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결정은 왜 세계에서 제일 빠른가
요시카와 료조 지음 | 중앙경제평론사
삼성의 결정은 왜 세계에서 제일 빠른가
요시카와 료조 지음
중앙경제평론사 / 2012년 11월 / 167쪽 / 12,000원
1. ‘빠른 의사결정’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시대
글로벌 전쟁은 ‘토너먼트전’
세계 산업구조는 세계화에서 글로벌화로 크게 변했다. 해외 진출한 일본기업은 많지만 대부분 비용감축을 위해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공장을 이전시킨 것에 불과하다. 해외에서 제품을 팔더라도 일본에서 제조하여 유통하는 상품을 그대로 파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행보를 보이는 기업 경영자는 ‘우리 회사는 글로벌 기업’이라며 기세가 등등하다. 하지만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미래는 밝지 않다. 일본기업은 ‘세계에서 경쟁하기 위한 진정한 글로벌화’가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을 실행한 한국은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신흥국은 생산기지가 아니라 거대시장이다. 그곳에서는 세계 여러 기업들이 토너먼트전을 반복하여 펼치고 있다. 토너먼트전에서는 한 번 지면 다음은 없다. 그럼에도 일본은 아직도 국내에서 자국 기업끼리 리그전을 계속하고 있다. 삼성 같은 한국기업이 일본기업 따라 하기를 그만둔 이유는 일본기업들이 산업구조의 글로벌화에 전혀 대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신흥국 각 지역마다 생산거점을 구축했다. 또한 신흥국을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닌 시장으로 인식하고 각 지역 문화에 맞게 지역 밀착형 제조업을 펼치도록 방향을 전환했다. 신흥국 경제규모가 거대해지면서 세계경제는 글로벌 경쟁으로 이행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던 것이다.
제조업의 글로벌화와 디지털화
기존의 세계화 단계에서는 외국에 공장을 두더라도 제품은 현지 요구와 상관없이 일본에서 입안 및 설계하여 제품을 만들고 값싼 노동력만 추구했다. 그러나 세계화 바람이 불면서 유망 시장으로 주목받는 지역에 공장이나 거점을 두고 해당 국가 문화에 맞는 지역 밀착형 제조업을 전개하는 것이 해외 진출의 진정한 의미가 되었다. 이처럼 제조업의 글로벌화는 급속히 진행되는데 이런 움직임에 일본은 확실히 뒤처지고 있다.
글로벌화와 함께 제조업의 디지털화도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디지털화로 인해 제품의 모듈화(표준화된 부품들의 조합으로 개발이나 제조를 생각하는 발상)가 진전되어 다양한 요구사양에 대응한 다품종 설계가 예전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제품개발의 IT, 설계정보의 디지털화로 인해 효율화가 더욱 확대되었고, 목적에 맞는 다양한 제품을 만들기 쉬운 환경이 정비되었다. 이제는 어느 국가 어느 업체라도 쉽게 첨단 상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제조업 디지털화라는 시대적 흐름을 타고 시장, 인재, 조달, 연구개발, 경쟁 등 각각의 분야에서 글로벌화가 진행되었다. 세계 각지의 시장에서는 국내기업, 해외기업을 불문하고 경쟁을 벌이는 ‘경쟁의 글로벌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재빨리 시장을 선점해서 주도하는 것이 주요한 시대가 되었다.
‘속도’가 비즈니스를 제압한다
다리 너머에 신흥국이라는 거대 시장이 있다고 가정하자. 다리가 무너지는 상황이라도 누구보다 빨리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된다. 건너지 않고 주변 상황만 살피다가 뒤늦게 누군가 다리를 건너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야 다리를 건너면 어떻게 될까? 앞으로 나아가는 시점이 다른 기업들과 같아진다. 세 개, 네 개, 열 개의 회사가 같은 시점에 신중하게 그 다리를 건너려고 하면 다리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한국인은 경우 오늘과 내일은 전혀 다르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일본인은 정반대이다.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기를 염원하는 일본인은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리그전에 익숙해진 사람은 토너먼트전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리그전에서는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리그전에서 지지 않으려면 속도보다는 사전 협상이 필요하지만 토너먼트전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경쟁에서 1등을 하지 않으면 이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리그전과 토너먼트전의 차이는 크다.
2. 의사결정 속도와 정보관리로 비즈니스를 제압한다!
톱다운보다 바톰업
결정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로 접어들면서 느린 의사결정이 많은 일본기업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상부의 하명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톱다운 방식(상명하달 방식)이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기업은 세부적인 사항부터 대국적인 일까지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다 늦어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하지만 삼성은 글로벌화 대처방안에 대해 6개월 이상 논의를 거듭한 끝에 2000년 이후 톱다운 방식을 버리고 바톰업 방식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 대개혁을 단행하면서 100년 후 방향성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3년 후의 매출 설정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단기 실적이나 세부 사항은 부하에게 맡기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이 최종 결정을 하더라도 그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는 일은 없다. 이처럼 리더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조직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미래에 나아가야 할 길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궤도를 수정하면 된다.
기술보다 애플리케이션
일본은 지나치게 기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애플리케이션(해당 기술을 사용하는 응용 분야)을 고려하지 않고 새로운 기술 개발에만 집중하는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발광 다이오드(LED) 연구가 진행되는 기간에는 상품화 방안에 대해 모색하는 것을 뒤로 미루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정반대로 이러한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누구보다 빨리 애플리케이션에 활용하는 방법을 강구한다. LED가 처음 개발되자 액정 디스플레이 백라이트로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재빨리 상품화에 착수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 좋은 사례이다. 이렇듯 기술 개발보다는 그 기술의 활용방안에 대한 기술과 발상, 그리고 결정력을 갖춘 업체와 벤처기업이 성장하는 사회가 바로 글로벌화가 진행된 사회의 모습이다. 기술은 개발설계(과학기술)와 양산설계(산업기술)로 나누어진다. 삼성은 개발설계 부문에서는 아직 일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모든 개발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기술 그 자체의 개발보다 기술을 얼마나 신속하고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건희 회장으로부터의 전화
1993년 6월 내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상대는 ‘삼성전자에서 전화드렸다’며 유창한 일본말로 말문을 열었다. “삼성전자 누구시죠?”라고 되묻자 “이건희 회장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와 매우 놀랐다. 삼성 오너인 이 회장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11월이었다. 이 회장이 삼성 2대 회장에 취임한 직후 한 인물을 통해 ‘CAD에 대해 알려 달라’고 한 이야기를 듣고 도쿄의 한 호텔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당시 나는 히타치제작소에서 CAD 시스템 개발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기업도 CAD 시스템을 도입한 곳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부터 이건희 회장이 CAD에 주목했고, 조기도입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첫 만남 이후 1988년 11월 삼성 측의 초대로 한국을 방문했다. 연구소와 공장을 방문해 보니 관리다운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현장이 이러니 CAD 시스템 도입이 불가능하다고 협조 요청을 거절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그로부터 4년이 흐른 뒤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이 회장은 내가 협조 요청을 거절한 사실을 보고받지 못했다가 그룹의 대개혁에 착수하려 했을 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내가 첫 요청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알게 되었는데, 이 전화 또한 프랑크푸르트에서 결려온 것이라는 점을 보면 결단과 행동 모두 신속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전화를 계기로 나는 1994년 8월 삼성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수평분업을 위한 ‘다품종 소량생산’
삼성이 추진한 개혁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닭 꼬치 방식(수직통합)에서 생선회 방식(수평분업)으로의 전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 닭 꼬치는 꽂힌 순서대로 앞에서부터 닭고기, 파, 두 번째 닭고기 순서로 먹게 되는데 과거의 상품개발 방식도 이와 같았다. 상품기획, 디자인, 기능설계, 생산표준처럼 하나의 공정을 끝내고 나서 다음 공정을 시작하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하였다. 따라서 신제품을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생선회 방식은 많은 종류의 회가 한 접시에 담겨 나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참치를 먼저 먹어야 할지, 오징어를 먼저 먹어야 할지 순서가 없다. 이것을 먹다 저것을 먹어도 상관없듯이 작업도 병렬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상품개발 시간이 큰 폭으로 단축된다. 닭 꼬치 방식은 아날로그 시대 제조업이고 생선회 방식은 디지털 시대 제조업이다. 이 두 방식은 속도 측면에서 크게 다르다. 글로벌화가 진행된 경쟁구도에서는 변화에 제대로 대응했느냐에 따라 시장 지배력에 큰 차이를 낳는다.
3. 삼성은 이렇게 세계를 제압했다
차원이 다른 휴대전화의 종류와 수
삼성은 프로세스 이노베이션을 통해 다품종 소량생산을 구현했는데, 이는 세계 전략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 제품이 해당 분야에서 세계 최고 성능을 자랑하더라도 그 제품이 전 세계에서 수요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브라질, 인도, 아프리카 등 환경과 문화가 다른 각 국가마다 원하는 바가 다르다. 따라서 각 고객의 요구에 맞게 제품을 만드는 ‘요구 사양’의 개념이 중요하다. 삼성은 기본 모델 제품을 바탕으로 각 시장에 맞추어 불필요한 기능을 빼고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많은 파생 모델을 만든다. 일본기업이 1년 동안 출시하는 TV 모델은 두 자리 수에 그치지만, 삼성은 1년 동안 1천 개 이상의 모델을 내놓는다. 다품종 소량생산을 바탕으로 가격을 낮게 설정해도 이익이 나는 체질로 만들었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승부를 겨룰 수 있다. 휴대전화 부문을 보면 삼성은 1년 동안 약 2.5억 대를 생산한다. 일본 1등 제조사가 1년 동안 판매하는 휴대전화가 천만 대 정도이므로 차원이 다르다. 삼성은 똑같은 모델을 1만 대 이상 생산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단순 계산으로도 1만 대 팔리는 휴대전화를 2만 5천 종류 생산하는 꼴이다. 전 세계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점을 계산하면 이 정도의 생산량도 놀랄 일은 아니다.
500엔짜리 장어덮밥과 3,000엔짜리 장어정식
품질에도 상중하가 있다. 음식으로 말하자면 500엔짜리 장어덮밥도 있고 3,000엔짜리 장어정식도 있다. 일본기업은 3,000엔짜리 장어정식만 상품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 상품은 최고급이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만 먹으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선 500엔짜리 장어덮밥을 내놓아야 한다. 이렇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장어는 맛있다는 사실을 알린 후 1,000엔짜리를 내놓는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을 찾는 사람에게는 3,000엔짜리를 내놓는 게 비즈니스의 정석이다. 예를 들어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상품 중에는 2~3개월 안에 망가지는 상품이 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불평하는 고객은 별로 없다. 고객 입장에서도 품질이 100엔 상품으로는 적절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품질은 고객이 정하는 것인데 일본기업은 이 점을 착각하고 있다. 한국의 삼성 같은 기업들은 이런 점을 고려한 비즈니스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일본을 누르는 결과를 낳고 있다.
‘재료비 감축노력’과 ‘뺄셈 방식’의 가격결정
삼성은 사용자가 추구하는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제조비용을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일본기업을 따라 하던 시절에는 일본제품과 같은 수준의 품질을 추구하면서 부품 하나라도 일본기업과 똑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존재했다. 하지만 당시 삼성제품은 일본제품보다 가격을 낮추어 경쟁하는 전략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비용증가 부담을 떠안아야 했다. 그 후 삼성은 일본기업 따라 하기를 그만두고 신흥국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때 제조원가 구조를 철저하게 개선했다. 신흥국 소비자가 필요로 하지 않는 부분을 제외하는 것만으로도 자재비를 크게 감축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전사적인 재료비 감축노력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하청업자를 울리는 일이 없도록 부품업체와의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또한 부품의 질을 다소 낮추더라도 제품으로서 요구되는 품질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면 저렴한 대체 부품으로 전환하였다.
이처럼 자재비를 감축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프로세스 이노베이션을 통해 작업의 효율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일본제품은 일반적으로 제품가격을 결정할 때 제조원가와 확보하고자 하는 이익을 합산하여 결정하는 덧셈 방식을 사용한다. 삼성은 정반대이다. 삼성은 시장마다 소비자의 경제력을 조사하여 판매 예상 가격을 먼저 설정하고 그 가격으로 맞추기 위해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범위를 산출해 제품 개발을 진행하는 뺄셈 방식을 사용한다. 기업과 소비자 입장에서 어느 쪽이 바람직한가는 확실하다. 삼성은 이 부분을 고려하여 각 지역의 수요에 맞는 다양한 제품을 제공하여 전 세계에서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디자인 혁명’을 통해 글로벌 브랜드로!
삼성에서 제품군을 고려할 때 신흥국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에는 와인 잔의 실루엣에서 모티브를 얻어 디자인한 삼성 액정 TV가 인기를 누렸다. 적당한 가격도 호평을 받았지만, 디자인이 유럽인의 생활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었다. 디자인 측면에서 삼성 TV는, 받침 때문에 일부러 TV 책상을 살 필요가 없다. 넓은 방에 자유롭게 배치하고 TV 자체를 인테리어처럼 사용할 수도 있다. 품질 면에서는 일본제품보다 한 수 아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소비자가 불편을 느낄 정도의 수준은 아닌 데다 종합적인 균형 측면에서 소비자가 선호하는 제품이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다. 이것이 바로 삼성의 디자인 혁명이다. 이것은 이건희 회장이 ‘고객은 가장 먼저 디자인으로 마음을 움직인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말만 했을 뿐이다. 그 방향성에 입각한 구체적인 전략을 세우는 것은 부하들의 몫이다. 디자인 혁명은 회장의 말 한마디에서 해결책을 찾아 나머지는 현장의 판단에 따라 추진되었다. 이후 삼성은 세계 각국에서 천 명 이상의 디자이너를 확보하여 해당 지역과 국가에 맞는 제품을 제공했다.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지역마다 수요나 취향도 천차만별이다.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이면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골라 해당 상품을 구입할 확률이 훨씬 더 높아진다. 이를 겨냥한 것이 삼성의 디자인 혁명이다.
4. 위기 시의 리더와 조직의 역할
아내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따라 삼성은 1993년부터 대개혁에 나섰다. 개혁이 그룹의 약진에 큰 힘이 된 것은 1997년 IMF 위기가 닥친 뒤였다. IMF 위기 때 삼성은 기업 해체는 면했지만 많은 사업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구조 조정으로 그룹사 수는 140개에서 83개로 축소되었고, 종업원 수도 16만 명에서 11만 5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삼성은 강한 위기감을 가졌고, 이로 인해 개혁은 급물살을 탔다. 이전까지 일본 따라 하기를 표방하던 삼성은 이때부터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로 했다.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꿔라’라고 지시했다. 누군가의 뒤를 쫓는 것이 아니라 개척자가 되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광경은 미지의 영역이다. 삼성은 이를 각오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재벌 오너
이건희 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87년이었고, 이후 다시 만난 것은 1993년이었다. 이 시기는 IMF 위기가 닥치기 전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근간을 둔 개혁을 추진하던 무렵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다른 사람처럼 변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처음 만났을 때는 오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지만, 다시 만났을 때는 얼굴 전체에 뾰루지가 나는 등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갓 50대였는데 마치 70세 넘은 노인처럼 보였다. 나중에 들으니 3개월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의 경영자는 이런 몰골이 될 때까지 회사를 생각하고 시간을 들이는 일이 없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상당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무렵 그가 간부 몇 명에게 로고를 지운 자사 TV와 일본 TV를 보여주고는 ‘둘 중 어느 것을 살 것인가?’ 물으니 하나같이 일본제품을 골랐다고 한다. 이런 제품만 만들면 이익률이 낮은 것은 당연하다. 이 회장은 한국에서는 최고 기업 대우를 받더라도 세계를 상대로 했을 때 경쟁력이 낮다는 점을 직시하고 위기감을 가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