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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기업의 탄생

김정호 지음 | 북오션



대한민국 기업의 탄생

김정호 지음

북오션 / 2016년 8월 / 320쪽 / 19,000원





기업가, 산업혁명을 이끌다



김홍국과 허영인, 농업과 프랜차이즈 혁명을 이끌다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가를 꼽으라면 누구일까요?” 2014년 8월 11일 오후, 한 경제신문사 기자에게 받은 질문이다. 그날 나는 ‘대한민국 기업가 열전’ 프로젝트 중 4번째 강의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나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하림 그룹의 김홍국 회장과 SPC그룹의 허영인 회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기자는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하림과 SPC보다 더 크고 잘 알려진 다른 기업도 있는데 어째서 그 두 회사의 회장들을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로 꼽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경영자에게는 관리자형과 기업가형이 있다. 관리자형 경영자는 안정을 추구하고, 주어진 자원들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데 주력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기업가정신의 핵심인 ‘혁신’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관리자형 경영자에게는 기업가라는 이름이 과하다. 반면 기업가형 경영자는 꿈을 이루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한다. 그러다가 실패도 하지만 포기하기보다는 교훈을 얻어 다시 도전한다. 그 도전이 성공했을 때 혁신이 이루어지며, 세상은 혁명적 변화를 경험한다.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같은 사람은 당연히 기업가형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없다. 그 자리를 대신한 2세 또는 3세 경영자 중 이건희, 정몽구처럼 기업가정신이 충만한 사람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그들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잘 알려진 기업 중에서 왕성하게 기업가정신을 발휘하고 있는 경영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김홍국과 허영인은 기업가정신이 충만한 사람이다. 김홍국은 축산의 기업화에 성공했다. ‘하림’이라는 농기업을 만들어 육가공 및 유통을 통합했고, 농업계열화도 이루어냈다. 농업혁명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는 지금도 냄새 없는 돈사, 종돈의 생산성 3배 올리기, 곡물 메이저 되기 등 벅찬 도전들을 이뤄나가고 있다. 한편 허영인은 자영업자들이 제빵 기술이 없어도 편하게 빵집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해 성공시켰다. 프랜차이즈 혁명이라고 부를 만하다. 또 맥도날드가 햄버거로 글로벌 기업이 되었듯이 글로벌 제빵 기업이 되기 위해 미국과 프랑스 등 빵의 본고장으로 진출하고 있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전인미답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홍국과 허영인을 이 시대의 대표적 기업가로 꼽았다.

엉겁결에 나온 대답이었지만, 잘했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쉬운 것도 있다. 만약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이 명단에 두 사람을 더 추가했을 것 같다. 바로 박현주와 이수만이다. 박현주는 대다수의 한국인이 일종의 공공사업으로 여겨온 금융업에서 ‘미래에셋’이란 기업을 만들었고, 뮤추얼 펀드라는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성공했다. 그 결과 한국인의 투자 방식을 혁명적으로 진화시켰다. 이수만은 한국 대중가요의 성격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국내에서만 통하던 한국의 대중가요를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K-POP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주먹구구식이던 대중가요를 치밀한 예측과 계획과 훈련이 지배하는 산업으로 바꾸어냈다.

지난 100년간 많은 기업가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한국 경제 발전의 역사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그 기업가들이 도전하고 실패하고 또다시 일어나서 성취한 역사이다. 그렇게 해서 각 분야에서 혁신이 일어났고 산업혁명이 이어졌다.



조선 상인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다



조선, 상업의 불모지가 되다

조선은 사대부에겐 신세계였지만, 상인에겐 무덤이나 마찬가지였다. 금난전권의 막강한 힘을 가진 시전ㆍ육의전 상인은 무뢰배들을 동원해 난전의 물건을 뺏고 좌판을 박살냈다. 조선은 그렇게 임금과 사대부들만을 위해 모든 백성들이 봉사하게 하는 나라가 됐다. 정치권력만 있고 상업이 없는 곳에서의 삶은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상업의 부재로 궁핍해진 삶의 짐은 오롯이 백성이 짊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통치 질서는 급속히 붕괴해 사농공상의 질서가 느슨해졌다.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 고향을 등지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서 난전을 벌였다. 시전과 육의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으로 그들을 없애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난전들이 뇌물을 대고 고관대작들을 포섭해 시전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1791년 신해년에 정조가 통공을 발표하면서 갈등은 봉합된다. 신해통공은 육의전이 취급하는 6가지 물목(명주, 모시, 비단, 무명, 종이, 생선)만 빼고 누구나 장사를 해도 괜찮다는 내용이었다. 일종의 상업 자유화, 요샛말로 규제 혁파 조치였다. 덕분에 조선의 백성들도 먹고살 만해져 갔다. 김만덕과 임상옥도 이 무렵의 인물이었다.

이걸 거꾸로 생각해보면, 조선시대 때 정조 이전까지는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금지해 일반 백성들은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어 써야 했다는 뜻이다. 정조의 통공정책으로 약간의 변화가 있긴 했지만, 상업을 금기시해온 사대부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이듬해인 1801년엔 천주교 단속을 빌미로 정조 대의 개혁세력을 숙청하고 백성들에겐 천주교인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오가작통법(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그중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인이 발견되면 다섯 집을 처벌한 제도)을 강력하게 실시한다. 정조 대에 조금 나아졌던 백성들의 삶은 정조 승하 후에 다시 피폐해졌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 그 증거다. 그런 시대에 임상옥 같은 상인이 나왔다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 극도의 반상업적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끝을 맺는다. 갑오개혁을 통해 육의전의 독점체계를 폐지함으로써 이제 왕의 허가를 받지 않고도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전에 시전이나 육의전에 상점이 없어도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있었다. 다만 금난전권의 단속을 재빨리 피해야 했기에 대부분 점포를 내지 못하고 등짐을 지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갑오개혁은 등짐장사들이 자기 점포를 낼 수 있게 한 조치인 셈이다. 그들은 기존의 육의전이 있던 종로 1, 2, 3가 옆인 4, 5가에 가게를 차렸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박승직이다. 그는 전국을 누비며 옷감을 파는 등짐장사로, 산간벽지의 아낙들이 짠 옷감을 도시 여인들에게 팔아 돈을 벌게 된다. 갑오개혁으로 상업 자유화 조치가 시행되자 2년 후인 1896년, 청계천 배오개다리 근처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이 상점은 두산그룹의 모태가 되었으며, 두산그룹은 현존하는 한국 기업 중 역사가 가장 길다.

그는 이후 옷감 장사, 화장품 장사, 무역 등으로 더 큰 돈을 번다. 1930년대부터 장사는 아들인 박두병이 맡아서 한다. 이름을 ‘두산상회’로 바꾸고 해방 후 적산기업을 인수해 OB맥주를 하다가 그 자손 대에 중공업그룹으로 변신한다.

갑오개혁으로 육의전 상인들은 치명타를 입는다. 박승직 같은 국내의 신흥 상인들을 비롯해 일본, 청국 상인들과의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몰락의 길을 걷는다. 임금으로부터 받은 독점권에 기대어 땅 짚고 헤엄치기 식 장사를 해왔던 탓에 친절, 신용, 생산성 등 장사에 필요한 덕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육의전 상인 중에 가문의 몰락을 면한 유일한 사람이 ‘백윤수’다. 백윤수는 6개의 물목 중 비단을 취급했다. 일제 강점기에 그의 아들인 백낙승이 상재를 발휘해 재산을 불리는 데 성공한다. 그것이 태창그룹으로 발전하고 해방 이후까지 명맥을 이어가다 4ㆍ19 때 부정축재자로 지목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참고로,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백낙승의 아들이자 마지막 육의전 상인인 백윤수의 손자다.



기업가, 민족의 이름으로 기업을 시작하다



춘원 이광수, ‘대군’을 예언하다

1935년 4월 14일 자 조선일보를 보면, 춘원 이광수는 ‘실업과 정신수양’이란 사설에서 ‘대군의 척후’라는 어구를 사용해 당시 조선의 기업을 소개한다. 이 사설에 등장하는 회사는 ‘화신백화점’과 ‘경성방직’이다.

“상업에서 화신백화점, 공업에서 경성방직의 확장 발전은 결코 한낱 사실만이 아니요, 뒤에 오는 대군의 척후임이 분명하다.”

척후란 전투 시 최전방에서 적의 형편이나 지형 등을 살피는 병사를 말한다. 화신백화점과 경성방직은 1930년대 당시 조선인이 운영하는 기업으로선 가장 컸다. 그런데도 본진이 아니라 척후라고 부른 이유는, 그들보다 더 큰 조선 기업이 많이 생길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한일합방과 더불어 한반도엔 많은 일본인 기업이 등장했다. 1920년대 이전에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기업으로는 조선방직(1917), 경성전기(1908), 조선면화(1913) 등이 있었고, 1930년대 이후에 진출한 기업으로는 조선소야전시멘트(1934), 북선제지화학공업(1935), 장진강수력(1933), 조선맥주(1933), 미쓰코시백화점(1930) 등이 있었다(황명수, 『한국기업가사연구』, 1999, 122~125쪽 참조).

반면, 조선인이 세운 기업의 규모와 숫자는 일본보다 한참 모자랐지만, 그중에서 일본인 기업에 필적할 만한 곳으론 세 곳을 꼽을 수 있다(황명수, 『한국기업가사연구』, 1999, 126쪽 참조). 민대식ㆍ민규식 일족의 회사, 김성수ㆍ김연수 일족의 회사 그리고 박흥식의 기업 정도다.

민대식 일족은 구한말 조선 제일의 부자 가문으로, 토지 관리를 하기 위해 영보합명회사, 계성주식회사 등을 설립했으며 후일 조흥은행(2006년에 옛날의 신한은행과 통합해 지금의 신한은행으로 출범)이 되는 동일은행도 가지고 있었다. 그마저도 일본 기업에 필적할 만한 근대적인 수준의 기업으로 성장시키진 못했다.

김성수ㆍ김연수 형제는 경성방직을 세웠다. 한민족 최초의 근대적 제조 기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경성방직은 조선방직, 동양방직 등 일본계 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만주에도 대규모 방적공장(남만방적)을 짓는 등 근대적 제조기업으로 성공을 이어갔다. 쌀장사로 시작한 박흥식은 종이판매와 백화점 등 유통업에 진출하여 일본 기업들과의 경쟁을 이겨낸다. 춘원 이광수는 이 셋 중 ‘경성방직’과 ‘화신백화점’을 일제 치하에서 성공한 민족기업의 대표로 꼽고 대군의 척후라 이름 붙였다.



기업가, 결핍에서 세상을 구하다



기업가, 정크무역에 나서다

일제 36년 동안 한반도는 일본 경제의 부속적 존재로 여겨졌다. 한반도의 북쪽은 중국과 가까운 데다 지하자원도 풍부해서 만주와 중국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남쪽은 쌀 생산기지로 삼았다. 남쪽엔 공업시설이라고 해봐야 방직공장과 고무신공장, 정미소 정도가 전부였다. 대부분의 다른 생필품들은 일본으로부터 조달해 쓰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해방은 남한의 경제를 일순간에 고립상태로 내몰았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일본과의 교역이 단절됐고, 북한과의 교역도 점차 줄었다. 그로 인해 물자는 극도로 부족해졌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시작됐다. 난세에 영웅이 나듯이 결핍의 시대를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위대한 기업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가장 먼저 시작된 비즈니스는 정크무역이었다. 중국의 정크선과 물물교환 방식으로 한 무역을 ‘정크무역’이라고 불렀다. 정크선이란 중국의 돛배, 범선을 말한다. 정크무역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일본인들이 중국에서 황급히 철수하면서 방치하고 간 물품창고와 군수창고들에 있던 것들이다. 중국인들은 거기서 빼낸 물품들을 정크선에 싣고 인천 앞바다로 들어왔다. 한국의 상인들도 물건을 들고 나가 교환했다. 당시 중국이 갖고 온 물품들은 농산물, 화공 약품 등이었고, 그 대가로 건네준 품목은 말린 오징어와 새우 등이었다. 그렇게 조달된 생필품들은 한국인들이 힘든 시기를 버텨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정크무역마저 없었다면 해방 직후 한국인들의 삶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상인들도 중국과의 정크무역을 통해서 돈을 벌었다.

기업가, 국산화를 시작하다

해방 직후 남한의 기업 활동은 대부분 무역이나 유통과 관련된 것이었다. 제조업으로는 경성방직과 조선방직 그리고 고무신공장 등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전히 한국의 힘으로 일으킨 제조업은 한국전쟁 중에 시작된다. 바로 구인회의 ‘락희화학’이다.

마산에서 포목점과 운수업으로 돈을 번 구인회는 부산으로 터전을 옮겨 전쟁 중에 화장품 판매로 성공을 거둔다. 유리로 된 병뚜껑이 잘 깨져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점을 해결할 방법을 찾다 플라스틱 뚜껑을 만들어 미국에서 플라스틱 사출기를 들여오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 기계로 병뚜껑과 플라스틱 빗, 바가지 같은 제품을 만들어 피난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준 대가로 돈을 벌었다. 한편, 설탕 약품 등을 수입해 팔던 이병철은 제일제당을 설립해서 설탕을 자급한다. ‘수입대체 공업화’의 시작이었다. 제일제당이 성공을 거두자 다른 기업들도 진입해 치열한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설탕가격은 수입품의 1/3 수준이 되고 차츰 설탕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식품으로 변했다. 제분산업도 시작됐다. 미국의 원조 물자인 밀을 원료로 밀가루를 만들었다. 대한제분 등이 설립돼 밀가루를 공급했다. 이병철의 수입대체 산업화는 제당과 제분에 그치지 않고, 제일모직을 세워 국산 모직 양복을 공급했다.

해방 직후 한국인이 사용하던 대부분의 공산품은 외국산 수입품(특히 밀수품)이었고, 물건이 귀해 값이 비쌌다. 수입해서 쓰던 물품을 기업가들이 직접 생산하면서 가격이 낮아지고 생필품의 품귀현상도 해소되기 시작했다. 세상을 결핍에서 구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버는 것, 기업가의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기업가, 세계로 나가 거인이 되다



서성환-서경배, 아름다운 기업을 만들다

한국에서 최고의 부자는 누구일까? 그 명단에 이건희, 정몽구가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자동차가 세계최고 기업의 반열에 올랐으니 말이다. 그런데 2014년부터 서경배라는 낯선 이름이 한국 최고 부자의 명단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는 화장품 회사인 아모레퍼시픽의 오너 경영자다. 최근 이 회사의 주가가 급상승하고, 서경배의 지분율이 높아 최고 부자에 등극하게 됐다. 그는 아모레퍼시픽의 9.08%, 아모레G의 51.3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주가가 최근 폭등한 것은 ‘설화수’, ‘헤라’ 등 이 회사가 생산한 브랜드 화장품의 매출이 중국과 국내 면세점에서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 관광객 증가로 인한 영향이 크다.

과거에 국산 화장품은 대부분 내수용이었다. 샤넬, 랑콤, SK-Ⅱ, 시세이도 같은 외국 화장품들의 경쟁력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우리 물건은 해외 시장에서 잘 팔리지 않았다. 한국의 소비자들도 해외화장품을 선호했다. 국산화장품을 쓰는 경우는 값이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같은 값이라면 외국의 유명 브랜드의 화장품을 선택했다.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한국 여행객들의 가방 속에는 대부분 외국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 이런 화장품 업계에 새바람을 일으킨 기업가가 서경배다. 그는 국산 화장품의 품질을 업그레이드하고, 공격적으로 해외진출을 추진했다. 그가 한국 최고의 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지난 20년 동안 공을 들여온 품질 혁신의 대가인 셈이다.

서경배는 태평양화학을 창업한 서성환의 차남이다. 서성환은 적극적 연구개발과 방문 판매 전략 등을 통해 한국 최고의 화장품 기업을 만들었다. 서성환이 화장품 사업을 하게 된 것은 모친인 윤독정의 영향이 컸다. 해방 전 윤독정 여사는 개성에서 동백기름, 미안수 같은 것을 팔았고, 서성환이 그 일을 거들었다. 해방과 더불어 서울로 온 그는 화장품 회사를 만들고 태평양화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메로디 크림’이라는 신제품으로 제법 자리를 잡을 즈음 전쟁이 터진다. 부산으로 옮겨간 서성환은 남성용 포마드 개발에 착수해 순식물성 기름을 원료로 한 ‘ABC 포마드’를 출시한다. 신제품을 알리기 위해 고깔모자에 연지곤지를 찍고 북을 두드리며 동동구리무를 외치고 다녔다. 불티나게 팔린 ‘ABC 포마드’로 전후 최고의 화장품 기업이 될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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