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경영학
이재규 지음 | 사과나무
이야기 경영학
이재규 지음
사과나무 / 2012년 8월 / 311쪽 / 13,000원
경영이란 무엇인가?_ 기업과 경영의 탄생
인류의 조상은 늘 의식주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왔다. 인류의 조상들은 잠자는 8시간을 빼고 하루 16시간 일을 했다. 1833년 영국의 공장법(The Factory Act)은 하루 노동시간을 12시간으로 정했다. 그 후 1847년 개정된 공장법은 근무시간을 1일 10시간으로 규정했다. 하루 근무시간 두 시간을 단축하는 데 14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1914년, 헨리 포드는 종업원의 하루 근무시간을 8시간, 주 5일 근무를 규칙으로 삼았다. 인류가 하루 16시간 근무에서 지금처럼 하루 8시간만 일하고도 살 수 있게 되기까지는 무려 5,300년이나 걸린 셈이다. 이렇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이다. 20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 등장한 팩스, 휴대전화, 복사기, 컴퓨터, 인터넷은 물품과 용역의 거래비용과 기업의 관리비용을 대폭 절감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단축에도 크게 공헌했다.
기업은 의식주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좀 더 많이, 보다 싸게, 그리고 더 나은 품질로 제공하여 과거 귀족이나 특권층만 소비하던 것을 모든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정치인이 추구하는 것이 권력의 민주화라면, 경영자와 기업이 추구하는 것은 '부(富)의 민주화'이다. 즉, 기업과 경영은 '부의 민주화'를 통해 인간이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는 것이다.
고대의 경영활동_ 근육의 시대
저축과 교환, 그리고 쟁기: 인류의 조상은 처음에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즉, '일용할 양식'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여유가 생겨서, 먹고 사용하고 남는 것을 나중을 위해 모아 두거나 서로 바꾸어 먹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상거래, 즉 물물교환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무기, 생산도구, 장신구, 가축, 옷감, 곡물 등이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 후 화폐가 등장하면서 화폐가 교환의 수단이 되었다.
인류의 조상이 정착민이 되어 토지를 개발하기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고대 이집트 왕국에서 거의 동시에 두 개의 큰 기술적 업적이 달성되었다. '피라미드의 건설'과 '쟁기의 발명'이 그것이다. 피라미드는 서구인들, 특히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을 자극시켜서 세계관, 철학, 수학, 과학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 쟁기의 발명에 대해 관심을 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쟁기는 1~2세기 뒤에 농작물의 생산량을 20~50배까지 증가시켰고, 최초로 인류가 도시를 건설할 수 있도록 식량을 공급했다.
사농공상 같은 계층 분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고대 국가에서 지도자는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등장했는데, 즉 '의식주의 해결', '외부 침략으로부터의 방어'를 약속으로 내걸었다. 거기다가 한 가지 덧붙인 것이 '사회 내부적 평등'이다. 똑같이 잘살게 하겠다거나 차별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평등을 강조하면서 생산요소인 토지의 개인 소유를 막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중국의 경우도 그랬는데, 농업이 고대 중국 경제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맹자(孟子, 기원전 371~289)는 제후들에게 "농부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다"라고 충고했고, 현대 중국의 공산당은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다. 농업의 기반을 흔드는 모든 경제질서는, 그것이 상업이든, 원거리 무역이든, 심지어 수공업이든 간에, 평등사회의 유지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라를 안정되게 다스린다는 차원에서 사회질서를 인위적으로 형성하게 되었는데, 고대 중국사회는 사회계급을 본(本)과 말(末)로 나누었다. 나라를 다스리고 또 식량을 생산하는 활동을 본이라 하여 그런 일을 하는 관리와 농부를 우대했고, 그 밖의 소득활동은 말이라 하여, 그런 일에 종사하는 수공업자와 상인을 경시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라를 운영하는 관료, 즉 사(士)를 제일 중요하게 여기고 다음에는 농업활동을 하는 농부를 두 번째로 중요한 사회구성원으로 높이 평가하며, 그다음에는 한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공산품을 생산하는 기술자 혹은 장인 계급들을 세 번째로 인정하고, 마지막으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정보를 이용하여 시세 차익을 남기고 또 사회를 불안하게 할 소식도 전하는 상인을 제일 낮은 계급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사농공상의 계급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특히 상인계급은 유럽에서도 유대인이나 집시가 하는 일로 천대받았다.
중세시대의 경영활동_ 봉건제와 기독교
중세사회를 지탱하는 두 축, 봉건제와 기독교: 5세기경 중앙아시아의 흉노족이 서진(西進)하여 발트해 연안의 게르만족을 약탈하고 위협했다. 그러자 5세기 말 게르만족은 흉노족을 피하고, 또 비옥한 땅을 찾을 목적으로 서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다.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유럽 역사의 주요 무대는 지중해에서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었다. 이제 그리스 로마 문명의 헬레니즘, 그리고 기독교 문명의 헤브라이즘에다 게르만 문명이 합쳐지면서 중세는 봉건사회를 형성한다.
중세사회를 지탱하는 두 제도는 봉건제도와 기독교였다. 봉건사회는 폐쇄적인 농업경제에서 한층 번성한 문명의 한 형태로,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국왕, 영주, 제후, 기사, 농민 등으로 신분이 나누어졌다. 제후(vassal, 가신)와 기사(knight)는 영주(Lord)에게서 봉토를 받고, 그 대가로 영주에게 각종 의무와 봉사를 제공한다.
하나의 사회를 다른 사회와 구분하여 명명할 때는 "각 사회의 중심 노동력이 무엇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수렵채집사회는 사냥꾼, 농업사회는 농부, 산업사회는 육체노동자가 중심 노동력이었다. 중세사회의 중심 노동력은 여전히 농부였다. 그러나 중세사회에는 다른 사회와는 차별화된 또 하나의 독특한 노동력이 있었는데 바로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기사'였다. 말을 탄 중무장 기사는 국가의 통제를 넘어선 자율적인 권력이었다. 기사는 자신이 다스리는 봉토에 대해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지배권을 행사했다. 교황이나 국왕 같은 중앙의 권력에 대해서 형식적으로만 충성하고 실질적인 권력은 스스로 행사한 것이다. 교회를 존경하고, 영주와 주군에게 충성하며 개인의 명예를 지키는, 이런 이상형에 가까운 기사들이 나타난 것은 11세기 말 유럽 기독교 지역의 기사들이 성지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공동목표 아래 모였던 십자군 전쟁 때였다.
중세 말, 유럽 상업도시의 등장: 중세 초기까지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거나, 전쟁에 대비한 성곽도시로서 주로 교통의 중심지에 건설되었다. 중세 말기에 이르면 십자군 전쟁의 후유증도 사라지고 사회가 상당히 안정되고 상업활동이 활발해진다.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활동을 벌였고, 지금의 네덜란드 지역인 플랑드르는 유럽 내륙을 상대로 상거래를 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한자동맹(Hanseatic League) 도시들이 청어를 비롯한 수산물과 일상용품 교역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상인들은 교회도시나 성곽도시 주변에 독자적으로 자치권을 가진 상업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상업도시의 상주 인구는 대체로 5,000명 정도였고, 중심 노동력은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위해 국왕, 귀족, 주교에게 돈을 주거나 때로는 위협으로 자치권을 얻어냈다. 12세기 중엽이 되면 대부분의 상업도시가 자유를 갖게 되고 도시의 시민은 곧 자유민을 의미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 소위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경영활동_ 메디치 가문과 푸거 가문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 십자군 전쟁으로 점차 상업이 번창해가자 이탈리아 피렌체 북쪽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메디치 가문의 선조는 상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유도시 피렌체로 이주해왔다. 처음에는 동방무역, 귀족을 대상으로 한 비단제조업, 서민을 대상으로 한 의류제조업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귀족이 아닌 메디치 가문이 유럽 최고의 부호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은행업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이탈리아는 국제무역의 부흥과 함께 여러 도시에서 은행업이 발달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1397년 지오반니 디 비치(1360~1429)가 피렌체에 메디치은행을 설립했다. 15세기 후반 피렌체에는 무려 72개의 은행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그중 메디치은행이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메디치은행은 확고한 공신력과 각국에 퍼져 있는 지점망을 바탕으로 상인들에게 금과 은 같은 금속화폐가 아닌 환어음을 유통시켰다. 무역상들이 금이나 은 같은 화폐를 들고 다니면서 무역을 할 경우 무겁기도 하거니와 해적이나 도적에게 약탈당할 위험이 많았는데, 은행이 발행한 교환증서인 환어음을 사용하면 이런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피렌체의 은행들은 환어음을 통해 엄청난 수수료 수입을 올렸다. 메디치은행의 또 하나 중요 업무는 대출업무였다. 급전이 필요한 일반인들에게 보석 등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단순한 전당포 업무로 시작해 모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원거리 무역상, 프랑스와 영국의 국왕, 그리고 교황에게까지 신용대출을 제공하는 다국적 금융자본의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잦은 전쟁으로 왕이나 귀족 등 권력자들에게 빌려준 돈을 떼이는 경우가 많아, 높은 리스크가 따랐기 때문에 이자 역시 엄청나게 높았다. 이자가 연 40~60%였다고 한다. 이른바 고위험 고수익이었다.
1419년부터 지오반니는 부의 사회 환원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빈민구제소를 짓고, 예술 후원에도 적극적이었다. 지오반니의 아들 코시모 역시 부의 사회 환원과 학문의 진흥에 힘을 쏟았다. 수많은 교회, 수도원, 병원, 복지시설을 짓거나 막대한 금액을 기부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고 하는 코시모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피렌체의 안전'을 자신의 인생철학으로 삼았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군소 도시들로 나뉘어 끊임없이 싸우던 때여서 피렌체의 존립은 외교적 성과에 크게 좌우된다고 생각해, 외교를 통해 전쟁을 줄이는 것이 피렌체 시민들이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코시모는 자신에게 그런 역량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를 잘 지켰기 때문에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산업혁명_ 농경사회에서 공업사회로
산업혁명은 어떻게 추진되었는가?: 산업혁명은 18세기 중엽부터 약 100년 동안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회·경제·조직의 변혁을 총칭하는 개념으로서, 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단순한 도구들이 크고 작은 기계들로 대체되었고, 조직적인 면에서 기존의 가내 수공업이 공장 규모로 바뀌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국내 시장 및 해외식민지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자본이 축적되었으며 사회적인 면에서는 산업 자본가 및 임금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계급사회가 형성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인류는 산업혁명을 통해 농경사회에서 공업사회로 급속히 재편되기 시작했다.
산업화로 인해 인구가 급격하게 도시로 유입되었고 저소득 공장 노동자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계급 분쟁이 심화되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가정이 생산의 중심에서 물러나고 새로이 외부 생산 시설, 즉 '공장'이 생겼다는 점이다. 산업혁명이 추진력을 얻게 된 데에 새로운 기술 세 가지가 동시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첫째, 대형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 동력의 공급이다. 둘째, 효율적이고 장시간 작동이 가능한 대형 기계를 만들 수 있는 질 좋은 철강재료의 생산이다. 셋째, 생산된 제품을 신속하게 유통시킬 수 있는 교통망의 발달 등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세 가지 혁신이 동시에 일어남으로써 현대 과학기술의 탄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동시에 갑자기 일어났는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동시에 갖춰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혁신에 동참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동기부여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대량생산을 위한 기술의 혁신 과정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는 지름길이었고, 이것이야말로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뜻이다.
산업혁명의 주요 특징_ 기술적 측면과 비기술적인 측면: 산업혁명의 주요 특징을 기술적 측면과 비기술적 측면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기술적 측면
첫째, 철과 강철과 같은 새로운 기초 소재를 사용했다.
둘째, 석탄, 증기기관, 전기, 석유 및 내연기관과 같은 새로운 연료와 동력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했다.셋째, 방적기, 직조기와 같이 인력을 더 적게 들이면서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었다.넷째, 공장이 발달했고, 분업과 직능의 전문화가 확대되었다.
다섯째, 증기기관차, 증기선, 자동차, 비행기, 전신, 라디오 등 교통과 통신이 발전했다.
여섯째, 산업에 있어서 과학의 응용이 대폭 확대되었다.
그 결과 산업혁명은 기계를 이용하여 상품을 대량생산했으며, 천연자원의 사용을 크게 증가시켰다. 산업혁명은 비기술적 측면, 즉 사회·경제·문화적 측면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 비기술적 측면
첫째, 점점 늘어나는 비농업 인구에게 식량공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농업생산이 증가했다.
둘째, 공업생산 및 국제무역 증대의 결과로 부(富)의 분배가 확대되었다.
셋째, 부의 원천으로서 토지가 갖는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넷째, 산업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국가정책과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다섯째, 도시의 성장과 노동운동의 발전 등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가져와, 노동자는 손으로 다루는 연장을 가지고 일하던 방식 대신 기계를 조작하게 되었다.여섯째, 심리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자원을 이용하고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커졌다. 예를 들면 철도는 심리적 거리를 단축시켰고, 인간은 의식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철도와 철강산업, 그리고 증기선_ 산업혁명의 견인차
철도산업이 산업혁명에 끼친 영향: 세상의 모든 발명은 처음에는 천재가 만들고 천재가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다음에는 평범한 모든 사람이 사용하게 된다. 가장 좋은 예가 컴퓨터이다. 같은 논리로 철도는 산업혁명을 기정사실화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산업혁명은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 '혁명'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일상생활이 된다. 철도가 산업혁명에 미친 영향을 사회·정치·경제적으로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철도는 새로운 경제의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1830년 세계 최초로 영국의 리버풀-맨체스터 사이에 철도가 놓였고 13톤의 '로켓호'가 시속 12마일로 달렸다. 그 후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증기기관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철도의 등장 후 5년 안에, 서구 세계는 역사상 가장 큰 호황을 누렸다. 오늘날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주요 철도망 대부분이 1860년대에 건설된 것들이다. 둘째, 철도는 사람들의 '심리적 지리(mental geography)'를 단축시켰다. 철도 덕분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이동수단을 갖게 되었다. 왕족이나 귀족 또는 무역상인이 아닌 일반인들의 시야를 처음으로 세계로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셋째, 철도는 국가를 하나의 단위로 묶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프랑스를 하나의 국가 그리고 하나의 문화로 만든 것은 철도였다. 철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프랑스는 서로 고립된 지역의 집합으로서, 오직 정치적으로만 통합되어 있을 뿐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_ 영국, 프랑스, 독일의 산업혁명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기계와 증기기관을 이용한 동력으로 대량생산이 시작되자 원료와 제품을 먼 거리까지 신속하게 수송해야 할 운송수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가장 먼저 부응한 것이 1814년 조지 스티븐슨에 의해 만들어진 증기기관차였다. 그다음, 19세기부터 증기선이 출현하여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범선을 제치고 해상운송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증기선의 선구자는 역시 영국이었다. 증기선의 발달에 따라 오직 수송만 전문으로 하는 운송 전문업자도 등장한다. 게다가 18세기 말부터 유럽 대륙 전체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려 있을 때 영국은 그 영향에서 벗어나 꾸준히 공업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합해져서 영국은 값싸고 품질 좋은 공업제품을 대량으로 만들어 유럽 여러 나라의 시장에 내다 팔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