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위대한 선택
지평길 지음 | 북씽크
이건희, 위대한 선택
지평길 지음
북씽크 / 2013년 2월 / 272쪽 / 14,000원
제1부 초일류 삼성전자를 만든 이건희의 위대한 선택
이건희의 위대한 여섯 가지 선택
반도체 - 반도체를 선택하다: "삼성전자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의 전자레인지와 같은 제품을 생산해 미국 시장에 뛰어들어 헐값에 파는 값싼 브랜드이다." 2002년 포춘지에 실린 삼성전자에 대한 적나라한 보도 글이다. 그리고 이 보도 기사는 절대로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2000년대 초에도 이러한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삼성전자의 이건희는, 30년 전에 회사의 부회장으로서 반도체 사업이라는 최첨단 사업에 진출할 것을 선택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반도체에 대해 그 어떤 기술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 결과 수십 년이 앞선 일본 반도체 업체들로부터 한물간 반도체 기술을 전수 받으면서 힘겹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 당시로는 무모한 것이었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무모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재계에서는 삼성이 반도체 때문에 무너진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을까? 하지만 이건희의 선택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이로운 것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삼성전자 40년, 도전과 창조의 유산』이라는 책에 보면,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를 시작할 당시의 힘겨웠던 상황에 대해 잘 설명해 주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1974년 12월 6일 삼성은 한국반도체의 50% 지분을 50만 달러에 인수한다. 나머지 50%의 지분은 미국의 소규모 벤처기업인 ICII가 그대로 보유하기로 했다. 한국반도체가 삼성과 ICII의 합작회사의 형태가 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사람이 이건희 동양방송 이사였다는 사실이다.' 같은 책에서 이건희 회장이 왜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그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1973년 오일쇼크에 충격을 받은 후,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때마침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공장 설립 과정에서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 앞으로 진출해야 될 산업을 물색하면서 반도체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던 중이었다. 시대조류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중 핵심인 반도체 사업이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젓가락 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주거생활 자체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문화는 반도체 생산에 아주 적합하다. 반도체 생산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고, 먼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 고도의 청정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공정이기 때문이다."
1983년 3월 15일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자가 반도체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이병철 회장은 64k D램 기술 개발에 착수하겠다는 구체적 계획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국내의 재계와 해외의 경쟁사들과 외신들의 반응은 1974년 이건희가 처음 한국반도체를 인수할 때처럼 냉소뿐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삼성전자는 세계를 충분히 놀라게 하기 시작했다. 9개월 후인 12월 1일 64k D램의 생산과 조립, 검사까지 완전히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이상의 기술 격차가 사실상 존재했던 반도체 업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년도 안 된 무명의 삼성전자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해버린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1983년 12월 삼성전자는 반도체공장 건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삼성전자는 세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1984년 3월 말,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미국과 일본만이 반도체 생산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반도체 생산 공장을 만든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에 기술 격차가 10년 이상이나 더 났던 한국이 불과 6개월여 만에 그 격차를 3~4년으로 줄였다. 그런데 세계 반도체 업계는 10년 후 이병철 회장이 아닌 이건희 회장의 삼성전자의 눈부신 반도체 도약을 통해 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1990년과 1991년에 세계 최초로 삼성전자가 8인치 웨이퍼 투자를 결정했고 투자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성전자의 행보가 세계를 경악하게 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그 시기가 세계적인 D램 반도체 시장의 불황이었다는 것과, 두 번째는 그 당시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했던 일본 의 도시바, NEC 등과 같은 업체들조차도 8인치 웨이퍼 투자에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1993년까지만 해도 반도체 웨이퍼(반도체소자 제조의 재료)는 6인치가 세계 표준이었기 때문이다. 6인치 웨이퍼와 8인치 웨이퍼는 생산량에서 2배 가까운 차이가 나지만, 기술적인 위험 부담 때문에 당시 일본이나 미국의 그 어떤 선진 기업들도 8인치 웨이퍼 투자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1993년 6월 세계 D램 업계 최초로 삼성전자는 8인치 양산라인을 준공했다. 전체 반도체 업계에서는 IBM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삼성전자는 일본 업체를 따돌리고 1993년 10월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1위 회사로 등극하게 된다. 여기에는 이건희 회장의 위대한 선택, 과감한 도전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기존에 3인치, 4인치, 5인치 웨이퍼는 미국의 반도체 업체들이 선도했다. 하지만 6인치 웨이퍼는 일본 업체들이 먼저 과감한 투자로 경쟁력을 갖추었기에 선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8인치 웨이퍼에서 과감한 투자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고, 이후 반도체 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삼성은 지금처럼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무도 반도체를 선택하지 못했던 그런 시기에 남들보다 앞서서 탁월한 혜안으로 반도체를 과감하게 선택했다는 것은 진정으로 위대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디지털 - 디지털화를 선택하다: "아날로그에서는 뒤졌지만 디지털에서는 앞서간다." 이건희 회장의 위대한 선택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날로그 시대로 대변되는 1900년대 후반에 전자업계의 독보적인 강자는 소니, 도시바, 샤프, NEC 등 일본 기업들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바뀌면서 새로운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은 바로 그러한 기회를 선점했고, 선공하여 일본의 쟁쟁한 기업들을 넘어설 수 있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는 '경험과 기술'이 중요한 경쟁 요소였다. 후발 업체였던 삼성전자는 이 점에서 일본 기업들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경험과 기술'보다 오히려 '혁신과 속도'가 더 중요한 경쟁 요소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통찰한 이건희 회장의 전략 경영 덕분에, 삼성전자는 일본의 소니가 아날로그TV에 집중할 때 한발 앞서 먼저 디지털TV 사업에 승부수를 띄웠다. 그리고 그 결과 지난 2006년 일본의 자존심인 소니를 넘어 세계 TV시장 1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2003년 6월에 비즈니스 위크는 삼성의 성공비결이 '신속한 제품 개발과 치밀한 고객 분석, 그리고 철저한 경쟁'이라는 3원칙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일본 언론들은 2004년 '삼성 10조 순익, 충격', '일본 전자업체 상위 10개사의 순익을 합한 것보다도 2배 많아' 등의 자극적인 보도를 내보낼 정도로 삼성의 도약에 경이로움을 표시했다. 이러한 삼성의 저력은 결국 남들보다 한발 앞서서 디지털 시대를 내다보고 준비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디자인 - 디자인을 선택하다: "올해를 그룹 전 제품에 대한 '디자인 혁명의 해'로 정하고, 우리의 철학과 혼이 깃든 삼성 고유의 디자인 개발에 그룹의 역량을 총집결해 나가도록 합시다." 이건희 회장은 1996년 신년사에서,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정하면서, 그해를 디자인 경영의 원년으로 삼았다. 이건희 회장은 오래전에 「후쿠다 보고서」를 통해 '디자인은 단순히 형태나 색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제품의 편리성 연구에서 시작해, 부가가치를 높여 이용자의 생활을 창조하는 문화행위'라는 것에 대해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993년부터 임직원들에게 디자인은 단순히 스타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제일 중요한 경쟁 요소가 될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그래서 1995년 디자인 학교인 SADI를 설립하고, 2년 전에는 디자인 산학 연대 프로그램인 '디자인 멤버십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그는 '디자인 혁명의 해'를 선언한 그해 신년사에서 다음과 같은 장엄한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다가올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자 '지적자산'이 기업의 가치를 결정짓는 시대입니다. 기업도 단순히 제품을 파는 시대를 지나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팔아야만 하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경영의 최후의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때부터 삼성전자는 디자인 기업으로 거듭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세계적인 권위의 디자인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이건희 회장의 디자인 경영에 대한 선택이 탁월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대부분의 한국 제조업체들은 원가 절감과 품질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중요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챙기지 못할 때,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임직원들에게 강력한 지시를 하면서 주문하는 것이 이건희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휴대폰 - 휴대폰을 선택하다: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 전화기를 중시하라." 이건희 회장은 남들보다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가 휴대폰이 대중화되고 인기를 얻게 되기 이전에, 벌써부터 휴대전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간파하고 임직원들에게 휴대폰 사업을 더욱더 강화하라고 1990년대 초에 지시한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이건희 회장의 강력한 주문과 지시로 인해, 삼성전자는 휴대폰 기술력에서 십 년 이상 격차가 나던 모토로라를 넘어서고 1995년부터 국내 1위 휴대폰 회사가 되었고, 2012년이 되면서 14년 동안 독보적인 글로벌 1위 자리를 지켜낸 핀란드의 거대 공룡 기업 노키아를 넘어서면서 글로벌 1위의 자리에 올랐다.
삼성전자는 오랫동안 휴대폰 시장에서 노키아의 압도적인 1위에 밀려서 2인자로, 1등이 좋은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으면 그것을 빨리 분석하여 비슷한 제품을 만들고, 베끼는 그런 추격자의 전략을 사용했고, 삼성전자의 막강한 글로벌 마케팅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청객이 나타났다. 애플의 아이폰이라는 스마트폰이었다. 노키아와 삼성전자는 처음에 아이폰의 돌풍을 그저 반짝 인기 정도로 생각해 별다른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폰의 돌풍이 갈수록 거세지더니, 2009년부터는 스마트폰 업계의 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해버리고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노키아는 1위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한편 이건희 회장은 2010년 3월, 2년 만에 경영 복귀하고 난 바로 직후, 무선사업부 수원사업장을 방문하여 임직원들에게 "세상 어떤 스마트폰보다 더 강력한 스마트폰을 만들어 달라."라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이건희 회장의 이러한 지시가 있은 후 경이로운 일이 3개월 후에 벌어졌다. 바로 3개월 만에 아이폰의 유일한 대항마 갤럭시S가 출시되었던 것이다. '갤럭시S'를 '이건희폰'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전자는 '갤럭시S'를 통해 서서히 애플을 따라잡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휴대폰과 스마트폰 시장에서 글로벌 1위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만약에 한두 달만 더 늦게 스마트폰에 사활을 걸었다면, 삼성전자의 휴대폰 사업이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LCD - LCD를 재배치하다: "LCD는 삼성전자로 이관합니다. LCD는 반도체 공정과 흡사하기 때문에 단순히 디스플레이의 하나라고 해서 삼성전관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1990년 일본에서 돌아온 이건희 회장이 사장단 회의를 거친 뒤 내린 결단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단 후 신속하게 이관이 이루어져 삼성전자의 반도체총괄 특수사업부에서 LCD 개발을 맡아서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후발 주자였던 삼성전자는 1995년부터 10.4인치 패널 양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불량률이 거의 50%에 육박했을 뿐만 아니라, 선발 기업들의 견제도 심해서 적자에 허덕였다. 샤프와 같은 선발 기업들은 10.4인치의 가격을 계속해서 낮추면서 동시에 11.3인치를 만들기 시작했고, 다른 LCD 업체들도 그것을 따라서 11.3인치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노트북 제조사들도 11.3인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LCD를 만드는 선발 업체들과 LCD를 1차적으로 구매하는 구매 업체들인 노트북 회사들이 모두 11.3인치를 업계 표준으로 삼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후발 주자로서 선발 업체들이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면, 평생 후발 업체의 딱지를 떼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반도체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삼성전자는 남들이 다 11.3인치로 갈 때, 한 단계를 뛰어넘어 12.1인치로 가기로 결단했다. 삼성전자는 앞서 나가며 시장을 창출하고 시장을 선점해야 후발 주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선발 업체들이 만들어 놓은 11.3인치 표준을 6개월 만에 12.1인치 시장이 표준이 되게 만들었다.
스포츠 - 스포츠를 선택하다: "21세기 우리의 기회는 세계에 있으며, 초일류기업도 진정한 국제화가 완성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1996년 이건희 회장이 신년사에서 한 말이다. 삼성전자가 초일류기업이 되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것들 중의 하나가 세계화였고, 그 세계화를 위해서 도구로 삼았던 것이 바로 '스포츠'였다. 올림픽 후원사가 되기 위해서는 모토로라와 같은 초일류기업이 주저할 만큼 막대한 후원금을 지원해 주어야만 한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기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았고, 성공으로 일궈 내었다. 그 당시 삼성전자는 '싸구려 가전제품을 만드는 회사' 혹은 '그저 이름만 알려진 회사' 정도로 인식될 정도로 세계무대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존재감이 미비한 한국 회사였다. 하지만 올림픽 파트너사가 되면서 삼성전자의 글로벌 인지도는 폭발적으로 신장하게 된다. 이건희 회장은 학창 시절부터 스포츠와 각별한 인연을 맺어 왔다. 그래서 그가 스포츠 마케팅에 대해 남들보다 한발 앞선 혜안을 가지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이건희의 경영과 인생, 그리고 도약
이건희의 다섯 개의 경영
경영 키워드 - 지금의 삼성전자를 만든 위대한 다섯 가지 경영 키워드: 삼성전자가 글로벌 시장에서 다시 한 번 큰 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건희 회장의 다섯 가지 경영 키워드인 '준비 경영', '계획 경영', '공격 경영', '변화 경영', '전략 경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준비 경영: '지역전문가제도'를 통해 벌써 이십여 년 전에 국제화 시대를 준비하여 현재의 글로벌 마케팅 최강 기업의 초석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품질과 디자인이 미래 사회에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을 짐작하고 미리 준비했다. ② 계획 경영: 반도체와 휴대폰 등 새로운 미래의 물결에 대해 누구보다 빨리 선견지명을 통해 정확하게 예측함으로써, 다른 기업들보다 먼저 반도체를 과감하게 시작하여 선점할 수 있었고, 휴대폰 신화를 일구어 낼 수 있었다.
③ 공격 경영: 통상 1년 6개월이 걸리는 반도체공장을 6개월 만에 건설하게 했고, 통상 1년이 걸리는 스마트폰 개발을 3개월 만에 만들어 낼 수 있게 하고,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공격적인 경영을 펼쳤다. ④ 변화 경영: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위기의식을 강조하면서 변화를 주문했고, 그 결과 위기를 만날 때마다 그 위기를 도약의 또 다른 발판과 기회로 삼을 수 있게 했다. 즉, 삼성전자를 강한 체질의 조직, 투명하고 공정한 조직,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기업 문화를 가진 조직, 일등 의식을 가지고 있는 초일류 조직으로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⑤ 전략 경영: 잘나갈 때 자만하지 않고, 오히려 10년 후의 신수종 사업을 발굴하고, 그 사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전략을 꾸준히 세웠기 때문에, 반도체를 제패하고, LCD와 TV를 제패하고, 스마트폰에서도 제패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