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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에는 마침표가 없다

오야마 겐타로 지음 | 서울문화사



도전에는 마침표가 없다

오야마 겐타로 지음

서울문화사 / 2017년 5월 / 263쪽 / 13,800원





나의 이력서



지진에서 부흥으로

지진 후 첫 조례 ? 동북 지역을 부흥시키다: [초조한 마음, 멈춰 선 차]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나는 ‘드럭스토어 쇼’에 참가하기 위해 치바 시 전시장에 있었다. 갑자기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순간 ‘진원지는 미야기 현의 먼 바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틀 전에도 본사와 자택이 있는 미야기 현에서 진도 5의 지진이 일어났고, 여진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초조한 기분으로 차 안에서 TV를 켰다. 센다이 공항으로 쓰나미가 밀려드는 장면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미야기 현에는 전화도 되지 않았다. 최고위 간부 4명 중 나를 포함한 3명이 오사카, 나고야, 치바에 출장 중이었다. 모두에게 즉시 센다이로 돌아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나는 4번 국도를 타고 센다이로 가려 했지만 후쿠오카 현 시라카와 역 근처에서부터 도로가 토막토막 끊겨 갈 수 없었다. 이틀 후인 13일 아침에는 도로가 복구되어 드디어 미야기 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가와라 공장, 가쿠다 공장, 센다이 본사 건물에는 큰 이상이 없었지만, 내부 곳곳에 지진이 남기고 간 크고 작은 피해가 보였다.

[“이곳에 남아 일해주길 바랍니다”] 다음 날은 월요일이었고, 직원이 참여하는 조례가 열렸다. 나는 말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 가장 걱정되는 것은 가족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품을 만들어 내보내야 지진이 쓸고 간 동북 지방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을 내보내지 않는 대신 지자체에 3억 엔을 기부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곳에 남아 동북 지방 회복을 위해 일해주기 바랍니다.” 직원들의 얼굴에선 불안의 빛이 사라지고 결의가 차오르고 있었다.

즉단즉결 ? 적자를 각오하고 물자 확보를 서두르다: [유통 시스템을 역회전시킨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미야기 현을 비롯한 여러 지자체에서 문의가 이어졌다. 주민 대피소에서 쓸 생활용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류에 강한 회사 시스템 덕분에 많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는 유통 시스템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각지의 매장들로부터 물건을 끌어모았다. 물론 적자였지만 필요한 상품을 확보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신 대지진을 겪었기 때문에 간이 난로, 봄베, 배터리, 자전거 등이 턱없이 모자라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물건을 확보하려고 서둘렀다.

[절전 수요 예측, LED 증산] 지진의 피해는 미야기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특히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가동이 중단되는 바람에 전력 부족 현상이 심각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문득 지진이 나기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뛰어든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사업이 떠올랐다. LED조명 기구는 전력 소비량이 적지만, 형광등에 비해 가격이 비싸 보급이 잘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절전을 위해 LED조명으로 바꾸는 기업들이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공장과 창고 복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3월 하순쯤 우리 회사의 LED공장이 있는 중국 다렌 시로 날아갔다. 그리고 당장 설비를 증설해 조명 기구 생산 능력을 3배로 키우도록 지시했다. 4월이 되자 LED주문량이 전년도 같은 달 대비 2배로 늘어났고, 5월에는 3배에서 5배로 훌쩍 뛰었다. 만약 미리 생산 설비를 증설해두지 않았더라면 급격한 상황 변화에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흥은 사람으로부터 ? 지역 경제를 떠맡을 사람 키우기: [‘인재 육성 학교’ 설립] 지진 피해지역을 부흥하려면 인재를 육성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업인들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동북 미래창조 이니셔티브’의 발기인이 되었고, 경영자와 기업가를 키우기 위한 교육기관인 ‘인재 육성 학교’를 세웠다. 나는 이 기관의 최고 책임자를 맡아 지금까지 123명을 졸업시켰다.

프로덕트 아웃 경영이 태어나기까지

오사카 출생 ? 가족은 13명, 공부하기 어려운 환경: 나는 1945년 7월, 오사카 현 후지이데라 시에서 태어났다. 내 위로는 두 살 많은 누나가, 아래로는 6명의 동생들이 있었다. 우리 집은 그 후 후세 시(현재 히가시오사카 시)로 이사했고, 내가 다섯 살이 될 무렵 같은 후세 시 안에서 쵸에이지 지구로 이사했는데, 이곳은 나중에 ‘아이리스오야마’를 창업하는 거점이 되었다. 어느 날 집 뒷마당 별채 건물로 플라스틱 기술자가 이사를 왔다. 당시 플라스틱은 오늘날로 치자면 신소재였다. 아버지는 ‘바로 이것이다!’ 하는 생각에 그동안 해 오던 철선 사업을 그만두고, 마당에 플라스틱 공장을 세웠고 ‘오야마 블로 공업소’로 사명을 정했다. 일요일엔 중학생인 나도 공장 일을 도왔고, 그러면서 저절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엔 블로성형이 유행이었는데, 뜨거운 열에 녹인 수지를 파이프 형태로 만들어 금형에 끼운 후, 그 안으로 공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냉각시켜 원하는 모양을 얻는 방법이었다.

고교 시절 ? 19세에 아버지를 잃고, 대를 이어 사장이 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몸에서 암 세포가 발견되었다. 바로 수술을 했지만 너무 늦은 단계였다. 그해 7월 아버지는 42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대학에 못 갔지만 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보내고 싶었다. 또 모두 5명인 공장 직원들의 일자리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버지가 물려주신 공장을 지켜야 했다.

젊음으로 승부 ? 쉬지도 자지도 않고 가족을 부양하다: [‘무조건 예스’ 영업으로 성장]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플라스틱 공장에서 하는 일은 하청이 대부분이었다. 원료를 제공받은 후 주문대로 부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이었다. 수입은 한 개당 10엔 정도 남는 제작비가 전부였다. 한편 우리 회사의 장점은 사장인 내가 젊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조건 예스’의 자세로 영업에 임하기로 했다. 납기나 비용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공장에선 거절하는 주문도 적극적으로 받았다.

[하청업체의 사장으로 끝날 수는 없다] ‘어떻게 하면 공정을 좀 더 간단히 하고 비용을 줄일 수 있을까?’ 나는 날마다 이렇게 궁리하면서 생산 설비를 개선했다. 또 항상 웃고 어떤 주문에도 ‘예스’로 대답했다. 덕분에 주문이 점점 늘어나고 경영은 순조롭게 돌아갔다. 문제는 ‘사람’과 ‘돈’이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채용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우리는 함께 성장해갔다. 사장과 종업원이라기보다는 서로에게 친구 같은 존재였다. 한편 은행에서 융자를 받으려 해도 아직 무명인 회사라 쉽지가 않았다. 담보로 삼을 토지도 별로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음을 발행해 그 자금으로 기계를 샀다. 이때 처음으로 ‘만약 어음이 부도가 난다면…’ 하는 공포를 맛보았다. 이후 30년 정도 어음을 발행하지 않고, 거의 빚도 지지 않는 경영을 하게 된 것은 당시의 마음고생 때문이다.

하청에서 벗어나다 ? 어업용 부표를 만들다: 스물두 살 때 하청업체를 벗어나 제조업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정의감 때문이었다. 당시 발주업체들은 관례상 1년에 한 번은 납품 가격을 깎았다. 만약 거절하면 더 이상 거래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납품 가격을 깎아주어도 그만큼 소비자 가격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점점 더 그들의 갑질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만든 제품이라면, 가격도 내가 정하고 싶었다. 그런데 제조업체가 되려면 독자적인 상품을 만들어야 했다. 무엇을 만들면 좋을까 이리저리 수소문하면서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앞으로 어업용 부표가 전망이 좋을 것 같아.”라고 조언해주었다.

당시 부표는 유리로 만든 것이어서 양식이나 수송 과정에 깨지기 쉬웠다. 게다가 표면에 줄을 걸 만한 곳이 없어 그물로 하나하나씩 싼 후에 줄로 연결할 수 있었다. 나는 유리병을 플라스틱 용기로 바꾸듯 부표도 플라스틱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재뿐만 아니라 디자인도 공부해서 완전히 둥근 공 모양보다 조금 더 안정적인 럭비공 모양 플라스틱 부표를 만들었고, 이 부표에는 줄을 끼울 수 있는 고리도 달았다. 사소하긴 했지만 당시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혁신이었다.

농업용품 히트 ? 미야기에 공장을 세우다: [유행이 지나고, 부도가 찾아오다] 첫 상품으로 진주 양식에 쓰이는 플라스틱 부표를 개발한 것이 1966년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수산업에 필요한 다양한 제품을 개발했다. 그런데 물건이 부족할 정도로 잘 팔리던 부표의 인기는 한 여성의 등장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유럽 여성들 사이에선 차분한 원피스나 정장에 어울리는 진주 목걸이나 귀걸이가 필수품이었다. 덕분에 우리 회사가 만든 진주 양식용 부표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하지만 영국의 트위기라는 모델이 활동적이고 캐주얼한 미니스커트 스타일을 유행시키면서 진주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양식업자들의 파산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나는 유행에만 의존하는 사업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역시나 안정적인 시장을 노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농업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농업인이 주로 쓰던 육묘상자는 나무를 가지고 수작업으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나무로 만든 상자는 수요가 갑자기 많아지자 제때 공급되지 않았고, 습기에 약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플라스틱으로 만든 육묘상자가 개발되기는 했지만 통기성이나 보습성에 문제가 있어 모가 잘 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온실을 만들어 여러 번의 실험을 거친 끝에 플라스틱이지만 모가 잘 자랄 수 있는 육묘상자를 개발했고 큰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되자 당시 육묘상자 생산을 떠맡고 있던 히가시오사카 공장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빌린 땅에 공장을 세우다] 미야기 현의 협력을 얻어 땅을 서둘러 찾았다. 오가와라 역 근처 하천변에 용도가 지정되지 않은 땅이 있었다. 매입 수속을 밟을 시간도 없어 우선 땅을 빌려 터를 닦고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1972년 7월에 예정보다 두 달 늦게 드디어 조업이 시작되어 오늘날의 오가와라 공장이 되었다. 처음엔 직원 150명으로 출발했는데, 그 후 몇 번이나 증설과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오일쇼크 ? 오사카 공장의 문을 닫다: 미야기 현에 진출한 이듬해인 1973년 가을,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자 플라스틱 원료인 원유 가격이 급등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상품을 찾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 만들기 무섭게 물건이 팔려나갔다. 당시 1975년 매출은 2년 전의 2배에 가까운 14억 7,000만 엔에 이르렀다. 원인은 도매상들이 당분간 원유 가격이 오르면 제품의 원가도 오를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사재기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를 정점으로 갑자기 매출이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2년이 지나 가격 오름세가 주춤해졌을 무렵 사재기에 돈을 쏟아부었던 도매상들은 더 이상 자금 압박을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어 하나둘 창고에 쌓여 있던 물건들을 시장에 풀어놓기 시작하자 엄청난 가격 붕괴가 시작되었다. 매출이 해마다 20%, 30%씩 줄어 미야기 현으로 진출하기 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현재의 상태로는 2개의 공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오사카 공장은 아버지가 세운 것이고, 집과 공장이 붙어 있다. 근처에는 친척과 지인, 친구들의 집도 많다. 하지만 미야기 공장은 설비도 최신이고 규모도 컸다. 합리적인 선택만이 결국 회사를 살릴 길이었다. ‘미야기 공장을 남기고, 오사카 공장의 문을 닫자.’ 이것 말고는 길이 없었다.

항상 이익을 내는 경영 ? 직원을 두 번 다시 버리지 않는다: 구조조정을 위해 폐쇄하기로 결정한 오사카 공장에는 직원 50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고개 숙여 사죄하고, 희망자는 미야기 공장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단 4명만 미야기 근무를 원했다. 미야기 공장에서도 150명이던 직원을 반으로 줄였다. 나는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런 괴로운 일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호황일 때 돈을 버는 것보다 불황일 때도 계속 이익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자세는 나중에 아이리스의 기업 이념 제1조로서 명문화했다. 전문을 인용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회사의 목적은 영원히 존속한다. 어떠한 시대ㆍ환경에서도 이익을 낼 수 있는 조직을 확립한다.’

제조와 도매를 함께 하다

마케팅 ? 가정 원예로 ‘수요 창출’: 20대 시절 나는 ‘프로덕트 아웃’, 즉 좋은 상품을 만들어 경쟁력 우위를 차지하는 경영을 추구했다. 이는 제조 회사 경영의 왕도를 걷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불황을 이기지 못하고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흑자를 보는 회사들은 모두 뛰어난 마케팅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즉, 고객의 니즈에 맞춰 서비스와 제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 회사의 장점을 살려 수익성과 장래성이 있는 분야를 구체적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제국데이터뱅크’로부터 일본 내 140만 개 회사의 경영데이터를 구입해 치밀하게 조사해본 결과 원예용품을 만드는 회사 두 곳이 눈에 띄었는데, 규모는 작았지만 매출이 꾸준히 늘고 이익률도 높았다.

기존의 화분은 도자기가 주류라, 무겁고 깨지기 쉬웠다. 만약 플라스틱으로 만들면 가볍고 튼튼하며 색깔도 다양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농업용 육묘상자를 만들던 기술을 살려 그물망 형태의 밑바닥을 갖춰 통기성과 배수성이 좋은 화분과 식물 재배용기를 개발했다. 이 화분은 물을 너무 많이 주어 뿌리가 썩거나 너무 주지 않아 말라버리는 것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어 원예에 익숙하지 못한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영화에 비교하자면 전체 구상, 즉 최종 목적은 ‘수요 창출’이었다. 그려내고자 하는 스토리는 ‘쾌적한 생활’, 광고 등에서 강조할 콘셉트는 ‘직접 키워보는 원예’였다. 당장은 시장이 작지만 앞으로 생활이 풍요로워지면 분명히 커질 것으로 보였다.

새롭게 개발한 화분과 재배용기를 어디서 팔면 좋을까. 종묘상들은 규모가 너무 작고, 씨앗을 파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대형 슈퍼마켓의 원예 코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시 이곳저곳에서 늘어나고 있는 홈센터에 주목했다. 홈센터는 철물, 페인트, 목공재료 등을 주로 파는 DIY 전문점으로, 매장이 주로 교외 도로변에 있어 아주 넓다. “씨앗에 비료와 물을 주고 기르는 것도 DIY입니다.” 내가 이렇게 설명하자, 1980년 나고야의 홈센터 ‘카마’에서 화분과 재배용기를 매장에 들여놓겠다고 했다. 결과는 대히트였다. 참고로 성공을 그늘에서 도운 숨은 주인공은 갓 결혼한 아내였다. 미야기 현에서 자란 아내는 취미가 정원을 가꾸는 것이었다. 아내는 신혼집의 작은 정원에서도 꽃을 키웠다. 나는 원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아내로부터 하나씩 배워나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개발할 원예 상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하나씩 얻었다. 생활 현장이야말로 최대의 연구소다. 생활 속에서 소비자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니즈를 발견한 덕분이었다. 숨어 있는 니즈를 밖으로 끌어내고, 소비자가 구입하기 편한 곳에서 판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시장 창조의 비결’이다.

매출을 2배로 ? 애완동물 열풍에 불을 붙이다: 원예 다음으로 눈을 돌린 것은 애완동물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마당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했다. 강아지를 길러보려고 목재를 사서 작은 개집을 만들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개집은 어떨까? 1987년 마침내 우리 회사는 ‘애완동물은 가족’이란 콘셉트로 애완용품 시장에 진입했다. 우리가 만든 플라스틱 개집은 화사한 색깔을 띠면서 물에 강하고 청결했기 때문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판매 장소는 이미 원예용품이 들어가 있는 홈센터였다. 나는 이번에도 “애완용품도 DIY다.”라고 설명했다.

클리어 수납 - ‘옷은 어디에?’로부터 생겨난 신상품: 1987년 5월 연휴 때였다. 바다낚시를 가려고 친구가 찾아왔다. 나는 5월치고는 쌀쌀한 날씨라 두꺼운 스웨터를 찾았지만, 겨울옷을 이미 치운 후였다. 짐작이 가는 옷상자를 여기저기 열어보았지만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스웨터 사건 이후 나는 크게 깨달았다. 옷 하나를 찾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이유는 수납상자를 만들 때 미처 편리성을 배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찾기에 편리한 수납’을 키워드로 신제품을 개발해보기로 했다. 마침 그때 투명한 폴리프로필렌이 등장했다. 나는 원료 제조업자에게 ‘완성되면 꼭 대량으로 구입할 것입니다’라고 약속했다. 그 후 함께 2년 동안 새로운 제조법을 궁리해 결국 목표했던 가격으로 투명한 원료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안이 보이는 새로운 수납상자를 만들어 공개했더니, 거래처 담당자나 본사 영업직원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토론 끝에 일단 매장에 시험 삼아 몇 개 가져다 두고 고객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래서 기존의 불투명하고 색깔 있는 옷상자와 새롭게 개발한 투명한 ‘클리어 수납’을 나란히 두었다. 2주도 지나지 않아 가격이 비싼 투명 상자의 매출이 기존의 불투명 상자의 매출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신제품에 큰 승부를 걸 만하다는 판단이 섰다. 정식 발매와 동시에 TV 광고도 대량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클리어 수납’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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