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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CEO, 에디슨

정성창, 이가희 지음 | 이새


스타트업 CEO 에디슨

정성창, 이가희 지음

도서출판 이새 / 2020년 12월 / 276쪽 / 15,000원



부활하는 에디슨




에디슨은 누구인가 - 발명가에서 기업가, 그리고 혁신가로


남들보다 일찍 세상으로 나가다: 에디슨은 1847년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았고, 학습부진아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평준화된 공교육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좋은 책을 읽히며 직접 교육했고, 또 에디슨 스스로 유용한 책을 골라낼 수 있도록 독서법을 가르쳤다. 그런 어머니의 지도 덕분에 에디슨은 독서의 세계에 빠졌고, 문학, 역사, 과학 등 폭넓은 지식을 섭렵했으며, 책을 통해 더 큰 세상을 보았다.

12세가 된 에디슨은 가난한 살림을 돕고자 남들보다 일찍 세상으로 나갔다. 13세 때부터는 신문팔이를 하고 기차역에서 과자를 팔며 사업 감각을 익혔다. 그런 어느 날 기차 안에서 신문을 팔던 그는 기차의 화물칸을 빌려 화학 실험을 하다가 화재 사고가 발생해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다행스럽게도 그의 주변에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는 인연이 있었다.

에디슨은 우연히 기차역장의 아들을 구해준 덕분에 그에게 전신 업무를 배웠는데, 그 시절의 전신 기술은 새로운 트렌드였다. 오늘날로 치면 인공지능에 비유할 정도의 기술이었다. 전신 기술의 기초를 배운 에디슨은 미국 중서부 지역을 방랑하며 전신 현장에서 차근차근 경험을 쌓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신기사 중 최고 베테랑만 맡을 수 있는 업무인 뉴스를 다루는 ‘전신기사’ 자리까지 올라갔다.

에디슨은 1864년부터 1868년까지 약 4년 동안 전신기사로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매사추세츠 보스턴에 자리를 잡았고, 1868년 에디슨은 잘나가던 보스턴의 ‘웨스턴 유니온’이라는 전보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웨스턴 유니온은 오늘날의 구글이나 애플처럼 대기업으로 빠르게 성장 중인 기업이었다. 하지만 원대한 꿈을 품은 에디슨은 직업발명가의 길을 선택했다. 에디슨의 첫 발명품은 1868년에 완성되었는데, 국회의원들을 위한 ‘전기투표기록기’였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새로운 기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에디슨의 첫 번째 발명품 사업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발명가’ 에디슨은 이런 식으로 그 후로도 몇 차례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파산에 이른 에디슨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뉴욕으로 이주해 길거리를 헤매다가 우연히 일자리를 만났다. 그러나 그 일자리도 오래가지 못하고 해고를 당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869년 마침내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특허를 매각하며 처음으로 5,000달러를 벌었다. 월급 100달러로 살아가던 그에게 이 돈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를 종잣돈 삼아 연구를 거듭했고 그 결과물로 또 특허를 냈으며, 이것을 5만 달러에 웨스턴 유니온 사에 매각했다. 그리고 그 매각 대금으로 연구와 생산 시설을 갖춘 회사를 뉴저지주의 산업도시 뉴어크에 설립했다.

뉴어크는 당시 기계 산업이 발달했던 지역으로 독일ㆍ스위스ㆍ영국 출신의 실력 좋은 기술자가 많았다. 에디슨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모았고, 전신기사로 일하면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전신 기술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그렇게 하여 1875년에 한 번에 네 개의 전신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발명, 즉 ‘사중전신기’를 발명했고, 이 특허를 3만 달러에 매각했다. 참고로 이 특허는 훗날 전신 산업의 창시자 새뮤얼 모스의 전신기 발명 다음으로 중요한 발명으로 평가받게 되며, 그 가치는 당시 가치로 1,000만 달러(오늘날 가치로 2억 2,6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이었다.

‘전기 제국’의 제왕: 1876년 에디슨은 연구와 제조를 겸하는 부산한 기업가의 삶을 관두고 일대 전환을 시도한다. 뉴욕과 그리 멀지 않은 한적한 시골 마을 멘로파크에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소를 설립한 것이다. 당시 언론은 이 연구소를 ‘발명공장’이라 불렀다. 에디슨은 이곳에서 ‘전화기 개량’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다. 하지만 그의 전화기는 완벽하지 않아서 소리가 잘 안 들렸다. 에디슨은 벨이 만든 전화기를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진짜 전화기로 개량했고, 이 전화기 개량 특허 또한 웨스턴 유니온 사에 매각했다.

에디슨은 언제 어디서나 발명을 했으며, 여러 가지 발명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전화기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축음기’ 아이디어를 떠올린 에디슨은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전기’ 못지않게 생애 최고의 발명을 완성한다. 축음기 발명으로 에디슨은 미국과 유럽에서 명성을 얻고 미국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 드디어 미국 사람들도 에디슨이라는 존재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1878년 여름, 미국 서부에서 개기일식을 관찰하고 돌아온 에디슨은 ‘전기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이때부터 ‘전기’에 관심을 갖게 된 에디슨은 멘로파크 연구소 동료들과 함께 ‘백열전구’ 개발에 온 열정을 쏟는다.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영입해 연구에 힘쓸 뿐 아니라, 이 거대한 개발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월가의 투자자들을 설득한다. 그리하여 2년간 39만 5,000달러가 투자되었고, 1879년 12월에 에디슨은 40시간 동안 꺼지지 않는 빛을 내는 백열전구를 대중 앞에 선보였다. 그리고 1881년부터 에디슨은 전기 산업을 태동시키기 위해 발전소, 발전기, 전선, 전구, 전기 소켓 등을 제조하는 관련 기업을 연이어 설립하며 벤처 기업가의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1882년 가을, 뉴욕 맨해튼에 전기 공급용 발전소를 완공함으로써 진정한 전기 시대를 열게 된다.

에디슨의 전기는 획기적이었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전기의 안전성 확보를 위한 발명을 계속했고, ‘전기가 안전한 것’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전기를 지하에 묻어 눈에 보이지 않도록 했으며, 전기 램프를 활용해 길거리 홍보를 펼쳤다. 그런데 전기가 안전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자 그대로 모방하는 기업도 생겨났다. 에디슨은 이들 후발 기업을 상대로 다수의 특허 소송을 제기했고, 후발 기업들은 그들대로 에디슨의 특허를 무효화하고자 했다.

10여 개의 후발 기업 중 대표 주자가 ‘웨스팅하우스 전기’다. 이 회사는 에디슨이 개발한 직류의 약점을 파고들면서 에디슨의 아성을 무너뜨리려 했다. 에디슨과의 특허 소송에서 궁지에 몰린 웨스팅하우스는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와 손잡고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에 도전장을 내민다. 인류 최초의 표준전쟁은 그렇게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 표준전쟁에서 에디슨은 실패한다.

‘교류 전기는 위험한 것’이라는 인식을 세간에 퍼뜨리기 위해 전기충격을 이용한 동물생체실험, 전기를 이용한 사형 집행 제안 등 끔찍한 일까지 감행했으나, 그런 극단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교류가 전기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후 에디슨의 전기 회사 및 계열사들은 오늘날의 제너럴 일렉트릭(GE)으로 통합되었으며, 10여 년에 걸친 특허 소송도 종결되었다. 웨스팅하우스와 GE는 특허권을 맞교환하면서 미국의 산업을 2강 구도로 재편했고, 특히 소송에 패배한 후발 경쟁회사들은 시장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는다. 물론 에디슨은 GE의 출범과 함께 그 회사의 주식과 현금 수당, 그리고 이사직을 제안 받았다. 하지만 그는 GE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실리콘밸리 문화’의 아버지: 전기 산업에서 승승장구하며 전성기를 누리던 1887년, 에디슨은 운영하고 있던 멘로파크 연구소보다 10배나 규모가 큰 연구소를 뉴욕 외곽 웨스트오렌지에 설립했다. 에디슨은 최신 시설과 장비를 갖추기 위해 당시 금액으로 18만 달러(현재 금액으로 490만 달러)를 투자했다. 에디슨은 웨스트오렌지 연구소에서 축음기 개량과 사업화, 영사기 발명과 영화 시장 진출, 철광석 사업 등을 추진했다. 참고로 그는 전기 사업에서 물러난 이후 철광석 산업에 200만 달러를 투자하였으나 수익을 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철광석 사업 과정에서 채취한 광물에서 쓸모없거나 가치가 낮은 것을 골라내는 선광 기술을 시멘트 생산 공정에 적용하여 그나마 일부 투자금을 회수했다.

에디슨은 1891년에 영사기를 최초로 발명하여 대중 앞에 선보였다. 그리고 1918년 에디슨은 음향ㆍ영상 산업을 성공시키며 철광석 산업의 실패를 만회했다. 하지만 콘텐츠는 경시하고 기술에만 치중한 탓에 그의 멀티미디어 사업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편 에디슨은 배터리와 시멘트의 발명 및 사업화에도 도전하여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는데, 이 과정에서 ‘에디슨 제조’, ‘에디슨 배터리’, ‘에디슨 시멘트’ 등의 회사를 설립하였고, 이들 기업과 공장이 웨스트오렌지 연구소의 부속 기관으로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주변에 대규모 산업단지가 형성되었다. 1차 대전(1914~1918) 기간 동안 에디슨의 웨스트오렌지 연구소와 부속 공장에서는 1만 명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으며, 주변 산업단지의 일자리는 4만 개에 이르렀다. 에디슨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1931년까지 1,093개의 미국 특허를 취득했다. 전기조명 및 전력에 관한 특허 389건, 축음기에 관한 특허 195건, 통신에 관한 특허 150건 등이었다.

정리해 보면, 에디슨은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가로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발명 활동에 몰두하였으며, 동시에 특허제도를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 펼쳤다. 당시 어떤 기자가 에디슨에게 당신의 최대 발명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백열등 전력 시스템”이라고 대답했듯, 에디슨의 발명 활동 중 백열전구의 발명과 전력 시스템 연구는 그의 발명 건수에서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요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에디슨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어쩔 수 없이 그도 연구실에서 멀어져야 했고, 1931년 10월 18일, 여든네 살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미국이 ‘개발도상국’으로 취급받던 그 시절, 에디슨은 단순히 발명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발명을 제품화하는 사람, 즉 기업가가 되고자 했다. 그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에디슨은 현대적 개념의 ‘연구소’를 창시했으며, 혁신에 대한 강력한 보상을 통해 더 나은 발명과 산업화를 이끌어냄으로써 오늘날의 ‘실리콘밸리’ 문화를 태동시켰다. 백 년 전을 살아간 혁신가로서 그가 겪은 어려움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고 창업의 꿈을 꾸는 기업가가 직면한 고민과 다르지 않다. 어떤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가. 어떻게 제품을 디자인하고 제조해야 하는가. 어떻게 연구개발비를 조달해야 하는가. 어떻게 변화하는 시장에 대응하고 경쟁기업과 맞서야 하는가. 신제품을 소비자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는가. 혁신가 에디슨의 삶이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에디슨을 혁신가로서 우러르는 것은 그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한 발 한 발 전진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에디슨을 통해 실패를 용인하고 혁신을 장려하며 도전을 격려하는 문화를 익힐 수 있다.



‘에디슨’ 브랜드의 탄생




멘로파크 연구소, 실리콘밸리의 기원


멘로파크 연구소를 만든 핵심인재들: 에디슨은 평생 동안 1,093개의 특허를 보유했는데, 그중 약 600여 건을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확보했다. 에디슨은 멘로파크에서 전화기 개량(말하는 전신기), 축음기, 백열전등, 전력전송 방법 등을 발명했다. 에디슨이 멘로파크 연구소에서 이뤄낸 가장 큰 업적은 역시나 ‘전기 산업의 창조’라 할 수 있다. 그는 이곳에서 백열전구 필라멘트를 비롯해 전기 산업에 필요한 시스템을 창조해냈다. 이곳에서 에디슨이 놀라운 창조와 혁신의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유능한 동료들이 그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멘로파크 연구소에는 유럽에서 온 기능공, 특히 독일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도구 제작, 기계 조작, 기계 설계 방면에서 탁월함을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인 기계 조작 전문가 지크문트 베르크만은 독일에서 온 이민자로, 영어를 거의 못했으나 최고의 기술자였다. 하루는 연구소의 한 직원이 에디슨에게 베르크만이 영어를 못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며 그와는 일을 못하겠다고 했지만, 에디슨은 베르크만의 결과물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며 그를 품었다. 훗날 베르크만은 전화기 개량 사업에서 에디슨의 공동 발명자로서 큰 공헌을 하는 한편, 에디슨이 전기 산업에 뛰어들 때 벤처기업 설립에 동참하며 에디슨의 숨은 조력자 중 한 사람이 된다.

이처럼 에디슨은 능력 있는 인재들을 곁에 둠으로써 자신의 ‘원대한 꿈’을 차근차근 실현해나갔다. 찰스 배철러는 그런 인재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에디슨의 오른팔이자 놀이 친구이기도 했다. 배철러는 영국 맨체스터의 복잡한 방직 기계를 다룬 경험을 가진 직공 출신으로 꼼꼼하고 참을성이 많아 에디슨의 성급한 성격을 잘 보완해주었다. 또한 숙련된 제도공이기도 해서 에디슨의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디어나 막연한 생각을 구체적인 설계로 바꾸어주었다. 예리한 시각을 가졌으며 손재주가 좋고 실험을 이끌어가는 능력과 안목이 좋았다. 에디슨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나 배철러였다.

존 크루에시는 스위스 출신으로 방직 기계와 자물쇠 제작, 기계 운전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능력자였다. 그는 당시 잘나가던 기업 ‘싱거 재봉틀’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입사 제안을 받고도 ‘뉴어크의 유망한 발명가 에디슨’을 선택했다. 그 역시 뉴어크 시절부터 에디슨과 운명을 같이했으며, 멘로파크에서는 기계제작소를 담당했는데, 멘로파크 연구소의 기계제작소는 실험에 필요한 도구와 기계를 제작하는 곳이었다. 그런 점에서 크루에시의 역할은 매우 컸다. 그도 배철러처럼 에디슨의 암호 같은 스케치와 업무 지시를 조수들이 실행으로 옮길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완벽한 도면과 디자인으로 바꾸어놓는 능력자였다. 한마디로 에디슨이 ‘아’하면 ‘어’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계공 존 오트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데, 그는 에디슨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친구로 지냈다. 즉, 50년 동안 에디슨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근무하며 생사고락을 같이한다. 한편 에드워드 존슨은 지금으로 치자면 영업과 마케팅 전문가다. 1882년 가을 에디슨이 맨해튼의 밤을 백열전구로 밝히자, 존슨은 곧바로 백열전구를 이용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발명하고 뉴욕에서 최초로 시연 행사를 열어 ‘크리스마스트리의 아버지’로 통하기도 한다. 그리고 축음기가 발명되자 이 놀라운 기기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도 그가 맡았다. 그는 훗날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의 초대 부사장이 된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만 더 이야기해보자면, 프랜시스 업턴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업턴은 배철러와 크루에시보다 뒤늦게 멘로파크 연구소에 합류했으나, 에디슨의 대표 업적인 ‘전기 프로젝트’ 분야의 일등공신이다.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업턴은 에디슨에게 과학지식에 기초해 기술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을 코치했으며, 에디슨과 주변 동료들에게 전기공학의 기본지식(전기저항ㆍ전압ㆍ전류)을 가르쳤다. 또한 전기 프로젝트의 상업적ㆍ경제적 가치를 고려한 전력전송 시스템을 기획하고 그것을 수학으로 이론화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발전기 개발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에디슨의 곁에는 기술적 배경, 학력, 국적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적어도 멘로파크 연구소에 있는 동안은 에디슨을 향한 충성심이 매우 강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에디슨과 함께 일하면 원대한 꿈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바로 이런 충성심과 믿음이야말로 멘로파크 연구소를 생산성 높은 연구소로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에디슨의 젊은이들 / 에디슨의 방식 -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기: 에디슨의 명성을 듣고 야심 찬 청년들이 계속해서 멘로파크의 문을 두드렸다. 에디슨이 멘로파크로 이주할 당시 연구소 직원은 12명이었는데, 전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던 1878년 10월에는 30명이 되었다. 그리고 1880년 봄으로 접어들 무렵에는 무려 64명에 이르렀다.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일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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