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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사노 신이치 지음 | 럭스미디어
손정의

사노 신이치 지음

럭스미디어 / 2012년 9월 / 464쪽 / 15,000원





손정의 삼대의 해협 이야기



나에게 피해의식은 없다: 손(구성 야스모토)정의(일본명 마사요시)는 부친 손삼헌(야스모토 미쓰노리)과 모친 이옥자의 차남으로, 1957년 8월 11일 사가현 도스시 도스마치 무번지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넷으로 위로부터 정명, 정의, 정헌, 태장이 있다. 손정의 일가와 일본의 연관은 삼대 전까지 거스른다. 그의 조부 손종경이 대구 근교에서 소작농을 하다가 대한해협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온 게 1930년대의 일이다. 머지않아 조모 이원조도 강원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손종경과 이원조는 1934년에 혼인하여 7명의 자식을 두었다. 위로부터 우자, 청자, 삼헌, 재헌, 일헌, 설자, 성헌으로 4남 3녀였다.

조선인 마을에 돌이 날아들다: 도스에 사는 재일 한국인에 관한 더 자세한 조사를 위해 인터넷에 실린 주소 하나만 믿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도스지부'를 방문해 보았다. 하지만 해당 주소의 민단 사무소는 없고, 불고기 식당 한 채만이 있을 뿐이었다. 때마침 점심때라 그곳에서 식사했는데, 놀랍게도 가게 주인은 손정의의 종형제였다. "제가 정의보다 6살 위예요. 저 역시 역 앞 조선인 마을에서 살았어요. 그곳에 손씨 집안 네 가족이 모여 살았지요. 모두 돼지를 쳐서 생활했어요."

자식은 복권이 아니다: 종형제인 오다케 진테쓰가 말해 준 손정의의 유년기 이야기 이상으로 흥미로웠던 건 그의 부친 손삼헌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 삼헌 외삼촌 말인가요? 머리가 좋은 상인이셨어요. 얼굴은 지금의 정의와 쏙 빼닮았지요. 돼지치기와 밀조주로 종잣돈을 모으고 있었어요." 손삼헌은 오토 삼륜차로 오무타와 구마모토는 물론, 나가사키와 야마구치현 하기까지 밀조주를 날랐다고 한다.

야와타제철 사원을 상대로 한 신용대출: 손정의 일가는 손정의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도스의 조선인 마을을 떠나 기타규슈시 야와타니시구로 옮겨와 살았다. 손정의 일가가 기타규슈로 이주한 이유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가 유치원을 다녔던 도스에서는 머리에 돌을 맞는 등 노골적인 한국인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손삼헌의 생업이 돼지치기와 밀조주 제조에서 금융업이라는 '떳떳한 직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손삼헌의 비서가 되었던 오다케는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는 아직 신용대출 같은 건 성행하지 않아 목돈을 가진 자가 돈을 빌려 주곤 했어요. 구로사키에 사무소를 차렸던 건 근처에 야와타제철소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철은 국가다. 제철소는 망하지 않는다. 그러니 야와타 공원들에게는 아무리 돈을 빌려 줘도 떼일 염려가 없다'는 게 외삼촌의 계산이었어요." 오다케는 야와타제철소 사택을 집중공략하여 전 세대의 우편함에 죄다 전단지를 던져 넣었다. 선전 문구는 다음과 같다. '보증인ㆍ담보 없음. 5만 엔까지 융자' "이게 대박이 난 겁니다. 신용대출 따윈 존재하지도 않던 시절이라 공원들은 속속 돈을 빌려갔어요. 게다가 월급날이면 꼬박꼬박 갚았으니 제철소 공원들은 최고의 고객이었지요. 외삼촌의 예측이 멋지게 적중한 거죠."

붉은 잉어를 낚으면 만 엔: 손정의가 10살쯤 되었을 때 손삼헌은 대출업에서 파친코업으로 전업했다. 1980년대 초, 적중률 높은 휘바기(일본의 파친코 제작사 산교가 만든 파친코 기계 시리즈 중 하나)의 규제가 아직 시작되기 전인 파친코 호황기에는 손씨 일가 7남매 중 여섯이 소유한 사가와 후쿠오카의 파친코만 해도 56곳이나 되었다. 휘바기의 규제가 시작되고 손씨 일가의 파친코 가게에도 한적함이 감돌기 시작했을 때 손삼헌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손삼헌은 파친코 주차장에 유료 낚시터를 만들어 '붉은 잉어를 낚은 사람에게 만 엔의 보너스를 지급합니다'라는 전단지를 뿌렸다. 그러자 낚시터는 크게 번성했고, 보너스를 획득한 손님은 파친코로 되돌아왔다. 또한 파친코에서 잃은 손님은 다시 낚시터에서 따려 했기 때문에 양쪽 모두 번성했다.



구루메에서 미 서해안으로의 '청춘 질주'



모든 전학 수속을 혼자서 하다: 손정의는 기타규슈의 히키노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히키노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히키노중학교엔 1학기 동안 잠시 다녔을 뿐이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모친 이옥자와 후쿠오카시 조난구의 맨션으로 옮겨와 살았다. 후쿠오카현 굴지의 명문학교로 알려진 조난중학교로 전학하기 위해서였다. 손정의의 조난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가와히가시 도시미즈는 전학 당시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조난중학교로 전학한 건 정의가 직접 결정한 것 같았어요. 1학년 때 담임 말로는 정의가 모든 전학 수속을 혼자서 했다고 하더군요."

'사실은, 나 재일 한국인이야': 조난중학교 1학년 시절 같은 반이었고, 현재는 후쿠오카 시내의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고가 가즈오는 손정의가 한국 국적인 걸 3학년이 될 때까지 몰랐다고 한다. "그 친구가 자기 입으로 한국 국적인 걸 밝힌 건 3학년 겨울 무렵이었을 겁니다. 친한 친구들과 덴진에 놀러 갔을 때입니다. 꼬치구이점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어요. 고등학교에 가면 뿔뿔이 흩어지겠구나, 쓸쓸하겠다,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말을 가로막듯 불쑥 밝히더군요. '사실은 나 재일 한국인이야'라고.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모두 곤란해했어요." 손정의는 3학년이 될 무렵엔 성적도 최상위권이 되어 졸업 후, 지역 명문고인 구루메대부설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교생이 '학원 경영'을 기획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손정의가 가와히가시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불려 나간 곳이 시내의 레스토랑이었어요." 가와히가시가 용건을 묻자, 그는 이런 말을 꺼냈다. "선생님, 저희 아버지는 파친코와 대출업을 하세요. 나름 유복하기는 하지만, 전 도저히 아버지 일에 친밀감이 들지 않아요. 사실 전 앞으로 학습 학원을 경영하고 싶어요. 이게 제가 짠 학원의 커리큘럼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아직 학생이라 경영에 나설 수가 없어요. 선생님께서 학원 책임자를 맡아 주실 수 있나요?"

"저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정의한테 말했죠. '좀 더 기다려라, 넌 아직 고등학생이야. 서둘러 사업을 시작할 필요가 없지 않니?'라고 말이죠. 그는 '음!' 하고 생각에 잠겼지만, 제가 장단을 맞춰 주지 않자 결국 그만두더군요. 하지만 그가 만든 커리큘럼은 상당히 잘 만들어진 것으로 기억됩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토혈: 손정의는 2010년 '신 30년 비전 발표회'에서 스크린에 비친, 그토록 좋아했던 조모의 사진 앞에서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먼저, 그토록 좋아했던 조모가 죽도록 싫어지게 된 게 철이 들고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그걸 숨기려고 일본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을 알게 되었던 무렵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그러던 중, 제 아버지가 피를 토하고 입원을 하셨습니다. 가족의 위기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극복해야만 한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저는 그때 사업가가 되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일시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가족을 책임질 수 있는 사업을 일으켜야겠다고 중학교 시절에 각오했습니다……"

'젊은이들'의 합창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다: 구루메대부설고등학교 1학년 시절 담임이었던 아베 이쓰로(현 동교 비상근 강사)는 2학기가 되자마자 손정의에게 불쑥 "미국에 가고 싶어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전 사실 일본의 대학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한국 국적이라 그건 무리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설령 한국 국적이라도 미국의 대학을 나오면 일본인은 저를 좀 더 인정해 줄지도 몰라요."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걸 듣고, 아무리 설득해도 이 아이를 막을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손정의는 1973년 9월, 구루메대부설고등학교에 정식으로 자퇴서를 냈다.

'저 젊은이는 일본을 손에 거머쥘 것이다': 16세에 미국으로 건너간 손정의는, 영어 학교에서 몇 개월간 어학 공부를 마친 후 세라몬테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그는, 대학입시 검증시험에 합격하여 미국에 온 지 1년 반이 지난 1975년 9월엔 홀리네임즈 칼리지(현 홀리네임즈 유니버시티)에 입학했다. 홀리네임즈를 2년간 수료한 그는,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에 편입시험을 치른 뒤, 경제학부 3학년에 편입한다. 그해, 교제 중이던 오노 마사미도 같은 대학 천문물리학부에 편입한다. 버클리캠퍼스에서 손정의는 자신에게 '하루 한 가지 발명'이라는 난제를 부여하여 불철주야 연구에 몰두한다. 그 결과 마침내 발명한 '자동번역기'로 1억 엔의 자금을 손에 넣는다. 이 천재 사업가의 성공의 첫걸음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버클리캠퍼스 재학 시절 손정의가 '자동번역기' 아이디어를 제안했다던 우주물리학자 모더 박사를 통해 당시의 손정의가 어땠는지에 귀 기울이는 건 의미 없는 일 아닐까 생각하고 박사를 만났는데, 그는 말했다. "그가 다른 발명자와 달랐던 점은 발명을 상품화할 뿐 아니라, 그 상품을 어떻게 팔 것인가 하는 부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죠. 그걸 보고 그의 성공의 싹을 예감할 수 있었어요." 모더 박사의 이야기 중, 또 하나 흥미로웠던 건 손정의의 결혼 상대 여성에 관한 견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의사로, 도쿄에서 아주 큰 병원을 경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병원을 물려줄 만한 의사 사위를 원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녀는 외동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딸은 의사가 아닌, 더구나 한국인인 손정의와 사귀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거라고 느꼈지요."

치마저고리로 결혼식: 손정의가 캘리포니아주 시청사에서 양가 부모와 친척도 없이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결혼 이듬해 두 사람은 버클리캠퍼스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일본에서도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 마사미는 시댁 어른들 눈을 의식하여 웨딩드레스를 벗고, 일부러 한국 전통 의상인 치마저고리로 갈아입었다. 그 여성은 훗날 손정의가 일본에 귀화하여 '야스모토'에서 '손'으로 성을 바꿀 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손정의가 귀화하여 일본 국적을 취득한 건 미국에서 귀국하고 10년 후인 1990년의 일이다.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데 그만큼 시간이 걸렸던 건, 귀화 신청을 낼 때마다 법무성으로부터 '손'이라는 한국 성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번번이 들었기 때문이다.

'손'이라는 성은 일본에 없다. 선례가 없는 걸 인정할 수 없다. 일본에 귀화하고 싶다면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라. 이것이 법무성의 변명이었다. 이에 대해 손정의는 일본식 성으로 바꾸는 일은 도저히 싫다고 주장하며 한 가지 비책을 강구했다. 한국에서는 부부 별성제(別姓制)이기 때문에 그의 아내는 '오노'라는 성 그대로였다. 그래서 먼저 일본인인 아내가 재판소에 '오노'라는 성을 '손'으로 개정하는 신청을 했다. 재판소에서 변경 사유를 묻자 그녀는 "남편의 성 때문"이라고 답했다. 재판소는 결국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손정의는 다시 법무성에 가서 "일본인 중에 정말 '손'이라는 한국 성의 선례가 없나요? 잘 찾아보시죠. 한 사람 있을 겁니다"라며 버텼다. 담당자는 "한 사람 있네요. 당신 아내요."라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야스모토'는 한국 성인 '손'을 그대로 쓰면서 일본에 귀화할 수 있었다.

그는 우주인이다: '자동번역기'를 상품화한 전 샤프 부사장 사사키 다다시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손정의란 남자는 어떤 인물입니까?

"그는 우주인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주인이 되고 싶어 하오. 실제로는 아직 인간과 우주인의 중간 정도랄까." 손 회장을 처음 만난 건 언제쯤인지요?

"1977년경일 거요. 그 당시 샤프의 기술자였던 나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LSI 연구 현장을 돌아보고 있었고, 손 군은 당시 버클리캠퍼스 컴퓨터 연구 동아리에 있었는데, 그 역시 실리콘밸리를 돌아보고 있었지요." 그때 그는 어떤 인상의 청년이었습니까?

"뭐, 첫인상은 평범하고 호감 가는 청년이었소. 단 약간 특이한 면이 있는 남자라는 생각은 들었소. 무슨 얘기 끝에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우주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요? 우주의 처음 시작은 어땠을까요?'라고 묻지 않겠소." 그래서 어떻게 대답하셨나요?

"그건 잊어버렸지만 그런 질문을 하는 남자를 만난 건 처음이라 손 군에게 강한 흥미를 느꼈던 건 사실이오. 이 특이한 남자를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요."

24살 젊은이에게 1억 엔을 보증하다: 귀국한 사사키는 샤프 중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고, 1년이 지난 1978년 여름, 손정의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일시 귀국했습니다. 꼭 사사키 씨를 만나 뵙고, 보여드릴 게 있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손정의가 상담한 건 이제 막 완성했던 자동번역기의 판로확장이었다. 사사키는 손정의의 자동번역기를 보고는 가망이 있을 거라고 느껴 손정의의 기술을 2천만 엔에 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손정의는 1981년에 사사키의 진언을 받아들여 소프트뱅크의 전신인 일본 소프트뱅크를 세웠다. 손정의는 그 창업자금을 위해 다이이치간교은행에 1억 엔의 융자 신청을 했다. 하지만 단번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 직후 손정의는 사사키에게 전화를 했다. "'사사키 씨, 전 분합니다. 저는 어떻게든 창업을 하고 싶습니다. 사사키 씨, 제 보증인이 되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샤프 인사부에 내 퇴직금을 계산해 달라고 했소. 또 자택 평가액도 조사한 결과, 양쪽을 합하면 1억 엔이 된다는 걸 알았지요. 이 정도면 만에 하나 돈을 날리더라도 어떻게든 수습이 되겠구나. 그런 계산을 하고 손 군의 보증인이 될 결심을 했어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나 자신도 모르겠소.(웃음) 그에겐 그만큼 매력이 있었다고밖에 할 수 없지 않겠소."

소프트뱅크의 원점: 손정의의 인터뷰로 가보자.

손 회장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건 부친 손삼헌 씨가 토혈을 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심정은 어떠셨나요? "눈앞이 캄캄했었죠. 아버지는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기는 와중에도 일을 하며 끊임없이 고난을 극복해 온 남자니까요." 아직 중학생이었죠?

"그렇습니다. 형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가 하시던 대출 회사를 도왔습니다."

손 회장께서도 형과 같은 선택을 생각한 적이 있으신가요?

"물론 있어요. 고등학교에 가지 말고 형처럼 중졸로 대출과 파친코 가게를 도울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루메대부설고등학교에 들어가셨지요?

"시험 보기 싫어서 도망쳤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화가 났고, 제 자존심도 허락지 않아서 고등학교만은 보란 듯이 다녀 보이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바로 학원을 차릴 생각을 하셨습니다. 왜죠?

"그건 제 유학 자금을 벌 생각으로 그랬던 겁니다. 그렇잖아도 아버지의 입원비 및 이래저래 돈 들어갈 곳이 많아 유학 자금 정도는 제 손으로 벌고 싶었거든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부친의 토혈을 계기로 손 회장께선 조모님과 함께 한국에도 가고, 미국에 갈 결심도 굳힙니다. 왜 그때 한국에 갈 생각을 하셨나요? "그토록 좋아했던 할머니가 왜 싫어졌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 찾고 싶었기 때문이죠. 가보니 어찌나 좋던지, 전기도 없는 호롱불 속에서 정성껏 차린 맛깔난 음식으로 반겨 주셨어요. 이런 멋진 사람들이 있는 조국을 전 차별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 절실히 느꼈어요. 나쁜 부스럼 딱지가 몽땅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지요. 그래서 미국에 갈 때는 순수한 마음으로 죽어라 공부에만 매달릴 수 있었고요."미국으로 유학 간 건 일본의 대학을 나와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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