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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마윈의 알리바바다!

둥즈쉬안 지음 | 이레미디어
이것이 마윈의 알리바바다!

둥즈쉬안 지음

이레미디어 / 2014년 12월 / 316쪽 / 14,500원





1부 알리바바의 시작



알리바바, 세계 시장에 화려하게 데뷔하다

알리바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다: 2014년 9월 19일, 알리바바가 뉴욕증권거래소에 정식 상장했다. 처음 상장하는 기업은 상장 당일 해당 기업의 법인 대표가 거래소 안에 있는 큰 종을 울리는 관례가 있다. 그런데 다른 상장 기업의 타종의식과는 달리 이번 상장 타종은 알리바바그룹 이사회 의장인 마윈이 아니라 알리바바의 고객 대표 8명이 했다. 마윈은 “알리바바는 운이 좋은 회사다. 그 운은 고객에게서 나오고, 인터넷에서 나오며,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고, 전 직원이 노력한 결과이다. 과거 15년, 향후 87년, 우리는 계속 이 시대에 감사하고 인터넷에 감사하며 중국에 감사하고 중소기업에 감사할 것이다. 이러한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업을 더 잘해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윈은 또한 “타종의식 때 종을 치는 고객 8명에 주목하길 바란다. 우리가 15년 동안 노력한 목적은 그들을 이 무대에 세우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의 성공을 바라서였다. 우리는 그들이 성공해야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이번 타종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역사상 최초로 기업 대표가 아닌 고객이 종을 친 것이었다. 종소리와 함께 알리바바의 정식 거래가 시작됐다. 베이징 시간으로 2014년 9월 19일 새벽에서야 알리바바그룹은 IPO(기업공개) 발행가를 68달러로 공식 확정했다. 이것은 예상 발행 가격 구간의 상한선이었다. 미국 동부 시각으로 10시가 막 지났을 때, 마켓메이커인 바클레이의 스크린에 80달러와 83달러라는 숫자가 두 행으로 떴다. 20분 뒤 거래소 직원이 “개장 가격 구간이 82~85달러로 상향 조정됐습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나 곧 알리바바의 개장 가격 구간이 84~87달러로 올라갔다. 5분 뒤에는 다시 88달러로 뛰었다. 88은 중국인이 좋아하는 숫자이고, 88달러로 계산하면 알리바바의 시가 총액은 아마존과 이베이를 합친 것보다 더 컸다. 11시 정각이 되자 개장 가격 구간이 91달러로 다시 올랐고 계속 상승하여 마침내 93.89달러로 첫 거래일을 마감했다. 발행 가격 대비 38.07퍼센트 상승한 것이다. 종가로 계산하면 알리바바의 시가는 2,314억 4,0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로써 알리바바는 뉴욕증권거래소 역사상 첫날 시가가 최고인 회사가 되었다. 현재 알리바바그룹은 세계 4대 과학기술 기업이 되었으며, 시가 총액은 구글, 애플, MS의 뒤를 잇고, 페이스북을 넘어 제2대 컴퓨터 기업이 됐다. 이에 따라 마윈도 IPO로 전 세계 과학기술계의 10대 부호 반열에 올랐다.

잘나가는 영어교사: 1988년, 스물네 살의 마윈은 우수한 성적으로 항저우사범학원 영어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마윈은 진로 문제에 부딪혔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1988년은 개혁개방 10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구체제에서 신체제로 전환되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대학을 졸업하면 나라에서 직장을 할당해주었다. 자신이 어느 학교로 발령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윈에게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마윈을 항저우전자공업학원(현재 항저우전자과학기술대학)으로 발령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이것은 마윈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행운이었다. 항저우사범학원 원장은 마윈을 불러놓고 엄숙한 표정으로 “자네를 항저우전자공업학원으로 발령하기 위해 우리가 애를 많이 썼네. 요즘 많은 청년들이 나라에서 정해준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고 있는데 자네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네. 자네에게 우리 항저우사범학원의 명예가 걸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적어도 5년 안에는 그만두지 말게.”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마윈은 항저우전자공업학원에서 영어와 국제무역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이후 마윈은 항저우의 한 야간대학에서 겸직 강사를 하면서 무역업을 하는 사장들과 알게 되었고, 사업에 필요한 인맥의 기반을 쌓았다. 항저우전자공업학원에서 6년 반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마윈은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강사 혼자 떠드는 틀에 박힌 수업을 벗어나 학생들과 교감하면서 학생들이 즐겁고 재미있는 분위기 속에서 지식을 배우고 견문을 넓히도록 했다. 이후 마윈의 파트너이자 알리바바 창업 ‘18나한’ 중 한 명인 한민은 “당시 마 선생님은 책에 있는 대로 수업을 한 적이 없다.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외국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라고 회상했다.

현재 중국 인터넷업계에서 마윈은 언변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는 해외 고객 앞에서도 유창한 영어로 강연한다. 마윈은 “이 재주는 강사 시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연습된 것이다. 지금도 정해진 원고를 갖고 연단에 오르지 않는다. 한번 입을 열면 그냥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 기간 동안 마윈의 최대 수확은 앞으로 동고동락할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현 알리바바의 최고인사책임자인 펑레이를 비롯하여 저우웨홍, 한민, 다이산, 장팡 등 ‘18나한’이라고 불리는 알리바바의 핵심 멤버 가운데 대부분은 마윈의 학생이었다.

인터넷이라고 들어봤나?: 마윈은 어느 날 퇴근길에 영어학과 학과장이 자전거 핸들에 채소 봉지를 걸고 집으로 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자신이 학교에 계속 남아 있으면 결국 학과장과 같은 모습으로 늙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퍼뜩 깨달았다. 그러고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여동생에게 1만 위안을 빌려 총 2만 위안으로 1995년 4월, 중국 최초의 인터넷 비즈니스 회사인 항저우 하이보컴퓨터서비스유한공사를 설립했다. 직원이라고는 마윈 자신과 부인 장잉을 포함해 단 3명뿐이었다. 이때가 차이나텔레콤이 인터넷을 개통하기 4개월 전이었다. 1995년 5월 마윈은 중궈황예(chinapage.com)를 오픈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중궈황예는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업체였다.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중궈황예의 사업은 점점 활기를 띠었고, 1997년 말 웹사이트의 매출액이 무려 700만 위안에 달했다. 알리바바 사이트의 초기 형태는 중궈황예 사이트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 번째 사업 실패 / 팀을 이끌고 다시 항저우로: 1996년 인터넷은 각 언론매체의 핫 이슈로 떠올랐고 신경제에서 가장 유망한 업종이 되었다. 그러자 곧 중궈황예에 도전하는 수많은 적들이 나타났다. 가장 큰 적은 항저우텔레콤이었다. 마윈의 자본금이 2만 위안인 데 비해 항저우텔레콤은 자본금이 3억 위안이었고 강력한 정부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마윈은 생존을 위해 항저우텔레콤의 투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회사 운영을 놓고 항저우텔레콤 측과 갈등이 커지자 1997년 마윈은 마침내 중궈황예를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마윈의 첫 번째 사업 실패였다.

마윈이 중궈황예를 떠나자 베이징에 있는 대외무역경제합작부로부터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당시 대외무역경제합작부는 전국적으로 광섬유 케이블을 깔아 각 지사를 연결하는 내부 네트워크인 다네이왕(大內網)을 구축하고자 하여 산하 중국국제전자상거래센터에 이 프로젝트를 맡겼는데,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해줄 사람으로 마윈을 낙점한 것이다. 1997년 12월 마윈은 부인 장잉과 함께 총 13명으로 팀을 구성하여 베이징으로 갔다. 대외무역경제합작부는 마윈의 팀에 중국국제전자상거래센터 지분의 30%를 주었고 마윈의 팀은 주로 대외무역경제합작부의 홈페이지(다네이왕) 개발을 맡았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난 뒤 마윈은 전반적인 틀을 보다 개방적인 인터넷 형태로 바꿔야 한다고 대외무역경제합작부를 설득하여 마침내 승인을 얻어 합자회사인 궈푸퉁IT유한공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궈푸퉁을 설립한 마윈은 ‘온라인 중국 상품거래 시장’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온라인 중국 상품거래 시장’은 전국 각지에 있는 대외무역경제합작부 지사들이 현지 중소기업의 정보를 인터넷에 올리도록 한 것이었다. 장관의 강력한 지원과 지방 부처의 적극적인 홍보 덕분에 ‘온라인 중국 상품거래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며 막대한 이익을 기록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최초로 기획한 인터넷 대형 전자상거래 사이트였다.

회사는 승승장구했지만 마윈은 이곳이 자신들의 회사가 아니라 정부의 한 부처일 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더욱이 대외무역경제합작부가 처음 약속했던 대로 지분의 30퍼센트를 줄 수 없다고 하자, 1999년 마윈은 마침내 팀원들과 함께 ‘다시 항저우로 돌아가 제로에서 시작해 평생 후회하지 않을 회사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알리바바의 윤곽이 드러나다: 이로써 마윈은 인생에서 두 번째로 창업에 실패했지만, 베이징에 머문 14개월이 완전히 실패한 시간은 아니었다. 궈푸퉁 사이트는 개설 첫해에 수익을 냈다. 이것은 중국 인터넷 초기에는 극히 드문 기적이었다. 또한 마윈과 그의 팀은 당시 중국 대외무역경제합작부의 최전선에서 세계와 대화하고 인터넷 거물과 교류했다. 마윈은 그곳에서 국가 거시경제의 흐름을 몸소 체험했고, 세계 인터넷 산업의 추세를 느꼈다. 인터넷에 구축한 ‘온라인 중국 상품거래 시장’이 개통되자 각지에 있는 중소기업이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를 통해 중소기업의 수요를 파악할 수 있었고, 인터넷을 이용해 세계와 중국의 중소기업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베이징을 떠날 때 마윈은 동료들에게 돌아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둔 사업 모델이 있었다. 알리바바 모델은 마윈의 영감과 직감에서 온 것이고, 5년간의 인터넷업계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1999년 3월, 마침내 마윈은 자신을 포함해 총 18명으로 ‘알리바바닷컴’을 창업했다. 알리바바는 대기업 홈페이지를 제작했고 온라인 상점을 개설했으며 호텔 예약을 하기도 했다. 마윈은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인터넷이 아주 효과적인 도구이며 무역 비용을 절감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윈이 그때 머릿속에 그린 알리바바는 10년이 지난 2009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틀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닷컴 열풍으로 들썩거렸다. 사람들은 앞다퉈 야후와 아마존, 이베이를 모방했고, 온라인 포털, 온라인 서점, 온라인 경매를 복제했으며, 인터넷상의 생존법, 전자상거래 역시 핫이슈였다. 그러나 마윈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전자상거래는 3년 뒤에나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은행과 배송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윈은 미국의 3가지 모델이 중국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B2B(기업 대 기업 간의 전자상거래) 모델을 출시하려고 했다. 당시 중국의 사이트는 대부분 포털사이트였고, B2C(기업 대 최종 소비자 간의 전자상거래)를 하는 사람은 간혹 있었다. 마윈은 인터넷에 있는 상업기관 사이의 거래량이 상업기관과 소비자 사이의 거래량보다 훨씬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업기관 중 전자상거래 지원이 가장 필요한 곳은 수많은 중소기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윈이 생각했던 것은 일종의 독특한 아시아식, 중국식 B2B 사이트였다. 알리바바 B2B 모델의 특징은 중소기업이 대상이라는 점인데, 마윈의 말을 빌리자면 ‘고래는 안 잡고 작은 새우만 잡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의 B2B가 모두 대기업을 주요 고객으로 삼던 시절에, 마윈은 알리바바를 중소기업의 해방자라고 선언했다. 또한 알리바바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출시한 서비스는 전부 무료였다. 단, 전자상거래 전 과정(거래 전, 거래 중, 거래 후)을 지원하지 않고 오로지 거래 전 단계와 정보 이동만 취급했다. 아직 미성숙한 단계인 온라인 거래, 결제, 오프라인 배송은 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정보만 이동시켜 고객이 온라인으로 정보를 교류하고 오프라인에서 거래하도록 한 것이다. 알리바바는 사실상 개방된 정보 플랫폼이었고 가상 전자 시장과 글로벌 상인의 커뮤니티였다. 마윈은 “전자상거래 하면 꼭 온라인에서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관념이다. 전자상거래라고 반드시 거래가 이뤄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거래 전인 이 단계를 서양에 비해 더 잘할 수 있다. 정보와 교류, 통신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터넷이 앞으로 30년 동안 인간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줄 3,000미터 장거리 경주라고 한다면, 미국은 지금 겨우 100미터, 아시아는 30미터 뛰어갔고 중국은 고작 5미터 달려나갔다. 야후나 아마존이 현재 1위로 달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모델이 가장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200미터, 300미터 이후에는 그들이 탈락할 수도 있다. 예전에 넷스케이프가 정말 잘나갔지만 한 바퀴 돌고 나니 그들은 사라졌다. 미래의 인터넷, 전자상거래는 지금 우리가 토론하고 있는 형태가 절대 아닐 것이다. 앞으로 3~5년 뒤 전자상거래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현재 중국이 전자상거래의 제1단계 업무에 적합하다면 우리는 제1단계 업무를 잘하면 된다.”

마윈이 창조한 알리바바 모델은 모호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매우 단순하다. 기업 전용 무료 전자게시판이라고 보면 된다. 알리바바의 이러한 초기 모델은 중국의 상황과 인터넷 시장 발전 단계가 낳은 산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알리바바는 예전의 그 알리바바가 아니다. 알리바바는 청신퉁이라고 하는 전자상거래 서비스를 도입했고 알리페이라고 하는 결제 시스템도 도입했다. 앞으로 알리바바가 또 어떤 형태로 진화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알리바바는 즐거운 청년이다: 마윈은 해외 유학파도 아니고 명문대학이라는 화려한 간판도 없으며 심지어 인터넷 기술에 대한 기초 지식도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입시 삼수 경험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키웠고 또한 외국어 실력과 6년 동안 대학에서 강의한 경험을 잘 활용하여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마윈은 한마디로 목표를 이룰 때까지 쉬지 않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개성이 뚜렷하고 생각한 것을 바로 행동으로 옮길 줄 알며 변화와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의 성공에는 우연적인 부분도 있지만 필연적인 부분도 있다. 마윈이 인터넷을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이 새로운 기술의 미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고집스럽게 추구한 것이 바로 알리바바가 성공한 필연적인 이유이다. 1995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터넷에 대해 전혀 몰랐을 때 마윈은 교육자의 길을 포기하고 사업에 뛰어들어 인터넷 회사를 설립했다. 마윈이 친구들에게 이런 구상을 말했을 때 24명 중에 23명이 반대했고 겨우 1명만 찬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선택을 한 덕분에 마윈은 양호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마윈이 오늘날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법’은 사람과 일에 대해 일정한 규칙을 고수한 것이다. 마윈의 인간적 매력 덕분에 동고동락하는 ‘팀’이 형성되었고 최초의 성공도 인재 덕분이었다. 마윈은 인터넷 회사를 경영하면서 인재를 붙잡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실패라고 생각한다. 마윈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알리바바는 즐거운 청년이다.” 이 말에는 즐거운 마음가짐과 필승의 신념을 늘 간직하며 일하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알리바바의 열정에 감염되다

손정의 회장이 알리바바에 투자한 이유: 알리바바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열정이다. 알리바바 창립자 마윈은 열정의 중요성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1999년 인베스터 AB의 수석투자매니저였던 차이충신이 투자 건으로 알리바바를 찾았다. 몇 번 접촉하는 과정에서 차이충신은 마윈의 생각과 열정에 탄복했다. 그래서 그는 연봉 75만 달러의 직장을 버리고 월급 500위안의 알리바바에 합류했다. 마윈은 열정으로 여러 어려움을 이겨냈을 뿐 아니라 자신과 만나는 사람들도 매료시켰다. 이후 마윈은 더욱 열정적으로 “우리는 102년 동안 지속될 회사를 만들 것이고 세계 3대 사이트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미친 것처럼 보이는 이 생각은 모두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이런 그의 열정을 높이 사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도 단 6분 만에 알리바바를 투자 대상으로 선택하고 2,00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손정의 회장은 마윈의 사업에 대한 열정과 리더십이 자신을 매료시켰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윈과 만날 때면 “마윈, 당신의 독특한 기질을 유지하십시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투자한 제일 중요한 이유입니다.”라고 말한다. 마윈은 확실히 열정적인 사람이다. 마윈을 만났거나 텔레비전에서 본 사람은 모두 그의 열정에 감염된다.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최선을 다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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