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트백 억만장자
데이비드 겔러스 지음 | 흐름출판
더트백 억만장자
데이비드 겔러스 지음
흐름출판 / 2026년 6월 / 404쪽 / 22,000원
route 1. 아웃사이더 (1938~1963년)
플레이어가 아닌 게임 메이커1938년 11월 9일, 이본 쉬나드는 미국 메인주 루이스턴의 병원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인구가 막 20억 명을 넘고 지구 온난화가 시작되기 전, 더 푸르고 고요한 세상이었다. 그의 조부 자크는 캐나다 퀘벡에서 메인주로 이주한 모피 사냥꾼의 후손이었고, 아버지 제라르는 방직 공장 직조기 수리부터 배관·전기·목수 일까지 거의 모든 것을 고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현장의 지혜는 훗날 막내아들 쉬나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쉬나드는 걷기도 전에 오르는 법을 배웠고, 걸음마를 떼자마자 숲을 누비며 자연을 향한 사랑을 키웠다. 검소하고 강인하게 자란 그는 조상처럼 모피 사냥꾼이 되기를 꿈꿨다. 1946년 가족은 아버지의 천식 치료와 자녀의 미래를 위해 캘리포니아 버뱅크로 이주했다. 66번 국도에서 어머니가 가난한 호피족 아이들에게 옥수수 통조림을 나눠 주는 모습을 보며 그는 나눔의 가치를 배웠다. 운동 신경은 타고났으나 사람들 앞에서 얼어붙었던 그는 팀 스포츠를 그만두며 이렇게 말했다. “억지로 농구 선수가 되느니 차라리 나만의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스스로 규칙을 정한다면 반드시 이기기 마련이다.”
산에 미친 사람들1953년 남캘리포니아 매사냥 클럽에서 쉬나드는 동료애와 운동 능력의 조화를 찾았고, 절벽 둥지에 닿기 위해 록 클라이밍을 익혔다. 1954년 DDT가 송골매를 파괴한다는 것을 발견한 클럽은 맹금류 보호를 위한 캘리포니아 최초의 규제 캠페인을 시작했고, 그는 작은 행동이 거대한 변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여섯 살 때 산 낡은 포드 모델 A로 서부를 방랑하던 쉬나드는 와이오밍의 개닛피크를 첫 시도에 홀로 등정했고, 티턴산맥과 요세미티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로열 로빈스, 톰 프로스트 등 당대 최고의 등반가들과 어울렸다. 그는 더트백(dirtbag)으로 불렸다. 더트백이란 길 위의 자유로운 삶을 좇는 사람을 뜻한다. 등반계에서는 오직 암벽을 오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을 존경과 애정을 담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더트백’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등반을 관습에 대한 반항이자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등반은 결국 그의 일부가 되었다.
등반가, 서퍼, 그리고 대장장이등반 실력이 늘면서 그는 로프를 고정하는 피톤의 한계를 발견했다. 유럽산 연철 피톤은 요세미티 암벽에 박으면 일그러져 재사용이 불가능했다. 1957년 쉬나드는 고물상에서 모루와 화덕을 사 부모님 집 닭장을 작업장으로 개조하고, 도서관에서 빌린 대장장이 책으로 첫 피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피톤은 단단해 여러 번 쓸 수 있었고, 개당 1달러 50센트로 유럽산보다 훨씬 비쌌지만 팔리기 시작했다. 도구를 살 때는 최고의 제품을 구해 평생 써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그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면 소비자가 기꺼이 더 높은 값을 지불한다는 평생의 교훈을 얻었다.
일이 여가를 방해하지 않도록 그는 차에 모루를 싣고 해변에서 서핑을 하며 피톤을 만들었다. 이어 부모님께 빌린 825달러로 알루미늄 단조 금형을 사서 더 가벼운 카라비너를 제작했다. 연간 순이익률이 1퍼센트에 불과했지만, 전문 등반가가 1,000명도 안 되던 시절 그는 그들 대부분을 고객으로 만들었다. 1960년 톰 프로스트와 함께 면도날 두께의 크롬니켈강으로 좁은 틈새에 들어갈 ‘러프(RURP)’를 만들어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우리’가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1962년 고물차 배달 일을 맡았다가 고장 난 차 때문에 유치장에 갇히고, 화물열차에 올랐다가 부랑죄로 다시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은 뒤, 그는 입영 통지서를 받았다. 한국의 미군 기지로 발령받은 그는 일부러 상관에게 경례하지 않기, 단식 투쟁 등의 이상한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켜 단순 임무를 받은 뒤, 남는 시간에 서울 근교 암벽에서 초등 기록을 세우고 도서관에서 기계 공학과 야금학 책을 탐독하며 제대 후를 준비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프리시디오에 배치된 그는 훗날 가장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이 될 더그 톰킨스를 만났다. 청교도 후손으로 부유하게 자란 톰킨스는 여러 면에서 쉬나드와 정반대였지만, 둘 다 젊은 반항아이자 책을 좋아하는 영혼의 단짝이었다. 이후 50년 동안 두 사람의 삶은 얽히고설켰다. 쉬나드가 파타고니아를, 톰킨스가 에스프리를 세웠고, 쉬나드가 미니멀리스트로 검소하게 살 때 톰킨스는 맥시멀리스트로 왕처럼 살고자 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절 톰킨스는 장군인 척 전화를 걸어 쉬나드를 빼내 베이에어리어를 함께 누볐고, 그 여행에서 두 사람은 인생을 결정지을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인간이 환경을 망치고 있으며, 이를 바로잡을 책임 또한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쉬나드는 회상했다. “우리는 인류가 고향인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았습니다. 그때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야생의 자연을 보호하고 복원할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route 2. 클린 클라이밍 (1964~1972년)
다시 쓰는 요세미티 등반론군에서 제대한 뒤 피넛과의 결혼 생활이 실패로 돌아가자, 쉬나드는 유일한 안식처였던 대장간으로 돌아왔다. 등사기로 인쇄한 한 장짜리 가격표 하단에는 “5~9월에는 빠른 배송을 기대하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구가 있었다. 소비자의 기대를 거스르는 사업 방식이었으나 통했다. 그의 장비는 품질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해안 도시 벤투라의 양철 헛간더그 톰킨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노스페이스를 창업해 등반가와 비트족, 히피들의 성지로 만들었지만, 1967년 단돈 4만 달러에 매각했다. 소매 체인점 운영이 자신의 야망을 담기에 너무 작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쉬나드는 1966년 한적한 해안 도시 벤투라의 양철 헛간으로 옮겨 쉬나드 이큅먼트를 정식 출범시켰다. 회사가 커지자 쉬나드는 등반 친구였던 톰 프로스트를 정식 파트너로 영입했다. 등반 인구가 늘면서 제품 수요는 급증했고, 장비는 점점 정교해졌다. 모든 걸 수작업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금형과 새 기계를 도입해 공정을 자동화해야 했다. 스탠퍼드 출신의 항공 엔지니어인 프로스트가 적임자였다. 요세미티 암벽에서 벤투라 작업실로 이어진 파트너십은 처음에는 매끄러웠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디자인은 등반만큼 재밌었어요. 쉬나드는 아이디어 뱅크였고, 나는 엔지니어였죠.”
지구상에서 가장 외딴곳으로의 원정1968년, 톰킨스는 쉬나드에게 피츠로이산 사진을 보여 주며 함께 오르자고 고집을 부렸다. 피츠로이산은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로스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에 있는 해발 3,375m의 화강암 봉우리였다. 다섯 명의 남자들은 밴 지붕에 서핑보드를 매달고 파타고니아 원정에 나섰다. 넉 달의 여정 끝에 도착한 그들은 눈을 파서 만든 구덩이에서 31일을 버텼다. 쉬나드는 그곳에서 맞은 서른 번째 생일을 인생 최악의 순간으로 기억한다.
장비는 문제 없었지만 옷은 엉망이었다. 재킷은 방수가 안 되고 양말은 마르지 않았다. 그 순간 쉬나드는 비바람을 견딜 옷을 위한 시장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톰킨스도 의류 시장이 피톤 시장에 비할 수 없이 크다며 힘을 실었다. 피톤은 한 번 사면 10년을 쓰지만, 셔츠는 1년만 입어도 새것을 찾기 마련이다. 그 생각이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또한 사업으로 세상을 바꾸려면 통제권을 쥐고 있어야 한다고, 돈을 벌더라도 반드시 세상에 이로운 방향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1968년 12월 20일, 다섯 남자는 역대 세 번째로 피츠로이산 정상에 섰다.
우리가 만든 장비가 암벽을 망가뜨린다면1970년 쉬나드 이큅먼트는 시장의 80퍼센트를 점유한 미국 최대 등반 장비 업체가 됐다. 그런데 재사용 피톤이 문제였다. 수많은 등반가가 그의 피톤으로 암벽을 깎아 내면서 수만 년을 버텨 온 지형이 몇 년 만에 망가져 갔다. “암벽 등반이 무해한 스포츠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바위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쉬나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피톤 생산 중단을 결정했다. “부모님은 어지른 사람이 직접 치워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대신 그는 바위 틈새에 끼웠다 회수할 수 있는 ‘촉’을 개발해 헥센트릭, 스토퍼 등 방대한 제품군을 선보였고, 이 새로운 가치관에 ‘클린 클라이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72년 첫 카탈로그에는 쉬나드·프로스트의 서문이 실렸다. “산은 유한하며, 거대해 보이지만 취약하다”, “개인적 성공의 척도는 정상 정복이 아니라 등반의 방식이다. 등반가가 도구를 적게 사용할수록 자연과의 교감이 커진다.” 이는 때로 고객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철학을 지키겠다는, 자연의 선한 관리자가 되겠다는 선언문이었다. 클린 클라이밍은 빠르게 받아들여졌고, 촉 수요가 쏟아지며 회사는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route 3. 대장장이에서 사업가로 (1970~1979년)
그들만의 사업 방식요세미티 캠프 4에서 쉬나드는 훗날 자신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사람을 만났다. 한 여성이 창밖으로 빈 맥주 캔을 던진 남성을 쫓아가 캔을 주우라고 소리쳤고, 남성이 손가락 욕설로 응수하자 그녀는 격분해 맨손으로 번호판을 뜯어내 공원 관리인에게 넘겼다. 그 모습에 매료된 쉬나드가 인사를 건넸고, 여성은 엘런 말린다 펜노이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가족과 수년간 요세미티를 찾으며 쉬나드처럼 자연을 사랑하게 됐다. 두 사람은 1970년에 결혼했고, 말린다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쉬나드 이큅먼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아들 플레처와 딸 클레어가 태어났고, 와이오밍주 무스에 스네이크강과 맞닿은 두 번째 집을 마련했다. 쉬나드는 지금도 이 집에서 오래된 가구와 식기를 쓰며 여전히 50년 전에 산 칼로 생선을 손질한다. “내가 가진 건 거의 다 낡은 것들입니다.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쓰니까.” 진입로의 낡은 토요타 범퍼에는 ‘모든 억만장자는 정책 실패의 결과물이다’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고, 이 집은 현관문을 잠그는 법이 없다.
그즈음 쉬나드는 회사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등반가이자 서퍼이자 대장장이로만 살 수는 없었다. 좋든 싫든 자신이 회사의 리더라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급여를 지급해야 했고, 직원들을 돌봐야 했으며, 주문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세간의 비즈니스 관행을 따르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예를 들어 그는 직원이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맬 필요가 없으며, 사무실도 칙칙한 회색 카펫으로 덮거나 칸막이로 나누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직장에서 하루하루 시간이나 대충 때우는 ‘혈색 없는 시체들’을 비웃었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대로 회사를 운영할 작정이었다.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의 시작스코틀랜드 등반 여행 중 쉬나드는 럭비 선수들이 입는 경기용 셔츠를 샀다. 럭비 선수들이 입을 만큼 튼튼하다면 등반용으로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란 바탕에 빨강·노랑 줄무늬가 든 이 셔츠는 칙칙한 무채색뿐이던 당시 아웃도어 의류와 비교하면 놀랍도록 화려했고, 칼라가 어깨에 멘 장비로부터 목을 보호해 줬다. 요세미티에서 그가 입고 다니자 다들 갖고 싶어 했고, 영국에서 수입하기 시작하자 셔츠가 국경을 넘어오는 속도보다 팔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어느 날 양철 헛간에서 박스를 분류하던 쉬나드는 등반 장비를 빼면 모두 남의 물건을 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쉬나드는 파타고니아 피츠로이산의 비좁은 구덩이 속에서 허튼소리로 들렸던 톰킨스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촉이나 카라비너보다 셔츠와 바지를 파는 게 남는 장사라던 그 말이 맞았다. 그는 자기만의 의류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가 출시한 첫 작품은 등반용 숏 팬츠였다. 너무 뻣뻣해 탁자 위에 세워 놓아도 모양이 그대로였던 ‘스탠드업 쇼츠’는 곧 베스트셀러가 됐다. 의류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그는 먼 곳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발음하기 쉬운 이름을 찾았고, 1973년 마침내 ‘파타고니아’를 사명으로 선택했다.
1976년 말린다는 로스앤젤레스 의류 도매 단지에서 괜찮은 원단을 발견했다. 털이 수북한 연하늘색 합성섬유의 정체는 욕실 바닥 매트와 변기 커버용 소재였다. 재봉사 프랭코는 “융털이 따뜻한 공기를 가둬 보온이 되리라는 걸 알았어요. 양모보다 가벼웠고요”라고 말했다. 매끄러운 면을 밖으로 하면 보풀이 일어 지저분해 보이자 쉬나드는 앞뒤를 뒤집기로 했다. “동물은 털이 밖에 나 있다. 이 옷도 그래야 한다.” 향후 수십 년간 패션계에 영향을 미칠 영감이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이 재킷은 투박했지만 산악인들을 추위로부터 확실히 지켜 줬고 곧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어 폴리프로필렌 내복도 불티나게 팔렸고, 파타고니아는 ‘겹쳐 입기’의 장점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파타고니아 매출은 연간 약 25만 달러에서 불과 몇 년 만에 200만 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 하지만 그림자도 있었다. 합성섬유의 도입은 환경을 파괴하는 의류 시대의 막을 여는 데 한몫했다. 오늘날 전 세계 옷의 약 60퍼센트는 화석연료에서 나온 합성 소재로 만들어진다.
괴짜가 만든 괴짜들의 회사1974년, 럭비 셔츠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쉬나드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영국에서 계속 럭비 셔츠를 수입하는 대신, 아시아의 의류 공장과 계약해 직접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공급처를 찾기 위해 쉬나드는 톰킨스에게 도움을 구했다. 톰킨스가 설립한 플레인 제인은 블루밍데일스나 삭스 피프스 애비뉴 같은 백화점에서 화려한 스커트와 상의를 팔아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톰킨스는 홍콩의 한 공장을 추천했고, 쉬나드는 매달 여덟 가지 디자인으로 럭비 셔츠 3,000장을 주문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먼저 품질이 문제였다. 셔츠의 품질은 형편없었고, 원단은 약했으며, 사이즈는 들쑥날쑥했다. 게다가 납품 날짜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쉬나드는 서둘러 계약을 취소했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셔츠가 안 팔리며 돈줄이 마르기 시작했다. 잘못된 결정 하나로 회사 전체가 수렁에 빠지고 있었다.
쉬나드와 말린다는 은행을 찾아다니며 자금 확보에 나섰다. 하지만 지역 은행 대부분은 파타고니아와 거래하기를 꺼렸다. 회사가 너무 무질서해서 신뢰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쉬나드는 결국 지역 은행에서 겨우 대출을 받아 회사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금난은 조직 내 스트레스를 위험 수위까지 끌어올렸다. 자유분방한 말린다와 빈틈없는 엔지니어 톰 프로스트는 처음부터 물과 기름 같았다. 1975년 쉬나드는 프로스트의 지분을 사들였고 회사는 완전히 쉬나드 부부의 소유가 됐다.
프로스트는 떠났고, 쉬나드는 등반에 미쳐 몇 달씩 자리를 비웠다. 파타고니아에는 새로운 리더가 필요했다. 쉬나드도 알고 있었다. 1979년 그는 내부에서 적임자를 찾아 의외의 인물에게 회사를 맡기는 결단을 내렸다. 크리스 맥디비트를 총괄 매니저로 뽑은 것이다. “파타고니아와 쉬나드 이큅먼트를 네가 맡아 줘. 나는 산에 가야 해.”
route 4. 파타고니아 마니아 (1980~1986년)
‘플리스’의 표준을 세우다1906년 헨리 포이어스타인이 세운 말덴밀스는 미군 납품업체로 성장했지만, 아시아 제조업체에 밀려 1980년대 초 파산 위기에 몰렸다. 절박했던 손자 에런의 지시로 원단 전문가들은 폴리에스터를 초극세사로 뽑아 플리스를 만들어 냈다. 파타고니아와 함께 완성도를 끌어올린 결과 양면이 보송보송하고 보풀이 일지 않는 소재가 탄생했고, 친칠라 털 같다 하여 신칠라(Synchilla)라 이름 붙였다. 첫 제품 신칠라 스냅티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제품 중 하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