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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대표의 경영일지

한동빈 지음 | 새라의숲


별난 대표의 경영일지

한동빈 지음

새라의숲 / 2023년 10월 / 248쪽





1장 Thinking Action _ 왜 스웨덴은 되고, 한국은 안 되는 걸까



자리에 안주한다면 변화는 없다


인생 최초이자 최고의 일자리 RIST:
포항제철은 1987년 당시 박태준 회장의 지시하에 번듯한 소재 공정 관련 전문 연구소를 운영하기 위해 수년에 걸쳐 엄청난 자금을 투자함으로써 자재와 설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포항에 위치한 탓에 우수한 인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1990년 3월 1일, 서울 토박이인 나는 포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미국에서 박사과정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에서 러브콜을 받은 것이다. 미국에서 학회에 참석하고 있던 어느 날, RIST에서 왔다며 한 사람이 나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는 당시 RIST의 부원장으로, 미국까지 찾아와 RIST 연구소의 위상을 설명하면서 내가 그곳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어떤 연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박사학위를 끝내지도 않은 나를 찾아와 간곡히 설명하는 그의 모습이 의아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나는 RIST의 제안에 마음이 끌렸다.

나는 RIST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스물아홉 살이라는 그다지 많지 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끝내고 RIST에서 연구 업무를 하게 된 나는 몇 년 만에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일단 실력을 인정받은 데다 원하는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탄탄한 직장이었던 까닭에 직장 생활이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안락한 일상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연구원으로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누렸던 것 같다. 구속 없는 연구 생활, 부족함 없는 연구비 등 한마디로 연구원으로서는 최고의 호시절이었던 것이다. 입사할 때 박사 연구원 초임 연봉이 2천만 원대 중반이었는데, 이는 당시 은행 대졸 직원이 받는 초임 연봉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게다가 30여 평이나 되는 사택까지 제공받았다. 월급날이 되면 통장 잔고는 새로운 숫자로 바뀌었고, 연구 생활도 편안했다.

물론 나를 설레게 하는 일도 있었다. 현장 지원을 하는 업무로, 현장에서 개선해야 할 점을 발견하면 연구실에서 그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연구소에서 지원하는 연구비도 국내 최고 수준이었고, 내가 하고 싶은 다양한 연구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실험하는 생활이 이어지면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답답함을 느꼈고, 문득 자신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나는 연구에만 매진하는 성향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다:
RIST에 몸담았던 10여 년 동안 재료공학과가 있는 전국 주요 대학교의 교수들과 산업단지가 있는 지방 중소기업의 대표들, 그리고 내가 일하고 있는 연구소의 연구진들이 모여 현장 과제를 따내기 위해서 협업을 자주 하곤 했다. 내 업무는 주로 협업을 통해 성과를 얻을 수 있도록 일을 진행하는 것이었고, 언젠가부터 그런 일이 내 성향에 잘 맞는 것 같아서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문제가 없는지 계속 체크하면서 대학교수들과 중소기업 대표들, 그리고 연구원들 등 서로 결이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국에 있는 관련 현장으로 출장을 다니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소재 관련 산업단지가 있는 곳으로의 출장도 잦아졌다. 다행스럽게도 출장을 다니면서 업무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연구원이 아닌 ‘영업맨’으로서 사업가를 꿈꾸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소통하기를 좋아하는 천성 덕분에 현장에서 근무하는 실무자들과도 격의없이 지냈다. 연구원으로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포스코 현장에서 사용하는 소모품의 사용 기간을 어떻게 하면 늘릴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기존 소모품의 사용 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었다. 설비에 들어가는 부품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실험을 하고, 개선된 부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의 주 업무였다. 따라서 나는 인천, 부천, 대구, 창원 등 제조업 단지를 찾아다니며 연구 결과를 실제로 제작할 수 있는 업체를 찾느라 출장이 잦았다. 이렇게 전국을 누비며 출장을 다니던 어느 날, 문득 ‘내 사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때가 1995년이었고, 어느새 나는 서른 중반이 되어 있었다.

고심 끝에 창업 아이템을 결정하다:
마침내 회사를 떠나는 운명의 날이 왔다. 나는 RIST에서 이룬 연구 성과와 모든 자료를 반납하고 마음도 내려놓고 나왔다. 그것은 RIST의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산화되지 않았던 부품을 찾아본 결과 스웨덴의 K사로부터 전량 수입해 쓰던 초고온 세라믹 히터가 눈에 들어왔다. 히터 하나당 가격이 30~90만 원 정도로 엄청 고가였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과 연구소 그리고 산업 현장에서는 40여 년 동안 스웨덴 제품을 사용해왔다. 하지만 제품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새 제품으로 교체하는 방법 외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영업 방식은 한마디로 ‘나몰라라’식이었다. 제품을 주문하면 비행기가 아니라 선박으로 배송해주기 때문에 약 2개월 후에야 도착했고 소량 주문의 경우 늘 배송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제품에 대해 독점적 기술을 유지하고 있는 K사는 애프터서비스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일방적으로 가격을 올린다고 통보해도 고객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왜 이런 부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중에 히터가 말썽을 빚을 때면 너무나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그 짜증과 화 덕분에 내가 창업을 하게 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라믹공학을 전공한 덕분에 히터를 어떻게 만들고 또 히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론적으로나마 알고 있던 터라, 실제 제품화하는 것도 그리 까다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한번 해보자.”

창업에 대한 생각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리고 국산화하기로 마음먹고 결정한 아이템이 초고온 세라믹 발열체였다. 초고온 세라믹 발열체는 연구실에서 필요했던 부품으로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니, 그런 부품의 국산화라면 창업 아이템으로 적당했다. 1995년 말쯤 마침내 나는 사업 준비에 들어갔다. 공장 부지는 인천 남동공단으로 결정했다. 나의 첫 공장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이같이 허름한 장소는 단연코 없었다. 하지만 처음은 미미하나 나중은 창대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상하게도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제는 기술과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깊은 고민보다 때로는 단호한 행동이 필요하다


‘무’에서 다시 출발하다:
1997년 나는 마침내 (주)위너테크를 설립했다. 부품의 국산화라는 목표를 세우고 멋진 사업가로 성공할 것이라는 풍운의 꿈을 꾸며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다. 고액 연봉이 보장된 현직 책임연구원이라는 안정적인 길 대신 나는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퇴직금을 포함해 거의 대부분의 재산을 창업에 쏟아붓고 미래를 알 수 없는 안개 속에 가려진 나의 꿈, 바로 사업가의 길을 선택했다. 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다만 ‘스웨덴은 되는데, 왜 우리는 안 돼?’라는 질문 하나가 나를 허름한 공장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공장이 마련되자 세라믹 히터 제작에 필요한 원료 반죽기, 압출기 등을 설치하고 원료를 구입해 본격적으로 히터 제작 실험에 들어갔다. 원료를 반죽기에 넣어 섞고 찰흙 형태의 덩어리를 뽑아내는 실험을 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워 보였다. 곧 완제품 히터가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원료를 넣고 기계를 돌리자 모터에 불이 붙어 공장에 불이 날 뻔했다. 결국 2억 원을 들여 만든 압출기와 반죽기는 고물상으로 직행했다. “엿 바꿔 먹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다시 만들어보자.’

박사 명함을 접고 작업복 차림으로 변신하다:
그때까지 연구원과 사업체 대표를 겸직하던 나는 30대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 내 사업에 올인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사업에 올인하지 않으면 기술 개발은 고사하고 허송세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사업을 시작하지 않은 탓에 조직 관리는커녕 시제품이 언제 나올지도 알 수 없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1999년 9월에 RIST를 퇴직한 나는 위너테크놀로지 대표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 한참 동안 나의 정장은 작업복으로 입던 점퍼였다. 망가진 압출기와 반죽기를 다시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은 지나간다


2 트랙의 성공전략:
나는 공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일단 공장 한쪽에 간이침대를 놓고 직원들과 같이 먹고 자면서 제품 개발을 위한 연구와 실험을 계속해나갔다. 한편으로 조직을 재정비하고 사업을 2트랙으로 진행했다. 첫 번째 트랙으로는 박사학위를 활용해 정부의 과제를 본격적으로 수주받기로 했다. 그 결과 인천시가 지원하는 중소기업 지원연구사업을 신청해 6,000만 원 규모의 정부 사업을 수주했다. 참으로 귀한 과제로, 지금의 위너테크놀로지를 생존케 해준 마중물이자 자금이 되어주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연구 과제를 따냈다. 덕분에 초고온 세라믹 발열체 연구 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정부가 내린 결론은, 국산화는 할 수 있겠지만 제조원가가 지나치게 높아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1,700도까지 올라가는 초고온 세라믹 발열체는 이미 중국에서 저가 제품도 나오고 있어 1,800도와 1,900도를 견딜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가 사업 성공의 관건이었다.

이와 같은 두 번째 트랙으로 2년간 10억 원이라는 적지 않은 사업화 자금을 받은 덕분에 세라믹 히터 제조에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성공을 향한 시행착오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안정된 정부 사업의 성과에 힘입어 1999년 위너테크놀로지는 벤처기업으로 지정되었다. 이와 함께 마음가짐도 새로 다잡았다. 그리고 모든 경비를 최소화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맸다. 모든 일은 회사 중심으로 하되, 특히 연구 개발에 집중했다. 세라믹 히터 제조는 내 인생을 건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2장 Dreaming Action _ 꿈을 꾸는 자만이 미래를 얻는다



고객이 먼저 찾아주는 제품을 만들어라


완벽한 제품은 없다, 그러나 고객의 불만에는 귀를 기울여라:
제품을 만들기 시작한 지 3년이 넘어서야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외국 제품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1,700도용 기능으로는 손색없는 성능을 낼 수 있는 히터 생산에 성공한 것이다. 실패를 거듭하며 어렵사리 만들어낸 탓일까. 1,700도 제품도 대단한 쾌거로 느껴졌고, 판매할 만한 히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품은 나왔는데 영업을 어떻게 해야 하나? 대체 이것을 어디에 팔아야 좋을까?’ 이제 고민은 매출이다. 제품이 출시된 후 처음에는 지인을 찾아가 1개라도 사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직원들 동기부여 좀 하게 사줘요. 그리고 사실 수입품이 너무 비싸잖아요.” 그동안 정부기관 연구소와 과제를 진행하면서 맺어온 친분으로 작은 기업 연구소를 찾아가 우리가 만든 제품을 구매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니, 떼를 썼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그래도 벤처기업이 만든 건데….

그러자 실험용으로 소량 구매는 가능하다며 제품을 보고 싶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지인의 너그러운 인심 덕분에 위너테크놀로지는 첫 매출을 올리게 되었고, 그 후 영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지인들을 통해 소량으로 판매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실에서 실험용으로 사용하겠다는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나의 기대를 여지없이 박살내고 말았다. “이거 형편없잖아. 이걸 히터라고 만들었어? 한번 쓰고 나니 깨져버리네!”, “이거 불량이 심한데! 온도가 올라가니까 풍선껌처럼 부풀어오르네.” 히터가 깨진다. 버블이 생겨서 쓸 수가 없다 등등 돌아오는 클레임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 ‘자금은 또 얼마나 투자해야 하는 거지?’, ‘시간은 또 얼마나 걸릴까?’, ‘여기가 끝인가, 이제 포기해야 하나?’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싶었다. 그동안 흘렸던 피땀어린 수고와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뒤섞여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결심하고 시작한 창업인데. ‘그래, 한 번 더 해보자. 문제가 있으면 해결할 길도 분명히 있을 거야. 문제는 풀라고 있는 거잖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제품의 공정을 개선하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다시 2년을 쉬지 않고 클레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제품 생산 공정을 개선해나갔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몇 번이든 부딪쳐라:
이제 젊은 나이라고 할 수도 없는 마흔, 나는 어느새 중년을 향해 가고 있었고, 하늘을 뚫을 것 같았던 자신감도 조금씩 사그라져갔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원인을 찾아 계속 시도해나갈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은 내게 암흑의 시대와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한 길만 보기로 했다. 포기하지 않고 실험을 해나갔다. 그러나 좀처럼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모든 부분에서 압박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근면과 성실로 무장했고 악착같이 버텨냈다. 그리고 문제는 반드시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클레임을 해결하고 불량을 개선할 때까지 제품 개발을 위한 실험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꼬박 4년을 버텼다. 그러면서 위너테크놀로지는 공정을 개선해나갔다. 신기하게도 그러는 과정에서 수십 개가 넘던 클레임이 대부분 해결되었다. 이래저래 클레임이 속출했던 문제는 모두 공정에 있었던 것이다. 고온 발열체, 즉 히터에 기포가 생기거나, 발열부와 비발열부의 접합이 잘 되지 않거나, 혹은 히터가 깨지거나 하는 문제가 공정을 개선하니 거의 해결되었다. 어디서 해결점을 찾아야 하는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결될 때까지 끈질기게 반복해야 하는 실험에 지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끈질긴 노력의 결과 마침내 2000년에는 1,700도 고온에서 견디는 발열체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해 신기술 NT 마크(New Technology Mark)를 획득했다. 이제 회사 매출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내는 좁다, 세계에 도전하라


위기와 기회는 항상 함께 온다:
위너테크놀로지가 국산화한 초고온 세라믹 발열체는 바이오 분야에서 응용하는 장치로 인공 치아를 제조하는 열처리 설비용으로 쓰인다. 치아가 닳거나 상하면 금이나 세라믹 등으로 인공 치아를 만들어서 교체하거나 덮어씌우게 되는데, 인공 치아를 만들 때 본을 뜬 세라믹을 고온에서 굽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때 고온에서 치아를 굽는 장치 속에서 열을 내는 기능을 담당하는 부품이 바로 초고온 세라믹 발열체, 즉 히터이다. 치과의사나 치기공사들이 인공 치아를 구워내는 소형 설비에서 열을 내는 히터는 필수 소모품이며, 1년에서 1년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새 제품으로 교체해야만 하는 부품이다. 마치 프린터의 토너를 교체하듯 히터의 수명이 다하면 새것으로 갈아 끼워야 하기 때문에 정기적인 수요처를 확보할 수 있다.

문제는 영업이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겪는 수많은 고충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안정적인 판매처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기업에 제품을 납품하기 위해 납품업체 대표들은 대기업의 담당 직원들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접대를 해야만 한다. 힘들게 완성한 제품을 그들이 구매해주지 않으면 사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와 직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그들에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영혼을 털어가며 접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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