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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우의 작은 신화, 하순섭

하순섭 지음 | 예미


팔라우의 작은 신화, 하순섭

하순섭 지음

예미 / 2024년 5월 / 264쪽 / 18,000원





기꺼이 실패하라 - 오대양 육대주에서 담금질한 집념



오대양 육대주에서 담금질한 집념


월남의 전선에서 귀국한 나는 고려원양에 입사했고, 1969년 1월 부산을 출항한 ‘광명63호’는 일엽편주로 인도양을 가르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첫 직장생활을 바다에서 시작했다. 국립수산대학교 한 해 선배인 배정대 선장 밑에서 광명63호의 일등 항해사로 인생의 첫 출발을 한 것이었다. 나는 인도양 해역으로 참치 조업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조업 해역은 인도양 모리셔스 인근 해역이었다. 그렇게 부산에서 출항한 지 꼭 140여 일 만에 우리는 만선을 이뤘다. 그리고 본사 지시에 따라 마다가스카르 동남부에 자리한 파라파가나항구에 입항을 했고, 입항 수속을 하고 어획물을 운반선으로 넘겼다.

이후 본사 지시에 따라 다시 남미 어장으로 이동했고, 긴 항해 끝에 아르헨티나 연안에 도착했다. 곧바로 조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며칠 작업해 보니 어황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브라질 해역으로 접근했고, 며칠 동안의 시험 조업으로 좋은 어장을 발견했다. 알바코가 많이 올라왔다. 알바코 덕분에 인도양에서보다 두 배의 어획고를 올릴 수 있었고, 두 달여 만에 만선을 이뤘다. 그리고 마침내 귀국 비행 코스가 정해졌다. 라스팔마스~마드리드~파리~알래스카~도쿄~서울로 이어지는 여정이었다.

가다랑어 채낚기 ‘신어법 개척’ 챔피언 선장


당시 한국의 원양어업은 달러벌이의 첨병이었다. 그래서 원양어업 육성을 위해 정부는 차관으로 원양어선들을 사들였고, 배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나는 서둘러 선장으로 진급하는 것보다, 새로운 조업 기술을 배우는 자리를 선택했다. 당시 학창 시절 은사인 조경제 교수가 한일합작회사인 태행수산이라는 회사를 세웠고, 나는 태행수산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가다랑어 개척선 첫 선장으로 내가 낙점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선장의 소임이었다. 소형 선박인 ‘팔테라 31호’가 내가 선장으로서 몰게 된 첫 배였다. 이 배에는 일본인 어로기술자 5명도 합류했고, 40여 일의 항해 끝에 가나 테마항에 도착했다. 참고로 당시는 가다랑어 채낚기 어업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때였는데, 니치로 선단에서 수년 동안 개척한 테마 어장에 한국 배가 출어에 나서자 모두가 어이없어했다. 조업선형 자체가 이곳 어장환경과는 맞지 않은 배로, 모두들 코웃음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출어하기 전 미끼로 사용할 생멸치를 잡는 건착망 어로마저 초보였다. 장비 미비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흘 만에 겨우 어창에 멸치를 채웠고, 부랴부랴 조업에 나섰다. 애를 썼지만 하루에 10~20톤씩 조업실적을 올리는 일본 배들에 비해 한 달에 10톤가량 어획에 그쳐야 했다. 특별한 대안도 없이 몇 개월이 후딱 지나갔다. 시원찮은 조업에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쳤다. 함께 승선했던 5명의 일본인 어로기술자들도 서로 의견이 갈렸다. 나는 고심 끝에 새로운 방법을 제안했다. 어군에 배를 들이댈 때 진행각도를 45도로 급하게 꺾은 뒤 속도를 확 줄여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어로장인 고지마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하지만 결국 내가 생각한 대로 시도해서 배를 어군이 있는 쪽으로 접근하며 방향타를 45도로 꺾으면서 멸치를 뿌렸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고기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미늘이 없는 가짜 미끼를 매단 낚싯줄을 던졌다가 위로 날쌔게 채어 올리는 작업을 반복했다. 불과 15분 만에 700kg 가까운 어획을 올렸다. 재차 배를 돌려 낚으니 또 어림잡아 300kg가량이 더 올라왔다. ‘고기를 못 잡아도 좋으니 어로장 지시를 따르라’했던 회사 지침이 무색한 상황이 벌어졌고, 고지마 어로장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후 어로장이 다음 항차부터 키를 나에게 맡겼다. 그 후 8일 만에 100톤이나 되는 고기를 잡았는데, 이는 우리나라 채낚기 어업의 본궤도 진출에 한 획을 그은 일이었다. 본사와 일본에서 축전이 날아왔고, 주위에서 나를 ‘챔피언 선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가나, 사모아를 거쳐 팔라우에서 실패로 끝난 초장기 수산업


성공적으로 선장 데뷔 조업을 마치고 귀국한 지 2개월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1975년 3월, 나는 내 선장 이력을 아는 모 업체와 연이 닿아 일본에서 200톤급 가다랑어 채낚기 배를 인수하기 위해 대윤수산이란 회사를 설립했고, 일본의 무라카미 조선소에서 중고선을 완전히 수리해 한국으로 들여왔다. 그리고 그해 7월, 선주 겸 선장으로 팔라우로 출항했다. 팔라우와 첫 인연을 맺는 여정이었다.

하지만 출발부터 산 넘어 산이었다. 어느 것 하나 정리된 게 없는 맨땅에 헤딩하기 식이었다. 팔라우 어장에는 40~60톤 목선이 적합했는데, 우리 배는 어장환경에 비해 너무 컸다. 또 팔라우는 수심이 얕아 큰 배로는 해변 산호초 속에서 미끼인 활어 멸치를 잡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어장 조건들을 몰랐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사업 확장을 염두에 두고 선원을 너무 많이 뽑은 것도 문제였다. 배를 늘릴 것을 대비해 미리 훈련시킬 목적으로 적정 인원의 두 배나 데려온 것이었다. 결국 운항경비와 급여 등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벌어졌고,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상황으로 내몰렸다.

결국 1976년 3월, 운영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깨가 축 늘어져 다시 팔라우를 찾은 나를 본 선원들이 험악해졌다. 나를 밧줄로 묶어 바다로 매달았고, 바닷물 속에 몇 번을 담갔다 올렸다 반복했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보다는 자존심이 상했다. 가까스로 선원들을 달래고 배를 한국으로 회항시켰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선원들이 여기저기 민원을 제출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혼 생활비마저도 한 방에 날려버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팔라우의 멋들어진 풍광이 매일 떠올랐다. 팔라우와는 전생에서부터 질긴 연분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이후 1976년 10월, 수산개발공사에 말단으로 입사했는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입사해서 아프리카 가나의 가다랑어 채낚기 사업을 기획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1977년 4월, 사모아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고, 60여 척 선박의 뒤치다꺼리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생전 해보지 않은 회계와 경리 업무도 처리해야 했는데, 후일 내 사업을 시작하는 데 큰 밑천이 되었다.

한편 주재원으로 일하면서도 수산업을 다시 시작할 궁리를 했고, 월급 550달러를 착실하게 저축했다. 그런데 1978년 말, 미국 통조림회사인 인터내셔널 밴 캠프 시푸드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주저 없이 회사를 옮겼다. 그 회사에서 아프리카 가나 지점으로 발령이 났고, 개척선장으로 땀을 흘렸던 가나 테마항에서 어획물 수매사업을 병행하는 선단관리자의 임무가 맡겨졌다. 그런데 근무를 시작하자마자 세계 참치조업규제위원회가 황다랑어와 눈다랑어는 3.2kg 크기 이상만을 잡도록 하는 규제를 발표했다. 모든 조업선에 비상이 걸리고 통조림 원료공급에 치명적인 차질이 발생했다. 본사 임원들이 가나로 달려왔다.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강구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모두들 선장 경험이 있는 나만 바라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상황에 대한 내 의견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내가 제시한 아이디어는 어획물을 옮기는 과정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기존에는 어선으로 잡은 고기를 항구의 냉동창고에 입고한 다음에 고기를 수매회사의 운반선으로 옮기는 방식이었다. 나는 냉동창고 입고 절차를 줄이는 방식을 제안했다. 어선을 바다 위에서 운반선에 곧바로 대고 어획물을 옮겨 싣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항구 냉동창고에 입고시켰다가 다시 출고하는 과정에서 흑인들 손을 타는 일도 없어지고, 냉동창고의 정전사고로 인한 피해도 줄일 수 있었다. 결국 내 제안대로 일이 진척되었다. 푸에르토리코 통조림 공장에서 하역해 보니 애초 어선 어획고가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이전엔 하역량이 어획고보다 30%나 줄어든 상태가 다반사였다. 두둑한 포상이 나왔고, 6개월마다 2주씩 휴가를 받았다.

휴가에서 돌아와 다시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어로 규제로 인한 적자가 쌓여 갔기 때문이다. 미국 본사는 가나 사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팔라우 지사로 발령이 났다. 다시 팔라우와 운명의 끈이 이어진 것이었다. 팔라우 지사에서도 선박과 선원 관리 임무가 주어졌다. 거기에 더해 통조림 공장에 보내는 선어의 냉동실 저장 관리까지 맡아야 했다. 활기차게 일했지만 곧바로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예상치도 못했던 어획 부진이었다. 통조림 회사가 원료인 고기를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본사 구조조정 팀이 다녀갔다. 결국 팔라우 공장이 매각되었다. 앞이 캄캄했다.

팔라우에 온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한국으로 가버릴까, 팔라우에서 버텨볼까, 갈팡질팡했다. 아내는 한국으로 가자고 했지만 나는 버텨보자며 고집을 피웠다. 수중에는 2만 달러가 전부였다. 그런데 회사가 매각되면 근로자 신분도 사라져 팔라우 체류 자격이 없어진다. 답답한 마음에 평소 친분이 있던 한국인 2세 노블 킹을 찾아갔다. 그에게 설명하고 체류 방안을 상의했다. 그가 일단 자신의 회사 킹스 엔터프라이즈에 총지배인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방안을 강구해 보자 했다. 1982년 10월경이었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탁월함에 이르는 열쇠 - 내 사전에 포기는 없다



무늬만 총지배인, 식당이라도 해야 하나?


팔라우에서 만난 사람 중에 재일동포 권부식 회장이라는 분이 있었다. 권 회장은 팔라우에서 모래를 채취해 콘크리트를 생산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고, 나중엔 호텔도 짓겠다는 구상까지 비치기도 했다. 반면 팔라우 체류를 위해 총지배인이라는 명의만 걸친 내 처지가 처량했다. 사정이 사정이라 권 회장을 찾아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불쑥 팔라우에 한국식당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식당이라도 해야 하나?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불안에 밤잠을 설쳤다.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팔라우에는 한국음식점이 없으니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라며 눈치를 살폈다. 아내가 조금 마음이 동하는 눈치였다.

팔라우에서 아리랑식당을 열다 / 나의 반쪽, 여장부


우여곡절 끝에 1983년 8월 16일, 드디어 아리랑식당이 문을 열었다. 아리랑식당은 노블 킹의 명의로 열었는데, 나는 외국인 신분이어서 사업자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니 팔라우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인물들이 개업식에 참석했다. 정부 고위 공무원과 국회의원, 주지사, 추장들이 대거 몰려왔다. 하지만 이후 개업하고 6개월 동안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단 한 사람의 고객을 위해서라도 밤 12시까지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팔라우에 퍼시픽 리조트 호텔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면서, 불고기를 좋아하는 일본인 기술자들이 우리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식당이 자연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내는 한국인 주방장과 필리핀 종업원들을 지휘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다음은 아리랑식당을 개업하고 거의 2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국회의사당 인근에 고급 현지인 식당이 들어섰는데, 음식 솜씨가 미흡했던지 손님들이 찾지 않았고, 건물 주인이 찾아와 식당 인수를 권했다. 마침 팔라우에 아시아나와 대한항공 운항으로 하늘길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 분위기에 인수 계약을 한 뒤 ‘한국관’이라는 대형 식당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엔 운이 따르지 않았다. 얼마 후 괌에서 발생한 KAL기 추락 사고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시설이 더 나은 한국관을 택하고 아리랑은 접기로 했다. 다행히 큰 공사가 하나 또 시작됐다. 1999년 말경 대우건설이 팔라우의 각 주를 연결하는 도로공사를 낙찰 받았던 것이다.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한편 뒤에 설명할 한파그룹의 운영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나는 목 좋은 곳에 약 300평, 1,000평, 700평의 대지를 임차했는데, 그중 700평 자리에 1996년에는 지하 1층과 지상 2층 건물을 먼저 건축하여 한국과 팔라우의 이름 첫 자를 딴 ‘한파빌딩’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후 한파빌딩을 발판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지하 1층은 창고로, 1층은 중고차 판매장의 사무실과 건자재 창고로 사용했다. 2층은 회사 사무실로 사용했다. 그리고 2000년 들어 지하층은 냉동과 냉장창고로 개조하여 1층에는 한국 식자재와 미국산 냉동물과 잡화를 취급하는 한파마트를 열었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아내가 매니저를 겸했다. 나는 건설과 석자재, 건자재를 운영했다. 아무튼 사업의 확장은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내는 팔라우 한인교회에서도 헌신하고, 한인회 한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2만 달러로 태동한 한파그룹


식당을 운영한 지도 2년 가까이 돼 가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식당은 현지인의 명의를 빌어 사업을 하는 이른바 ‘팔라언 프런트 비즈니스’였다. 그때 나는 한국계 현지인 노블 킹의 명의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그동안 살림을 아껴 모은 돈 2만 달러를 밑천삼아 합법적으로 사업을 하는 방안을 찾기로 했고, 마침내 회사설립 허가를 받았다. 이는 4개월 동안 매달려 얻어낸 결실이었다. 주식은 내가 60%, 아내 30%, 노블 킹 5%, 노블 킹의 부인 5%로 배당했다. 노블 킹 부부에게 준 주식 10%는 공짜였는데, 그동안 도와준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제 투자 승인을 받을 차례였다. 첫 사업 품목으로 현재 운영하는 식당과 농업을 신청했다. 그런데 1984년 12월 30일 식당 허가만 승인이 났다. 반쪽의 성과였지만 새로운 출발이었다. 1985년 대망의 새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한국인 하순섭 이름으로 사업 허가를 얻다 / 팔라우 역사상 외국인 최초로 도소매업 허가를 받다
농장 일은 순탄치 않았다. 그런데 1985년 10월 5일, 금요일로 기억한다. 오전 11시경, 아직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있던 오이토롱 부통령이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그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오이토롱 부통령이 전화기를 들어 미국인 검찰총장 러셀과 한동안 통화를 했다. 통화를 끝낸 부통령이 투자 허가 승인서에 서명을 했다. 장장 10개월 5일이나 걸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한파산업개발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1986년 1월 1일, 이날은 나와 아내에게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특별한 날이다. 팔라우 현지인이 아닌 한국인 하순섭 이름으로 사업허가를 얻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식당을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몇 달 후 유통업 도소매와 건축자재, 자동차, 기타 판매 허가까지 취득했다. 1988년에는 한파 종합건설 면허를 취득했다. 건축 설계와 중장비 대여, 콘크리트 제조, 중장비 수리, 산호 채취, 골재 생산, 석산 개발, 자동차 정비공장 등의 분야로 한 발 한 발 사업 영역을 넓혀 나갔다.

참고로 팔라우는 ‘신들의 정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다. 그래서 앞으로 관광사업의 전망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고, 팔라우 관광 붐을 대비한 리조트 부동산회사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1992년, 골든 퍼시픽 벤처를 설립했다. 아파트와 호텔, 콘도, 상가를 망라한 부동산 매매 허가를 취득하기 위함이었다. 교통과 경관이 좋은 땅들을 확보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도소매 허가도 받았다. 팔라우 역사상 마트와 건재상과 같은 유통업을 할 수 있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외국인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팔라우에서는 지금까지도 다른 외국인에게는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건설회사 설립, 블록과 콘크리트 생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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