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전쟁
이경식 지음 | 휴먼앤북스
안철수의 전쟁
이경식 지음
휴먼앤북스 / 2012년 6월 / 292쪽 / 13,500원
히포크라테스 선서
인생의 전환점
가톨릭학생회 봉사 활동, 사회 현실에 눈을 뜨다: 안철수는 가톨릭학생회에 가입해서 구로동의 한 성당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나는 봉사 활동을 하면서 책에서만 보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진료소에 올 수 없는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을 찾아서 집으로 왕진을 갔을 때 답답한 광경들을 많이 보았다. 어느 날 관절염이 심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한 할머니를 찾아갔을 때였다. 할머니가 거의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중학교 1학년 손녀가 신문 배달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행복바이러스 안철수』 65쪽)'
이 손녀는 힘든 가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했고, 할머니는 혼자서 죽음을 맞이했다. 뒤늦게 병문안을 갔던 성당 사람들이 할머니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 무렵 그는 처음으로, 돈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보다 더 높을 수 있다는,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진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런 진실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현실 앞에서, 또래의 다른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의대생 안철수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내 머리는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봉사하는 데에도 한계가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당장 학교를 그만두고 봉사에 헌신하는 것도 해결책이 아니었다. (…) 배운 사람의 도리 같은 것을 생각하니 마음은 더 답답했다. (『행복바이러스 안철수』 66~67쪽)'
'배운 사람의 도리'란 바로 지식인의 사회적인 역할 혹은 책임이었다.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아픔을 해결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이었다. 특히 그 무렵은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민주화투쟁이 노동자들의 처절한 복직투쟁과 맞물려서 전개되고 있었고, 대학생들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조직적으로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던 시기였으니까. 그런데 과연 의과대학 본과생이던 안철수가 노동운동에 투신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했을까?
안철수는 노동운동가로 투신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을 게 분명하다. 청소년용 자서전『행복바이러스 안철수』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각자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한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고백한 것으로 그런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추정은 또 그가 했던 한 인터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05년 한 인터뷰에서, 이제 성공은 할 만큼 했으니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부분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386세대가 그러했듯 사회의식이 좀 있었거든요. 저는 운동권 쪽으로 빠진 건 아니고 오히려 기본적인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어떤 일을 하면 사회로부터 내가 받은 것들을 다시 나눠줄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곽소경, "21세기 디지털 리더, 안철수의 마인드",《여성조선》 2005년 1월)'
'운동권'과 '비운동권': 1980년대의 대학생 혹은 청년을 가르는 기준 하나가 이른바 '운동권'이었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열망과 헌신을 기준으로 한 이런 분류로 보면, 노동운동 혹은 민주화운동에 투신을 한 사람은 '운동권'이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운동권'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준이 적절하지 않았음은 나중에 드러난다. 비운동권에 속했지만, 학계, 예술계, 법조계, 교육계, 과학계, 의학계 등 각계에서 자기 전문성을 철저하게 연마한 사람들이 10년 혹은 20년 뒤에 자기 전문 분야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하며, 우리 사회가 낡은 관습을 깨고 발전하는 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발전은 이른바 '운동권'의 노력뿐만이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자기가 받은 혜택을 사회에 되돌려주기 위해서 노력한 수많은 사람들의 고뇌와 노력에 힘을 입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말없는 다수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안철수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의사 안철수 / 컴퓨터를 만나다: 1986년 2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식장에서 안철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일깨우는 희생과 배려의 정신을 이제 곧 온전하게 깨닫고 실천하게 될 줄, 졸업생 안철수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한편 안철수가 컴퓨터를 처음 접한 건 본과 1학년이던 1982년 가을이었다. 1982년은 컴퓨터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의해 1982년을 대표하는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바로 그해이기도 했다. 1년쯤 뒤인 1983년 겨울방학 때 큰맘 먹고 샀다. 당시에는 디스크 드라이브가 너무 비싸서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우선 본체와 모니터만을 구입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겨울방학 내내 컴퓨터의 매력에 푹 빠져서 살며, 컴퓨터 언어를 공부했다.
컴퓨터 바이러스, 운명적인 만남: 안철수는 1988년 박사 과정 첫 학기 때 신문을 보고서 컴퓨터 바이러스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컴퓨터 바이러스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름부터가 재밌었고 호기심에 컴퓨터를 뒤져보았죠. 외신에 나오는 그런 거니까 설마 제 컴퓨터 속에 있을까 하고 봤는데, 50장 정도의 디스켓 가운데 세 장이 감염되어 있었어요. (…) 무섭기도 하고 호기심도 있고, 그래서 뒤져보기 시작했어요. (『안철수 경영의 원칙』14쪽)'
안철수는 프로그램을 현미경처럼 확대해서 볼 수 있는 응용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바이러스를 관찰하고 분석해서 원리를 파악했다. 하지만 아직은 바이러스로 망가진 자료를 복구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 주쯤 뒤, 본과 1학년 학생과 대화를 하다가 컴퓨터 바이러스 얘기가 나왔고, 이 학생은 바이러스 때문에 숙제한 내용이 다 날아갔다고 하소연을 했다. 이 말에 자극을 받은 안철수는 곧바로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바이러스가 헝클어놓은 논리구조를 반대로 그대로 되돌려놓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날 집에 가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하룻밤을 꼬박 새서 새벽녘에 프로그램을 완성했어요. (…) 그 프로그램이 지금도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V3의 첫 번째 버전이에요. (『안철수 경영의 원칙』15~16쪽)'
안철수는 이렇게 만든 백신 관련 내용을 담아 월간지인 《마이크로소프트》에 기고했고, 이 글은 1988년 7월호에 실렸다. 그때만 하더라도 안철수는 그것만으로 끝일 줄 알았다. 자기의 본업은 변함없이 의학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미 안철수는 국내에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분야 1인자였고, 사람들은 그의 도움을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 신종과 변종의 새로운 바이러스들이 계속해서 나타났고, 주위에 물어볼 사람도 없고 하니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디스켓을 《마이크로소프트》로 보내서 복구시켜달라고 했고, 잡지사에서는 이렇게 쌓인 디스켓들을 모아 안철수를 찾아왔다. 백신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처지여서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안철수는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결론이었다. 학부 때 구로동의 한 성당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할 때 그는, '지식인'으로서 자기가 가진 것 그리고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땀을 흘려 이룬 성과물의 결과이므로, 이것을 자기보다 못한 사람, 혹은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기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었다. 이런 인식은 그 뒤로도 바뀌지 않았고, 마침 우연한 계기로 박사 과정과 병행해서 할 수 있는 '무료' 봉사 활동을 찾은 것이다.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 안철수는 박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바이러스 백신 개발 작업을 병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모자라니, 없는 시간을 쪼개서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여섯 시까지 세 시간 동안 바이러스 백신 만드는 작업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종일 박사 과정 학생으로 살았다. 또 그렇게 만든 백신은 무료로 배포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은 3년 뒤 박사 과정이 끝났어도 계속되었고, 단국대학교 의과대학에 교수로 취직해 학생들을 가르칠 때까지, 그리고 군의관 복무를 마치던 1994년, 대학교에 복직한 뒤까지 7년째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한계에 다다랐다. 바이러스의 발생률도 빠르게 증가해서 하루에 혼자서 세 시간씩 투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한편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해야 하는 교수로서 해야 하는 역할도 충실하게 할 수 없었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로 나설 것인가, 아니면 의사로 남을 것인가? 안철수는 전자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둘 다 재미있고, 의미 있고,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의대 교수는 자기 아니라도 많았지만 백신 개발자는 흔하지 않았다. 거의 자기 혼자뿐이었다. 그러니 그만큼 더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안철수연구소가 탄생했다.
영혼이 있는 기업
벤처기업
기업의 본질, 기업가정신: 안철수는 처음 안철수연구소를 비영리조직으로 만들려 했지만,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지 못해 간판을 올리지도 못할 처지에 놓이자, 차선책으로 주식회사 형태로 창립했다. 이때부터 안철수는 기업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가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기업의 목적은 수익 창출인가? 이 문제들은, 그가 안철수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유학을 가서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정리가 되었다. 다음은 이렇게 정리된 내용을 2005년 퇴임사에서 밝히는 부분인데, 이것이 바로 안철수가 말하는 '영혼이 있는 기업'의 전제조건이다.
"또한 창업을 하면서 '기업의 목적은 수익창출'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습니다. 기업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객들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만든 다음에 그것을 판매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수익이란 목적이라기보다는 결과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따라서 저는 '기업에서의 수익창출은 결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본질과 과정에 충실하다면 결과는 따라오는 것이라는 믿음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안랩 홈페이지 > 회사 소개 > 설립자 소개 > 퇴임사)"
1,000만 달러 줄 테니 회사를 파시오: 1997년 6월, 실리콘밸리의 한 백신 소프트웨어업체인 맥아피가 안철수연구소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맥아피는 '스캔'이라는 바이러스 백신 제품으로 유명했으며, 일본 유일의 백신 소프트웨어업체인 제이드를 사들인 때였다. 1,0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100억 원이었다. 당장 돈이 절박하게 필요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만일 회사를 맥아피에게 팔 경우 맥아피는 V3를 폐기하고 자기 제품을 한국 시장에 깔아놓을 터였다. 안철수는 "노!"라고 대답했다. 안철수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일말의 갈등도 없이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 아무리 높은 금액이라도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 보호와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 앞에서는 나에게 수용조건이 되지 못했다. (『CEO 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 35쪽)'
거금을 제시한 맥아피의 인수 제안 거부라는 이 일화는 안철수를 애국자로 만들었다. 안철수연구소도 국민기업이라는 훈훈한 이미지를 얻었다. 게다가 그해 말에 한국에서 이른바 '아이엠에프 사태'가 터지면서 알짜 기업들이 줄줄이 외국 자본에 팔려나가는 시점에서 안철수가 1,000만 달러라는 거금을 뿌리치며 안철수연구소를 지켜냈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만큼이나 시원한 화젯거리였다. 하지만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지점은 안철수의 애국심이 아니다. 기업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그의 가치관이다.
사실 안철수가 돈을 벌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안철수연구소를 세우지도 않았다. 자기가 가진 능력으로 사회에 봉사할 마음으로, 즉 '사회를 살아가는 한 일원으로서 일방적으로 혜택을 받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일부라도 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백신을 무료로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이 일을 보다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 공익적 성격의 비영리 연구소를 세우려고 하다가, 여의치 않자 한글과컴퓨터라는 기업과 손을 잡고 기업 형태로 안철수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회사를 비싸게 쳐준다고 해서 옳다구나 하고 팔 일은 아니었다.
계몽주의자
청춘콘서트
박경철과의 만남: 안철수는 2009년 6월 17일 방송된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출연했고, 방송 직후에 한 일간지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유를 '젊은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2009년 10월 24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국리더십센터가 개최한 '글로벌 리더십 페스티발'의 일환으로 강연을 했고, 이 자리에서 박경철이 "전국 대학을 돌며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강의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안철수는 "중요한 기부 중 하나는 시간 기부인 것 같다. 고민해 보자"고 답했고, 청중들의 환호 속에서 대담 형식의 이날 강연은 끝났다. 이 강연을 전후로 해서 안철수는 본격적으로 강연에 힘을 쏟았다. 그즈음 안철수가 학교 강의가 아닌 외부 강연을 한 횟수는 석 달 동안만 100회가 넘을 정도로 왕성하게 강연 활동을 벌였다.
청년들의 멘토: 2011년 5월 22일 경희대 강연 때부터는 '청춘콘서트'라는 이름을 붙이고 '공연'에 나섰는데, 2011년 9월 9일 대구 경북대학교 강당에서 청춘콘서트의 마지막 공연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전국 27개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국 2,730명 자원봉사자들의 참여 속에 총 43,996명의 청춘들이 열기를 뿜어냈던 2011년 '희망ㆍ공감 청춘 콘서트'는 막을 내렸다. 어떤 평자는 안철수의 '청춘콘서트'는 새로운 시민 정치운동의 한 양식이며, 안철수가 이를 통해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정치적인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았다고 분석했다. 또 어떤 정치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청춘콘서트를 통해서) 안철수는 정치 영역의 다수파나 소수파 모두 선뜻 개척하려고 나서지 않았던 레드오션을 블루오션으로 바꿔내어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본인은 이것을 '정치'라 칭하길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 28쪽)'안철수가 꿈꾸는 세상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행복한 세상
'안철수 미스터리': 2011년 11월 21일에 한 정치평론가가 일간지에 "안철수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정치시평을 썼다. '안철수 교수만큼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사람도 없지만, 그만큼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인물도 찾기 힘들다. 우선 안 교수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힌 적이 거의 없다. 단지 한나라당은 응징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한 것이 거의 유일한 것 같은데, 이마저도 한나라당이 도대체 어떤 측면에서 응징되어야 할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 이것뿐이 아니다. 본인은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도 자신의 대북관은 어떠하고 지금의 경제 상황에 대한 판단은 어떠하다는 입장 표명을 들을 수는 없다. (…) 여기서 가장 큰 미스터리가 생긴다.
도대체 누구의 도움을 받아 정치구도를 '창출'하고 있는 걸까? (…) 여기서 분명히 할 점이 있다. 신비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혀 우리 국민도 안 교수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방식의 정치를 펴나갈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기업 해 봤으니 국가 운영도 잘할 것이라는 국민들의 막연하고 잘못된 '또 한 번'의 기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신율, "정치시평-안철수 미스터리", 《내일신문》, 2011.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