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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 법칙

이채윤 지음 | 머니플러스
황창규의 선택



황창규는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가 중, 고등학생이었던 1960년대는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이 치열했던 때였다. 평소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그는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각종 실험을 통해 물리 이론을 재구성하는 실용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법대나 의대로 갈 것을 희망했지만 황창규는 물리학에 대한 흥미를 버리지 못하고 서울대 전기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때인 1974년 운명 같은 책을 만나게 된다. 인텔의 창업자 앤디 그로브가 쓴 『반도체의 물리와 기술』을 접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읽고 큰 영감을 받고, 홀린 듯이 반도체를 파고들었다. 그는 반도체를 공부하기 위해 수학, 화학, 응용물리학까지 섭렵했고 반도체의 순수한 학문으로서의 매력과 무한한 잠재력, 미래의 성공 가능성에 빠져들어서 밤잠을 설치곤 했다.



1977년 또 다른 계기가 찾아왔다.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윌리엄 쇼클리가 한국을 방문하여 서울대학교에서 특강을 했는데, 이것을 듣고 황창규는 반도체에 인생을 걸기로 결정했다. 반도체 엔지니어로서의 꿈을 굳힌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반도체를 전공으로 선택했고, 지도교수도 없었지만 뜻이 맞는 대학원생끼리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그때 멤버 가운데 한 명이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다. 1981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황창규는 메사추세츠 주립대학교에서 1985년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반도체의 메카 스탠포드 대학으로 가서 전기공학과 책임연구원이 되었다. 스탠포드에서 보낸 5년 간의 연구생활은 그의 반도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연구환경도 좋았고 실리콘밸리에서 인텔이나 HP에 컨설팅을 하면서 그들의 기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데다가 반도체 전문가들과의 교류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창규는 스탠포드에서 자신을 반도체 분야로 접어들게 한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윌리엄 쇼클리와도 만남을 가졌다. 당시 76세의 명예교수 쇼클리는 황창규의 앞방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창규는 자연스럽게 의견을 나누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학생도 아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황창규가 많은 논문을 발표하자 지도 교수는 이 열성적인 동양 청년이 연구원생활을 겸하면서 인텔에서 컨설팅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때 황창규는 자신을 반도체의 세계로 안내한 또 다른 스승인 인텔의 앤드 그로브 회장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이상하리만큼 친밀감을 느끼게 되어 훗날 가족동반으로 식사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황창규는 앤디 그로브에게 반도체뿐 아니라 기업경영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처럼 윌리엄 쇼클리, 앤디 그로브 같은 거장을 만나 반도체와 관련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던 황창규에게는 또 다른 인생의 전기가 다가왔다. 1988년 10월 해외인재 확보에 열을 올리던 삼성전자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그 무렵 황창규는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하겠다는 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조국에 돌아갈까? 공부를 더 할까?" 고민에 빠졌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황창규는 우연히 일본 반도체 업계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일정 마지막 날 도쿄의 한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히타치 연구소 부소장이 황창규에게 물었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저는 미국에만 있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삼성이 일본의 기술을 따라오려면 멀었습니다. 20년이 지나도 못 따라올 겁니다." 순간 황창규는 히타치 부소장의 입가에 자만의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은근히 오기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언제까지 저들의 조소를 받으며 살아가야 하나" 그때 그의 머리 속에는 "아!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건희의 선택



1974년 무렵 30대 초반의 청년인 이건희는 동양방송 이사로 있었다. 1973년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그는 자원이 없는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당시 일본 업체들이 TV, 냉장고 등에 들어가는 핵심부품인 IC의 물량과 가격을 통제하며 횡포를 부리자 이건희는 우리나라가 국제 경쟁력을 갖추려면 두뇌로 경쟁해야 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하이테크 산업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러 사업유형을 검토하다가 반도체가 전자산업의 씨앗으로 가장 유망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국내 반도체 산업은 걸음마 단계였다. 1974년에야 첨단 시설을 갖춘 국내 최초의 웨이퍼 가공업체인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설립되었으나 과다한 투자로 경영이 악화된 상태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건희는 부친인 이병철에게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반도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이건희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이것이 삼성 반도체 사업의 씨앗이 되었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이건희는 공장규모를 키워 일본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반도체 회사를 만들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삼성 사장단은 반도체 사업에 본격 진출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반도체 사업은 장치산업으로, 본격적으로 하려면 당장 4천억 원의 투자가 필요했다. 당시 삼성그룹 전체의 연 시설투자 규모가 8천억 원임을 감안하면 앞날이 불투명한 신규 사업에 결단을 내리기는 힘든 일이었다. 동물적인 사업 감각의 소유자인 이병철 회장도 아들이 반도체 이야기를 꺼내면 핀잔을 줄 정도였다. "그 돈이면 TV를 몇 백 만대 더 만들 수 있는데 그 쪼그만 것 만드는데 쓰겠다는 거냐?" 하지만 이건희는 끊임없이 아버지를 설득했고 결국 이병철은 반도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다.



당시 이건희는 기술확보를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나 드나들 정도로 반도체에 미쳐 있었다. 그는 아이비리그를 비롯하여 미국 전역의 대학을 뒤져가며 반도체를 전공한 한국계 연구 인력을 맨투맨으로 만났다. 그는 이렇게 찾아낸 30대 초반의 젊은 인재들을 400-500만원의 파격적인 월급에 대거 스카우트했다. 당시 삼성전자 사장 월급이 100만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알 것이다. 그것이 훗날 삼성 반도체의 신화를 낳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병철의 선택



1981년 9월 이병철은 그룹 임원회의에서 앞으로 반도체와 컴퓨터에 삼성의 흥망을 걸겠다는 선언을 하고 이 새로운 산업에 투신하기 위해 미국의 실리콘 밸리를 찾았다. 이곳에서 이병철은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이테크 산업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귀국한 후 반도체 신사업추진팀을 구성했다. 1982년 10월 신사업추진팀이 작성한 보고서를 읽던 이병철은 '반도체 중에서 일본이 미국보다 유일하게 앞선 분야가 메모리'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미국이 일본에 뒤졌다는 것은 메모리 반도체가 원천기술 못지 않게 생산기술에 의존함을 의미하며, 첨단설계도 중요하지만 대량생산을 가능케 하는 공정기술만 갖추면 해볼만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메모리 제품은 수요가 많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한번 투자하면 투자 액수의 서너 배를 금방 뽑아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1983년 3월 15일 마침내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메모리 위주로 추진한다는 방침을 굳히고 반도체에 사운을 건 투자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유명한 이병철의 도쿄선언이다. 그리고 반도체 공장(경기도 기흥) 건설에 삼성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당시 그는 73세의 노인이었다. 이 과감한 결단과 투자는 이병철이 지닌 대담한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공장을 짓는 동안 삼성은 기술인력을 키우기 위해 해외연수도 실시했다. 외국기업에서 반도체에 대해 배우고 익히며 외국인 기술자에게 기술을 빼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매너 그리고 기술에 대한 고급지식이 필요했다. 삼성의 연수생 교육은 철저하게 이점에 포커스를 맞추고 진행됐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은 삼성이 파견한 반도체 신사유람단을 문전박대하고 기술전수를 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반도체에서 2류에 속하는 일본 샤프사를 찾아갔지만, 여기서도 삼성의 박사급 연구원들은 샤프사의 고졸 출신 엔지니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어깨너머로 생산공정을 훔쳐봐야 했다. 기술 없는 회사가 겪어야 했던 설움이었다.



삼성은 기흥공장 건설에 설계와 공사를 병행하는 속전속결 전략을 펼쳐 1년 반이 걸리는 공사를 6개월만에 완공했고 제품생산을 2년이나 단축했다. 이렇게 전력투구를 한 결과 삼성은 1983년 12월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을 독자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984년 10월 자체 순수 설계로 256K D램의 개발에 성공한다. 삼성이 이처럼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256K D램을 개발할 때 기존의 4인치 웨이퍼에서 5인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6인치를 사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넓은 웨이퍼를 쓰는 새 기술을 적용하는 데는 막대한 자금이 들지만 속도전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삼성은 무리를 했고, 그 결과 1.4배의 생산성 향상 효과를 낳았다.

일본업체들은 삼성이 64K D램을 본격 생산하자 삼성을 고사시키기 위해 덤핑가격으로 물건을 출고했다. 국제시장에서 64K D램의 가격은 폭락했고, 미국은 일본 반도체 기업에게 반덤핑 관세를 물리기에 바빴다. 설상가상으로 1984-1985년 전세계적인 반도체 불황이 닥쳤다. 삼성은 1천 4백억 원의 누적적자를 보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삼성이 반도체 때문에 자멸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왔다. 그러나 일본의 덤핑이 삼성에 상처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일본 기업에 반덤핑 관세의 공세를 취하는 사이에 일본의 256K D램 투자와 생산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는데, 삼성은 이때를 치고 들어갈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1986년부터 세계시장에서 반도체 가격이 상승하면서 삼성은 명운의 갈림길에서 성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내 생애 최고의 결정



일본을 뛰어넘는 데 인생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한 황창규는 삼성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1988년 그의 나이 36세 때였다. 당시 삼성에서는 임원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연구개발직을 요구했다. 오로지 일본을 꺾기 위해 삼성에 뿌리박을 결심을 했기에 보수나 직위는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첫 직책은 소자개발팀장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1983년 64K D램 개발에서 시작해서 256K D램, 1M D램, 4M D램으로 이어지는 반도체 개발작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황창규가 삼성에서 자리 잡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오랜 해외생활에 서구식 토론문화가 익숙한 탓에 상명하복식 의사결정에 길들여져 있는 직원들과의 융화가 어려웠다. 하지만 황창규는 새로운 토론문화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아이디어를 내면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아무리 윗사람이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할 말을 다했고, 끝까지 밀어붙이며 경직된 삼성의 조직문화에 도전했다. 황창규의 적극적인 토론문화 정착 운동은 1년, 2년 세월이 흐르면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토론문화뿐만 아니라 연구풍토도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연구원들에게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연구논문을 많이 써서 학회에 발표할 것을 강조했다. 당장 매출을 높이는 데 매달리면 멀리, 깊이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기술간담회를 열기 시작했다. 회사 일을 끝내고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기로 한 모임은 항상 새벽에야 끝이 났다. 그렇게 2년이 흐르자 삼성의 엔지니어들이 개안하기 시작했다. 기흥 골짜기에 파묻혀 기술 개발한다고 하다가 세계 시장의 기술동향을 내다보고 놀란 것이다.



그는 연구진에게 학회활동을 유독 강조했다. 그의 회고를 들어보자. "논문이 학회지에 실리려면 심사위원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일본과 미국의 심사위원만 각각 15명씩 참여하는 거예요. 안되겠다 싶어 국제전기전자공학회 회장을 만나서 나를 심사위원에 넣어달라고 했어요. 그 회장이 스탠포드 시절 친구였거든요. 그래서 심사위원이 됐죠. 그런데 심사를 할 때 1차 심사결과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와서 통역을 두고 일본말로 회의를 진행하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 심사위원회에서는 영어만 쓰게끔 바꿔버렸습니다. 그것만 한 것이 아니에요. 심사위원회에 400개의 논문이 들어오면 우리 엔지니어에게 싹 나누어주고 연구하게 했어요. 이게 바로 우리가 미래의 반도체 원천 기술을 갖게 된 계기입니다."

특명



기회는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오는 법이다. 삼성에 입사한지 3년 만에 이사로 승진한 황창규는 1992년 3월 256M D램 개발의 특명을 받았다. 당시 삼성은 64M D램 개발에도 성공하지 못한 상태였다. 황창규는 즉각 개발팀 구성에 들어갔지만 베테랑 인력은 64M D램 개발에 투입이 되어 있어서 경험이 적은 젊은 인재로만 팀을 구성해야 했다. 황창규는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개발팀의 대부분을 반도체 개발 경험이 많지 않은 초보자들로 구성했다.



256M D램은 머리카락 한올의 1/480 굵기인 0.25미크론의 회로를 그려야 하는 초미세 작업이지만 팀원들은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한다는 자부심으로 밤낮 없이 연구에 몰두했다. 황창규는 기존 반도체 업체들과는 다른 개발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처음부터 256M D램 샘플을 제작하지 않고 이미 개발해 상용화되고 있던 16M D램에 256M D램 사양을 적용했다. 256M D램 개발을 위한 전용설비를 갖추기 어려운 실정이므로 기존설비를 이용하자는 생각이었다. 이런 방식에 불안감을 나타내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는 자신감을 갖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연구개발에 들어간 지 1년만인 1993년 3월 개발팀은 256M D램의 디자인 룰인 0.25미크론에 근접한 0.28미크론급 16M D램을 만들고 1993년 말에는 256M D램의 기능을 완전히 갖춘 16M D램 시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1994년 4월 256M D램의 실험용 시제품을 설계하는데 성공하였다. 다음 공정은 웨이퍼를 가공해 칩을 찍어내는 일이었다. 연일 35-37도를 오르내리는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휴가도 없이 연구에 몰두하는 강행군이 계속되었다.



1994년 8월 11일 기흥연구소는 흥분에 휩싸였다. 연구원들은 웨이퍼에 들어 있는 칩이 하나하나 검사되는 과정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다.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웨이퍼 10장 가운데 8장을 검사했지만 셀이 100% 작동하는 칩은 하나도 없었다. 연구원들은 어깨가 축 처졌고 일부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나머지 웨이퍼 2장을 검사할 때 단위소자 100%가 작동하는 칩이 발견된 것이다. 100% 작동하는 칩을 단 한 번의 공정개발로 얻는 것은 반도체 개발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연구팀은 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다. 검사장비가 고장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10여 차례 다시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256M D램 세계 최초 개발 성공, 이로써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에 손을 댄지 11년 만에 기술력에 있어서도 세계 정상을 차지한 것이다. 황창규란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삼성반도체의 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는 이 공로로 상무로 진급했고, 그 해 삼성그룹 기술대상을 받았다.



노어냐? 낸드냐?



모든 사업의 성공에는 선견지명과 운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지금 삼성이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플래시메모리의 경우 한 천재의 전문적 안목과 직관력, 그리고 운이 따라 준 경영 사례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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