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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家의 불편한 진실

정규웅 지음 | 머니플러스
삼성家의 불편한 진실

정규웅 지음

머니플러스 / 2012년 5월 / 288쪽 / 15,000원





암(癌)과 맞서며 후계구도를 그리다



수술 앞두고 ‘호암장’에 가족들 불러 모아

1976년 9월 초,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에 위치한 호암장. ‘空手來空手去’ 호암은 물끄러미 내실에 걸려 있는 편액을 바라보며 온갖 감회에 빠져들고 있었다. 호암의 나이 66세였다. 언제나 차분하고 냉정하다는 소리를 들어왔지만, 갑자기 가슴에서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다. “한 십 년만 더 살았으면…!” 하지만 그는 가늘게 한숨을 내뱉고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늘은 인간에게 죽음을 극복할 지혜와 능력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든지 언젠가는 죽음의 길을 가야 할 줄 알면서도, 삶을 마감할 단계에 접어들면 미련이나 슬픔이나 공포를 자아내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는 호암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에게는 아직 확실하게 매듭짓지 못한 몹시 중요한 일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그 때문에 좀 있으면 자녀들이 빠짐없이 이곳으로 몰려올 것이다.

“삼성은 앞으로 건희가 이끌도록 한다!”

가족이 모두 모였다. 아내 박두을 여사, 장남 맹희 부부, 차남 창희 부부 그리고 인희, 숙희, 순희, 덕희, 명희 등 다섯 딸들이었다. 셋째 아들 건희는 일본에 가 있었다. 수술에 앞서 미리 대기토록 한 의미가 있었지만, 두 형들 앞에서 자신이 후계자로 지목되는 거북함과 불편함을 피하게 하려는 호암의 배려가 컸다. 물론 그때는 다른 식구들이 호암의 그런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더러는 아버지가 왜 갑자기 호출했는지 몰랐을 것이고, 더러는 암 수술을 앞두고 뭔가 중요한 말씀을 하실 것으로 알고 있었을 터이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으며 호암을 주시했다. 이윽고 호암이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

큰아들 맹희, 예상은 했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

사실 가족들은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몇 해 전부터 그러한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남과 차남을 앞에 두고 단도직입적으로 3남을 후계자로 지목하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호암의 한마디에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장남 맹희였다. 더구나 그 자리에는 그의 아내도 있었고 어머니도 있었다. 두 여자 역시 할 말을 잊고 한동안 멍한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맹희는 그들 보기가 부끄러웠고 난감했다. 맹희는 건희보다 열한 살이나 위였다. 또한 장남으로서 여러 해 동안 아버지 밑에서 그룹의 모든 사업에 깊이 관여하여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호암도 맹희를 후계자로 생각했고, 그의 경영능력을 테스트하고자 중요한 일을 맡긴 것도 여러 차례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호암은 맹희의 일거수일투족에 불만과 회의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사업에 임하는 맹희의 생각과 행동이 호암을 만족시키지 못했던 탓이었다. 호암이 건희를 후계자로 지목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아버지와 큰아들 사이에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큰 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틈새는 언제, 왜, 어떻게 벌어진 것일까?

둘째 창희의 ‘모반 사건’이 후계결정에 큰 영향?

호암은 그의 나이가 50대에 접어들고, 삼성그룹의 규모가 커진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은근히 삼성의 장래를 대비했다. 전통적 가부장제도의 규범이 몸에 밴 그가 두 살 터울인 30대의 두 아들 맹희와 창희를 곁에 두고 경영수업을 시키기 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만일 그 무렵 한 명의 후계자를 선택하라고 했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장남인 맹희를 지목했을 것이다. 창희를 경영에 참여시킨 것은 맹희의 부족한 부분을 창희가 메워줄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맹희 또한 자신이 후계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정열적으로 일했다.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함께 기거하고 출퇴근하며 삼성의 전 분야에 관여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맹희의 편이 돼주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은 삼성의 최대 시련기였다. 이른바 ‘삼분(三粉) 사건’, ‘사카린 밀수 사건’, ‘한비(韓肥) 사건’ 등이 잇따라 터지고, 한때 차남 창희가 구속되는가 하면, 호암이 십 년 가까이 심혈을 기울인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해야만 했던 엄청난 시련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호암은 경영의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고, 삼성의 경영은 장남 맹희가 맡게 되었다. 그 무렵 3남 건희는 일본 와세다 대학 경제학부와 미국 조지 워싱턴 대 경영대학원의 MBA 과정을 수료하고, 1966년 귀국해 동양방송에 입사해 있었다.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일시적이나마 맹희가 삼성의 대권을 거머쥐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아직 3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호암에게는 삼성이라는 거함을 힘겹게 이끌어나가는 장남의 모습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위태로워 보였을 것이고, 아직은 맹희에게 모든 것을 맡길 만한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호암은 ‘삼성기획위원회’를 두어 맹희를 보필하도록 하고, 맹희의 결정을 보완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었는지, 뒤이어 ‘5인 위원회’를 만들어 핵심적인 역할을 맡겼다. 이 기구는 맹희와 창희를 주축으로 한 당시 삼성의 최고의사 결정기구였다. 어쩌면 호암은 이 기구를 통해 다시 한 번 두 아들의 경영능력을 시험해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5인 위원회’는 호암이 기대했던 만큼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오히려 갖가지 혼란과 시행착오만 수없이 되풀이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호암은 1969년경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5인 위원회’의 해체와 함께 그들에게 사실상 문책에 가까운 조치를 내린다. 아울러 호암은 다시 경영일선에 나서면서 아직 20대인 3남 건희를 가까이 두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건희는 아버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호암이 건희를 후계자로 염두에 둔 것은 이때부터였을 것이라고 삼성 사람들은 보고 있다. 이맹희는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당시 아버지는 1970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그룹으로 다시 복귀하겠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둔해서 그걸 깨닫지 못했다. 1972년 무렵 거의 완전하게 복귀 준비를 한 아버지는 우선 삼성 본관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말하자면 전면에 나설 준비를 완료한 것이다. 예전엔 나에게 일체를 맡기신 일들을 직접 챙기기 시작했으며 그 이전보다 사장을 불러서 직접 지시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이맹희는 1970년에 와서야 자신도 뒤늦게 알게 된 충격적인 사건이 후계자 구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창희가 아버지에 대해 모반을 일으킨 일이었다. 이맹희는 계속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제 창희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당시 창희는 자식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창희를 포함해서 모두 다섯 명이 꾸민 이 일은, 창희가 아버지를 사직당국에서 조사해보라는 천륜에 어긋나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만들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즉 삼성 이병철 사장에게 이런 잘못이 있으니 기업에서 영원히 은퇴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탄원서 같은 것이었는데, 창희를 제외한 네 명 중에 세 명이 창희를 부추겨서 그런 짓을 하도록 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이 문서를 청와대에서 제일 먼저 손에 넣은 사람은 전두환 중령이었고, 이걸 박종규 실장에게 보여준 다음 바로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박종규 실장의 전언에 따르면, 당시 박 대통령은 이 문서를 살펴보곤 다른 것은 문제를 삼지 말고 해외도피 재산 문제는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라 지시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나도 이 일에 대해서 개입된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그 일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 그 일에 개입된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는데 내가 어찌 거짓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같은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호암은 그 사건에서 맹희가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맹희에게는 창희를 감독하지 못한 책임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암은 한동안 삼성을 떠맡겼던 두 아들에게 큰 실망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맹희가 그 충격적 모반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후에 알게 됐고, 창희도 자신은 삼성을 살리려고 그런 일을 했다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해도, 그것이 식어버린 호암의 마음을 덥혀주지는 못했을 것 같다. 모반 사건 이후 호암이 창희에게 ‘미국으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창희는 강하게 반발하며 ‘제가 뭘 잘못했다고 미국으로 갑니까? 저는 삼성을 살리려고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버텼다지만 이미 호암의 마음은 그들에게서 떠났을 것이다.

결국 호암이 다시 경영일선에 나서고, 맹희는 삼성에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할 일이 없어지자 빗나가기 시작했다. 더구나 감성이 강한 이맹희는 아버지의 냉정한 태도에 몹시 실망했을 것이며, 반발심 같은 격한 감정도 치밀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멋대로 행동했고, 보란 듯이 호암의 눈에 거슬리는 짓을 했다. 국내외를 몇 달씩 나돌아 다니며 풍류를 일삼는 그를 가리켜 주위 사람들은 ‘양녕대군’이라고 수군댔다. 그러나 이 무렵엔 호암도 맹희가 창희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인간적인 고뇌도 있었던 것 같다.

널리 알려진 대로 호암은 유학자 집안 출신이다. 설혹 맹희가 눈밖에 벗어나는 짓을 저질렀더라도 그 정도로 부자의 연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호암 자신이 더 잘 아는 사실이었다. 호암은 기업가로서의 냉정한 판단과 인간적 도리 사이에서 한동안 갈등을 겪었을 것이고, 마침내 맹희를 다독거려 다시 곁으로 데려오려고 무척 애를 썼다. 맹희도 그러한 아버지의 심정을 이내 알아차렸지만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 보일수록 아버지를 미워하며 오히려 더욱 거세게 반발했다.

맹희의 불같은 성격과 자존심 그리고 누구도 꺾지 못하는 강한 고집에도 호암은 끈질기게 큰아들을 붙잡으려고 했다.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윽박지르기도 했다. 이맹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 아버지는 어머니나 누이 혹은 창희를 통해서 여러 차례 나에게 서울로 올라와 무릎 꿇고 사과한 다음, 다시 내 밑에서 일을 하라는 전갈을 보내며 유서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었다. ‘유언장’을 바꾼다는 말인즉, 그 이전의 내용은 나에게 유리하게 작성되어 있었는데, 내가 아버지에게 계속 굽히지 않고 버티면 유언장의 내용을 나에게 불리하게 바꾸겠다는 얘기였다.”

이맹희는 덧붙여 아버지가 유언장 문제를 들춘 것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외부에는 유언장이 있는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호암은 유언장을 만든 적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 구두로, 즉 말로 남겼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가족들과 신현확 전 총리뿐이라고 했다. 신현확 전 총리는 오랫동안 호암과 그의 집안 그리고 삼성과 아주 가깝게 지낸 분이다. 결과적으로 호암의 맹희 설득은 실패하고, 마침내 호암은 결단을 내린다. 1973년 여름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이맹희는 이렇게 회고한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나에게 ‘네 지금 직함을 몇 개나 가지고 있노?’ 하고 물었다. 내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열댓 개는 되는 것 같다고 했더니 ‘네가 다 할 수 있나?’ 하고 되물었다. 그 이전부터 뭔가 낌새를 채고 있었기에 ‘다 할 수 없심더’ 했더니 아버지가 ‘내가 한번 보게 직함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종이에 써 와봐라’고 했다. 이진석 비서실장을 시켜서 내 직함을 써 오니 전부 17개였다.” 이맹희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말투는 의논조로 ‘이건 하기 힘들제?’, ‘이건 네가 할 수 없제?’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예정하고 있었던 듯 연필로 직함들에 하나씩 줄을 죽죽 그었다. 대부분을 그렇게 줄을 긋고 나에게는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의 부사장 직함 3개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삼성의 운영에 상당한 실권이 있었던 삼성문화재단의 상무이사 자리와 안양 골프장 운영위원 등 한두 개의 자리는 더 남겨져 있었던 듯하다. 나는 그제야 사태를 깨달았다. 아, 아버지가 나보고 물러나라고 하시는구나!” 맹희의 호암과, 또 삼성과의 결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뒤에도 맹희는 일주일에 서너 번 아버지를 모시고 일찍 출근했으나 모든 것이 전과는 달랐다. 6개월을 그렇게 보냈다. 이제 모든 결정은 호암이 직접 내렸고 맹희는 이렇다 할 일이 없었다. 너무 무료해 어느 날 한 임원에게 ‘일본에 가서 당분간 쉬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말을 임원에게 전해들은 호암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하다니…’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맹희는 당장 짐을 꾸렸다. 그리고 사흘 후에 일본으로 떠났다. 너무나 멀고 긴 이별의 길이었다.

같은 해인 1973년, 둘째 창희는 아버지의 용서를 받았지만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스스로 삼성을 떠나 독립했다. 물론 호암의 지원을 받았지만 그가 이해에 세운 회사는 미국회사와 합작으로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는 ‘네틱 미디어 코리아’였다. 이 회사는 1977년에 인수한 특수 세라믹사를 통합해서 ‘새한미디어’를 설립하고 삼성에서 벗어나 독자운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맹희와 창희는 이미 1973년 호암의 곁을 떠났고 셋째 건희만 남게 되었다. 그 뒤 호암은 다시는 맹희를 찾지 않았다. 맹희 역시 인간적인 면에서 아버지를 미워하며 참으로 긴 세월을 국내외로 정처 없는 유랑생활을 했다. 호암이 세상을 떠나고 동생 건희가 정식으로 삼성을 계승했을 때도 그는 또다시 해외로 방랑길에 올라 오랜 세월 수많은 나라들을 떠돌았다. 호암 생전에는 거의 강압적으로 방랑생활을 했다면, 건희가 정식으로 삼성을 계승한 뒤에는 동생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해외로 나가 유랑생활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비운의 황태자’였다.

그런데 호암은 맹희의 큰아들인 이재현(CJ그룹 회장)만큼은 끔찍이 아꼈던 것 같다. 호암 가계(家系)의 장손인 탓도 있을 것이다. 이맹희의 장남 재현은 할아버지 호암과 부친의 갈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인지, 누구의 도움도 받기 싫다며 1983년 시티은행에 입사했다. 그러나 호암은 재현을 삼성으로 불러들여 CJ의 전신인 ‘제일제당’ 경리부에서 일하게 했다. 제일제당을 큰아들 가족에게 맡기겠다는 생각은 이때부터 싹텄던 듯하다. 1987년 호암이 운명할 때 임종한 손자도 재현이었다. 또한 할머니 박두을 여사가 2000년 타계할 때까지 서울 장충동 호암의 자택에서 함께 살기도 했다.



복잡한 가족관계와 뒤늦게 발생한 재산분쟁



57세 때 자녀 모두 결혼, “장녀 인희가 아들이었다면”

호암은 박두을 여사와의 공식화되어 있는 3남 5녀(그중 3녀 순희, 4녀 덕희는 혼외자식으로 입적됐다) 이외에 1953년 4남 태휘를, 62년 6녀 혜자를 더 둔 것으로 되어 있다. 4남 태휘는 77년 일본에서 게이오 대학을 졸업했고 80년에 일본여성과 결혼했으며 한때 삼성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암이 작고한 후 일본으로 떠났고, 그 뒤 그들 가족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호암은 선친에 의해 16세에 혼인했기 때문에 자녀들도 일찍 두었다. 장녀 인희는 19세에 낳았고, 그녀도 일찍 결혼했다. 만 19세인 1948년, 경북지방의 대지주였던 조범석가의 3남 1녀 가운데 막내인 조운해와 결혼했다. 이들은 동혁, 동만, 동길의 3형제를 두었다. 이인희가 맡은 ‘전주제지’가 1991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되고, 92년 ‘한솔그룹’으로 개칭, 새롭게 출발하면서 이인희가 한솔그룹 고문을 맡고 3형제에 의해 운영되었다. 한솔그룹은 이인희 고문이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인희 고문은 호암을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카리스마가 있고 결단력이 뛰어나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항상 ‘정직’을 우선하는 것이 아버지 호암과 꼭 닮았다는 것이다. 호암도 후계자 문제로 고심할 무렵, 맏딸을 가리켜 ‘쟤가 아들이라면 무슨 걱정이 있겠나…’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장남 맹희 내쳤지만, 장손 재현 애정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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