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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레몬 스토리

칩 윌슨 지음 | 예미


룰루레몬 스토리

칩 윌슨 지음

예미 / 2022년 6월 / 572쪽 / 25,000원





캘리포니아에서 캘거리로



아메리칸드림 / 캘거리에서의 고생담


내 인생의 초반을 돌이켜보면, 태어나서부터 내 손으로 기업을 일으키기까지 삶의 전체를 관통하며 나를 성장시키며 이끌어 온 키워드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삶의 키워드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사업체를 운영하시던 외조부모님 경영 방식, 부모님의 빠듯한 재정 형편,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서 캐나다의 앨버타주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미국과 캐나다의 이중 국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체육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등을 들 수 있다.

부모님 두 분은 유타주에 있는 브리검 영 대학교를 다니며 서로를 알게 되어 결혼을 했다. 나는 1955년 4월에 태어났고, 1957년에 여동생 노엘이, 1960년에 남동생 브렛이 태어났다. 두 분이 처음 만난 것은 20대 초반이었는데, 계획에 없던 임신으로 서둘러 결혼했고, 이왕이면 잘해 보고 싶었겠지만 서로 소통하는 데 서툴렀다. 게다가 헤어나기 힘든 재정적 압박이 있었다. 아무튼 부모님이 고군분투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수영 선수 생활


가정의 경제 사정을 고려할 때 수영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활동이었다. 필요한 장비는 수영복과 고글뿐이었고, 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절실히 원했지만 살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마음에 드는 수영복이었다. 당시 캘거리에서 구할 수 있는 수영복 브랜드는 스피도뿐이었는데, 모두 한 가지 색상의 디자인뿐이었다. 그런데 11~12살 무렵, 나는 수영모임에서 전혀 다른 수영복을 보았다. 다양한 꽃무늬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었다. 너무 갖고 싶어서 그걸 입은 아이에게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아이는 “텍사스”라고 대답했다.

갖고 싶어도 사지 못하고 참는 것은 내게 익숙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 수영복을 꼭 갖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내가 좋아하는 수영복이라면 다른 아이들도 좋아할 것이라며 대량으로 싸게 구매하여 다른 아이에게도 판매하면 이윤이 남을 것이고, 그러면 내 수영복을 살 만한 비용은 마련될 것이라고 얘기하셨다. 나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한 개에 13달러에 여러 벌을 구매해서 두 배 정도 되는 가격으로 팔았다. 작지만 강렬한 성공이었다. 그 일을 통해 구매, 배송, 판매 등의 개념에 눈을 뜨게 되었다.

부모님의 이혼


서로 맞지 않는 상대임을 확인하고 갈라선 부모님은 각자 완벽한 파트너를 새로 만나 재혼하셨다. 재혼으로 인해 부모님의 재정 상황도 바뀌었다. 어머니는 프랭크 콘래드라는 지질학자와 재혼했는데, 그에 따라 우리의 생활 수준도 달라졌다. 우리는 캘거리에서도 상류층이 거주하는 지역인 마운트 로얄로 이사했다. 이웃들은 모두 부유했고, 윤리에 아주 엄격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새로 사귀게 된 친구들의 부모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 친구들이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었다.



겨우 19살에 내 집을 갖다



앨버타 대학교 / 알래스카 송유관 / 문명 세계로 돌아오다


나는 집에서 200마일 떨어진 에드먼턴에 있는 앨버타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내가 운동 말고는 다른 일에 별로 열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은 인생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캘거리에서 돌아오는 에드먼턴 공항에서 친구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알래스카로 가는 중이야. 남편이 알래스카 유전 송유관 5개 구역 중 하나의 프로젝트 관리자란다. 네가 미국인이 아니라서 유감이다.” 그녀는 한 마디 덧붙였다. “네가 미국인이고 원하기만 한다면 거기서 일할 수 있는데 말이야.” 그런데 친구의 어머니는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미국 국적도 가지고 있는 이중 국적자였다.

대학 2학년을 마치던 날, 나는 알래스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얼마 후 송유관 공사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나는 영하 30도의 온도에 크레인의 정상에 올라가 다른 크레인과 연결하는 고공 인양 노동자로 일했다. 처음에는 여름 한 철만 일하고 가을 학기에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캘거리에서는 여러 일을 전전해도 시간당 3.5달러밖에 못 벌었지만, 그곳에서는 13.5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18개월 만에 송유관 현장을 떠났다. 그때까지 내가 번 돈은 15만 달러 정도였다.

캘거리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새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여러 집을 둘러봤지만,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볼품없는 건물에 눈길이 가 그 집을 샀다. 그리고 집이 결코 좋은 집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메르세데스 벤츠도 한 대 구입했다. 그러나 집은 낡아서 유지하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갔다. 자동차도 고급 자동차라 별것도 아닌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차량 대리점을 통해 독일에서 부품을 공수해 와야만 했고, 그 때문에 해결하려면 수백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 나의 첫 두 가지의 소유물로 얻은 이러한 경험은 훗날 사업하는 데에도 큰 교훈이 되었다. 이후 나는 고장이 잘 나지 않고 유지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혼다 시빅과 같은 차량을 선호하게 되었고, 앞으로는 든든하게 지어진 집만 살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와인처럼 근사한’



대학 졸업 / 캘리포니아 랩 쇼츠 / 취업


1976년, 경영대학 2학년 과정을 마치고 나니 교수님들은 내게 경영대학이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조언했다. 내가 회계학 과목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공은 경제학이었고 회계학 때문에 골치 아프기는 했지만, 다른 과목은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1979년 말쯤, 나의 대학 생활은 끝났고, 은행에는 8만 5천 달러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과거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캘리포니아에서 답을 찾았다. 1979년 가을, 샌디에이고에 사시는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에 나는 오션 퍼시픽이 제작한 스트리트 스타일의 코르덴 재질의 서핑 쇼츠(이 책에서는 운동용 반바지를 쇼츠라고 표시함)와 서핑을 하지 않을 때 입을 만한 후드티를 보았다. 또 젊은 여성들이 끈의 한쪽을 묶고 아래로 늘여 다시 뒤에서 묶는 랩 쇼츠(Wrap shorts)를 입은 것을 보았다. 나는 매년 캘리포니아를 방문했기 때문에, 이것이 그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유행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나는 캘거리로 돌아가면서 여자 친구인 신디 윌슨에게 줄 선물로 쇼츠 두어 벌을 샀다. 돌아와서 그녀에게 쇼츠를 보여 주니 아주 좋아했다. 그녀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쇼츠의 상품성을 알려 주는 첫 번째 긍정적인 신호였다. 처음에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패턴을 자른 뒤 바느질을 해 보았지만, 사람들이 입고 싶을 만한 옷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신문에 구인 광고를 냈고, 몇몇 여성들이 지원했다. 지원자들에게 랩 쇼츠 10벌씩 제작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를 기준으로 작업 숙련도가 높다고 생각되는 사람 5명을 추려 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다른 네 명보다 아주 탁월했다. 그녀의 이름은 조세핀 테라티아노였다. 이탈리아계 여성 재봉사였던 조세핀은 친척들과 함께 내 작업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훗날 내가 이탈리아 인맥을 만드는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나는 조세핀과 그녀의 자매들의 도움으로 쇼츠 300벌을 제작했고, 송유관 현장 시절, 멘토처럼 가깝게 지냈던 빌리 오캘러한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파인 애즈 와인(Fine as Wine)’이라는 브랜드를 개발했다. 제작한 물량은 신디의 친구들을 통해 판매하는 한편, 캘거리의 좀 규모가 있는 백화점들을 찾아가서 이 쇼츠 판매에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어느 백화점도 이 쇼츠가 팔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은 거의 재고로 남았다. 처음으로 재고 관리의 문제에 눈을 뜬 것이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판매 방법인 레모네이드 가판대 말고는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계획은 간단했다. 캘거리 시내에 여름 3개월 동안 장소 사용료를 내고 근사한 목조 가판대를 설치해 놓고 물건을 파는 것이었다. 이것은 재고 소진 계획인 동시에 내 평생 처음으로 직영 매장을 운영하겠다는 계획이기도 했다. 신디는 일주일 걸려 목조 가판대를 만들었고, 주말이면 쇼츠를 팔았다.

나는 그 무렵 돔 석유라는 회사에 지원했고 현장 직원으로 고용되었다. 당시 내 연봉은 3만 달러였고, 25살의 젊은이에게는 괜찮은 연봉이었다. 돔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스콧 시블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스콧 시블리는 나중에 나의 거래 파트너가 되었다. 그런데 돔이 좋은 직장인 것은 분명했지만, 근본적으로 송유관 현장에서 일하는 것과 같은 함정에 빠지고 있다는(인생을 돈과 맞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0살 이전에 창업한다는 목표를 떠올리니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분명해졌다.

사업 첫해


다시 봄이 왔고, 신디와 나는 다시 가판대를 열었다. 많은 수요를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가판대는 돔 타워 건너편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루가 마감되면 들어온 돈으로 원단을 구입하고, 그 원단을 재단사와 재봉사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90분 정도 수영을 하고, 배부르게 먹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나는 일찍 일어나서 자전거로 두 시간 정도를 달려서 도시 반대편으로 가서 조세핀으로부터 완제품을 받아서 매장으로 배송했다. 그러고 나서 정장으로 갈아입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출근을 했고, 점심에 10km쯤 달렸다. 사업도 하고, 철인 3종 경기 출전도 준비하고 훈련하던 그 시절은 참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멋진 시절이었다.



4장 웨스트비치 경영



재정 문제 / 사업 2년째 / 사업 3년째


1980년, 우리 사업의 첫 여름이 끝날 무렵, 신디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에 진학해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나는 겨울에는 가판대를 닫고 다음 시즌을 준비했다. 우리는 그 시즌에 5,500달러 정도 벌었다. 나는 다음 시즌 제작을 위해 2만 달러어치 원단을 사야 했다. 나는 계속 돔 석유 회사에서 번 돈을 웨스트비치에 투입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조세핀에게 상품이 다 팔리면 이듬해 여름에나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데 겨울에 재봉을 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조세핀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1981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웨스트비치는 사업 규모를 조금 키웠다. 캘거리의 다른 곳에 가판대를 하나 더 설치하고, 에드먼턴에 할인 매장을 하나 냈다. (이것이 훗날 룰루레몬 특유의 팝업 스토어의 시초이다). 수요는 분명히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 파트너는 이 신념을 공유하지는 못했다. 신디도 나도 각자 성장할 영역이 달라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사업적 관계는 물론 개인적인 관계도 청산했다.

1982년 여름에 나는 정식 웨스트비치 매장을 열었고, 고객들이 다른 의류 매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을 느끼도록 분위기를 만들었다. 한편 나는 캐시와 케이시를 채용했는데, 판매와 매장 관리를 위해서였다. 그들을 고용한 것은 면접, 교육, 인재 개발 등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편 내가 돔에서 친하게 지냈던 스콧 시블리는 1년 전에 밴쿠버에서 리처드 멜론이라는 사람과 새로운 사업을 한다며 돔에 사표를 던지고 떠났는데, 스콧과 리처드는 소형 요트 사업을 벌였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스콧은 회사의 현금 흐름의 숨통을 틔우려고 우리의 쇼츠와 티셔츠를 위탁 판매했는데, 그것이 주력 사업이 되면서 매장 이름도 ‘캘리포니아BC’로 바꿨다. 아무튼 밴쿠버에서는 그곳대로 웨스트비치 의류에 대한 수요가 있었고, ‘캘리포니아BC’는 나의 가장 큰 홀세일 고객이 되었다.



동업



돔을 떠나다 / 3자 동업


1985년 4월 25일, 나는 30번째 생일 전에 달성하기로 했던 목표를 이뤘다. 돔 정유 회사를 그만둔 것이다. 그때부터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목표가 아직 하나 있다. 40세에 은퇴하는 것이다. 40살에 은퇴하려면 웨스트비치를 좀 더 키워야 했다. 그런데 한 해 전부터 사업의 중심이 서핑에서 스케이트보드로 옮겨지는 것 같았고, 스케이트보드 시장은 과거 서핑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5년 정도 지나면 수십억 달러의 규모로 커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동업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함께할 파트너가 없다면 머지않아 스케이트보드가 크게 유행하게 되었을 때, 더 많은 돈과 전문성을 갖춘 누군가로부터 추월을 당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당시 스콧과 리처드 측은 매장에 비치할 옷을 계속해서 대규모로 주문하고 있었다. 1985년 여름, 우리는 함께 힘을 합쳐 일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85년 9월, 나는 내 사업 지분의 66%를 리처드와 스콧에게 매각했고, 우리는 정식으로 동업자가 되었다.

웨스트비치는 이제 개인 사업체가 아니라 어엿한 기업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초창기에 우리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는데, 사업 형태를 바꾼 덕도 컸다. 스콧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는 원래 버티컬 리테일 중심의 영업을 했지만, 홀세일 영업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칩은 캘리포니아의 자기 매장에 물건을 채워 넣는 것에 익숙했지만, 우리가 가세하면서부터 캐나다 시장을 겨냥해 홀세일 형태로 물건을 유통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해 가을, 우리는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의류 관련 무역 박람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후 몇 년 동안 매년 몇 차례씩 일본, 라스베이거스, 뮌헨 등에서 열리는 무역 박람회에 참가했다. 우리 물건을 유통해 줄 홀세일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였다.

밴쿠버의 재발견 / 플래그십 스토어 / 결혼


우리는 캘거리와 시애틀, 그리고 인스부르크에 매장을 냈고, 몇 년 후 휘슬러에도 매장이 생겼다. 각 매장에는 3~4명의 직원이 있었고 연간 수익은 백만 달러가 약간 넘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수입이었지만, 현금 유통이 원활하지 않은 홀세일 중심 영업으로 인해 빚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웨스트 4번가에 위치한 우리의 밴쿠버 1호 매장 맞은편에 더 큰 직영 매장을 마련했다. 웨스트 4번가의 확장된 새 매장에 큰 스케이트보드 경사로를 조성하면서 웨스트비치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스케이트보드 의류 공급 업체가 되었다. 내가 가판대에서 랩 쇼츠를 판매할 때만해도 이 정도까지는 예상 못 했지만, 나는 꾸준히 유행에 관심을 가지고 몇 년 후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왔다. 이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이었다. 한편 나는 33살에 근사한 여성을 만났고, 결혼해서 예쁜 아들 두 명을 갖게 되었다.

버티컬 리테일 매장을 늘리다


우리는 직영점과 자체 생산 방식의 경제적 이점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생산과 판매에서의 모든 중간 마진을 없애고 더 나은 가격으로 더 나은 품질의 제품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밴쿠버에서 본격적으로 웨스트비치 매장을 경영하는 중에도 나는 생산을 조세핀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산 라인을 재정비해야 할 때가 왔다. 밴쿠버에는 대규모의 아시아 이민 사회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숙련도가 높고 비용이 저렴한 재봉사와 재단사를 쉽게 만날 수 있고, 아시아 쪽의 해외 생산 공장을 물색하기도 쉬운 환경이라는 의미이다. 조세핀과의 협력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내 재산이 좀 늘어났을 때, 나는 조세핀에게 1만 달러의 현금 금일봉과 함께 신발 한 상자, 그리고 이탈리아행 일등석 항공권 두 장을 보냈다. 누가 보냈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꼭 밝혀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선물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집에서 만든 수제 쿠키 상자를 역시 ‘익명’으로 받았다. 오래전, 조세핀의 집에서 즐겨 먹었던 바로 그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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