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기업으로 다시 창업했습니다
정민 지음 | 드림공작소
1인 기업으로 다시 창업했습니다
정민 지음
드림공작소 / 2022년 9월 / 246쪽 / 13,800원
1장. 하필 왜 1인 창업인가?
위기는 기회다“귀 막고 1년, 눈 막고 3년, 입 막고 5년만 버텨라!” 건설 회사에 갓 입사한 나를 진정한 건설 역군으로 키우겠다고 한 첫 사수의 말이다. 그는 입사 1년, 3년, 5년 차에 위기가 온다며 이때가 가장 힘든 시기니 잘 넘겨야 한다고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 할수록 사수의 말은 옳았다. 실제로 입사 1년 차에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 동기 중에도 몇 명은 이때 사표를 냈다. 적성에 맞지 않아서, 상사에게 불만이 있어서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핏대를 세우며 말한 첫 사수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표를 던지고 퇴사했다. 어설픈 사회 초년생이 사수 없이 일한다는 건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것과 같다. 맨땅에 헤딩하듯 3년을 버텨 냈지만 결국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다시 토목 회사에 입사했지만 3년 차에 IMF 외환 위기가 왔다. 경제 환란의 희생자들이 여기저기 즐비했다. 난 다시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사실 위기라는 단어에는 “위기가 있으면 기회가 있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평범한 생활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 위기는 절대적 위험이다. 특히, IMF 외환 위기는 직장인에게는 위태로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도 누군가는 위기와 맞서 판세를 뒤집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위기 속에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이다.
테라로사의 김용덕 대표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IMF 외환 위기 때 여기저기서 명예퇴직 바람이 불었다. 그는 20여 년을 성실하게 근무한 은행에 과감히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여행이나 하면서 남은 인생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사표를 내고 유유자적하면서 커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공장형 커피숍’이란 콘셉트를 내세운 테라로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커피가 운명적으로 다가왔다. IMF 때 은행을 그만둔 것은 가장 큰 행운 중 하나였고, 커피를 만난 것은 나를 변화시킨 근본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라고 그는 말했다.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던 것이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를 만난 건 대우에 입사했을 당시 신입 사원 교육에서다. IMF 외환 위기로 인해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직장을 그만둔 그가 3년 뒤 옛 동료와 세운 회사가 셀트리온이다. 그는 위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했기에 지금 세계적인 기업의 총수가 될 수 있었다. 나 역시 직장을 다니면서 소호 창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집이나 작은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을 ‘소호족’이라 불렀다. 지금의 1인 창조 기업과 같다.
내가 정보 제공 사업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건설 현장에서 근무할 당시 책상에 있던 컴퓨터 때문이었다. 업무용이었지만 때론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나의 경우 스타들의 패션을 소개하는 동호회 시솝 활동을 했다. 동호회 시솝으로 있을 때 “가수 유승준의 은색 셔츠를 구할 수 없을까?”라는 메시지가 왔다. 1997년 화려하게 데뷔했던 그의 패션과 헤어스타일이 그때 유행하기 시작했다. 메시지를 받고 유승준의 소속 기획사 전화번호를 어렵게 알아내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무대 의상을 사겠다는 말에 기획사 실장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며칠 뒤 청담동에 있는 기획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실장이자 매니저는 소속 가수가 휴식기에 들어간 터라 무대 의상들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의상 몇 벌을 손에 쥐게 되었다. 기획사 대표와 매니저들을 만날수록 그들은 의상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대 의상은 일반 옷과는 달리 화려하다. 활동 시기가 끝나면 폐기 처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대 의상은 가수의 시그니처와 같다. 무대 의상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1998년 1월 잘 다니던 회사를 과감히 그만두었다. 퇴직금으로 받은 300만 원으로 데이터뱅크라는 정보 통신 회사를 설립했다.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기획사와 무대 의상 구매 계약을 맺고 탄생한 것이 <스타 소장품> 정보였다. IMF 시기에 회사를 그만둘 때 입사 동기들은 미친놈이라 했다. 당시 안정적 직장을 스스로 그만둔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때 사표를 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입사 동기들처럼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의든 타의든 회사를 떠나는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그들보다 빠른 판단 덕에 새로운 기회를 볼 수 있었다. 때로는 위기를 맞는 순간 새로운 기회의 순간도 찾아온다.
깡은 훌륭한 사업 밑천이다그런 나의 첫 사업은 처절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인생 끝났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너졌다. 신용 불량자, 노숙자의 삶은 막다른 인생 그 자체였다.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9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채무였다. 삶을 포기할 정도로 절망적인 채무였지만 해결해야만 했다. 8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피나게 노력했다. 그리고 빚을 갚아 나가는 과정에서 반전을 만들어 냈다.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하던 중 택배 일을 하면서 김 소장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택배 일은 밑천 없이 할 수 있지만, 깡 없이 하기 힘든 일입니다. 새벽 5시부터 엄청난 양의 택배 물건을 분류해서 매일 150곳 이상을 배달해야 겨우 먹고 삽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두 배로 일이 늘어납니다. 배달하기 위해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합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에 무거운 것을 배달하고 나면 이 일을 하게 된 것에 후회가 들기도 합니다. 점심은 거르기 일쑤요, 저녁은 건너뛰어야 새벽 전에 배달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웬만한 깡다구 없이는 하기 힘든 일입니다.” 택배 일을 처음 시작한 날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이혼하고 맨몸으로 아이 셋을 키웠다. 주위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붙여준 별명은 ‘깡순이’였다. 초등학교 입학 전의 어린 자녀들을 혼자 힘으로 키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자녀 양육에 관한 어떤 도움도 이혼한 남편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경제적으로 무척 빈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시절 사진을 보면 동생들과 나의 옷차림이 꽤나 세련되어 보였다. 양장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 모습도 세련됐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매일 먹었던 기억도 있다. 당시 바나나는 비싼 과일이었다. 어려웠지만 풍족하게 산 것 같아 나는 늘 그게 궁금했다.
내가 얻은 답은 어머니의 깡다구였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이른 새벽 채소 공판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어머니는 공판장 일과 함께 생선 좌판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를 마치고 나면 저녁에는 춤까지 가르쳤다. 고등학교 때 무용을 전공한 어머니의 꿈은 무용가였지만 결혼과 이혼을 하면서 이루지 못했다.
대신 무허가 교습소에서 지르박, 차차차 등 다양한 춤을 가르쳤다. 때론 교습소가 단속에 걸려 문을 열지 못하는 날이면 방 한 칸이 전부였던 집에서 춤을 가르쳤다. 심지어 나의 담임 선생님도 어머니의 춤 제자였다. 담임 선생과 학부모 사이는 원래 어려운 사이다. 웬만한 깡다구 없이는 못 하는 일이다. 어머니의 깡다구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30대 이혼녀가 자식들을 별 어려움 없이 키워 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깡다구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홀로 되어 내 편이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깡이 있어야 한다. 깡 없이 어정쩡한 정신을 하고 있다가는 시쳇말로 한 방에 훅 간다. 깡이 있으면 어디에서도 지지 않는 정신이 생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 무너진 삶을 반전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깡이 부족해서다. 깡은 기어이 하고 마는 의지이고 집념이다. 깡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악착같은 강한 뚝심이 있다. 그런 끈기와 용기로 불가능을 기어이 가능하게 만든다.
나 역시 그랬다. 사업을 하면서 진 빚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통의 빚 독촉 전화를 받았다. 그런 날이 밤낮으로 계속되면서 빚 때문에 죽는 사람을 이해하게 됐다. 깡이 없었다면 결코 견뎌 낼 수 없는 삶이었다. 신용 불량자라 취직도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 우유 배달, 신문 배달, 택배 기사와 정수기 수리 기사 단순직 일 4가지였다.
하루에 18시간씩 일을 하다 보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러나 잠시 외출한 정신도 금방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깡이다. 8년 동안 오로지 빚을 갚기 위해 나와 아내는 깡으로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빚을 모두 갚았다. 하지만 후유증도 남겼다. 아내는 심한 탈모가 왔고 나는 40대 나이에 20개나 되는 치아를 잃었고, 그 자리는 지금 틀니가 대신하고 있다.
나는 다동인(多動人)이다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하는 대체 불가능한 사람을 나는 다동인(多動人)이라 부른다. 나는 다동인이다. 공업 고등학교에서 기계를 전공해 평생 ‘공돌이’로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전공대로 살아지던가? 어쩌다 보니 대학에서 건축 관련 분야를 공부했다.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 건설 회사에서 기술 업무와 행정 업무를 두루 거치며 직장 생활을 했다.
30대 초반에는 창업과 동시에 파티 플래너, 프러포즈 기획자, 웨딩 컨설턴트, 웹 기획자, 방송 등 다양한 일을 했다. 사업에 실패했을 때도 생계형 일용직 직업 4개를 동시에 가졌다. 40대 중반 다시 창업해 지금은 문화와 교육, 컨설팅 등 3개의 기업체를 운영하며 기업체 두 곳의 사외 이사를 겸하고 있다.
“재주가 여럿인 사람은 1가지 재주만 가진 사람보다 성공하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다. 예전에는 1가지 일에 숙련된 전문가가 되면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여러 개의 재주를 가진 사람이 주목받는다. 한 분야의 일을 잘하는 사람도 좋지만, 오히려 창업에서는 여러 가지 능력을 갖춘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그런 면에서 여러 분야의 능력을 끊임없이 키워 나가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창업가라면 의도적으로라도 그런 능력을 갖추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오래전부터 의도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해 왔다. 사업에 실패했을 때도 그랬다. 우유와 신문은 새벽 배달도 있지만 한 달에 몇 번은 휴일 낮에 수금도 한다. 이때는 확장 영업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우유를 마시는 고객에게 신문 구독을, 신문 구독자에게 우유를, 확장 한 건당 2만 원의 수당을 받는다. 그렇게 매달 두 달 치의 수입을 벌었다.
창업 후에도 하루에 몇 가지 일을 같이하곤 한다. 각각 다른 업이라 불리는 일들이다. 오전에는 소상공인 컨설팅과 함께 지자체 문화 행사 관련 계약을 체결한다. 오후에는 게임 업체에 들러 새로 출시된 게임의 마케팅 회의를 진행한다. 때로는 지자체 도시 재생 기획을 하면서 직장인들과 학생들에게 커리어 코치를 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웨딩 연출과 연극 연출을 하기도 한다. 여러 개의 업(業)을 동시에 수행하지만 이를 관리하는 1가지 핵심 역량이 있다. 바로 기획이다.
인생은 고(苦), 고(苦)는 고(go)로 응수한다인생은 만만치 않다. 아픔과 상처도 많다. 고통은 숙명처럼 따라다닌다. 고통은 삶의 본질이다. 해가 뜨고 지듯이 자연스러운 거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어려운 일이다. 즐겨 찾는 사찰의 스님은 “고통이 내 안에서 해소되면 고통이 아닌 게 된다.”고 말했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애써 받아들이면 고통의 크기를 줄일 수 있다. 고통의 크기가 줄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래저래 고달픈 인생인데 ‘굳이 해결하려고 애쓸 게 뭐 있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만 있으면 발전이 없다. 발전 없는 고통은 고난일 뿐이다.
택배 일을 할 때 작업장이 등산로 중간에 있어, 등산객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산을 오르는 사람들 중에 유독 시선이 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목발을 짚고 산을 오르는데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그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어 한동안 환상지통에 고생했다고 한다. 지금은 의족 속에 감춰진 다리에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통증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는 내게 그는 이렇게 답했다.
“통증이 없으니 살 것 같았지만 날이 갈수록 불안했습니다. 통증에 시달릴 때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몸도 움직이고 했었는데, 아픈 것이 사라지니 오히려 무기력해졌습니다. 고통보다 힘든 건 의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욕 없는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무기력은 자살을 시도할 만큼 무섭습니다. 산을 오르게 된 건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서입니다. 불편한 다리로 산을 오르고 나면 숨이 차서 고통스러운데 그때 ‘아,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나 역시 움직임으로써 고통을 이겨 냈다. 사업에 실패한 후 정신적인 고통, 결핍의 고통, 그리고 실패에 따른 온갖 고통에 시달렸다. 많은 채무를 해결하지 못하니 고통의 강도는 더 했다. 삶의 의욕마저 잃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육체적 고통은 약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정신적 고통을 치료하는 약은 없다. 이러다간 죽는 걸 행동으로 옮기겠다 싶어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하루 18시간 이상 일에 몰두하면 딴생각이 들지 않는다. 심적 고통의 특효약은 움직이는 것뿐이다.
당신은 지금 고통스러운가? 고통을 참지 못할 만큼 힘든 상태인가? 그렇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 고통에 대한 안목은 그때 생긴다. 당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태도이다. 인생은 고(苦)다. 고(苦)는 고(go)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1인 창업이다잘해 오던 생계형 일을 모두 그만두었다. 다시 창업하기 위해서였다. 같이 일하던 택배 소장들은 “그렇게 고생하고도 또다시 사업하고 싶으냐?”, “지금 하는 일이나 잘하지!”, “아직 고생 덜했네.”라며 한마디씩 했다. 사업에 망해 고생해 본 사람이라면 사업 언저리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고잡이는 다르다. 하고 싶은 일은 어떡해서든 한다. 실패했어도 또 일을 벌인다. 난 하고잡이다.
그런데 왜 다시 1인 창업인가? ‘실패 지점에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지론이다. 실패는 일생에 단 한 번이면 충분하겠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실패는 수시로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실패 지점에서 그대로 좌절하지만, 어떤 사람은 꿋꿋하게 일어선다.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은 재기의 근육이 탄탄해서다. 사업에 망해 본 사람은 재기의 근육을 만들기 좋은 상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게 만든 근육은 아무리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튼튼한 근육이 된다. 나는 8년간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낸 최고의 근육을 만들었다. 하고잡이의 근육이다.
누군가 “사업으로 진 빚 때문에 마음고생 했는데, 다시 1인 창업이 당신 인생에서 최적의 솔루션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그렇다.”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다. 1인 기업을 할 수 있는 근육이 내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인 창업을 할 수 있는 근육은 무엇일까? 바로 실패를 이겨 낼 근육이다. 실패에 대한 내성이 생기면 그 결과물로 의지의 근육이 단단해진다.
“1인 기업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창업하면 길이 보인다.”라고 창업 전문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누구나 1인 기업을 창업할 수는 있지만 성공한 1인 기업가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다. 바로 다양한 경험을 했느냐다. 기업가는 성공하기 위해 지식과 경험, 내공이 필요하다. 1인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늘 고비가 온다. 이때만 넘기면 수월할 듯하지만 다시 새로운 고비가 밀려온다. 고비는 파도처럼 다가온다. 경험이 축적되지 못한 기업가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반면 경험이 축적된 기업가는 파도 타듯 어려움을 잘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