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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빈 살만

벤 허버드 지음 | 메디치미디어


무함마드 빈 살만

벤 허버드 지음

메디치미디어 / 2023년 6월 / 448쪽 / 29,000원





들어가는 말




아랍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이끌고 있는 젊은 왕자가 연설할 때쯤 세계에서 모여든 투자자들과 거부들이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했는데, 프레젠테이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우디를 국제 해운의 허브로 만들 것입니다. 2,200만 국민을 위해 종교적 이유로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놀이공원과 영화관과 콘서트장 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대폭 확대할 것이고, 그동안 방치했던 유적지를 개발하고 홍해에 세계적 수준의 생태 리조트를 조성함으로써 관광업 붐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 변화가 진짜인지 의심하는 사람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 있도록 그동안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비난받았던 규정을 바꿀 것입니다. 2018년 6월부터는 마침내 여성이 운전을 시작할 것입니다.”

사우디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그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무함마드 빈 살만(MBS)이라는 일 중독자이자 왕의 아들이었다. 당시 32세였던 그는 빠른 시간 안에 사우디뿐 아니라, 나아가 중동 전체를 재조직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참고로 그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정상에 서고 싶어 하는 수천 명의 왕자를 제치고 선두에 나서기까지 3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2015년 연로한 살만 빈 압둘아지즈는 국왕에 오른 후 아들들에게 사우디의 가장 중요한 분야인 국방, 경제, 종교, 석유를 담당하도록 맡겼다. 이후 무함마드 빈 살만(MBS)이 사촌 형들을 제치고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왕세자 자리에 올랐다. 비록 부왕이 국가권력의 정점에 있기는 했지만, 무함마드 왕자가 국가의 감독자이자 경영 책임자이자 실질적인 통치자인 것은 분명했다. 그런 그를 다른 왕자들과 구분하기 위해 사우디 안에서뿐 아니라 사우디 밖에서도 MBS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던 날로부터 2주 후, 가혹한 일이 벌어졌다. 며칠 동안 왕실 요원들과 비밀경찰이 사우디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인사 수백 명을 검거했는데, 그중에는 MBS의 친척도 적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의 결혼식에 참석한 인사도 있었다. 요원들은 검거된 인사들의 수행원과 운전기사를 돌려보내고 휴대전화를 압수한 후 그들을 리츠칼튼 호텔에 감금했다. 호화로운 투자 회의장이 오성급 감옥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이 인사들을 구금한 것을 부패 단속의 결과라고 발표하자 국민이 환영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왕자와 사업가들이 노다지 같은 계약을 체결하거나 정부 금고에서 재산을 빼돌리는 것을 지켜봤고, 그곳에 구금된 인사 중 몇몇은 그 정도가 아주 심각했다.

하지만 살만 국왕의 가까운 인척을 포함해 유력 인사들이 같은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구금되지 않자 단속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증이 일어났다. 이상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체포가 이루어지는 동안 수사를 담당하는 위원회가 발표되었는데, MBS가 주도한 그 위원회는 MBS의 재산에 대해서는 조사한 일이 없었다. 그는 요트를 사기 위해 5억 달러나 쓰지 않았는가? 잡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집’이라고 거론된 바 있는 프랑스에 있는 그의 성은 어떻게 된 일일까?

리츠칼튼 호텔에 구금되어 있던 인사들이 국왕의 손님이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그들을 대하는 모습은 손님을 대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고통을 겪는 동안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MBS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MBS는 사이코예요. 그는 악마 정도가 아니에요. 악마조차 그에게 배운단 말입니다” 그들은 MBS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우디의 수도를 장악하고, 자신에게 도전하려는 모든 사람의 명성을 더럽히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불과 몇 년 만에 MBS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배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역동적이고 눈길을 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날 때부터 두드러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살아온 시간 대부분은 훨씬 더 부유하고 경험이 많은 왕자들 사이에 끼어 존재감조차 없었고 서열도 형편없었다.

아무튼 MBS는 매우 분열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게임체인저로 추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적으로 여기는 이들은 그를 잔인한 독재자로 여겼다. 그가 발표한 모든 계획은 충성스러운 그의 후원자들과 언론인들에 의해 절묘한 작품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 대한 많은 부분이 감춰져 있다. 체포가 일상화되면서 시중에서는 그의 배경이나 그가 세운 계획의 타당성이나 그가 발표한 계획을 달성할 능력이 있는지 거론하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사회 규제가 느슨해지고 여성들이 그들의 어머니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직업을 얻게 되면서 열정이 넘쳐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국민은 소셜 미디어에 올린 게시물이나 댓글 때문에 체포되거나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통화를 기피하고 만날 때 휴대전화를 치워놓기도 했다. 2017년 말에 투자 회의에 참석해 매력적인 모습을 보인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리츠칼튼 호텔에 많은 사람을 가두어 둔 것과 같은 서로 상반된 2가지 모습이 MBS의 실체였다.

도착


2013년 사우디를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나는 왕실 내막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나는 중동 지역에서 7년 동안 근무한 후 최근에 《뉴욕 타임스》 중동 특파원으로 고용되었다. 나는 이집트와 시리아, 이라크와 리비아뿐 아니라 어디서든 필요한 곳에서 기사를 작성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움직임을 폭넓게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우디는 블랙홀과 같았다. 똑같은 흰색 전통복을 입고, 이름도 순서만 다를 뿐 그 이름이 그 이름이고, 사회는 불투명하고, 글자로 된 것 대부분은 이슬람 종주국과 관련된 것이고, 여성이 천대받았다. 나는 아랍 사람들이 사우디를 비난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들은 사우디에서 특정한 정치적 조류가 부상하는 것이나, 이슬람국가(IS)나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리스트를 부추기고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나, 사회적으로 보수주의가 확산하는 것과 같은 병폐를 못마땅해했다. 그리고 중동 지역에 미치는 사우디의 영향력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다.

이후 5년 동안 내 임무는 그 실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사우디를 수십 번 방문하고 각 지역을 돌아보는 동안 각계각층의 사우디 사람 수백 명을 만났고 그들을 알아가게 되었다. 사우디를 지상 최고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성직자부터 탈출을 갈망하는 젊은이, 자기가 가진 특권의 의미를 망각한 왕자와 공주, 운전하고 싶은 여성, 운전에 관심 없는 여성, 그리고 비록 사회가 조금 더 밝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사우디 국민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까지. 그 시간 동안 나는 사우디의 정치와 외교정책과 문화와 종교를 파헤쳐 가며 수백 편의 기사를 작성했다.

즉위


2015년 1월 23일, 압둘라 국왕은 오랜 폐암 투병 끝에 리야드의 국가방위군병원에서 사망했다. 국왕의 아들 중 하나가 병실에서 나와 국왕 일가와 각료들에게 국왕의 사망을 알렸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방계가족의 왕자들이 조문을 다녀갔는데, 그중에는 무함마드 빈 살만을 대동한 살만 왕자도 있었다. 어느 시점엔가 젊은 왕자가 왕실 문서에 사용하던 인장을 압둘라 국왕 내각의 실세에게서 넘겨받았는데, 이로써 권력이 누구에게로 넘어가는지 분명해졌다. 압둘라 국왕을 병원으로 옮겼던 왕실 경호원들은 살만을 호위해 병원을 떠났고, 살만이 국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살만은 79세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건국한 압둘아지즈 국왕의 살아남은 아들 중 거의 끄트머리였고 자기 세대 중 국왕에 오른 마지막 왕자였다. 새로운 국왕이 즉위해 사우디가 환호로 뒤덮이고 TV 방송에 축하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녹색 불꽃이 리야드 밤하늘을 수놓았지만, 당시는 사우디에 고난의 시기였다.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민중 봉기로 튀니지와 예멘과 리비아와 이집트의 독재 권력이 무너지자 사우디에게 익숙했던 지역 질서가 흔들렸다. 이러한 봉기로 인해 각 국가에서 누가 권력을 휘두를 것이며 사우디와는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불투명해졌다.

사우디를 등에 업은 새로운 독재자가 이집트를 장악했지만, 이집트는 경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포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리비아는 권력을 잡으려는 두 세력의 충돌로 혼란에 빠졌다. 예멘의 후티 반군은 수도 사나와 사우디 국경 지역인 예멘 북서부를 장악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시리아에서는 사우디의 지원을 받은 반군이 바샤르 알 아시드 대통령을 축출하는 데 실패하자 잔인한 내전으로 번졌다. 그때 이슬람국가(IS)의 지하디스트들은 시리아 동부와 이라크 서부를 휩쓸어 영국 크기의 영토를 점령하고, 무자비한 폭력으로 적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세계 무슬림을 통합하기 위해 칼리파가 다스리는 이슬람 정부를 수립했다고 선언했다. 사실 사우디 왕실을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무슬림은 지하디스트를 혐오했고, 그래서 그들이 부상하는 것이 사우디로서는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한편 그 당시 이란은 이 지역의 혼란을 틈타 레바논과 시리아, 이라크와 예멘의 민병대를 비밀리에 지원해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었다. 참고로 사우디와 이란은 이슬람의 가장 큰 종파의 대표로서 경쟁하는 사이였다. 수니파 왕국인 사우디는 스스로를 세계 무슬림의 바티칸으로 여겼고 이란의 시아파 신앙을 일탈이라고 무시했다. 반면 시아파 혁명정부가 통치하는 이란은 사우디를 ‘혁명을 수출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익을 훼손하려는 자신들의 의도’를 방해하는 첫째가는 적으로 보았다.

이런 정세 속에서 살만은 MBS를 이끌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까지는 관측통조차도 젊은 왕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살만은 압둘라 국왕이 부왕세제로 책봉했던 이복동생 무끄린 빈 압둘아지즈를 왕세제로 승격시켜 왕실 서열을 정비했다. 이어서 살만은 조카이자 알카에다 격퇴 작전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무함마드 빈 나예프(MBN) 내무부 장관을 왕위 계승 서열 두 번째인 부왕세자로 책봉했다. 이로써 MBN은 압둘아지즈 국왕의 손자로서는 첫 번째로 왕위 계승 서열에 이름을 올렸다.

살만은 MBS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해 군을 통솔하게 했으며, 동시에 국왕 비서실장으로 임명해 국왕에게 보고되는 모든 사안과 왕실 자금을 관리하게 했다. MBS는 두 지위를 이용해 자기 세력을 키웠다. 이후 국왕은 왕세제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면서 무끄린을 왕세제에서 폐위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는 안보 당국의 수장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MBN)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MBN이 그동안 안보와 관련해서 미국과 의견을 조율해 왔고 중앙정보국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워싱턴에서는 이러한 조치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MBS도 따라서 승격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부왕세자로 책봉하고, 사우디 경제의 중추인 사우디 아람코 이사회 의장으로 임명해 이를 지휘하게 했다.

웅대한 비전


MBS가 사우디를 재건하려는 계획을 공식화하면서 그는 변화를 반대하고 나설 성직자들의 마음을 돌릴 뿐 아니라 재건을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향을 잡아줄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경영 컨설턴트들을 찾기 시작했다. 사우디가 현금을 풀기 시작하자 최고의 교육을 받은 외국 전문가들이 경제 다각화를 비롯해 군비 조달 효율화와 교육 과정 재구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 대해 조언하겠다며 몰려들었다. MBS는 같은 일을 여러 회사에 맡겨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경쟁사가 보는 앞에서 결과를 발표하게 만들어 아이디어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2016년에 들어서면서 사우디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MBS의 웅대한 계획이 발표를 앞두게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컨설턴트들이 모든 단계에서 관여했고, 맥킨지가 주도하는 싱크탱크는 사우디가 당면한 도전을 진단하고 이것을 해결할 방안을 보고서로 작성했는데, 이것은 마치 이들이 고려하고 있는 여러 대안에 대한 국민 반응을 떠보기 위해 풍선을 띄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사우디 당국자들이나 현지 언론이 맥킨지가 마련한 MBS의 미래 로드맵인 국가개조계획(NTP)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발표를 여러 차례나 미뤄야 했던 MBS는 경쟁사인 보스턴컨설팅그룹을 선정하고, 그가 제안한 국가개조계획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비전 2030’이었다.

‘비전 2030’이라는 사우디의 웅대한 비전은 비록 외국 컨설턴트들이 작성한 것이기는 하지만 발표되는 순간에는 이미 MBS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 계획을 발표한 날 그는 여러 TV쇼에 나와서 ‘비전 2030’ 안에 들어있는 엄청난 숫자를 제시했을 뿐 아니라, 그가 계획하고 있는 것이 단지 사우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우디는 그동안 ‘석유 중독’으로 발전이 지체되었지만 그 시절은 곧 끝날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저널리즘의 역할


MBS는 그의 비전을 선포하고 난 후 사우디 사회의 주요 인물들을 초청해 비공개 리셉션을 열었다. 그는 두 그룹을 초청했는데, 하나는 젊은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그룹이었다. 그들은 케케묵고 나이 든 성직자들과는 달랐는데, 그들은 새로운 문물에 익숙했을 뿐 아니라 마치 할리우드 스타들이 서구 젊은이들을 몰고 다니는 것처럼 그들도 많은 사우디 젊은이를 몰고 다녔다. 그들이 초청된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트위터나 스냅챗 같은 소셜 미디어의 팔로어 수가 수백만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즉 MBS는 ‘비전 2030’을 그들보다 더 빨리 안착시킬 수 있는 그룹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그룹은 국내외 현안에 대한 사우디 정부의 견해와 지도자들의 견해를 보도해 사회적 여론을 조성하는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이었는데, 그들 중에는 몇 년 전에 미국 외교관에게 앞으로 군주정치체제가 직면해야 할 문제에 대해 설명했던 자말 카슈끄지라는 언론인이 있었다. 그는 사우디에서 중요한 사회적 변화를 모두 경험한 사람으로, 그 누구보다 MBS의 거취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되었다.

살만 국왕이 즉위한 후 카슈끄지는 국왕을 강력한 지도자라고 칭송한 후에 아랍은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는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신임 국왕의 외교정책을 설명하는 ‘살만 독트린’이라는 칼럼에서 이란의 위협을 인정하려는 미국의 태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의 견해는 때때로 온라인에서 공격받았지만, 그는 자기 견해를 고수했고 사우디 정부가 공개 토론을 허용한 것에 감사를 표했다. 그런 카슈끄지가 2016년 MBS가 개최한 성직자 지식인 회의에 초대된 것은 그가 중요하게 대접받는 인물이라는 것과, 동시에 사우디의 떠오르는 새 지도자가 그를 꺾어야 할 상대로 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MBS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경제계획을 설명하고 정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또 수단과 파키스탄과 지부티에서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두 무함마드


MBS는 왕실 행사나 미국 당국자들과 갖는 회담 같은 공개적인 행사에서는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사촌 형을 예의를 갖춰 대했다. 사촌 형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MBN) 왕세자가 말하는 동안 그는 왕세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세로 종종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진 채 왕세자의 뒤에 서 있었다. 사우디 당국자들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두 무함마드’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MBS가 MBN을 존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MBS가 자기 사촌 형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MBS는 MBN을 조금씩 무장 해제시켜 나갔다.

MBN은 수년 동안 인공지능 박사 학위를 받은 언어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인 사드 알 자브리 박사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해 그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알 자브리 박사는 내무부 안에서 승진해 장성급 비서실장이 되었으며 미국 당국자들에게 왕자가 다루는 다양한 현안에 대한 ‘해결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왕세자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데다가 외향적이기까지 해서 미국 당국자들과 자주 만나 알카에다의 위협이나 이란의 움직임,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발전 방향에 대해 의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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