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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특파원 중국 CEO를 말하다

홍순도 외 지음 | 서교출판사
베이징 특파원 중국 CEO를 말하다

홍순도 외 지음

서교출판사 / 2012년 8월 / 400쪽 / 18,500원





제1부 중국 CEO, 그들은 누구인가?



중국 공산당과 홍색자본가

중국인들은 돈과 참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표현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중국 역사를 살펴봐도 이런 점은 명확히 드러난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자본가로 꼽히는 왕해, 강태공으로 더 유명한 여상, 공자의 제자로 이재(理財)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는 자공 등 예로부터 중국에는 세상을 뒤흔든 거부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거부들의 명맥은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인해 명맥이 끊겼고, 2차 대전 이후 중국이 공산화되고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지주와 부농들은 철저한 타도 대상이 되었다.

1979년 1월 덩샤오핑은 룽이런을 비롯한 구 중국 시대의 자본가 5명을 초청해서 개혁, 개방 정책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경제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이렇게 해서 룽의 주도로 외국 자본과 선진기술 도입을 주요 업무로 하는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CITIC)가 설립되었다. 자본금 1천만 위안으로 시작한 이 회사는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전체 자산 1조 위안, 순 자산 1천억 위안의 대형 그룹으로 우뚝 섰다. 모두가 홍색자본가인 룽의 공로였다. 룽이런과 같은 상하이 출신의 징수핑(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은 룽의 오른팔이 되어 CITIC의 부동산 부문을 크게 성장시켰고, 중국 최초의 상업은행을 설립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개혁, 개방 정책 추진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홍색자본가들은 이 밖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사영 기업인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자본가가 될 첫 번째 기회를 잡은 사람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당원이나 관료 출신이었다. 이렇게 개혁개방 정책 초기 당정의 혜택을 많이 받았던 홍색자본가 계층도 세월이 흐르면서 진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공산당원이 아닌 경우가 많아졌고, 관료 출신도 많이 줄어들었다. 대신 이들의 자리는 정치색이 약한 정보기술 인력들이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해외유학을 통해 한 차원 높은 IT 기술을 습득하고 귀국한 자본가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빠르게 모태 홍색자본가들을 대체해 나갔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인터넷 검색엔진 <바이두>를 창업하고 10년도 안 된 기간 안에 중국 부호 랭킹 3위에 오른 리옌홍(43세)과 중국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장차오양(48세) <써우후> 대표가 있다.

홍색자본가들을 대체하는 또 다른 유형의 자본가로는 부동산 업자들이 있다. 21세기 들어 주택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부동산 사업에 눈을 돌린 자본가들이 대박의 행운을 잡았다. 중국 부호 랭킹 50위권에 드는 자본가들 중 거의 절반 가까이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부동산 개발업체 <비구이위안>을 경영하는 젊은 여성 자본가 양후이옌(30세)이다. 당정 고위 원로들의 후예들을 일컫는 태자당 멤버들도 자본가로 변신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큰 아들인 장멘형이다. 그는 통신업체 <차이나넷컴>의 대주주이자 홍리 반도체의 실질적인 오너로 알려져 있다. 원자바오 총리의 아들인 원윈쑹(41세)도 사모펀드 파트너로 70억 위안에 이르는 큰 부를 쌓았다. 이 밖에도 많은 태자당 출신 자본가들이 중국 경제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중국 자본가들은 최근 들어 홍색자본가들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분야에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 모든 산업의 기본이자 부가 가치가 엄청나게 큰 제조업에 승부를 거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부호 순위 1, 2위에 각각 이름을 올린 량원건(56세) <싼이중공업그룹> 회장과 쭝칭허우 <와하하그룹> 회장이 있다. 중국 자본가들이 진화한다는 사실은 부호 랭킹 가운데 여성과 젊은이들이 유독 많은 숫자를 차지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여성 CEO 비율은 중소기업까지 포함할 경우 30%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재 중국의 자본가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홍색자본가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홍색자본가로 급격하게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중국 경제를 견인하는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제부터 중국 경제를 이끌어 가는 대표 CEO들을 한 명 한 명 자세히 살펴보자.

철밥통 뒤로하고 광야에서 성공한 싼이그룹 량원건 회장

중국은 지금 전국이 공사판이라고 할 만큼 여러 곳에서 엄청나게 많은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개발붐은 적어도 10년은 유지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개발붐에 편승해 중국의 건설장비 업체들은 엄청난 고속성장을 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선두 업체가 바로 량원건 회장이 이끄는 싼이중공업이다. 최근 싼이중공업은 중국 굴삭기 시장 부동의 1위였던 두산중공업을 밀어내고 15% 전후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굴삭기, 펌프카, 크레인, 천공기 등을 생산하는 싼이중공업은 1986년 후난성에서 설립되었다. 2003년 상하이 주식거래소에 상장된 싼이는 2011년 매출액 650억 위안, 순이익 110억 위안을 기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싼이의 성장세를 고려할 때 2015년에는 매출액 2,000억 위안의 세계적인 공룡기업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956년 후난성에서 태어난 량원건 회장은 1983년 중난 대학을 졸업하고 3년 동안 국영 무기제조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리고 중국에 개혁개방의 물결이 본격 몰아치던 1986년 어느 날 안정된 국영기업 공무원 신분을 걷어차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여러 가지 사업을 시도하다가 합금 사업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작은 성공을 맛본 그는 건설장비 제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중국 경제 발전으로 향후 인프라 사업이 많아질 것이고 따라서 건설장비제조업이 유망하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91년 기존 국영기업이 장악하던 건설장비 제조업에 민간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싼이가 뛰어들었다. 이후 싼이는 고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규모를 기하급수적으로 불려갔다.

회사가 커지자 량 회장은 싼이그룹을 싼이중공업그룹과 싼이재료공업으로 분할하고 본사를 후난성의 성도 창사로 옮겼다. 그리고 기술개발을 위해 외국 전문가들을 영입했다. 이후 싼이중공업의 행보는 눈부셨다. 기술개발에 치중한 싼이의 제품은 품질이 뛰어났다. 칭짱철도 건설현장과 남수북조 시공현장, 중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도 그 진가를 보였다. 해외에서도 중동 최대의 역사라는 말을 듣는 두바이 도심 건설 현장에서도 그랬다. 1998년에는 싼이중공업을 세계에 알린 대기록도 수립되었다. 싼이의 펌프카가 광둥성 선전에 건축 중이던 사이거플라자 70층 공사 현장에 300.8미터 높이로 콘크리트를 올려보낸 것이다. 중국 최고 기록이었다. 싼이중공업이 중국에서 '콘크리트 펌프왕'으로 불리는 것은 이때의 기록수립과 관련이 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슈퍼펌프카 개발에 매달려 2002년 홍콩국제금융빌딩 시공 현장에서 406미터의 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설립된 지 불과 15년 남짓한 싼이중공업의 기술력이 완벽하게 입증되었다. 게다가 애프터서비스도 나쁘지 않았고, 제품 가격도 저렴했다. 이후 싼이의 제품은 터키, 대만, 동유럽,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등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

만약 량 회장이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인생을 편하게 보냈을지 모른다. 학력이나 능력으로 볼 때 최소한 국영기업 사장 자리 정도는 꿰차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는 30대 초반에 이런 미래의 가능성을 과감하게 걷어차 버렸다. 이른바 철밥통을 걷어찬 것이다. 한때 주변 사람으로부터 돈키호테라고 비아냥받던 그는 지금 중국 재계의 주류로 우뚝 서 있다.

그가 중국 재계의 주류로 우뚝 선 계기는 2005년 중국 자본시장 역사상 처음으로 주식분할을 실행한 것이다. 시장의 반응은 좋았고, 언론은 연일 중국증권시장에 큰 한 걸음이 되었다는 찬사를 쏟아냈다. 이후 중국 증시에서는 주식분할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가 적극 총대를 멘 덕분이었다. 그의 희생정신은 보답으로 이어졌다. 2005년 중국중앙방송국(CCTV)에 의해 '올해의 중국경제인물'로 선정된 것이다. 이후 그는 중국 재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의 위상을 만천하에 보였다. 차기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오를 것이 확실한 시진핑 부주석이 2012년 2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중국 재계 지도자 12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제2부 우리도 주목하라 : 또 다른 신화의 주인공들



화교의 신화 창조한 화빈국제그룹 옌빈 회장

"바람과 서리가 몰아치고 눈과 비가 온다고 해도 길을 만들고 다리를 놓아야 한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세상일을 한다면 엄청난 성공까지는 몰라도 평생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 말은 도덕 교과서에 나올 만한 유명한 인물의 말이 아니다. 2011년 중국 부호 순위 4위에 랭크된 화빈국제그룹 옌빈(58세) 회장이 늘 언급하는 좌우명이자 경영철학이다. 500억 위안에 달하는 그의 재산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땀과 노력이 있었다.

1954년 산둥성에서 태어난 옌빈은 집안이 엄청나게 가난해 중학교도 겨우 마쳤을 정도였다. 그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18세에 무작정 태국 방콕으로 밀입국했다. 방콕의 한 차이나타운에서 그는 막노동판 십장을 만났다. "너 힘 좀 쓰게 생겼구나. 내 밑에서 일해라. 일당은 얼마면 되겠니?" 어린 옌빈의 대답은 간단했다. "밥만 배불리 먹으면 돼요." 눈썰미가 좋고 부지런한 그는 곧 십장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때의 삶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집안 청소와 화장실 청소를 끝낸 다음 노동판에 나갈 준비까지 철저히 했다. 이렇게 부지런했으니 십장이 나를 좋게 볼 수밖에 없었다." 경리일까지 맡은 그는 월급을 알뜰하게 모아서 몇 년 뒤에 작은 가게를 열었다.

부지런한 그였으므로 돈은 금방 불어났다. 1984년 그는 화빈국제그룹을 설립하여 버려진 캔을 수집해 수출하는 국제무역에 뛰어들었다. 매출이 쑥쑥 늘면서 1989년 부동산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당시 태국은 부동산이 유망 아이템이었다. 그는 방콕 시내 호텔에 투자하여 큰돈을 벌고 음료 산업에 진출했다. 우리나라 박카스와 비슷한 기능성 음료인 홍뉴가 대박이 났다. 홍뉴는 태국 시장에서 매년 10억 개가 넘게 팔렸고, 인근 동남아 국가로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옌빈은 내친 김에 1995년 선전에 음료 공장을 짓고 중국에도 첫발을 내디뎠다. 홍뉴는 중국에서도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는 베이징에 공장을 추가 건설했다. 음료 사업을 하면서 그는 부동산에 눈을 돌려 1996년 베이징 중심가에 공사가 중단된 빌딩 하나를 싸게 인수하여 자금을 투입했다. 이 빌딩은 현재 그에게 황금알을 낳아주는 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진화했다.

옌빈의 초고속 성공을 가능케 한 요인은 시장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이다. 시장에 대한 그의 예지 능력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빛을 발했다. 당시 그는 보유 중이던 달러로 바트화를 사들이는, 보통 사람들과는 반대의 선택을 했다. 태국 경제의 펀더멘털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역발상은 성공적이었다. 태국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면서 그는 큰돈을 벌었다. 인재를 알아보는 탁월한 능력과 우연히 온 기회도 확실히 잡는 과감한 결단력도 성공 요인이다. 그가 화교의 신분으로 중국 사업에 투신한 지 17년 만에 자산 300억 위안, 매출 100억 위안의 기업을 일구었다는 사실은 결코 간단하게 볼 일이 아니다. 어쩌면 옌빈 이후에 비슷한 화교 기업인조차 나오기 힘들 수도 있다. 그만큼 그의 성공은 화교로서 독보적이다.

반골의 올드보이 리판그룹 인밍산 회장

중국에는 평범한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기인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충칭에 기반을 둔 <리판그룹>의 인밍산(74세) 회장이다. 인밍산은 1938년 쓰촨성의 조그만 강변 마을에서 대지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탓에 그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이후 홀어머니와 함께 고향 근처 오지의 초가로 쫓겨났다. 이후 그는 생존을 위해 닥치는 대로 구걸에 나섰고, 바늘과 달걀을 파는 장사를 하였다. 장사를 하여 돈이 좀 모이자 그는 충칭에 가서 공부를 시작하여 대학시험까지 합격을 하였다. 하지만 1950년대 불어닥친 반우파 투쟁의 바람으로 악질 반혁명 우파분자로 몰려 9개월의 감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후에도 감옥살이나 진배없는 공장에서의 노동개조를 무려 21년이나 당했다. 하지만 그는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영어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공부를 하는가 하면, 밖으로 나갈 경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늘 생각했다.

그는 1978년 공장 노동에서 해방되었지만 다른 일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할 수 없이 선택한 것이 영어강사 자리였다. 공장에서 처절하게 익힌 영어실력 덕분에 충칭출판사 편집부 직원으로 스카우트되었다. 뛰어난 이재 능력을 바탕으로 출판사 경영에 참여했던 그는 1985년 5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값싼 책을 박리다매로 판매하여 종잣돈을 모은 다음 55세의 나이에 오토바이 모터 생산 공장을 차렸다. 회사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고 자금을 어느 정도 축적하자 아예 오토바이 제조업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그는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직접 오토바이 개발에 매달려 중국에서 처음으로 100cc 오토바이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에는 제품의 성능향상에 매달렸고 그 결과 2004년 오토바이 생산 및 판매량과 수출액, 특허 보유 등의 부문에서 중국 1위 업체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 앞에는 재벌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붙기 시작했다.

중국 재계 최고 기인의 성공 신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오토바이 제조 성공의 여세를 몰아 그의 나의 65세인 2002년 자동차 생산에 나섰다. 그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외국 업체와 합작을 하는 대신 독자 자동차 브랜드 개발을 선언했다. 오토바이 엔진에 차체를 얹은 한심한 자동차라는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그는 10년 동안 자체 엔진 개발과 연구 분야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지난 10년 동안의 노력을 통해 현재 리판그룹은 어느 정도 기술 자립을 이루었다. 아직까지는 외국 메이커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다른 토종 자동차 회사에 비해 초라한 수준이지만 지금 리판그룹과 인밍산은 희망에 부풀어 있다. 인밍산은 2002년 11월 25일 자신의 인생 역정을 전 중국에서 인정을 받았다. 이날 리판그룹이 상하이 증시에 상장되면서 그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적의 자본가라는 사실을 공인받은 것이다.

인밍산에게도 위기의 시절은 있었다. 1990년대 중반 경쟁업체의 덤핑공세로 매출이 떨어졌을 때였다. 그는 이 위기를 해외시장 개척으로 극복했다. 동남아 시장을 공략한 것이다. 그는 시장을 장악한 일본 제품에 대항하기 위해 "자전거보다 좀 더 비싼 오토바이"라는 선전문구를 대대적으로 내걸고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했다. 그의 전략은 적중하여 일본 브랜드를 완전히 몰아내고 동남아에서 시장 점유율 70%를 기록했다. 여기에 자신을 얻은 그는 아프리카 시장을 공략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11년 현재 그의 재산은 82억 위안으로 자본가 순위 165위이다. 하지만 그가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해 겨우 20년 만에 이렇게 회사와 재산을 키워낸 것을 보면 정말 놀라운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제3부 중국 재계를 주무르는 여왕 : 남성 CEO 뺨치는 여성 CEO



무일푼에서 미다스의 손이 된 런허그룹 다이슈리 회장

중국 경제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여성 기업가가 많고, 결단력이나 배짱에서 남성 경영자 뺨치는 여걸들이 많다. 이 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여성 CEO는 <런허그룹> 다이슈리 회장이다. 그녀는 헤이룽장성 하얼빈 출신으로 중국 문학을 전공한 문학도였다. 대학 졸업 후 기자 생활을 하던 그녀는 영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유럽으로 떠났다가 32세의 나이에 무일푼으로 중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중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무슨 배경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1994년 런허 부동산 회사를 창업하면서 인민해방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전국 곳곳에 소재한 방공호인 디샤청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것이다. 그녀는 냉전 시대의 유물인 이 지하 땅굴 일부를 지하상가로 개조하여 분양을 하였다. 독특한 아이템이어서 사업은 바로 성공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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