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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업이 가장 쉬웠어요

최인규 지음 | 이코노믹북스
나는 사업이 가장 쉬웠어요



최인규 지음

이코노믹북스 / 2018년 8월 / 284쪽 / 15,000원





어느 순간 나는 노숙자가 되어 있었다



노숙자가 된 나



1999년 1월 지독히도 추운 겨울, 나는 길바닥으로 내팽개쳐져 노숙자가 되었다. 왜, 나는 노숙자가 되어야 했을까? 나는 5남1녀 중 넷째로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내가 다섯 살 되는 무렵, 너무 궁핍한 생활을 하는 부모님에게 논 스무 마지기, 밭 열 마지기를 소작하게 해줄 테니 창원으로 오라며 친척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창원으로 이사를 했다.

학창 시절 당시 우리 집 형편은 내가 대학을 갈 형편이 아니어서 구미에 있는 금오공고에 진학했다. 당시 금오공고에 가면 학비, 책, 가방, 옷 등 학업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국가에서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고2 때 외로움을 견디고자 우연히 대구에 있는 교회를 가게 되었는데, 새 신자를 따뜻하게 환대해 주는 분들의 마음씀씀이에 감동받아 열혈 신자가 되었다. 그렇게 28세까지 10년간 종교에 빠져 살았다. 군복무하면서 모아놓았던 돈과 퇴직금을 쏟아 부으며 10년간 기독교뿐만 아니라 민족 종교까지 종교라는 종교는 다 쫓아다녔다. 마지막에는 유명 이단 종파 교주와 교리를 포함한 여러 문제점을 놓고 공개 토론까지 벌였다. 결국 믿었던 환상이 깨져 그 종교단체에서 나오게 되었다. 계획을 세우고 교회를 나온 게 아니어서 교회를 이탈하는 순간 그냥 세상에 내던져진 꼴이 되었다.

종교 생활 10년은 세상과 단절된 산속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세상 속이지만 가족이나 친구들과 인연을 끊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년을 인연을 끊으며 살고 나니 교회 밖에서 내 한 몸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렇게 난 노숙자가 되었다. 밤에는 노숙을 하고 낮에는 구인광고를 보며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하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다. 결국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몸으로 때우는 막노동을 했다. 한겨울 공사판에서 못도 뽑고 시멘트도 나르면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하루살이가 되었다. 연락할 곳도 없는 철저히 혼자인 ‘나를 지켜 줄 사람은 나뿐이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점점 독해졌다.

종교단체에서 나오면서 입고 나온 검은 점퍼는 노숙할 때 나를 지켜준 옷인데, 한동안 노숙을 벗어나고도 그 점퍼를 버리지 못했다. 처음에는 다시 길바닥으로 나앉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비상식량을 비축하듯 간직해 두었다. 사업이 잘 되고 있을 때도 노숙을 하면서 이를 악물고 결심했던 다짐들을 되새기기 위해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 2010년에 과감히 그 옷을 버렸다. 초심을 버린 것이 아니다. 새로운 꿈을 위해 암울함을 날려 보내려 한 것이다. 노숙은 나에게 꼭 필요했던 삶의 한 과정이었다. 더 멀리뛰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추어야 하고, 실패를 해본 사람이 더 단단한 성공을 이루어 내듯이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봤기 때문에 이만큼 도약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암울한 내 노숙생활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아픔이 추억으로 성숙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사업가 기질을 찾아내다



어릴 적 내 꿈은 사업가였다.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돈이 나의 가장 큰 관심사였고 그것이 행복까지 가져다줄 거라 믿었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공부는 안 했지만 돈 되는 일에는 관심이 많았었다. 그때 건강원을 운영하던 이모가 개구리를 잡아오면 마리당 50원을 주겠다는 말에 학교가 끝나자마자 양파 망을 들고 개구리를 잡으려 다녔다. 짭짤하게 돈 버는 재미에 공부는 더 뒷전이 되었지만 신이 나 있었다. 뱀도 잡으러 다녔었다. 그 당시 뱀탕집에서 독사 한 마리에 2천원을 줬으니 힘들게 개구리 40마리 잡는 것보다 까치독사 한 마리 잡는 게 시간이나 노력 면에서 훨씬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때는 신문 배달을 해 용돈을 벌었다. 가난이 내게 물려준 것 중 하나가 강한 정신력이다. 친구들과 한참 놀고 싶은 나이에 돈벌이를 위해 나가는 내 자신이 처량하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돈 받을 때의 행복감을 떠올리며 견디었었다. 우리 때는 장래 희망이 검사, 판사, 대통령 이런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 장래 희망은 사업가였다.

아들 때문에 해리포터란 영화를 보면서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가 궁금해 검색해 보았더니, 작가 조앤 K. 롤링도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까지 고난과 역경 속에 살았었다. 매번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고 남편의 폭력에 이혼을 한 조앤 K. 롤링은 갓 태어난 딸과 생활보조금 11만 원으로 생활하던 중 달려오는 기차를 보며 마법 기차를 떠올렸다고 한다. 아마 난 그 상황이라면 기차에서 장사해 돈을 벌 수 없을까라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이게 아마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기질의 차이이리라.

“난 뒷받침이 없어서”, “난 능력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으로 주눅이 들거나 기가 죽을 필요 없다. 뒷받침이 없으니, 능력이 부족하니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라고 역발상으로 생각해 보자. 분명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강점이 있다. 그것을 단단한 기질로 만들어 가면 성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



열정이 없으면 젊음이 아니다



준비된 자가 기회를 잡는다



열심히 해도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열심히 했지만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푸념은 좌절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기회가 오지 않는 이유를 분석하고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 가는 대안을 만들어 놓은 사람은 쉽게 실망과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더 많은 수확을 위한 준비 정신 또한 필요하다. 열린 감을 보며 그것에 맞는 자루와 너무 익어 땅에 떨어져 터져 버릴지 모르는 감은 미리 따낼 수 있는 전략 또한 필요하다. 싱싱한 감을 더 담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건 남 탓이 아니다. 계획보다 더 많은 수확이 생길 수 있다는 가정을 무시한 자신의 문제이다. 자신의 그릇은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노숙할 당시 낮에는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일자리를 찾아다니던 중 우연히 나에게 성경을 배웠던 사람을 만났다. 그 당시 프린터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사무실에서 복사용지를 많이 사용하니 복사용지 사업을 해 보면 어떠냐는 정보를 주었다. 종교단체에 빠져 사회와 단절된 시간이 길었던 내가 입사할 곳은 없었기 때문에 복사용지 사업이 돈이 된다는 정보는 아주 좋은 정보였다. 정보를 준 사람은 공급받는 곳과 판매 요령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 주었다. 내게 은인 같은 존재였다.

노숙자였던 내가 가게를 얻어 사업을 시작할 형편은 아니었다. 종교단체에서 만났던 여자 친구가 떠올라 자존심을 버리고 찾아갔다. “내가 사업자금이 필요한데, 다른 사람한테 빌릴 수도 있지만 네게 기회를 주고 싶어.” 내 말을 들은 여자 친구는 기가 막혀 했지만 잠시 고민을 하다 50만 원을 선뜻 빌려줬다. 그 50만 원으로 일단 15만 원 월세방을 얻어 노숙생활을 정리했다. 그리고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복사용지 사업을 위해 사전조사를 다녔다. 그런데 무점포로 한다 해도 지금처럼 렌터카가 성행하지 않을 때라 물건을 실어 나를 차가 필요했다. 또 체면을 무릎 쓰고 여자 친구에게 차구입비를 더 빌려달라고 찾아갔다. 50만 원을 받기 위해서는 200만 원을 더 빌려줘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지만 결국 200만 원을 더 빌릴 수 있었다. 다마스 차와 컴퓨터, 프린터기를 구입했다. 다른 곳보다 저렴하게 판매한다는 전단지를 만들어 발품을 팔아 빌딩 사무실이나 복사용지를 쓸 만한 곳은 어디든 돌렸다. 한두 곳 생긴 거래처가 점차 늘기 시작했다. 주문량보다 많은 복사용지를 싣고 다니다 전화가 오면 바로 배달했다. 내가 거래하는 ‘세원상사’라는 도매상 사장님은 주문량이 늘수록 공급가격을 할인해 주었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신속한 배송에 싼 가격, 고객과 거래처가 폭주할 정도로 늘게 되었다.

취업이 되었다면 복사용지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이지만 그걸 기회로 만들 의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찾아온 작은 우연도 기회로 만들어 간다. 작은 우연도 기회로 만드는 것, 그것 또한 가장 큰 자산이자 경쟁력이라 생각한다.

1인 3역으로 시작한 사업



99년 2월 3일 나의 업무일지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내 사업의 역사가 되었다. 사업 첫날부터 일반 회사에서 하는 방식대로 업무일지를 써 나갔다. 그 당시 나는 사장이자 경리이며 배달원까지 1인 3역을 했다. 내가 기록해 내게 보고하고 내가 사인을 했다. 모양새를 갖추려 그런 건 아니었다. 시스템을 만들어 가고 싶었고 느슨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첫 거래가 이루어진 2월 4일, 그날의 흥분과 기쁨은 지금도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있다.〈총매출 165,000원, 순이익 43,300원, 총 매입 121,300원〉가끔씩 초심을 다지려 그때의 기록들을 들쳐보기도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을 했고, 매달 말일에는 월말 결산을 했다. 그렇게 2006년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기 전까지 꾸준히 기록한 것이 6권이다. 따로 기록한 미수금 관리 대장들과 거래처, 입금자 명단도 보관하고 있다.

이 업계의 왕이 되고자 처음에 ‘크라운전산’이라고 상호를 정하고, 멋지게 왕관을 쓴 모습을 상상이 아닌 현실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매일 써 내려가는 기록들을 보며 다음 달, 다음 해에 대한 목표를 세웠다. 머리에만 두는 목표는 희망으로 그칠 수 있어, 메모해 두고 늘 보며 목표를 체크했고, 잘 되지 않는 부분은 다시 재점검을 했다. 실적 목표는 너무 크게 잡지 않았다. 큰 뜻을 가지지 않으려 그런 건 아니었다. 달성하지 못하면 갖게 되는 실망감이 자신감을 잃게 할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각보다 높은 실적은 또 다른 자신감을 가져 올 수 있다 믿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예상보다 높은 실적을 내며 단단한 회사로 성장시켜야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2006년 인터넷 쇼핑몰을 시작으로 6개월 만에 잉크토너 동종업계 전국 1위를, 현재는 1천 평 규모 복합 매장 2곳과 3백 평 규모의 토너 공장, 연 매출 1백억의 기록을 달성했다. 그렇게 하여 왕관을 그리며 크라운전산이라는 상호를 쓸 때의 꿈을 이루었다. 처음 흙을 퍼 쌓을 때가 가장 힘든 법이다. 쌓이고 쌓이면서 높이가 올라갈 때의 희열을 느껴 본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혜안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내려가고 없어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손해의 부메랑을 이익으로 받다



사업의 핵심, 내가 먼저 손해 본다



인간관계나 사업에 ‘내가 먼저 손해 본다’는 원칙을 가지고 사업 곳곳에 적용하고 있다. 물론 흔히 하는 말로 호구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손해도 감수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는 사람들 없이는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밥을 사기 전 내가 먼저 샀고, 한 번 얻어먹으면 두 번 사려 노력했다.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슬쩍 계산을 했다. 더 많이 샀으니 손해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가 이기적이라 얻어먹는 걸 즐기는 사람일지라도 내색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도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도 보답하려 했었다. 그걸 보며 내 원칙이 인간관계를 리드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을 이용하려 드는 사람도 있다. 그건 그 사람의 그릇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인간관계만 힘들게 할 뿐이다.

밥을 사는 것 외 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준다. 돈 안 들이고 비싼 효과를 얻는 게 칭찬이다. 그리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준다. 가장 힘들 때 자신의 말을 경청해준 사람이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잊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머리보다 가슴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어 누군가 힘들어하면 달려가 시간과 내 정신적 소모를 아낌없이 해주었다. 이 원칙을 매장에도 적용했다.

우리 매장에는 170㎝의 ‘몽당연필’ 모형이 서 있다. 서울에서 문구 관련 박람회를 갔다가 몽당연필을 새 연필로 바꿔주는 행사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는 몽당연필을 가져오면 그냥 교환해 주는 식이었는데, 나는 거기에 아이디어를 내어 몽당연필을 시각화해보면 어떨까 고민했다. 문구를 판매하는 매장에 몽당연필모형이 서 있으면 상징성도 있고 홍보도 될 것 같았다. 연필 모양의 상징물을 매장 안에 세우고 7센티미터 이하의 몽당연필을 가져오면 새 연필로 교환해준다고 홍보했다. 아이들이 직접 넣을 수 있도록 투입구도 만들었다. 아이들은 쓰다 남은 몽당연필을 매장에 가져 와 직접 넣어보며 재미있어 했다. 지금까지 수거된 연필만 대략 3만 자루가 된다.

아이들이 몽당연필을 새 연필로 바꾸어 그냥 가는 일은 드물다. 특히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은 이것저것 사달라며 떼를 쓰기도 한다. 무엇이든 보아야 충동이 생기기 마련이다. 몽당연필을 바꾸러 온 아이들이 충성 고객이 되어 오히려 우리에게 이윤을 안겨 주었다. 아이들이 쇼핑한다고 야단을 치는 부모님들도 몽당연필을 가져다 새 연필로 바꾸는 아이들의 정신 태도에 흡족해하신다. 아이들에게 절약 정신을 주고 부모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드리고 매상도 올리고 일석삼조라 생각한다.

인터넷 쇼핑몰 곳곳에도 이런 원칙들을 적용시켰다. 손해를 보더라도 고객 입장과 만족을 먼저 헤아려 서비스하려 했다. 아무튼 경제적 발달로 고객 수준과 의식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만족에 대한 평가보다 불만족 평가가 더 빠르게 전파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고객 입을 통해 나오는 구전 마케팅, 그것이 기업의 운명을 갈라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회사만이 살아남는다



앉아서 보고하고 서서 보고를 받다



침산동에 위치한 다다오피스 회의실에는 원탁이 있는데, 이 원탁에는 ‘평등’이라는 의미가 있다. 어디를 앉아도 똑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어디가 상석이고 어디가 말석인지 구분이 없어 내 경영 철학이 투영되어 있는 물건이다. 나는 회사 일을 논의할 때만큼은 평등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고 누구든지 편하게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내 철학을 담아 원탁을 놓았다. 너는 사장, 나는 직원, 이런 식으로 형식에 가둬놓으면 사고가 유연해질 수 없다. 회사를 살리는 일에 ‘사장 따로 사원 따로’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권위를 잘 내세우지 않는다. 권위는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이 스스로 세워 주어야 진정한 권위가 된다는 생각이다.

보고를 받을 때도 나는 종종 직원을 찾아간다. 바쁘게 일하는 직원을 불러서 굳이 보고를 들을 필요가 없다. 한가한 내가 가서 물어보면 된다. 그러다 보면 가끔 이상한 광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장은 서서 보고를 받고 직원은 앉아서 보고를 하는 모습이다. 거래처 사장님이 이런 광경을 보고 내가 마치 어린 선배에게 일을 배우고 있는 마흔 넘은 신입 사원처럼 보인다며 농담을 한 적도 있었다. 누가 서고 누가 앉았는지가 중요할까? 중요한 포인트는 서로 대화를 한다는 사실이다. 형식을 차려서 하는 것만이 보고는 아니지 않는가. 앉은 자리에서 얘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그렇게 보고 하는 것이 맞다. 길에 서서도 할 수 있고,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마시면서도 보고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사원들의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직원들이 자유롭게 열정을 토로할 수 있도록 하고, 맘껏 꿈을 펼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그래서 우리 회사 직원들의 표정이 대체적으로 밝고 긍정적이다. 표정이 밝은 사람에게는 뭔가 끌리는 데가 있다. 그런 밝은 에너지는 회사 분위기 전체를 밝게 변화시키고, 나아가서는 고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환하게 웃는 직원들 때문에 나도 늘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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