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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가 사람들 이야기

이채윤 지음 | 성안북스
삼성가 사람들 이야기

이채윤 지음

성안북스 / 2014년 7월 / 816쪽 / 29,000원





제1부 이병철 시대



삼성이 태어나기까지

사업의 출발, 협동정미소: 이병철은 1936년 마산에서 정미소를 시작하는데, 마산에서 가장 큰 규모로 하기만 한다면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이병철은 그러려면 자신이 가진 자본만으로는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정현용과 박정원을 만나서 사업을 같이 해볼 것을 제안했다. 마침 두 사람도 사업거리를 찾고 있던 터여서 세 사람은 각각 1만 원씩을 출자하고 북마산에 협동정미소라는 간판을 단 회사를 출범시켰다. 협동정미소는 최신 모델의 도정기를 들여놓고 운영한 덕에 순조롭게 굴러갔다. 그런데 일 년 결산을 해보니 1만 5천 원의 결손이었다. 깜짝 놀란 동업자들은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당시 협동정미소는 도정을 통해서만 돈을 벌 수가 없어, 현미를 구입하여 도정을 해서 쌀을 판매하는 쌀 도매상으로서의 역할도 했고 또 그 일이 주요 업무였다. 따라서 쌀 시세에 의해 사업의 성패가 좌우된다. 당시는 쌀값의 등락 폭이 무척 심했다. 게다가 당시의 곡물가격은 인천에 있던 곡물거래소에서 결정했는데, 통신 수단이 별로 발달되지 않은 그 시절 인천 곡물 거래소의 결정을 읽고 거래를 집행하기 때문에 늘 한 타임이 늦었다. 이병철이 분석을 해보니 적자의 원인은 시세를 잘못 읽은 것이었다. 아니 그 타임을 놓친 거였다. 이병철은 쌀값 시세와 관계없이 열심히 도정 작업을 했지만, 쌀값이 오를 때 사서 쌀값이 내릴 때 도장을 거쳐 팔아 거의 매번 손해를 보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때 동업자 중 한 사람인 박정원이 사업에 흥미를 잃고 빠지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정현용은 이병철이 내린 결론을 믿고 계속 사업을 하는 편에 섰다. 그래서 이병철은 이렇게 제안했다. “남은 두 사람이 사업을 그대로 지속하고 1년 후에 이익이 발생하면 자본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준다. 만약 다시 결손이 발생한다고 해도 자본금은 책임지고 돌려준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새로운 각오로 사업에 돌입했다. 지금까지 잘못되었던 점을 개혁하고 경영합리화를 도모했다.

가장 중요한 쌀 거래에서는 전년과는 반대로 오르는 시세에서 팔고 내리는 시세일 때에는 사들였다. 쌀값이 비쌀 때 다른 사람들은 더 오를 거라는 기대심리로 쌀을 사들였으나 그는 오히려 내다 팔았고, 쌀값이 내려갈 때 다른 사람들은 더 내려갈지도 모르니까 내다 팔았으나 그는 오히려 그때 샀다. 그의 작전은 맞아떨어졌다. 이듬해 결산에서 3만 원의 출자금을 빼고도 2만 원의 이익이 발생했다. 당연히 박정원의 자본금을 빼주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 무렵 이병철은 경영자로서 타고난 자질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는 정미소의 50여 명의 직원이 무질서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이대로는 생산성이 증가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작업자들의 업무 진행 과정에 맞추어 임무를 분담해주었다. 출납에서 잡일에 이르기까지 업무를 분담하고 업무 분량에 맞추어 인원을 배치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도였다. 이른바 자신이 맡은 바 직무에서 스스로 책임지게 하는 사업부제의 도입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협동정미소는 작업능률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창업기

1938년, 삼성의 출발: 이병철은 1938년 3월 1일, 대구 서문시장 골목 한 켠 목조건물에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자본금 3만 원으로 시작한 바로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체이다. 이병철의 나이 28세 때였다. 그가 그곳에서 벌인 사업은 만주와 중국대륙을 상대한 무역업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는데, 이병철이 사업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일본 유학시절 사귄 이순근을 지배인으로 앉히고, 전권을 일임하는 지배인 제도 아래서 사업을 운영했다는 점이다.

그는 꼭 자신이 나서야만 할 거액융자나 거액의 자재구입, 수주 외에는 인감관리와 어음발행 등의 모든 회사업무를 이순근에게 맡겼다. 이병철은 사업가가 큰일을 하려면 내부의 일은 신임하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시장의 흐름과 세계정세의 추이에만 신경을 쓰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삼성상회는 예상대로 순조롭게 성장했다. 대구 근교에서 수집한 청과물과 포항 등지에서 들어온 건어물은 중국과 만주에서 매우 환영받는 상품이 되었다.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정부는 외화를 절약하고 경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그렇잖아도 수입업자들 간의 과도한 경쟁으로 무역업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이병철은 발 빠르게 이에 대처해서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이병철은 1953년 제일제당을, 다음 해인 1954년에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생필품 등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그 시절에 삼성 공장에서 만든 물건들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은 정부의 수입대체산업 지원책과 맞물려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이병철은 한국 최고의 부자 자리에 올라서면서 최초로 재벌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성장기

한국경제인협회와 울산공업단지의 탄생: 1961년 8월 16일, 이병철은 한국경제인협회(지금의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창립회원은 12명의 경제인이었다. 곧이어 7명이 더 들어오고, 11월에는 20여 명이 들어와 회원은 모두 40명이 되었다. 이 무렵 이병철은 산업계의 총의를 모아 국가최고재건회의에 한 가지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대규모 공업단지를 조성해서 기간산업공장을 한곳에 유치하자는 안이었다. 이병철은 회원들과 함께 적합한 산업단지가 될 장소를 찾았다. 후보로 올라온 곳은 물금, 삼천포, 울산 등 세 군데였는데, 그중에서 울산이 가장 알맞은 장소라는 결론이 나왔다. 서울로 올라온 이병철은 ‘울산공업단지 건설계획서’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출했다. 그것을 읽은 박정희는 무척이나 흡족해했다. 계획에 타당성이 있고 이 계획이 그대로 실천되면 경제건설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병철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서울과 울산을 자주 오가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자신의 전용 경비행기까지 제공하며 독려했다. 마침내 1962년 2월 3일, 5ㆍ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지 8개월여 만에,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이 거행됐다.

새로운 선택, 전자산업에 뛰어들다: 한국에는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의 해외 기업 유치 정책 덕분에 저임금에 비해서 풍부한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한 외국 기업들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이 가운데 전자업체가 많았지만, 대부분 한국을 조립 생산 기지로만 이용했다. 그런데 이병철은 미국과 일본을 둘러보고 경제의 흐름을 분석한 결과 독자적인 전자산업을 일으켜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병철은 즉시 일본으로 날아가 산요전기의 이우에 토시오 회장을 만났다. 이우에 토시오는 이병철이 전자산업으로 진출하겠다는 결심을 밝히자 산요의 전자단지로 안내했다. 이병철은 40만 평에 달하는 산요의 전자단지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병철은 국내로 돌아오자마자 전자단지를 만들 부지매입에 착수했다. 그는 산요보다 한 평이라도 더 큰 공장을 짓기 위해 수원 매탄동에 45만 평의 부지를 사들였다. 그리고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법원에 설립등기까지 마쳤다. 이렇게 해서 삼성전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때마침 1969년 1월 28일 정부는 전자공업 진흥법을 공포했다. 삼성전자를 설립한 이후 이병철은 라디오, TV에서부터 반도체, 컴퓨터 등의 첨단산업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등에도 발 빠른 행보를 계속하면서 삼성의 세계화를 위해 진력했다.

도약기

경공업에서 유통서비스, 첨단사업으로: 삼성전자의 설립으로 이병철은 한국 기업사의 또 다른 한 획을 긋게 된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것은 삼성의 반도체산업 투자이다. 이 과감한 결단과 투자는 이병철이 지닌 대담한 기업가정신과 기업 이니셔티브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결단으로 ‘소비재 중심 재벌’, ‘이익만 추구하는 장사치’라는 오명을 깨끗이 벗어던지고, 삼성을 세계 일류 기업군에 들어서게 하는 첫발을 내디뎠다.



제2부 이건희 시대



제2의 창업

46세, 외로운 선장: 1987년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 타계하고 창업주의 3남이자 그룹 부회장인 이건희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많은 사람들이 과연 46세의 젊은 회장이 한국 최고의 기업집단을 잘 통솔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건희는 삼성호를 넘겨받은 이듬해인 1988년 새롭게 각오를 다지며 제2창업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그룹의 21세기 비전으로 제시하며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그는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그때까지 분리되어 있던 전자, 반도체, 통신을 삼성전자 산하로 합병하고, 유전공학, 우주항공 분야의 신규 사업을 추진하는 단안을 내렸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나도 50년 동안 굳어진 삼성의 체질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삼성의 가장 큰 병폐는 삼성이 제일이라는 자만에서 나오는 이른바 ‘삼성병’이었다. 삼성인들은 삼성 제품이 세계 시장에서는 싸구려로 찬밥 대접을 받고 있는 것도 모르고, 국내 제일이라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서 개선의 의지조차 보이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건희는 답답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구체적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비서실을 장악하다: 이건희의 비서실 개혁은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인 1990년 시작되었다. 먼저 비서실의 수장 소병해를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전출시키고, 15개에 달하는 비서실 조직을 10개로 축소했다. 그리고 그해 정기 인사를 통해 총 20명에 달하는 비서실 임원 대부분을 교체했다. 이렇게 하여 이병철의 사람들이 이건희의 사람들로 물갈이 되었다. 비서실을 장악한 이건희는 1991년 말 삼성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대적인 인사 조직을 단행했다. 무려 217명을 임원으로 승진ㆍ발령했는데, 생산기술 부문에서 38명, 해외 부문에서 17명에 이르는 기술 개발과 국제화에 역점을 둔 인사개편이었다. 바야흐로 이건희 체제의 개막을 알리는 인사개편이었다.

아버지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단숨에 삼성그룹을 장악해나간 그해 1992년 삼성이 거둔 성과는 바람직했다. 3월에 삼성물산이 국내 최초로 매출 10조 원을 돌파했고, 삼성전자는 10.4인치 TFT-LCD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4월에는 삼성전기의 포르투갈 공장이 생산을 시작했고, 5월에는 삼성전자 제품 가운데 컬러텔레비전 등 4개 제품이 세계 명품으로 선정되었다. 7월에는 삼성전자가 영국 빌링엄에 컬러텔레비전 공장을 건설하고, 8월에는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했다. 11월에는 삼성전자가 중국에 생산 법인을 설립했으며, 11월 30일에는 삼성전자가 제조업체 최초로 수출 40억 달러를 돌파했다. 또한 이건희가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거둔 경영 성과도 괜찮았다. 취임 첫해인 1988년에는 삼성그룹의 총 매출이 20조 1000억 원, 총 세후이익은 3411억 원이었다. 그런데 1992년의 총 매출액은 38조 2100억 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수출액도 1987년의 11.25억 달러에서 1990년에 17.3억 달러 그리고 1992년에 18.6억 달러로 꾸준하게 늘어났다.

삼성가의 재산 분할: 이건희는 삼성이란 조직을 어느 정도 다스려놓고 나서 다음번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체제를 굳히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자신의 형제자매들이라고 생각했다. 이건희는 가족들의 불화는 곧 치명적인 경영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하고 형제자매들과의 빅딜을 성사시키기로 작정했다. 참고로 이병철은 3남이 경영 대권을 물려받게 될 경우 벌어질 수 있을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에 미리 대비해두었다. 그는 경영상속을 위해 재산의 93.6%를 삼성그룹에 귀속시키고, 나머지 6.4% 정도를 다른 자녀들에게 물려주되 아예 기업을 독립시키는 분가원칙을 취한 것이다.

삼성 분할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건 1995년 2월, LA에서 열린 가족 모임에서였다. 이날 모인 가족은 이건희를 비롯해서 장녀인 이인희 한솔제지 고문, 막내인 이명희 신세계백화점 상무 그리고 이맹희의 아들이자 장손인 이재현 제일제당 상무 등이었다. 큰 잡음 없이 그 복잡한 삼성의 재산이 정리된 것은 이병철의 잘 준비된 재산 분할과 자손들의 양보와 타협 덕택이었다. 이날 열린 가족회의에서 제일제당은 장남인 이맹희 집안으로 넘어가서 오늘날의 CJ그룹이 되었고, 제일합섬은 새한미디어에 편입되어 이창희의 부인 이영자와 아들 이재관에게 넘어갔다. 이로써 삼성은 전자와 물산, 중공업, 건설, 전관, 전기, 항공, 신용카드, 호텔신라 등 24개의 계열사가 남았다.

신경영 선언에 대하여

신경영의 결실: 신경영의 개혁이 시작되고 2년 정도가 지나자 그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계 일등기업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아서 돌아온 삼성인들은 대상 기업의 장단점을 낱낱이 분석해 삼성만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렇게 개발한 핵심기술은 우수한 품질의 상품 생산으로 이어져, 삼성의 국제경쟁력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선언으로 시작된 이건희의 신경영은 천재육성론, 스포츠 마케팅, 골프경영학, 문화경영, 윤리경영 등 또 다른 경영철학을 많이 낳았다. 참고로 삼성인들은 IMF 외환위기 이전부터 개혁과 혁신이라는 방향을 설정하고 실천해나갔으며, 그때부터 삼성 경영의 화두는 ‘선택과 집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건희의 위대한 선택: 모든 사업의 성공에는 선견지명과 운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지금 삼성전자가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플래시메모리의 경우 한 천재의 전문적 안목과 직관력 그리고 운이 따라준 경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1998년이 저물어갈 무렵의 일이다. 당시 상무였던 황창규는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는 경영위원회에서 ‘낸드(NAND) 플래시에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을 몇 주째 펴고 있었다. 플래시메모리는 전원이 끊겨도 데이터를 보존하는 롬의 장점과 정보의 입출력이 자유로운 램의 장점을 모두 지니고 있어 쓰임새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반도체이다. 기본 회로의 특성에 따라 코드저장형인 ‘노어(NOR)’와 데이터저장형인 ‘낸드(NAND)’ 두 가지로 나뉘는데, 당시는 인텔이 노어 방식의 플래시메모리를 일찍 개발해서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낸드 방식은 개발 초기 단계에 있었다.

노어플래시는 읽기 속도가 빠른 장점을 갖고 있어서 소량의 핵심 데이터를 저장하는 데 많이 사용되는 반면, 낸드 플래시는 저장 단위인 셀을 수직으로 배열해 좁은 면적에 많은 셀을 만들 수 있어서 용량을 늘리기가 쉽지만 속도가 다소 느리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창규는 낸드 플래시의 개발 가능성과 시장 확대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낸드 플래시가 휴대형 정보기기에 쓰이기 적합한 제품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고, 앞으로 개발 여하에 따라 용량이 큰 멀티미디어 데이터를 저장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당시 삼성 수뇌부는 물론 구조조정본부도 황창규가 주장하는 새로운 낸드 방식에 대한 시장 향방을 점치기 어려워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황창규는 속이 탔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황창규의 예측대로 1999년 이후 플래시메모리 시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삼성은 재빠르게 이 분야의 기술 개발에 나섰다. 1998년에 128M를 개발한 데 이어 1999년에 256M, 2000년에 512M 제품을 연이어 선보였다. 삼성이 이처럼 빨리 성장하자 흥미롭게도 2001년에 도시바가 삼성에 낸드형 플래시메모리 합작 개발을 제안했다. 도시바는 낸드 플래시메모리에 대한 다수의 기술 특허를 보유하고 있었고, 낸드 플래시메모리 시장을 45%나 점유하면서 단연 선두를 달리는 업체였다. 도시바가 삼성에 사업 합작을 제의한 배경은 삼성의 막대한 자금을 활용하는 동시에 삼성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미래의 경쟁자를 사전에 제어하겠다는 포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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