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 명저)잭 웰치 끝없는 도전과 용기
잭 웰치 지음 | 청림출판
잭 웰치 끝없는 도전과 용기
잭 웰치 지음
청림출판 / 2001년 10월 / 660쪽 / 15,500원
제1부 꿈을 키우던 시절
어머니가 심어준 자신감그해 아이스하키 시즌의 마지막 게임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우리는 여섯 경기에서 계속 패했는데 그중 다섯 번은 단 한 골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패했다. 라이벌 베벌리 고등학교와의 경기는 2:2의 동점을 기록하며 연장전으로 이어진 막상막하의 숨 막히는 경기였다.
하지만 상대 팀은 이내 득점을 했고 우리는 결국 일곱 번째 패배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실망감 때문에 나는 하키 스틱을 경기장의 얼음판 위에 힘껏 내동댕이치고 라커룸으로 향했다. 라커룸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라커룸의 문이 열리더니 어머니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어머니는 내게 똑바로 다가와서 멱살을 잡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만일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른다면 넌 결코 멋지게 승리하는 방법 또한 알 수가 없을 거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넌 더 이상 경기를 할 자격이 없어.”
나는 친구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한 말을 그 이후로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라커룸 안으로 들어와서 내게 당신의 열정과 에너지, 나에 대한 실망, 그리고 사랑을 남김 없이 표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내게 승리의 기쁨과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자세의 중요함, 그리고 경쟁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었다. 나의 기본적인 경영 신념의 많은 부분들 또한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어머니가 불어넣은 통찰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떠한 상황이든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했다. 또 “자신을 속이지 마라. 그렇다고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학창 시절 초기에 어머니는 내게 성실하게 노력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었다. 어머니는 항상 내가 숙제를 했는지 철저히 검사했고, 지금 나는 어머니가 내게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회사에서 끊임없이 업무를 점검한다. 위층 내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을 때 거실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아직 다 못했니? 숙제를 마칠 때까지는 내려오지 마라!”
아마도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선물은 자신감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추구해 왔고, 또 나와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심어주려 했던 것이다. 자신감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그것은 보다 큰 위험을 감수하게 하여 스스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이상의 성취를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상상조차 못했던 일들에 도전하게 한다. 그것은 각각의 성공에 대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상해 줌으로써 생겨나게 된다.
GE에서의 힘겨운 첫걸음1961년에 연봉이 1,000달러 오르기 전까지 나는 엔지니어로서 GE로부터 1만 5,000달러를 받고 일했다. 1,000달러라는 금액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나를 포함한 4명의 동료들을 위해 책정된 일정 금액을 균등하게 분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나는 그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내가 표준보다 더 많이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상사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논의할 여지도 없는 문제였다. GE의 그런 비합리적인 관행에 좌절한 나는 다른 직장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변화를 거부하는 완고하고 거대한 관료조직 밑에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능력이나 성과 등을 고려하지 않고 미리 금액을 정해 놓는 임금 인상은 내가 GE에 느꼈던 염증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GE에서 보낸 첫해는 악몽이었다. 마음에 든 점도 있었지만 나는 매일 조금씩 더 좌절하고 있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회사의 인색한 행정은 계속되었다. 우리 팀의 네 사람은 비좁은 사무실을 나눠 쓰고, 두 대의 전화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고, 책상 너머로 서로 전화를 건네주느라 수선을 떨어야 했다. 사업차 여행을 할 때 호텔에서 다른 사람들과 방을 같이 쓰라고 요구받기도 했다.
결국 나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돌리려 할 때 당시 젊은 이사였던 루벤 구토프는 나와 아내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구토프는 내가 느끼는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4시간이나 계속된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 그는 GE에서 계속 일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보다 높은 임금 인상을 약속했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회사의 관료주의적인 간섭을 배제시켜 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도 나와 같이 GE의 그릇된 관료주의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고민을 했다. 그리고 결국 GE에 남기로 결심했다. 구토프가 나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사실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이후로 차별화는 나의 기본적인 경영 방식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차별화가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기를 떨어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20승을 거둔 투수와 40번이 넘게 홈런을 친 타자를 어떻게 대우해 주는지 보라. 그러나 선수들의 상대적 기여도는 매우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팀의 일원인 것이다. 게임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자신과 이해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팀원이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2부 웰치식 경영의 시작
마침내 GE의 키를 잡다1981년 4월 1일, 나는 마침내 CEO가 되었다. 그날이 있기까지의 풍부한 직장 경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 외적으로는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고, 나를 아는 사람들도 그 당시의 나를 신념이 강하고 거만하며,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는 강인한 사람으로 묘사했을 정도지만 사실 나는 매우 불안했다.
나는 외향적이고 활달해야 하는 CEO로서의 자질이 많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정부가 전보다 더 많은 기업 활동에 간여하고 있음에도 워싱턴의 그 누구와도 좀처럼 교류가 없었고 언론 매체를 다루는 일에 있어서도 일천했다. 50만 명 이상의 주주들은 잭 웰치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으며, 내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GE가 어떤 회사가 되어야 하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아직 그것을 ‘문화’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바로 문화였다. 나는 GE의 문화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GE는 250억 달러의 매출, 15억 달러의 순이익, 그리고 40만 4,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이었다. 어떤 직원은 GE를 두고 ‘초대형 유조선’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GE가 보다 빠르고, 민첩하며, 수익성 높은 스피드보트가 되기를 원했다. 나는 작은 기업이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옭아매어 사고의 범위를 좁히는 모든 제약을 없애 버리고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한 예로, 연례 행사의 하나로 봄에 가전 사업부의 예비 신제품을 평가하기 위해 루이빌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디자이너와 기술자들로 구성된 팀이 신제품의 모형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들 중에서 과연 몇 개가 대리점의 쇼룸에 전시될 수 있을지는 CEO도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이러한 겉만 번드르르한 행사가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었다. 수동적으로 검토하고 승인하는 불필요한 조직 체계는 사라져야만 했다.
첫 번째 여름 전략회의를 마친 후에 나는 나의 스태프들과 함께 내가 구상하고 있는 기업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GE에 혁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GE의 문화는 명령과 통제가 일반적이었던 시기에 형성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본사 스태프들이 겉으론 서로 친밀하고 아무런 갈등도 없는 척하지만 그 이면엔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피상적인 일체감’ 속에서 살아왔다고 느꼈다. 이 말은 사람들 앞에선 상냥하게 웃지만 뒤에선 다른 사람을 누르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킬 생각만 하는 관료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표현해 준다.
변화가 필요한 것은 본사뿐만이 아니었다. 풀기 어려운 문제는 내 사무실 주변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가전 사업부와 조명기기 사업부를 경영하면서 마주쳤던 관료주의는 GE의 다른 사업부들의 상황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업부가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들의 일에 대한 열성은 점점 더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중요한 것은 기술과 제품 그 자체가 아니라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관리자들이 그들의 지위를 새로운 도전의 기회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조직을 위해 봉사한 대가로 주어지는 경력 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직원들은 GE의 우수한 기계를 주문한 고객을 오히려 행운아라고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1981년 봄에 나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원자로 사업부를 방문했다. 이틀간의 방문 동안 경영진이 매년 신규로 발전소용 원자로 3기를 판매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수립된 장밋빛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현실은 신규 주문이 2년 동안 없었고 1981년에 원자로 부문에서만 손실이 2,700만 달러였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한 후 입을 열었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미국 내에서는 더 이상 원자로의 신규 주문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규 주문보다는 설치된 시설에 연료와 부가 서비스를 판매하여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입니다.”
그들은 반발했다. 하지만 결국 내가 말한 대로 사업이 진행되었고, 우리는 1983년엔 1억 1,600만 달러로 수익을 급증시켰다. 나는 조직 내부의 현실 파악의 필요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CEO로서 처음 몇 년간 원자로 사업부의 성공담을 되풀이하여 얘기하곤 했다. 조직 계층에 상관없이 나는 현실 인식의 중요성을 부르짖었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GE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원자로 사업부의 성공담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업부의 성공담을 인용하는 방법으로 기업 내의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본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초일류를 향한 비전GE의 회장으로서 월스트리트의 애널리스트들 앞에서 했던 첫 번째 연설의 핵심 메시지는 미래의 승리자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진정한 성장 산업을 찾아내고 그 산업에 뛰어들어 1등이나 2등이 되는 기업, 즉 1등이나 2등 수준의 군살 없는 조직 구조에서 가장 낮은 원가로 고품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세계 시장에 공급하는 기업만이 미래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하드웨어’의 혁명에 관한 메시지였다. 그리고 내가 현실 추구, 초인류의 추구, 인간적인 요소와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주제들로 화제를 돌리자 청중들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장 시장에서 반드시 1등이나 2등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하드웨어적인 비전과 새로운 기업 문화를 창조해 내기 위한 무형의 소프트웨어적인 가치들을 결합시켜야 했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청중들의 심드렁한 눈빛에도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연설을 계속해 나갔다.
1등이나 2등이라는 비전은 드러커가 했던 다음의 두 가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서 도출되었다. “만약 어떤 사업에 아직 진출하지 않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 사업에 진출하겠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노’라면 “이제 그 사업을 어떻게 하겠는가?”
단순한 질문들은 그것이 단순한 만큼 심오하기도 하다. 드러커의 질문은 GE에서 제기되어야 할 바로 그런 질문이었다. 당시 GE에는 여러 종류의 사업이 있었다. 그리고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사업이라면 그것만으로 존속 이유가 충분했다. 1등이나 2등 전략은 사실상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1등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는 사업부에서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업부의 직원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들은 재빨리 변화를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1등이나 2등 전략을 강조했다.
물론 다른 비전들과 마찬가지로 1등이나 2등 전략 역시 한계를 갖고 있었다. 선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경쟁 우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상용품 사업과 같은 의미없는 사업도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GE의 42개 사업 단위 전체에 비전을 전달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소비해야 했는데 어느 날 문득 그 문제의 해답을 발견했다. 세 개의 원을 그린 다음 핵심 제조, 기술, 서비스라고 각각 써넣은 후 원 밖에 있는 사업부, 즉 최저 성과밖에 올리지 못하거나,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어 성장 가능성이 낮아졌거나, 아니면 단지 전략적 적합성이 떨어지는 사업부들을 구분하고, 그 사업부들을 ‘고치거나 매각하거나 아니면 폐쇄’하라는 조치를 취했다.
반발은 컸다. 특히 소형 가전 사업부의 매각은 GE의 내부에 완전히 기름통을 들이붓는 격이었다. GE의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전 사업부 직원들은 강한 불만을 터뜨리며 당혹스러워했다. 당시에 이메일이 있었다면 아마도 회사 서버가 불만 이메일로 다운되었을 것이다.
벽 없는 조직 만들기내가 시행한 워크아웃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워크아웃을 통해 조직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던 관료주의의 잔재를 제거하고 있었다. 아이디어들이 회사 전체에 걸쳐 빠르게 확산되었다. 나는 조직 전체에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것, 즉 모든 사람이 더 많은 아이디어들을 공유하는 것을 한 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했고, 어느 순간 “벽 없는”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불쑥 떠올랐다. 그 한마디는 GE에 대한 내 모든 비전을 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벽 없는 조직이란 기능들 - 엔지니어링, 생산, 마케팅 등의 기능들 - 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어떠한 장애물도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었다. 또한 국내 영업이니 해외 영업이니 하는 구분이 무의미하고, 따라서 부다페스트나 서울에서도 편안하게 일할 수 있는, 지역 간의 벽이 전혀 존재하지 조직을 의미했다. 벽 없는 조직은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외적인 벽을 허물어버려야 하며, 비교적 눈에 잘 띄지 않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벽도 과감히 제거해야 한다. 또한 벽 없는 조직은 개인적인 성취보다는 팀의 성과를 더 중요시한다.
나는 1992년 보카 회의에서 ‘벽 없는 행동’을 포함한 GE의 모든 가치들을 더욱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다. 참석한 500명의 경영자들에게 나는 지난해에 4명의 경영자들이 높은 재무 성과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회사를 떠나야만 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5명의 경영자가 보이지 않을 겁니다. 1명은 성과를 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GE를 떠났습니다. 4명은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치들을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떠나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가치 공유에 이처럼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회의장 안은 너무나 조용해서 핀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모든 사업부가 아이디어의 실험실이 되기를 바란다면 그러한 개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큰 보상을 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전의 보상 체계는 오히려 그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1982년 9월 이사회에서 우리의 보상 체계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1989년에 스톡옵션 부여 대상 범위를 확대해 3,000명의 우수한 인재들에게 스톡옵션을 지급했다. 오늘날에는 매년 1만 5,000명의 직원들이 그것을 받는다. 주식 시장의 호황과 더불어 스톡옵션의 확대는 모든 사람들이 벽을 없애고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