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를 신은 마윈
왕리펀, 리샹 지음 | 36.5
운동화를 신은 마윈
왕리펀, 리샹 지음
36.5 / 2015년 1월 / 358쪽 / 17,000원
창업의 세계에 뛰어들다 - 하이보번역사부터 차이나옐로우페이지까지
창업 아이템을 선택하다 - 1992년, 최초의 창업, 하이보번역사
1988년, 24세의 마윈은 항저우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항저우 전자공업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마윈의 활약이 대단했기에 학교에서는 부임한 지 5년이 되는 날까지는 사직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5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항저우 전자공업대학에서 마윈은 영어와 국제 무역을 강의했는데, 주입식 교육을 싫어한 그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지식을 쌓기를 희망했다. 그러다 보니 마윈의 강의실에서는 환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학생들은 하나같이 마윈의 강의를 좋아했으며, 강의실은 항상 빈자리가 없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시후 근처에 ‘잉글리시 존’을 설치했고, 이는 통ㆍ번역계에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항저우에서는 대외 무역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민간 기업가가 증가하고 있어 통ㆍ번역 서비스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때문에 수많은 기업가들이 그를 찾아와 통ㆍ번역을 부탁하곤 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겸업은 할 수 있어도 전업은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한편 영어 통ㆍ번역을 겸업하면서 마윈은 주변의 수많은 동료나 퇴직 교사들이 하나같이 집에서 한가하게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전문 번역 기구를 설립하여 이들을 채용해야겠다는 발상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1992년, 마윈은 동료들과 함께 하이보번역사를 설립했다. 창업 초기에는 경영에 온갖 어려움이 발생했고, 결국 자금난으로 인해 다른 수입원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생화와 선물용품이 제법 돈이 벌리는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윈은 조그만 공예품으로 가득한 자루를 메고 항저우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다. 또 1년 넘게 의약품 및 의료기기 외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소규모 장사를 통해 번 돈으로 마윈은 어렵사리 번역회사를 운영했다.
마윈의 동료들은 돈이 안 되는 번역회사는 포기하고 대신 선물용품 회사를 차리자고 건의했지만 마윈은 단호히 거부했다. 애당초 마윈이 번역회사를 설립하게 된 목적이 돈이 아니라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동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회사를 계속 유지해 나가면서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마침내 1995년, 줄곧 적자를 보이던 번역회사가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5년 계약’이 만료된 시점이라 마윈은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했고, 이후에 한동안 전적으로 번역회사 운영에 매달렸다. 그러나 회사가 이윤을 내기 시작하면서 점차 제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경영을 다른 동료들에게 맡기고 더는 회사의 구체적인 업무에 관여하지 않고 다른 창업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창업의 방향을 찾다 - 1995년 5월, 차이나옐로우페이지의 성공과 실패
1995년, 항저우는 안후이에서 푸양에 이르는 고속도로를 건설할 계획이었는데, 미국의 한 투자회사도 이 건설 사업에 참여했지만, 이 회사는 사업이 진행되는 1년 동안 계약한 투자금을 지급하지 않고 계속 미루기만 했다. 마윈은 항저우 정부의 위임을 받아 조정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미국에 도착한 그는 해당 미국 회사가 유령회사였고, 애당초 합작할 의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들의 사기 행각에 마윈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프로젝트를 시찰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간신히 빠져나온 마윈은 문득 회사 동료의 사위인 샘이 시애틀에서 다른 사람과 동업으로 인터넷 회사를 창업했다고 들은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시애틀로 가서 샘의 회사인 VBN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터넷 세계를 목도한다. 당시 인터넷이란 다소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예민한 감각을 지닌 마윈은 이 참신한 아이템이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와 전환점을 가져다줄 것임을 직감했다.
마윈은 그곳에서 누구든지 인터넷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검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중국 관련 소식은 온라인에서 단 한 줄도 검색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에 마윈은 몹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샘에게 자신도 중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여 하이보번역사를 인터넷에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샘도 기꺼이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리하여 샘이 하이보번역사를 위한 간단한 홈페이지를 만들어 인터넷에 올렸다. 회사 홈페이지를 인터넷에 올린 첫날 서로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다섯 명이 반응을 보였다. 이 사업에 분명 비전이 있을 것임을 직감한 마윈은 VBN과 합작하기로 마음먹었다. VBN이 미국에서 기술을 제공하고 마윈은 중국에서 영업을 하는 방식이었다. 일주일 후 그는 아내 장잉과 상의하여 인터넷 회사를 창업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1995년 5월 9일, 중국의 첫 번째 비즈니스 사이트인 ‘차이나옐로우페이지’가 탄생했다. 차이나옐로우페이지 창립 초기에 마윈이 구상한 사업 모델은 미국 VBN과의 합작이었다. VBN이 서버와 기술을 제공하고 차이나옐로우페이지는 중국 내 기업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형식이었다. 보충설명하면, 마윈이 중국 기업들과 계약을 체결하면 하이보번역사가 이 기업들에 관련된 자료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EMS로 미국에 보내고, 미국에서는 이를 받아 홈페이지를 제작하여 인터넷에 올린 다음, 이를 출력하여 중국으로 보내주는 식이었다. 마윈은 팀원들과 함께 거래를 성사시켜 나갔고, 상황이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익을 VBN이 가져가고, 차이나옐로우페이지에 남는 돈은 몇 푼 되지 않았다. 마윈은 점차 독자적으로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96년, 리치의 합류로 마윈의 이런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바로 이때 차이나옐로우페이지는 최강의 적수인 항저우텔레콤을 만나게 되는데, 항저우텔레콤은 차이나옐로우페이지의 성공을 통해 인터넷 산업의 전망이 밝다고 판단하고 이 시장을 선점하기 시작했다. 경쟁을 시작한 지 약 1년 정도 지난 1996년 3월, 마윈은 협력을 선택하기로 하고 항저우텔레콤과 합자회사를 설립하는데, 항저우텔레콤은 지분의 70퍼센트를 차지했다. 합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쌍방 간에 의견 충돌이 생겼다. 마윈은 지분이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언권이 거의 없었고 떠나기로 결심한다.
창업 팀을 선택하다 - 1997년 12월, 대외경제무역 비즈니스정보센터
1997년 12월, 마윈은 대외경제무역부의 러브콜을 받았다. 중국 국제전자 비즈니스센터(EDI)에 합류하여 정보부 총경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대외경제무역부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착수금 200만 위안과 함께 그의 팀에게 30퍼센트의 지분을 주는 등 대단히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마윈은 8명의 팀원들을 데리고 정부 외교 조직에 들어가 중국 전자 비즈니스의 발전을 돕게 된다. 마윈은 1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팀원들과 함께 ‘온라인 광저우수출상품교역회’, ‘온라인 중국상품거래시장’, ‘온라인 중국기술수출교역회’, 그 밖의 중국의 투자 유치 및 대외 무역과 관련된 웹사이트들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마윈이 대외경제무역부에 있을 때 직위는 정보부 총경리였지만, 조직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는 조직 외부의 사람일 뿐이었다. 이익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에서 발언권도 전혀 없었고, 자신과 대외경제무역부 간부들 간에 견해차도 너무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후의 양즈위안이 그에게 야후차이나의 사장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또 1998년 말, 시나도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면서 마윈에게 함께 일할 것을 제의해 왔다. 하지만 마윈은 이 두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동시에 그는 대외경제무역부에도 사직하고 항저우로 돌아가 인터넷 영역에서 두 번째 독자적 창업을 준비하고자 했다.
마윈은 자신이 항저우에서 함께 데리고 온 사람들인 만큼 가장 먼
저 자신의 동료들에게 그런 생각을 알렸다. 그러면서 누구든 대외경제무역부라는 커다란 나무 아래 계속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야후나 시나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원한다면 자신이 직접 추천해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어느 쪽이든 모두 급여가 상당히 높을 것이라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반면 자신과 함께 다시 창업하는 쪽을 선택할 경우에는 한 달 월급이 고작 500위안밖에 안 될 것이고 고달픈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단 몇 분 만에 그들은 모두 마윈과 함께 돌아가 창업하는 쪽을 선택했다.
알리바바, 그 성공의 시작 - 골드만삭스 그리고 손정의
뚜렷한 비전을 확립하라 - 1999년 1월, 호반가든, 알리바바 창립
마윈은 항저우로 돌아온 뒤, 1999년 1월, 팀원들을 집으로 불러 자신의 전자 비즈니스 회사 설립 구상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아주 위대한 일을 할 겁니다. 우리 B2B 회사는 앞으로 인터넷 서비스 모델에 혁명을 가져올 거예요!” 그리고 팀원들에게 앞으로 다 함께 할 일에 관해 설명했다. 마윈과 팀원들은 창업 목표를 확정한 다음,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각자 주머니를 턴 결과 50만 위안이 모였고, 이 돈이 마윈의 두 번째 창업을 위한 초기 자금이 되었다. 자금이 충분치 않다 보니 오피스텔을 임대할 수 없어 호반가든 집 -이 집은 마윈이 대학에 재직할 때 사두었음- 에 사무실을 차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료들은 여기저기 침대가 놓여 있고 잠자리가 펼쳐져 있는 이 집에서 하루에 17~18시간씩 일을 했다. 그리고 6개월 후 마윈과 팀원들은 지금의 알리바바를 만들어 냈다. 마윈이 회사명을 ‘알리바바’로 정한 것은 글로벌 네트워크 회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자본을 이해하는 인재가 필요하다 - 1999년, 차이충신 알리바바 합류
예일대 법학대학원 석사 출신인 차이충신의 알리바바 합류는 그와 마윈의 협상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마윈은 알리바바에 투자할 벤처캐피털을 찾고 있었고 차이충신은 인베스터에이비를 대표해서 마윈과 투자 협력에 대해 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투자 협력은 결국 무산되었고, 협상 나흘째 되던 날 갑자기 차이충신이 마윈에게 인베스터에이비에서 일할 것이 아니라 알리바바에 들어와 알리바바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뒤에 차이충신에게 왜 백만 달러의 연봉을 포기하고 월급이 겨우 500위안인 알리바바를 선택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알리바바에게 끌렸던 첫째 이유는 마윈이라는 사람의 카리스마였어요. 둘째 이유는 알리바바가 아주 강력한 팀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지요.”
2002년, 마윈은 닝보 강연에서 ‘성공은 팀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제가 늘 중국 기업들은 팀 정신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지금의 알리바바가 이를 잘 구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회사의 연설가입니다. 말만 하고 움직이지는 않는 사람이지요. 우리 회사에는 ‘O’ 자가 붙은 네 개의 팀이 있습니다. 우리의 COO인 관밍셩이 우리 회사의 총재를 맡고 있습니다. GE, BTR 등 세계 500대 기업에 드는 회사에서 25년 동안 근무한 바 있는 영국 국적의 홍콩 사람이지요. CFO인 차이충신은 스웨덴의 인베스터에이비에서 투자 업무를 담당했었습니다. 법학 박사로서 캐나다 국적을 가진 타이완 출신 인재지요. CTO인 우죵은 야후의 검색엔진 발명자입니다. 미국 국적을 지닌 상하이 사람이지요. 저는 중국 국적이고 항저우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네 명이 각자 한 부분을 맡고 있고 아주 완벽한 협력을 이루고 있지요. 협력은 팀이 이끌어내는 겁니다.”
투자 유치를 어떻게 취사선택할 것인가 - 1999년 10월, 첫 번째 투자 유치, 골드만삭스알리바바는 1999년 10월 첫 투자 유치에 성공하기 전까지 서른여덟 곳의 투자기관에서 온 제의를 거절했다. 마윈은 전략적인 투자자를 찾고 싶어 했다. 투자자는 알리바바의 장기적 발전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했고, 수중의 주식을 쉽게 팔아 치우지 않아야 했다. 마윈이 투자자를 까다롭게 고르는 동안 마윈의 요청을 거절하는 투자자들도 끊이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곳은 대부분 마윈을 거절했고,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곳들은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이렇게 투자 유치가 지지부진하던 와중에 차이충신이 우연히 골드만삭스의 오랜 지인을 만나 알리바바에 대한 500만 달러짜리 첫 투자를 성사시켰다.
골드만삭스의 협상 조건은 다소 가혹한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윈이 골드만삭스를 선택한 것은 골드만삭스가 세계 유명 투자은행이라는 점이 알리바바의 향후 투자 유치와 언론에 대한 지명도 측면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또 협상에서 골드만삭스도 알리바바에 대해 장기적 신뢰를 가지고 있음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당시 골드만삭스의 투자금 500만 달러는 알리바바가 창업 초기의 한파를 견디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
이상적인 투자자란? - 2000년 1월, 소프트뱅크 손정의
알리바바가 첫 투자 유치에 성공한 뒤 얼마간은 자금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또 다른 유명한 투자자가 문을 두드렸다. 소프트뱅크의 창업자 손정의였다. 마윈과 손정의의 만남은 1999년 10월 31일에 이루어졌는데, 마윈의 얘기를 6분 정도 듣고 난 뒤 손정의는 알리바바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4,0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그가 요구한 회사의 지분은 49퍼센트였다.
그리고 20일 뒤에는 마윈이 손정의의 초청을 받아 도쿄로 가서 투자에 관한 협상을 계속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마윈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① 알리바바는 소프트뱅크 한 곳의 투자만 받는다. 다른 투자자가 들어오는 것은 원치 않는다. ② 소프트뱅크는 주주로서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알리바바의 장기적 계획을 무시해선 안 되고 알리바바의 장기적인 발전을 투자 목적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손정의는 알리바바의 운영 사항에 대해 지나친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 ③ 손정의가 알리바바의 이사직을 맡는다.’ 결국 손정의가 3,0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알리바바의 지분 30퍼센트를 확보하는 것으로 협상이 타결되었다. 하지만 이사직 요청은 거절했고 알리바바의 고문만 맡기로 했다.
그런데 항저우로 돌아온 마윈은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아서 무엇에 쓴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소프트뱅크가 알리바바의 지분을 많이 가져가 임원진들의 지분이 희석되면 발언권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이에 마윈은 곧바로 소프트뱅크와의 재협상에 들어갔다. 마윈은 손정의에게 돈이 너무 많은 것도 어떤 면에서는 안 좋은 일일 수 있으니 투자액을 2,000만 달러로 줄이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고, 손정의는 그에 동의했다. 이렇게 하여 결국 2000년 1월, 소프트뱅크와 여섯 개 투자기관이 연합하여 공동으로 알리바바에 2,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이중 소프트뱅크의 투자분은 당연히 2,000만 달러였다. 참고로 2000년에는 실리콘밸리의 인터넷 거품이 꺼지면서 투자 시장에서 투자를 받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총 2,500만 달러라는 투자 유치 덕분에 알리바바는 곧이어 불어닥친 인터넷 한파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성장, 결집 그리고 전진 - 무협 문화에서 활로를 찾다
세(勢)를 만들다 - 2009년 9월, 서호논검, 기업 문화의 조성
창립 초기에 알리바바를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마윈은 인터넷 업계의 뛰어난 인재들을 항저우로 데려다 무협소설의 ‘화산논검’을 모방한 ‘서호논검(西湖論劍)’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호논검’은 IT 업계의 저명인사들을 서호의 호반으로 초청하여 발전을 위한 대계를 함께 의논하는 자리였다. 당시 알리바바는 아직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회사였지만, 마윈은 회사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진융(金庸, 김용)을 ‘서호논검’의 진행자로 초청했다. 진융은 명망 있는 무협소설 작가로서 중화권 전체에 그 영향력이 엄청난 사람인데, 마윈은 진융의 팬으로서 어려서부터 진융의 무협소설을 통독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