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 이야기
홍익희 지음 | 오픈하우스
로스차일드 이야기
홍익희 지음
오픈하우스 / 2021년 7월 / 272쪽 / 17,800원
자본주의는 어떻게 탄생되었나?
자본주의를 잉태한 청어 이야기중세 유럽에서 말린 청어와 말린 대구는 요긴한 양식이자 화폐 역할을 했다. 생선의 크기와 모양을 가급적 똑같이 만들어 말린 후, 곡식 등 온갖 물건으로 교환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도 네덜란드를 부강하게 만든 청어 이야기는 흥미롭다. 우리가 겨울철에 먹는 과메기는 원래 청어로 만든다. 청어는 기름지고 맛이 좋아 말리면 독특한 풍미가 살아난다. 유럽에서도 청어는 인기가 좋았는데, 말린 청어보다는 신선도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소금에 절인 절임 청어가 더 맛있어서 인기가 높았다.
5세기 들어, 해류가 변하면서 발트해에서 잡히던 청어가 네덜란드 앞바다 북해로 몰려들었다. 이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너도나도 청어 잡이에 나서서 매년 여름 약 1만 톤의 청어를 잡았다. 그런데 네덜란드 사람들이 청어 잡이에 목을 맨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네덜란드는 국토 대부분이 저지대로 바다보다 낮은 늪지일 뿐 아니라, 소금기가 많아 목축업은 물론 농사도 어려워 먹을 것이 귀했다. 오죽하면 함께 모여 식사를 해도 자신이 먹은 양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더치페이’가 발달했겠는가.
너무 빨리 상하는 청어, 해결책은?: 이렇게 중요한 청어 잡이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청어가 맛은 좋지만 빨리 상했기 때문인데, 어부들은 생선이 상할까 봐 조업 중에도 급히 회항하곤 했다. 그런데 배를 먼 곳까지 끌고 갔다가도 회항을 자주 하다 보니 힘만 많이 들었다. 참고로 선상에서 청어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는 소금에 절여야 했는데 옛날부터 소금은 비쌌다. 이때 네덜란드 사람들이 선상에서 임시방편으로 소금 대신 함수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함수는 바닷물을 끓여서 85% 정도의 수분을 날린 고염도 소금물인데, 1358년에 ‘빌럼 벤켈소어’라는 한 네덜란드 어민이 이 함수를 이용한 선상 염장법을 고안해 냈다. 그는 작은 칼을 개발해 생선을 잡은 즉시 단번에 배를 갈라 이리를 제외한 내장과 가시를 제거하고 대가리를 잘라낸 다음 함수에 절여 배에 보관했다.
이 방법으로 네덜란드 어선들은 느긋하게 조업하면서 선상에서 생선을 오랜 기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네덜란드는 청어 산업에서 경쟁국들을 밀어내고 성공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작은 칼 한 자루와 함수가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참고로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 5세가 빌럼의 공을 기려 그의 동상을 세웠을 정도로 이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유대인, 천일염 수입으로 절임: 육지로 옮겨진 청어는 소금에 한 번 더 절여졌다. 그 무렵 소금값이 무척 비쌌지만 소금에 절여야 보관 기간을 1년 이상으로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절임 청어 원가의 대부분을 청어가 아니라 소금이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소금은 대부분 독일이나 폴란드 암염을 ‘한자동맹’ 무역망을 통해 공급받았다. 한자동맹이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중세 독일 북부 연안과 발트해 연안 도시 90여 개가 힘을 합쳐 결성한 상업동맹이자 자체적인 해군을 보유한 무역공동체를 일컫는 말인데, 이 상인 집단은 14세기 덴마크와의 10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세력을 공고히 하였다. 이 같은 환경에서 스페인에서 추방당해 네덜란드로 건너온 유대인은 절임 청어에 쓰이는 소금에 주목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이베리아반도 북부 바스크 지역의 바스크인들이 값싸고 질 좋은 천일염을 생산해 절임 대구를 만들던 것을 기억해 내어, 바스크 천일염을 수입해 독일산 암염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유대인은 소금의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암염에 비해 낮추어 소금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이는 네덜란드를 소금 중계무역 중심지로 만들어준 중요한 시초였다.
유대인의 시대가 열리다: 16세기 근대의 여명이 밝아오자 스페인에서 추방당해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있는 북해 ‘저지대’로 몰려든 유대인을 주축으로 ‘중상주의’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 저지대는 현재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을 말하는데, 해발고도가 바다보다 낮아 붙은 이름이다. 이 지역은 오랜 기간 부르고뉴 공국이 다스렸는데 1477년 부르고뉴 공 샤를의 딸 마리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으로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 이후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가 상속받았고, 카를 5세가 1516년에 스페인 국왕에, 1519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땅이 된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비교적 종교의 자유가 있어 유대인이 박해를 피해 몰려들었다.
중상주의란 상업을 중시하는 정책이다. 즉 한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무역을 통해 국부를 늘려야 한다는 사상이다. 당시 정부는 중금주의라고 할 만큼 화폐를 중시했고 이를 늘리기 위해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했다. 또 값싼 원료의 확보와 수출 확대를 위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도 정부의 중요한 몫이었다. 한마디로 중상주의는 국부를 증대하기 위한 정부의 전방위적인 강력한 계획과 간섭이었다. 네덜란드는 이 같은 중상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무역을 우선적으로 존중했다. 중상주의보다 자본주의 원칙에 더 충실했던 것이다. 이로써 장사의 귀재인 유대인의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
유대인, 앤트워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가다: 16세기 중엽부터 유대인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앤트워프나 브루게보다 스페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다. 이는 종교적 관용을 베푼 네덜란드의 유대인 수용정책 덕분이었다. 네덜란드는 유대인이 그리스도교하고 결혼하거나 국교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오히려 유대인이 원하는 바였다.
유대인들과 개신교도들이 몰려오자 저지대 북부 7개 주 연합인 네덜란드 지역은 스페인령 플랑드르 지역에 비해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1600년대 들어 네덜란드 지역 인구는 150만 명으로 스페인령 플랑드르 인구 160만 명과 얼추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그 무렵 특히 유대인들이 많이 몰려든 암스테르담은 인구가 7만 명으로 늘어나 앤트워프를 제치고 저지대 전체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자본주의 싹들이 피어나다: 그 무렵 네덜란드 선주들은 동양의 향신료를 수입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여 원양항해에 나섰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이 문제였다. 게다가 스페인, 영국 등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와 의회가 나서서 회사의 합병을 유도했고, 그 결과 통합되어 1602년에 탄생한 것이 ‘동인도회사’다.
참고로 이때의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는데, 이는 어느 한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대인은 그들이 처음으로 정착해 비즈니스를 시작했던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한 바 있는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냈다. 그리하여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당시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각자의 소액투자로 충당했는데, 약 645만 길더, 즉 금 64톤이 모였다. 엄청난 양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동인도회사의 주식 발행 이후, 여러 무역회사의 주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대형 수송선과 무역선을 건조하기 위한 주식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러한 해운업과 무역업의 발전으로 네덜란드는 물류산업 중심지가 되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중계무역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또 무역업의 발전은 이를 지원하는 금융업과 보험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싹들이 네덜란드에서 피어났다.
그런데 네덜란드가 세계 물류의 중심이자 중계무역 기지가 되다 보니 유통되는 화폐의 종류만 수백 가지가 넘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구나 네덜란드에는 지역 정부가 운영하는 14개의 정부 주조소와 40여 개의 민간 주조소가 경쟁하면서 주조 차익을 늘리기 위한 주화 변조 행태가 만연했다. 남부 네덜란드에서 은 함량이 낮은 주화 ‘파타곤’이 다량 유입되면서 시장에 악화만 남고 양화가 사라졌다. 더구나 은 함량이 높은 주화를 녹여 은 함량이 낮은 주화로 재주조하는 행태도 빈발했다. 게다가 금화의 주변을 살짝 깎아내는 ‘클리핑(clipping)’과 금화를 가죽부대에 넣고 마구 비벼 가루를 얻으려는 편법적인 시도가 기승을 부렸다. 그러다 보니 온전한 금화는 시중에서 자취를 감추고 훼손되어 가치가 떨어진 악화만이 유통되면서 시중 유동성이 말라갔다. 이를 개선할 획기적인 방안이 필요했다.
그렇게 원활한 상거래를 촉진하고 상인들이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지급결제 수단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606년 5월 10일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시의회에 원활한 화폐의 사용을 위한 은행의 설립을 청원했다. 그 결과 1609년에 화폐 통일을 목적으로 근대적 의미의 중앙은행 모태 격인 ‘암스테르담 은행’이 탄생했는데, 이는 국가가 설립한 중앙은행이 아니라, 상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암스테르담 시의회가 지원해 만든 기구였다. 참고로 시의회가 은행 거래에 대한 보증을 했을 뿐만 아니라 지급결제 독점권 부여 등 여러 가지 규정을 제정해 은행의 영업을 대폭 도왔다. 그리고 1613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등 여러 무역회사의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증권거래소’가 암스테르담에 세워졌다.
이후 암스테르담 은행은 신용대출을 선보였고, 채권시장이 활성화되어 시중금리가 2~3%?대로 낮아져 대규모 자본이 소요되는 세계무역망 구축과 해외 투자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과 자본주의 중심국으로 우뚝 서게 된다. 결과적으로 청어가 조선업과 해운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중상주의를 활짝 꽃피워 자본주의의 씨앗들을 탄생시켰다.
영원한 금융 황제, 로스차일드산업혁명이 세계로 전파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저금리의 금융 산업 발전과 해상무역의 발달인데, 그 중심에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 이야기의 사실상 클라이맥스는 로스차일드가에서 시작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산업혁명이 불길처럼 번지고 금융업이 전에 없이 번성하던 시대에 탄생해, 성장하고, 시대를 주도했다. 이 가문은 ‘국제금융의 설립자’로 불리는데, 19세기 당시 ‘지역 대부업’ 수준이었던 금융업을 온갖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글로벌 금융 산업’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게토 출신의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1744~1812)가 본격적으로 국제 금융업에 뛰어든 것은 18세기 말이다. 당시 독일은 독립 주권을 가진 235개의 공국과 51개의 자유도시로 나뉘어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목상의 느슨한 연방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 중부와 동부 유럽 국가들이 거의 포함되었다. 그 무렵 유럽은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대자본이 필요해졌을 뿐 아니라, 국제적인 무역 증가에 따른 대금 결제 필요성도 증대되었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에 휩쓸려 있던 시기였는데, 역사적으로 전쟁이 많은 걸 바꾸어 놓았듯 금융 산업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이때 새로운 금융 기법들이 탄생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탄생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박해: 1744년 프랑크푸르트 게토에서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태어났다. 프랑크푸르트는 예로부터 반유대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 참고로 중세에는 프랑크푸르트 유대인들이 주기적으로 박해를 당했는데, 1215년 로마에서 열린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유대인 차별 조항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1241년은 프랑크푸르트 유대인에게 악몽의 해였다.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은 유대인들이 늘어나자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유대인들이 몽골군과 내통하여 몽골군의 유럽 정복을 돕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은 프랑크푸르트 유대인들이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쳐들어온 몽골군과 결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제적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그해에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중 3/4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해 몽골 제국의 제2대 황제인 오고타이가 사망하는 바람에 몽골군은 쳐들어오지 않고 퇴각했다. 죄 없는 유대인들만 무고하게 학살된 것이다.
그 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유대인 사회는 가까스로 재건되었는데, 1세기 뒤인 1349년에 또다시 학살이 자행됐다. 유대인들이 흑사병을 퍼트린다는 루머가 당시 유럽 전역에 퍼진 탓이었다. 그 무렵 유럽 사회의 반유대주의는 뿌리 깊었다. 유대인들은 주재국의 모든 법에서 소외되었으며 갖은 구박과 냉대를 받았다. 상대가 “유대인이여, 의무를 다해라”라고 말하면 언제든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해야 했는데, 그게 어린아이여도 예외 없었다. 유대인이 이유 없이 구타당하거나 강탈당하는 일도 잦았다.
붉은 방패 달린 집, 로스차일드가의 시작: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태어났을 당시, 프랑크푸르트 게토에는 다른 지역 같으면 150여 명 정도 살았을 면적에 3천 명이 넘는 유대인이 살았다. 도시 중에서도 가장 번창해 장사가 잘되는 프랑크푸르트로 유대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아버지인 암셸 모제스는 잡화상 겸 골동품상을 운영하면서 환전업을 했다. 또한 금세공과 대부업도 겸했고, 하노버에서 은행업을 하는 유대인 오펜하임 가문의 도움으로 그 은행의 지사 업무도 맡아 했다. 가게에는 붉은 바탕에 사자와 유니콘이 그려진 방패 모양의 간판이 있었고, 가게 이름도 ‘붉은 방패’를 뜻하는 ‘Rot Schild’였다. 당시 유대인은 성이 없었다. 성이 없다 보니, 누구의 아들 누구, 어느 지역의 누구, 이런 식으로 이름 앞에 아버지의 이름이나 마을 이름을 넣어 구별했다. ‘로스차일드(Rothschild)’라는 성은 나중에 집 대문에 그려진 ‘붉은(rot) 방패(schild)’에서 따온 것이다.
어린 시절 랍비 교육을 받은 마이어 로스차일드: 마이어 로스차일드의 아버지는 랍비를 양성하는 학교에 마이어를 보내 랍비로 키우고 싶어 했다. 그런데 부모가 천연두에 걸려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마이어는 3년 만에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때 마이어가 신학교에서 받은 교육, 특히『탈무드』 교육은 훗날 그가 세계의 금융업자로 우뚝 서는 데 든든한 지식과 지혜의 창고 역할을 했다. 랍비 교육에는 유럽과 중동의 역사뿐 아니라 히브리어, 라틴어, 아랍어, 거주지 언어 등이 포함되는데, 이는 여러 언어를 구사하며 그 지역의 특수성을 역사적 안목과 현실적 상황에서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토대가 되었다. 또 지식과 지혜보다 ‘정직과 신뢰’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로스차일드, 정식 금융교육을 받다: 돈에 대한 유대교 경전인 『토라』와 『탈무드』의 가르침은 여타 종교들과 판이하다. 대부분 종교는 ‘청빈(淸貧)’을 강조하지만, 유대교는 부(富)가 신의 축복임을 인정한다. 동시에 유대교는 ‘청지기론’을 이야기한다. 재능이나 돈 등 세상의 모든 것은 원래 하느님의 것으로, 이를 적정한 사람들에게 임시로 맡긴 것뿐이니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재능, 즉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부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이를 공동체를 위해, 특히 공동체 내의 약자를 위해 써야 한다는 것이 청지기론의 핵심이다. 그런데 랍비 학교를 그만두게 된 마이어는 랍비가 못 될 바에는 차선책으로 부의 청지기가 되자고 생각했다. 아무튼 졸지에 소년가장이 된 마이어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하노버로 가서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였던 하노버 선제후국의 궁정 유대인 오펜하임이 세운 은행에서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편 마이어의 외삼촌은 쾰른 대주교의 어용상인이었는데, 마이어는 외삼촌 집에 살면서 처음으로 궁정 유대인들의 세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은행에서 업무 차 그들과 직접 접촉하며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배웠다. 또 사업을 할 때는 귀족과 부호의 돈줄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취미와 생활, 사고방식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