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의 신 정주영, 수성의 신 이건희
이상훈 지음 | 머니플러스
창업의 신 정주영, 수성의 신 이건희
이상훈 지음
머니플러스 / 2013년 6월 / 288쪽 / 14,000원
장인은 그냥 태어나지 않는다
장인은 몰입과 동기 부여의 달인
특정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집념과 몰입의 화신들이다. 이들은 부단한 노력과 헌신 그리고 집중을 반복한 결과, 임계점에 도달해 질적 비약이 이뤄질 때까지 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 사람들이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내재된 열정과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게 만드는 동기를 찾는 노역이기도 했다.
정주영과 이건희는 태어난 환경부터가 너무나 달랐다. 정주영은 가진 것 하나 없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반면, 이건희는 유능한 사업가인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평범한 어린 시절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 둘의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자신의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이를 발판으로 삼아 끊임없는 탐색과 노력의 과정을 지속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생의 주기로 볼 때 미약하고 더러는 초라할 수밖에 없는 성장기를 탄탄하게 닦아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갖고 있는 특정 관점 혹은 가치관이란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본다. 예로 ‘+’란 기호를 볼 때 수학자는 덧셈, 목사는 십자가, 교통경찰은 사거리,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 간호사는 적십자 등을 떠올린다. 그만큼 관점, 가치관 등은 자신이 처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다. 이는 당신의 무의식에 찬물을 끼얹는 목표 의식과 호기심을 자극할 수단이 있다면, 당신의 관점과 가치관을 이전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창조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결국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어떤 동기를 찾아내야 한다.
『몰입의 즐거움』이란 책을 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과거 성공했던 사람들에게 배울 수 있는 최대의 교훈은 그들이 어떻게 왜 그토록 성취하고 싶어 했는지, 무엇이 부끄러움과 수치를 이겨내고 정상의 길까지 줄기차게 내달리게끔 만들었는지, 얼마나 간절했기에 나쁜 습관을 뜯어고치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수준의 몰입과 노력을 하게끔 만들었는지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위대한 노동 없이 성과는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으로 장인들은 자기 만족감을 극도로 경계한 사람들이다. 작은 성취에 따른 만족감은 다음 작업을 인도하는 등대 같은 역할을 맡아야지, 긴 여정을 끝내도록 하는 자아도취가 돼서는 곤란하다.
우리 주변에서 자신의 일에 몰입돼 삶을 다채롭게 일구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일을 할 때 뚜렷한 목적을 갖고 있다. 보람, 만족감, 자아계발, 자신의 정체성 등이 일과 밀접히 연계돼 있다 보니 힘든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다. 집중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하루를 무감각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나 상황이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진다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렇게 되면 설사 일을 통해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경험을 하더라도, 그 일에 제대로 의미 부여를 하지 못한다. 일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일을 어떤 용도로 활용하겠다는 의지와 비전을 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에 몰입할 수 있고, 살면서 만나는 난관들에 휘둘리지 않고 의연해질 수 있다.
열정은 꿈과 현실 사이 간극을 줄여준다
정주영은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개척 정신의 소유자였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배짱으로 이리 저리 궁리해 보는 근성과 집념을 갖고 있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주영과 그의 가족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부산 피난길에 올랐다. 모든 것을 잃게 된 셈이지만, 전쟁 피난지 부산은 정주영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전쟁 특수로 인한 건설 물량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태평양을 건너 물밀듯이 밀려드는 미군들의 숙소와 군수 물자 집하장, 군사 지원 사령부 등의 건설이 다급한 실정이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려고 그랬는지 마침 그의 첫째 동생인 정인영이 미군사령부 건설 담당 맥칼리스터 중위의 통역으로 배치됐다. 맥칼리스터 중위는 정인영에게 건설업자를 찾아오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주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갔다. 맥칼리스터 중위는 정주영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건설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군 병사 10만 명의 임시 숙소를 한 달 안에 만들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때마침 여름 방학을 맞아 휴교 중인 교실을 소독한 뒤 페인트칠을 하고 바닥에 널빤지를 깔아 천막을 쳐서 숙소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잠자는 시간을 3시간으로 줄이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그러던 끝에 정주영은 약속한 한 달 만에 미군 병사 10만 명의 임시 숙소를 뚝딱 지어냈다.
정주영의 추진력에 크게 감명 받은 미군사령부 측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각국의 사절들이 참배할 부산의 UN군 전체 묘지를 푸른 초원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 겨울철에 말이요?” “당신은 내게 건설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참배일이 고작 5일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어서 정주영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린 시절에 자신이 목격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고향의 겨울 들판에서 볼 수 있었던 푸른 보리밭이 뇌리에 스친 것이다. 그는 곧바로 트럭 30여 대를 부산 인근의 농촌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낙동강 근처 보리밭에서 한겨울인데도 파랗게 자란 보리 포기들을 떠서 UN군 묘지에 옮겨 심기 시작했다.
너무도 황량해서 을씨년스럽기조차 했던 UN군 묘지가 푸른 보리밭의 초원으로 변해가자 맥칼리스터 중위는 물론, 미군사령부 관계자들은 저마다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한겨울의 보리 잔디는 “(건설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정주영만이 해낼 수 있는 ‘창조적인 영토 정벌’이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에 어울리는 창의성이 있기 마련이다. 창의성은 곧 문제 해결 능력이다. 남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발상과 관점으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딜레마적 상황에 균열을 가하는 것이다.
기계, 사람에 대한 식견을 높이다
CEO에게 있어 업무 장악력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업무란 매일매일 반복되는 단순 일과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영위하는 사업을 손금 보듯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기술의 트렌드, 발전 방향, 시장의 업황과 전망 등을 훤히 꿰고 있어 번득이는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탁월한 수준의 전문성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급변하고 있는 기술 흐름을 놓치고 도태되기 십상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건희의 어린 시절은 운이 좋게도 기술 분야 CEO가 갖춰야 할 조건을 완비하게 만드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외로웠지만 집안은 넉넉했기에 이건희에게는 장난감이 넘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희는 오래지 않아 그것을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복잡한 기계 속으로 들어가 나름대로 무언가를 찾아보고 생각하는 탐구 놀이로까지 발전시킨 것이다. 나중에는 카메라, VTR 등을 몽땅 해체했다가 다시금 조립하는 경지에 올랐다. 각종 전자 제품을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기계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깨쳤고, 이런 경험은 후일 전자 분야에서 탁월한 식견을 내놓을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이건희를 소개할 때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영화와 다큐멘터리에 광적으로 집착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초등학교 2년과 중학교 1년을 유학하는 사이 그는 무려 1,300여 편 이상의 영화를 봤다고 한다. 『이건희의 서재』란 책을 쓴 안상헌 저자의 말대로, 영화나 다큐멘터리에 매료된 경험은 이건희로 하여금 사람과 조직, 사회에 대한 이해와 식견을 높여줘 경영 아이디어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시대를 읽고 내공을 키우다
완벽주의자보다는 유연한 사람이 돼라
하버드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는 벤처 기업의 흥망성쇠 분석을 통해, 벤처 사업에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큰 차이는 애초에 세웠던 계획이 아님을 지적했다. 크리스텐슨 교수에 따르면, 처음부터 완벽한 계획을 세워두는 것은 여력을 남겨두는 것, 혹은 후원자나 투자자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하나의 흠도 없는 완벽을 추구하기보다는, 아주 완벽하지는 않아도 타이밍을 살려 일단 실행부터 하고, 문제점이 발생하면 수정해 나가는 편이 더 낫다고 본 것이다. 이는 비즈니스에 따르는 여러 변수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완벽하기보다는 난관이 나타나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오뚝이 같은 근성, 개방성과 유연함 등의 기질이 성공을 낳을 확률이 더 크다는 판단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창업 기업들은 두 번째 세 번째 시도를 한 후에나 정상 궤도에 올라선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전략을 시작하기도 전에 열정이나 여력이 바닥난 기업들은 실패를 벗어날 수 없다. 현실에 매진하면서도 난관에 봉착했을 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궤도 수정할 수 있는 유연성과 개방성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리고 각 분야의 대가나 천재라고 하는 인물들의 과거 행적을 더듬어보면, 결코 그들의 시작은 대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노력했으며 실패 속에서 하나 둘 얻어 나가, 나중에는 남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반열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정주영과 이건희도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으며 대가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키워 나갔다.
시대의 발톱이 할퀴어도 굴하지 않다
정주영이 창업했던 당시로 돌아가보자. 그의 삶이 관통했던 시대사는 일제시대, 해방 정국, 6ㆍ25전쟁, 개발독재 등으로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격변기였고, 우리 민족의 수난사였다. 정주영은 노력 끝에 작은 성공을 쌓아왔지만, 무서운 시대의 횡포 속에서 번번이 좌절해야만 했다. 경일 상회라는 쌀가게는 1937년 중일 전쟁으로 조선총독부가 미곡 통제와 함께 쌀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문을 닫아야 했다. 만약 정주영이 쉽게 자포자기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다음 인생은 별 볼 일 없었겠지만, 그는 매번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현대자동차의 모태 격인 아도서비스는 갑작스런 화재로 정주영을 빚더미에 올려놓았다. 평소 착실히 쌓은 신용 덕분에 빌린 돈으로 천신만고 끝에 재기할 수 있었지만, 1941년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 전쟁에 나서면서 아도서비스는 일진공작소에 강제 합병되는 비운을 맞는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해방 이후 정주영은 서울 중구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또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한 것이었다. 초창기 현대자동차공업사는 미군 병기창의 하청만을 받아 일했으나, 나중에는 기술력을 인정받아 낡아빠진 엔진을 바꾸어 다는 작업까지도 맡게 됐다. 해방 이후 교통량이 늘면서 현대자동차공업사도 날로 번창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미군 부대에서 건설업자의 계약 현장을 우연히 목격하곤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받는 수금액은 한 번에 고작 30~40만 원이었던 것에 비해, 건설업자들은 무려 1,000만 원에서 2,000만 원씩을 받아 가고 있었다. 젊은 정주영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피땀 흘린 노력이 아닌 업종의 차이로 받는 돈의 대가가 그만큼 달라질 수 있다는 데 놀랐다. 결국 그는 주변의 반대에도 현대자동차공업사 공장 옆 건물에 오늘날 현대건설의 모태가 되는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더 달았다. 온 가족이 나서서 현대토건사 사업을 확장하는 데 아낌없는 노력을 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주영과 그의 가족은 모든 것을 버려둔 채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전쟁 피난지 부산은 정주영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전쟁 특수로 인한 건설 물량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사업가로서 정주영의 초창기 이력을 보면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불리한 지점에 서 있는 사람이 유리한 지점에 있는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몇 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정규 공부보다 사회에서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은 것을 습득하고 더 빨리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현재 처지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정주영의 젊은 시절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미래 경영으로 승부수를 던지다
이건희가 창업주가 아님에도 최고의 경영자로 평가받는 것은, 반도체 시장에 대한 탁월한 안목으로 이 산업에 과감히 뛰어 들어 그룹을 도약시켰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었다면 일구기 어려운 성과였다는 점은 모든 이가 공감한다. 실제로 그가 하는 말을 유심히 살펴보면, 유달리 ‘미래’, ‘5년 후’, ‘앞으로’ 등의 미래 지향적인 말들이 많다.
이건희가 반도체 사업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74년이었다. 파산 직전에 있던 한국반도체라는 회사를 인수한 게 시작이었다. 그는 시대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그 핵심에 반도체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삼성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예상 밖이라고 평가했다. 오일 파동으로 전 세계 경제가 휘청거렸고, 힘들게 진출했던 전기와 전관 사업 부분에서도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도체 사업에 대해 당시 비서실에서도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믿었던 아버지 이병철마저 확신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전자 제품을 일일이 뜯어보고 조립해 보면서 기술에 대한 안목을 넓혀갔던 이건희는 반도체 미래에 대한 자신의 직감과 통찰력을 믿었다. 그러나 방향이 맞아도 사업의 성공은 또 다른 문제다.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이내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렇다 할 제품은 고사하고 자본금을 모두 잠식한 채 부도 위기까지 내몰렸다. 결국 이병철이 나서서 사업을 챙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반도체를 챙기는 과정에서 이병철이 반도체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그룹의 사활을 걸고 그곳에 역량을 집중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이 대대적인 저가 공세로 반도체 가격을 폭락시켰다. 벌 만큼 벌었으니, 한국과 미국의 반도체 업체를 손봐주겠다는 심산이었다. 일본 업체들의 계산은 적중해서 1986년까지 삼성반도체는 2,000억 원이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병철은 기흥의 반도체 공장에 라인을 하나 더 증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다수 임원들은 펄쩍 뛰었다. 그러나 사태는 곧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1987년부터 반도체 경기가 급격히 살아나더니 모든 라인을 풀가동해도 주문량을 채우지 못할 정도가 됐다. 불황 속에서의 라인 증설, 이것은 삼성의 승부수였고, 여기에 가장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 이건희였다. 이병철이 고민하고 있을 때 이건희가 과감한 선행 투자가 필요하며 곧 경기는 회복된다고 아버지를 줄곧 설득한 것이다. 결국 이병철은 이건희의 견해를 따랐고 시장을 선점했다. 이건희가 한국반도체 인수 후 ‘작은’ 실패를 통해 시장을 더 면밀히 내다보며 용의주도하게 준비하고 대응하는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이런 혜안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리더는 전략적 판단에 능해야 한다
시간과의 싸움
정주영의 일생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속도에 능했다는 점이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빨리 해냈다. 참고로 창업 기업들은 대개 자본을 남에게서 조달한다. 그런 까닭에 창업을 결정하고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면, 창업 시에 조달한 타인 자본으로 인해 비용 상승 압박이 커진다. 그런데 정주영은 시간과의 싸움에서 매번 승리했다. 그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빨리 했고, 여기에 더해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했다. 이 점은 그의 두둑한 배짱과 치밀한 전략이 없었다면 애당초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동시 창업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병행한 현대중공업의 창업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조선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현대는 영국에서 차관 제공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선박을 구입한 사람이 있다는 증명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정주영은 지어지지도 않은 조선소에서 만들지도 않은 배를 팔러 다녀야 했다. 그때 그리스의 선주로부터 당시의 국제 선가보다 16%나 싼 가격에 유조선 건조를 제안받고 이를 수용했다. 만약 정주영이 원가 계산에 집착하는 스타일이었다면, 이 일은 성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