸를 칠 계획이라는 것이다. 량스이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장줘린과 쑨원이 연합해서 새로운 정부를 세울 것입니다. 이때 HSBC가 나서서 통일 차관을 제공하면 됩니다. 허나 그에 앞서 우페이푸를 칠 전투 자금을 제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디스는 즉답을 피했고 이후 사태는 량스이의 에측과는 반대로 전개되었다. 이 이야기는 HSBC 경영진이라 할지라도 중국 정세와 베이징 군벌의 동향을 예측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6. HSBC의 사이클 1937년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상하이를 공격한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난징을 공격하고 대학살을 자행한다. 국민당 군대는 충칭으로 옮겨가 항일전쟁을 계속한다. 항일전쟁 동안 조계지에 있던 여러 은행은 만일에 대비해 약 2,300만 냥을 홍콩 HSBC 본사로 옮겨 놓는다. 일본군이 수도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