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를 팝니다
선현우 지음 | 미래의창
한국어를 팝니다
선현우 지음
미래의창 / 2014년 7월 / 256쪽 / 13,000원
수줍은 비보이, 세상과 만나다
모범생의 쓰라린 ‘첫 경험’
나는 EBS 교육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어도 손색없을 만큼 건전하고 성실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자부한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고교 진학에 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시키는 건 공부든 숙제든 착실히 하려고 노력한 결과, 내 성적은 준수한 편이었고, 어느 순간 나는 왠지 공부를 정말 특출하게 잘하는 아이들, 소위 영재들만 갈 것 같은 ‘과학고 준비반’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범생이 정신’을 가감 없이 발휘해 주어진 미션에 최선을 다해 준비한 끝에 맞이한 운명의 시험 날,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최대한 많이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시험 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결과는 불합격!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원어민 앞에서 얼어붙은 입
과학고 진학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목적 없이 착실하기만 해서 학교에서 시키는 건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하게 영어에 대한 흥미가 생기게 된 데는 정부가 시행한 교육정책의 공이 컸다. 당시 교육부에서 전국에 파견하기 시작한 ‘원어민 영어교사’가 드디어 광주의 우리 학교에도 찾아온 것이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방학이었지만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배가 아팠다. 할 수 없이 조퇴를 하려고 교무실에 갔더니, 문 앞에 금발의 외국인이 서 있었다. 그때 무슨 배짱이었는지 외국인과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막상 외국인 선생님 앞에 서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게 아닌가! 원어민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반갑게 웃으며 “Good afternoon” 하고 인사를 건넸지만, 얼어버린 내 입에서 간신히 튀어나온 말은 “안녕하세요(Hello가 아니다!)”였다. 외국인 앞에서 영어를 한마디도 못 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나머지, 배가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집에 가자마자 영어 문제집을 펼쳤다.
나만의 영어 공부법은 바로 ‘채팅’
원어민 선생님과의 충격적인 사건 이후 영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내가 가장 중시했던 부분은 바로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궁리를 하다가, 한영사전과 영어 문법책을 구해서 평상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모두 다 영어로 바꾸어보기 시작했다. 일기를 영어로 써보는 것은 물론이고, 낙서도 영어로 했고, 국사, 수학, 생물 시간의 필기도 할 수 있는 부분은 영어로 해보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머릿속으로 ‘여긴 지금 미국이야’라고 상상하면서 내가 겪는 모든 상황을 영어로 표현해보고는 했다. 당시 내게 광주 충장로는 뉴욕 5번가였고, 근린공원은 센트럴파크, 분식집은 레스토랑이었다. 겉멋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내 생각을 영어로 ‘표현’해보는 것에서 오는 기쁨은 굉장했다. 이렇게 몇 달을 지내고 나니, 50명의 다른 학생들과 밤늦게까지 교실에 갇혀 공부하는 것이 답답해졌다. 밤 열시가 다 되도록 자율학습을 해야 하는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신분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영어 공부에 ‘올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새 담임선생님을 열심히 설득했고, 결국 나는 야구부원을 제외하고는 전교에서 유일하게 저녁 여섯 시에 하교하는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매일 저녁, 방문을 살며시 걸어 잠그고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한 은밀한 ‘접속’을 시작했다. 독학으로 영어를 익히며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서툰 영어 실력으로 만든 문장이 문법에 맞는지, 정확한 표현인지 등을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인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외우려니 영 재미도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 누군가와 영어로 대화를 나눌 수 없을까 궁리하게 되었고, ‘선현우표 콩글리시’를 부끄럽지 않게 써먹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을 찾아냈다. 바로 모뎀 시대를 풍미한 하이텔의 영어 채팅방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잽싸게 집으로 뛰어 들어가 PC 통신에 접속했고, 수업 시간 내내 만든 수십 개의 영어 문장을 채팅방의 ‘영어 신’ 형님 누나들에게 날렸다. 그리고 누군가 문법을 교정해주거나 정확한 표현을 알려주면, 다른 채팅방에 입장해서 내가 원래부터 사용하던 표현인 양 써먹었고, 어쩌다 잘한다는 칭찬이라도 한마디 듣는 날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경시대회 1등, 대학까지 쾌속 진학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웠는데, 어느 날 프랑스어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어떤 ‘경시대회’가 있는데 거기 나가서 1등을 하면 프랑스에 보내준다고 했다. 당시 프랑스어를 제대로 구사할 줄 몰랐지만 ‘고등학생들이 프랑스어를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무조건 참가!”를 외쳤고, 당연히 예선 탈락했다. 그래도 한 가지 소득이 있었는데, 프랑스어 말고도 영어 경시대회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다음 해 영어 경시대회에 참가했다. 고등학교 대표 선발전을 거쳐 광주 예선에서 광주 대표 일곱 명 중 한 명이 된 나는 마침내 서울에서 열린 경시대회에서 1등을 해버렸다. 덕분에 교육부 장관상까지 받았다. 그런데 ‘전국 1등’이라는 타이틀은 내게 또 다른 소득도 안겨줬다. ‘외국어 특수 재능 보유자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하고, 『영어 하나로 대학 간다』라는 책도 내게 된 것이다. 당시 그 책에는 영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등 외국어 실력만으로 대학에 들어간 일곱 명 학생들의 이야기가 담겼는데, 내 사례가 ‘현우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전공은 묻지 마세요
영어 특기생으로 서양어문학부 입학해 1년을 보낸 뒤, 전공을 결정할 시기가 찾아왔다. 나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엉뚱하게도 ‘불어불문학과’를 선택했는데, 이미 영어는 어느 정도 익혔기 때문에 새로운 언어를 배워보고 싶기도 했고, 당연히 영문학과를 선택할 것으로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대학 강의들은 하나같이 재미없고 지루했다. 그동안 억눌러온 자유와 낭만을 한 방에 터트려도 모자랄 시간에 또다시 고등학교 때와 다를 바 없는 주입식 교육을 받아야 한다니. 내 관심은 자연히 전공 수업에서 점점 멀어졌고, 학점은 펑펑 펑크! 그러다가 비보잉(B-Boying)에 빠지면서 공부와 아예 담을 쌓게 되었다. 결국 1999년도에 입학해서 2009년에 졸업해야 했다. 춤을 추느라 F 학점을 열한 개나 맞아서 어떻게든 재수강을 통해 학점을 메꿔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졸업이 한 학기 남은 2008년, 나는 회사를 준비했다. 2006년부터 자발적으로 블로그와 싸이월드, 유튜브에 올린 외국어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오디오 파일과 비디오 파일을 직접 만들어 올렸는데 반응이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 있는 한 온라인 외국어 교육 업체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그 회사와 몇 개월 정도 일했는데 하루에 두 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150만 원을 받았으니 보수는 꽤 높은 편이었다. 돈 버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기보다 일하는 게 좋았다.
그 밖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이것저것 찾아보면 또 끊임없이 무언가가 있었다. 급기야 나중에는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교정, 교열에서 제작, 필름교정, 인쇄감리까지 정식 직원이 하는 모든 일을 거의 섭렵했다. 책의 판권에 내 이름이 나오는 게 너무 신 나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일에 빠졌다. 해외 도서전까지 다녀왔으니 이 정도면 아르바이트치고는 ‘꿀 알바’였던 셈이다. 대학 시절에 경험한 이 모든 일이 내게는 회사를 시작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심지어 비보잉까지도 말이다.
출판사 알바로 해외 출장까지
제대 후 뭔가 재밌는 일이 없을까 싶어 학교 게시판을 훑어보는데, 출판사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들어간 출판사에서는 영어 교재를 만들었는데, 정신없이 교재 한 권을 만들면 2개월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러면 또 다음 책을 맡고, 그렇게 내가 만든 책이 하나씩 쌓여 열 권 정도가 되니 어느덧 2년이 흘렀다. 알바생이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게다가 적은 보수로 묵묵히 일했던 것이 대견했던지 회사에서는 나를 사장님 출장길에 끼워 일본에 보내주었다. 출장의 목적은 당시만 해도 영어 교재 출판에 한국보다 앞서 있었던 일본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 머문 나흘 동안 나는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글로벌’한 기운을 맛보았다.
일본에 갔다 온 뒤로 나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뭔가 보답해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 같다. 사장님도 ‘얘가 어디 갔다 오면 일을 더 잘하는구나’라고 생각하셨던 건지 아니면 당시 주머니가 두둑하셨던 건지는 몰라도, 다음 해에는 나를 세계 최대의 도서박람회인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보내주셨다. 더 큰 세계를 경험하고, 느낀 것을 업무에 녹여달라는 주문과 함께였다.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 유럽 땅을 밟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사장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프랑크푸르트 출장에서 돌아오던 내 가슴속엔 출판사 업무에 대한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다시 유럽에 갈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일상에 복귀해서도 호시탐탐 유럽으로 떠날 기회를 찾던 나는 어느 날 ‘유럽 인턴십’ 공고를 발견했다.
해외 인턴십으로 유럽 여행…할 줄 알았지?
당시 내 눈에 띈 것은 영국의 다국적 배낭여행 회사가 8개월짜리 계약직 직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의 공고였다. 버스로 유럽 전역을 여행하는 패키지 상품을 판매하던 회사였는데, 단체 배낭여행객들을 관리하고 도와주는, 이른바 ‘투어 보조’를 뽑는 것이었다. 당장 지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600명이 넘게 지원했고, 1ㆍ2차 면접에서 대부분 탈락했다. 최종적으로 단 네 명만이 합격했는데, 그 네 명 가운데 하나가 나였다.
정식 근로계약 전에 먼저 한국 지사에서 한 달 동안의 인턴 과정을 수료해야 했다. 인턴 업무는 생각보다 훨씬 고됐다. 결국 인턴 기간 중 네 명 가운데 두 명이 실무 능력을 평가하는 최종 과정에서 탈락했고, 나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출국을 3주가량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본사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한국인이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데 취업비자가 필요한지 몰랐다. 결국 너를 채용할 수 없게 됐다”는 거였다. 유럽에서 생활하며 겪을 수 있는 수많은 경험과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의 만남, 차곡차곡 월급통장에 쌓였을 유로. 이 모두가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회사도 양심은 있었던지, 대신 왕복 비행기 표를 끊어줄 테니 관광비자라도 얻어 짧게나마(6일) 투어에 참가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한 달 동안 소처럼 일한 게 억울해서라도 일단 비행기 표는 받기로 했다.
한국을 이렇게 몰라?
8개월간의 모험이 1주짜리 체험학습으로 둔갑해버렸지만, 그 짧은 기간 유럽에 머물며 보고 느끼고 겪은 수많은 경험은 우물 안, 아니 대한민국 안 개구리였던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가장 처절하게 깨달은 것은 유럽에서 한국의 존재감이라곤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영국 할머니부터, 한국이 어디쯤 위치한 나라냐고 물어보던 브라질 친구, 심지어 ‘텔레비전’이 뭔지 아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외국어 학습 비결을 열심히 공유하던 내가 반대로 한국과 한국어를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창업일까?
내게 한글을 배우겠다고?
유튜브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게 되면서 사소한 일상도 동영상을 찍어 공유하는 게 취미가 되었다. 한번은 다른 외국어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스페인어를 하는 분 중에 서울에 계신 분은 연락주세요.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어요”라는 내용의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많은 외국 친구들로부터 “나는 당신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댓글이 달렸다. 어라, 내게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한국어가 누군가에게는 꼭 한번 배워보고 싶은 언어인데, 그들은 쉽게 한국어를 배울 기회를 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제대로 만든 한글 교육 서비스를 내놓는다면 괜찮은 반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양한 외국어를 두루 섭렵한 덕분에 외국어를 어떻게 공부하면 좋은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영어를 활용해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아울러 내가 외국어를 익힌 바로 그 방법으로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이제까지 해온 일들을 바탕으로 한다면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당장 시장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한 달에 평균 10달러씩만 소비한다고 해도 1,000명이면 한 달 수익이 1,000만 원! 게다가 이미 익숙한 온라인 무대를 활동 기반으로 삼는다면 자본도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을 터였다. 자본이 적게 들기 때문에 만약 실패한다 해도 큰 위험이 없는 사업 모델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었다. 그래, 온라인으로 한국어를 가르쳐보자!
처음 6개월, 씨를 뿌리다
강의 콘텐츠를 제작해서 올리고, 사이트를 운영하고, SNS에 홍보하는 일 모두를 나 혼자 해낼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다국적 언어 교환 모임인 랭귀지 캐스트를 운영하며 친해진 현정 씨와 경은 씨에게 사업 계획을 들려주면서 함께 해볼 생각이 있는지 슬쩍 ‘밑밥’을 던졌다. 고맙게도 두 친구 모두 내 제안을 덥석 물어줬다. 다니던 회사도 때려치우고 톡투미인코리안에 합류한 것이다. 처음 6개월 동안은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20분짜리 오디오 강의는 매일 한 개씩, 동영상은 일주일에 두세 개 정도를 제작해서 올렸다. 강의 주제는 몇 년이 지나도 괜찮은 보편적인 소재로 골랐고, 마라톤 회의를 거쳐 커리큘럼을 구성했다. 업로드는 한국 시각 기준 새벽 5시로, 미국 퇴근 시간에 맞췄다. 머리를 맞대고 촬영 시나리오를 짜고, 대본을 작성하고, 실제로 녹음해서 각 플랫폼 환경에 맞도록 편집해 우리 사이트와 유튜브에 각각 올리는 데만 세 명이 매달려도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렇게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로운 강의를 만들어 편집해서 올리고, 다시 시나리오와 대본을 짜고 하느라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루 평균 열다섯 시간 이상 일했다. 물론 계속 무료로 콘텐츠를 올리면서 ‘과연 이게 돈이 되기는 할까’, ‘나중에 유료로 전환하면 사서 볼 사람이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불안감보다는 자신감이 더 컸기에 버틸 수 있었다.
사이트로 접속하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해서 느는 것이 눈에 보였고, 이들이 모두 잠재고객이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또 우리가 올린 콘텐츠에 대한 반응이 눈에 보이자 한층 희망이 솟구쳤다. 정말 잘 만들었다고, 너무 재미있다고, 잘 배우고 있다는 응원의 댓글들이 달렸다. 누군가 댓글로 질문을 남기면, 밤새 그 댓글에 대한 답변을 강의로 제작해 올리기도 했다. 참고로 처음 만들었던 레벨 1의 강의 자료가 지금까지 1,000만 건이나 다운로드 되었으니, 죽도록 고생했을지언정 그때 제대로 만들어놓길 천만다행이지 싶다. 그렇게 올린 무료 콘텐츠들이 온라인에서 조금씩 입소문을 타면서 6개월이 지나자 사이트 방문자 수가 1만 명을 넘어섰다. 우리의 예상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였다.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한국어에 대한 수요가 실제로 꽤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기도 했다.
딩동! 첫 구매가 이루어지다
처음 유료 서비스를 사이트에 올렸던 날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떨렸다. 우리의 첫 유료 상품은 총 25장으로 구성된 레벨 1 강의 자료의 전자책(e-book)으로, 가격은 2.99달러였다. 그런데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아무도 구매를 하지 않았다. 언제 첫 구매가 이루어질지 알 수가 없으니 컴퓨터 앞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걱정이 뒤엉켰다. 그런데 갑자기 ‘딩동!’ 하고 구매가 이루어졌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메일 알림음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만 의자에서 튀어 오를 뻔했다. 역사적인 첫 구매의 주인공은 미국인이었다. 곧이어 두 번째 구매자가 나타났고, 그 후로도 조금씩 꾸준히 판매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