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윤리경영 리더십
모리야 아쓰시 지음 | 예미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윤리경영 리더십
모리야 아쓰시 지음
예미 / 2025년 3월 / 264쪽 / 19,000원
격동의 인생 전반기 :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생애 ①
시대가 낳은 인물시부사와는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다이쇼, 쇼와까지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시부사와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알에서 태어난 누에가 네 번의 잠을 자고 네 번의 허물을 벗는 과정을 거쳐 고치를 짓고 나방이 되어 다시 알을 낳는 것처럼, 제 처지도 24~25년간 네 번 정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시부사와는 여러 번의 변화를 몸소 겪으며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갔습니다.
시부사와의 인생은 크게 다섯 가지의 시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존왕양이’ 운동을 벌인 시기
2. 도쿠가와 3대 가문 중 하나인 히토쓰바시 집안의 가신을 거쳐 막부의 신하가 된 시기: 아이러니하게도 막부를 타도하자고 외쳤던 시부사와가 막부의 신하가 된 셈입니다.3. 파리만국박람회에 일본 대표단으로 참가한 시기: 이렇게 해서 시부사와는 프랑스를 경험하게 됩니다. 외세를 배척해야 한다고 말했던 시부사와가 유럽에서 큰 영향을 받으며 변화해 나갔습니다.4. 메이지 정부의 관료가 된 시기: 시부사와는 대장성에서 활약했습니다.
5. 기업가와 사회 사업가로 활약한 시기: 시부사와는 총 481여 개의 기업과 약 600개의 공익단체 설립에 관여했습니다. 말 그대로 시부사와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일본 경제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일본 경제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시부사와가 태어난 시기는 도쿠가와 막부가 몰락하기 27년 전인 덴포 11년(1840년)이었습니다. 이 해 중국에서는 아편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시부사와는 지금의 사이타마현 후카야시 지아라이지마에서 태어났습니다. 지아라이지마무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오카베번은 가난한 번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이 시부사와의 사상이 만들어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아버지 이치로에몬과 어머니 에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시부사와의 집안은 농사도 짓고 누에도 기르고 염료도 팔았습니다. 부유한 농민이자 상인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치로에몬은 양자로 들어와 기울어가던 집안을 일으켜 세웠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에게는 형제자매가 많이 있었으나 대부분이 어린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집안의 대를 이을 장남으로 귀하게 자랐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어린이용 한문 입문서인 《몽구》와 《논어》 등을 읽었습니다. 이른바 시작은 ‘논어식’ 학습이었습니다. 공부 머리가 남달랐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일곱 살이 되자 열 살 많은 한학자 사촌형인 오다카 아쓰타다가 운영하는 학원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한문을 익혔습니다.
시부사와는 오다카로부터 《사서오경》, 《좌전》, 《사기》, 《일본외사》, 《일본정기》와 같은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배웠습니다. 오다카의 가르침은 매우 독특했습니다. 딱딱한 학습서를 억지로 읽게 하지 않고 학습자가 읽고 싶은 책을 차근차근 읽어가게 하는 교육법이었습니다.
또한 오다카는 《사서오경》을 읽고 외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사서오경》을 진짜 나의 지식으로 만들어 제대로 활용하려면 장차 사회 경험을 두루두루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시부사와는 이러한 오다카의 독서교육 덕분에 독서에 푹 빠졌습니다.
뛰어난 상인 기질시부사와는 매일 독서를 시작으로 검술 연습을 하고 학문을 익혔습니다. 그러다가 열네 살 때부터는 아버지의 권유로 가업도 도왔습니다. 시부사와의 집안은 사람들로부터 쪽을 사들여 염료로 만든 다음에 도쿄나 관동지방의 염색 가게에 납품하고 나중에 대금을 받는 일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시부사와는 이처럼 일찌감치 ‘주판’에도 재능을 보였습니다.
어느 해에 소년 시부사와는 근처 마을에서 많은 쪽을 사들인 후에 스모 선수들의 랭킹표인 ‘반즈’처럼 쪽을 많이 만들어 판매한 사람들의 순위를 매겼습니다. 시부사와는 쪽을 많이 만들어 판매한 사람들을 따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품질이 좋은 쪽을 만든 사람부터 차례로 상석에 앉게 했습니다. 쪽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의 경쟁심을 부추기면서도 ‘내년에는 정성을 들여 더욱 좋은 쪽을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격려해주는 것이 시부사와의 방식이었습니다. 이처럼 시부사와는 어릴 때부터 장사를 해보고 돈을 직접 만졌습니다. 한 마디로 일찍부터 비즈니스와 회계 감각을 길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관’에게 받은 모욕열일곱 살 때 시부사와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한 사건을 겪게 됩니다. 어느 날 마을 영주가 시부사와의 가족과 친척에게 어용금(부유한 상인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의 일종)을 요구했습니다. 영주는 번의 부족한 재정을 메우려면 ‘어용금’이 필요하다면서 으레 부유한 농민 등에게 돈을 빌리곤 했습니다.
시부사와는 아버지의 대리인 자격으로 대관이 근무하는 곳에 갔고, 그곳에서 와카모리라는 대관으로부터 오백 냥의 어용금을 내라는 영주의 분부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자 시부사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대신 왔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액수만 전해 듣고 돌아가겠습니다. 일단 아버지께 여쭤보고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그러자 대관이 탐탁지 않아 하면서 시부사와를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 집 재산에서 오백 냥은 별로 큰돈도 아닐 텐데. 일단 알아보고 다시 오겠다니, 그런 미적지근한 말 따위는 허락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는 나중에 내가 말을 할 테니까 일단 여기서는 바로 ‘분부 받들겠습니다’라고 해라.”
시부사와는 대관으로부터 계속 모욕적인 말을 들었지만 “일단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여쭤봐야 하오니 여기서는 바로 대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했고 겨우 그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영주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며 시부사와에게 오백 냥을 전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시부사와는 대관에게 받은 모욕을 결코 잊을 수 없었고 마침내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오카베번의 영주는 정해진 세금을 꼬박꼬박 받으면서도 갚지도 않을 돈을 ‘어용금’ 따위의 이름을 붙여 징수한다. 게다가 사람을 무시하며 마치 빌려 간 돈을 내놓으라는 듯이 당당히 명령한다. 도대체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또한 하는 짓으로 봐서 결코 지식인이라 할 수 없는 자가 대관이랍시고 사람들을 무시하다니, 이 모두가 썩을 대로 썩은 도쿠가와 막부 때문이다. 이런 정치 아래에서라면 저 대관 같은 인간에게 나는 계속 무시당하겠지. 정말 싫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시부사와만 이런 생각을 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 재능 있던 하급 무사나 농민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각지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 마침내 낡은 봉건 체제를 무너뜨리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다카사키성 습격 계획시부사와가 성인이 되던 시기에, 일본은 시대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고 있었습니다. 시부사와의 주변도 들썩였습니다. 학문의 스승인 오다카 아쓰타다를 중심으로 동생인 오다가 나가시치로, 그리고 인근의 존왕양이 지사들이 모여 당시의 정세에 대해 격렬하게 토론했던 것입니다.
오다카 아쓰타다가 추구하는 학문은 ‘존왕양이’를 주창하던 미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쓰타다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도 같은 사상으로 뭉쳤습니다. 스물두 살이 된 시부사와는 두 달 정도 에도(도쿄의 옛 이름)에 유학하며 유명한 유학자 ‘가이호 교손’의 문하생이 되었고, 검술 도장 ‘겐부칸’에도 다녔습니다. 그리고 에도에 모여 있던 존왕양이 지사들과도 계속 교류했습니다. 젊은 혈기의 이들은 마침내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했습니다.
거사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우선, 한밤중에 다카사키성을 기습해 점령해서 무기를 탈취한다. 그 후에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주지를 습격해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외국인들을 도륙한다. 그리고 존왕양이 지사들의 봉기를 재촉해 막부를 타도한다.’
시부사와 일행은 분큐 3년(1863년) 11월 23일을 거사 날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거사를 앞둔 어느 날, 평소 급진파로 통하던 오다카 나가시치로가 거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일을 일으켜봐야 단순한 폭동으로 보일 거야. 결국 모두 개죽음만 당하고 말 거야.”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각오가 되어 있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이제 와서 거사를 멈출 수 없다고 맞섰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오다카 나가시치로는 밤새 설전을 벌였습니다. 결국 시부사와는 오다카 나가시치로의 주장이 맞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거사 중단에 동의했습니다.
시부사와 일행은 거사를 중단했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체포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에, 일단 피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사촌형 시부사와 기사쿠와 함께 이세신궁 참배를 다녀온다는 명목으로 서쪽으로 피신했습니다.
히토쓰바시 집안의 가신이 된 시부사와시부사와 에이이치와 시부사와 기사쿠는 교토로 향했습니다. 교토에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히라오카 엔시로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히토쓰바시 가문의 가신인 히라오카에게 의탁했습니다. ‘조정에 있어야 할 천하의 권력은 막부에 있다. 막부에 있어야 할 권력은 히토쓰바시 집안에 있다. 히토쓰바시 집안에 있어야 할 권력은 히라오카에게 있다’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당시 히라오카는 실세로 통했습니다. 히라오카는 존왕양이 지사들과도 교류할 정도로 도량이 넓은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시부사와 기사쿠가 교토에서 존왕양이 지사들과의 교류하고 있을 때 두 사람에게 고향에서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동지였던 오다카 나가시치로가 체포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다카 나가시치로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칫 다카사키성 습격 계획을 불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시부사와 기사쿠는 섣불리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두 사람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히라오카가 히토쓰바시 집안의 가신이 되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습니다. “히토쓰바시 집안의 가신이 되어보는 것은 어떤가? 히토쓰바시 가문의 요시노부공은 걸출한 군주시다. 비록 막부가 나쁘다고 해도 히토쓰바시 가문은 조금 달라.”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히토쓰바시 집안의 가신이 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히토쓰바시 집안의 가신이 되기로 결심하지만, 그 전에 히라오카에게 특이한 조건을 달았습니다.“군공을 직접 찾아뵙고 한 마디만 말씀드리고 난 후에 군공을 모시고 싶습니다.”
꽤 당돌한 부탁이었으나 히라오카는 허락했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시부사와 기사쿠가 전한 의견은 이러했습니다. “히토쓰바시 가문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막부와는 거리를 두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도쿠가와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이후, 히토쓰바시 요시노부와 시부사와는 평생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군신 관계를 맺습니다. 히토쓰바시 집안의 가신이 된 시부사와는 군비 확충과 산업 장려에서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남다른 제안 능력시부사와는 히토쓰바시 가문의 신하가 된 이후에 존왕양이 지사들을 히토쓰바시 가문으로 스카우트하는 등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부사와의 행적을 눈감아주던 히라오카가 미토번 소속의 무사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시부사와는 히토쓰바시 가문에서 빠르게 출세해 갔습니다.
당시 히토쓰바시 가문의 당주였던 요시노부는 교토 조정의 안전을 책임지는 직위에 봉해졌습니다. 하지만 히토쓰바시 가문에게는 제대로 된 병력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시부사와는 히라오카의 후임인 구로카와 가헤에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군공께서 지위에 걸맞지 않게 군비가 충분하지 않으시다니 문제입니다. 영토 안의 농민들을 모아 보병을 편성하면 2개 대대의 병사 정도는 금세 만들 수 있습니다.”
구로카와와 요시노부도 찬성하며 시부사와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시부사와는 히토쓰바시 가문의 영지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병력을 모았고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400~500명의 병력이 모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부사와는 히토쓰바시 가문의 영지를 다니면서 이런 생각도 품었습니다.
‘히토쓰바시 가문이 지금처럼 항상 막부로부터 많은 자금을 지원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영지는 작지만 경제적으로 잘 활용하면 조금이라도 수입을 늘릴 수 있다. 영지의 사람들도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돕는 방법을 찾고 싶다. 장사 경험으로 쌓은 상인의 기질을 발휘해 보자.’
시부사와가 구로카와에게 한 제안은 곧바로 채택되었으며, 시부사와는 새롭게 담당하게 된 재정과 회계 업무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이처럼 시부사와는 히토쓰바시 가문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주판’ 이론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시부사와는 훗날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의 경제와 금융을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됩니다.
허탈감에 빠진 시부사와그런데 승승장구하던 시부사와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불과 스물한 살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히토쓰바시 요시노부가 후계자로 결정된 것입니다.
원래 시부사와는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민심을 잃고 쇠퇴하는 중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막부는 명목뿐인 존재로 만들고 요시노부가 배후에서 막부를 조종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시부사와가 생각한 해법이었습니다.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면 안팎에서 흔들리고 있는 막부를 지키며 개혁을 해야 하는데, 제아무리 요시노부라고 해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시부사와는 알고 있었습니다. 시부사와는 생전 처음으로 의욕을 잃고 허탈감에 빠졌고, 정 안 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부사와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게이오 3년(1867년) 프랑스는 파리만국박람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일본의 쇼군을 만국박람회에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대신해 동생이자 미토번의 번주였던 도쿠가와 아키타케가 파리만국박람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아키타케의 수행원으로는 당연히 미토번 소속의 무사가 선발되었지만 무사 특유의 완고함이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유연한’ 시부사와에게 수행원 자격으로 파리만국박람회에 참가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던 것입니다. 마침 울적한 상태였던 시부사와는 파리만국박람회의 수행원이 되는 것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파리만국박람회 일본대표단 33명은 1월 11일 프랑스로 향하는 ‘알페’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출발했습니다. 유럽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시부사와는 새로운 것 앞에서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때 시부사와는 양이론을 주장하며 ‘외국은 전부 야만적이고 짐승과 다름없다’라며 경멸했으나 외국에 가기로 결심한 이후로는 마음을 달리 먹기로 했습니다. 이 기회에 빨리 외국어를 익혀 외국도서를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입니다.
시부사와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교토에서 보병 편성을 기획하고 직접 해보니 군사제도, 의학, 선박, 기계 같은 것은 외국에 비하면 일본은 아직 멀었다.’, ‘무엇이든 외국의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싶다.’ 시부사와는 이왕 유럽에 가게 되었으니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흡수해 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그리고 파리에 도착한 시부사와는 상투가 너무 눈에 띈다고 생각했는지 서양식으로 머리를 잘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