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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이야기

스티브 첸, 장리밍 지음 | 올림
유튜브 이야기

스티브 첸, 장리밍 지음

올림 / 2012년 6월 / 320쪽 / 15,000원





1 소년, 프로그래밍 언어에 빠지다



나는 1978년 8월 타이완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다. 8살 때인 1986년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일리노이 주의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이곳이 나 개인의 스토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그때부터 나는 스티브 첸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 초등학교 3학년에 들어갔지만 친구들과의 대화나 학교 수업에서 영어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수학 하나는 잘했다. 특히 구구단은 어린 나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버팀목이었다. 타이베이에 있을 때 이미 나는 구구단을 다 외웠는데 같은 또래 미국 친구들은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시간의 도움으로 언어의 난관이 극복될 즈음 나는 수학을 포함하여 모든 과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게 되었다.

어렸을 때 집안 분위기는 보통의 미국 가정과 달랐다. 부모님은 매일 우리의 공부에 대해 물었고 자주 권고를 하셨다. "숙제도 열심히 하고, 책도 더 많이 읽고, 다른 아이보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좋겠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나는 같은 또래 미국 아이들보다 아픔이 있긴 했지만, 타이완의 아이들보다는 훨씬 더 행복했던 것 같다. 그것은 점수에 연연하지 않고 창의력에 중점을 둔 미국 교육 시스템 덕분이었다. 그 덕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컴퓨터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고,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그램을 짜지도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인생 최초로 프로그램을 짰다. 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직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닌텐도에 푹 빠져 있었던 나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는 환상 그 자체였다! 컴퓨터로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흔들었고, 컴퓨터 언어를 배우기 위해 도서관에서 미친 듯이 책을 보았다. 당시 우리 집에는 1997년 탄생한 애플II 컴퓨터가 있었다. 이 PC로 나는 짧은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최초로 만들었다. 우리 부모님은 노는 문제에서는 나와 내 동생을 단속했는데 컴퓨터에 관해서는 어떤 제약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컴퓨터를 공부의 한 방식이라 여겼던 것 같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IMSA(일리노이 수학과학고등학교)로 독특한 학교였다. 입학은 어려웠지만 일단 들어가면 스스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와 여건을 제공했다. 나는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밤새도록 프로그램을 짜거나 친구들과 놀고 또 낮에는 잠만 자고 수업에는 들어가지 않는 생활을 하였다. 당연히 고등학교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큰 소득이 있었다. 내가 노력해야 할 방향과 목표를 알게 된 것이다. 졸업 후에 나는 일리노이 대학을 선택했다. 컴퓨터 관련 학과가 발달해있고 또 집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비도 저렴했다. 대학에서 나는 자주 수업을 빼먹고 독학을 하였다. 그런데 독학을 하면 할수록 성적은 좋아졌다. 전체 과목에서는 컴퓨터가 늘 우수했다. 대학 생활에서 나의 첫 번째 룸메이트는 앤디 첸이었고, 2학년 때는 데이비드 강을 만났다. 나중에 그들은 나와 함께 페이팔(PAYPAL)의 초창기 멤버가 되었다. 페이팔은 일리노이 대학 선배인 맥스 레브친이 창업한 온라인 결제 회사이다.

내가 마지막 학기에 대학을 중퇴한 이유는 실리콘 밸리의 강력한 유혹 때문이었다. 내가 학교를 떠나 페이팔에서 일하게 된 것은 개인적인 취향 외에 동문들에 대한 믿음이 크게 작용했다. 대학 선배들이 이미 페이팔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를 면접한 페이팔의 최고기술경영자 맥스 레브친 역시 일리노이 대학 출신이었다. 1999년 11월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다. 어머니는 내가 학업을 중단한 것에 대해 속상해하셨다. 나는 휴학한 이후 학교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나중에 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주겠다고 하면서 학교에 와서 연설을 해 달라고 했지만 그때는 유튜브가 가장 바쁜 시기였다.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형편이어서 결국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말았다.



2 페이팔에 합류, 백만장자가 되다



1999년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수중에는 단돈 200달러만 있었다. 다음 날 실리콘 밸리를 방문하자 차창 밖으로 내 컴퓨터 모니터에, 책에, 잡지에 등장했던 회사들의 로고가 즐비하게 보였다. 오라클, 썬 등 전설적인 이름들이 하나씩 지나가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실리콘 밸리에는 대학 선배이자 페이팔의 창업자인 맥스 레브친이 있었다. 레브친은 실리콘 밸리의 창업자 중에서도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그는 꿈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실리콘 밸리로 몰려 온 많은 젊은이들을 이끌었다. 또한 자신의 청춘을 프로그램 코드와 설계, 그리고 혁신에 쏟아부음으로써 창업의 에너자이저이자 실리콘 밸리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대학가 165번지는 일명 '가장 운 좋은 사무실'로 불린다. 165번지가 유명해진 것은 이곳에서 입주하여 큰 성공을 거둔 기업들 때문인데 로지텍, 구글, 페이팔 등이 대표적이다. 165번지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페이팔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 엔지니어들이 나를 환영해 주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침대도 없는 아파트에서 선배들과 합숙하며 실리콘 밸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전형적인 실리콘 밸리 엔지니어의 일과표는 이러하다. 느지막이 일어나기, 출근하기, 점심과 저녁 모두 회사에서 해결하기, 새벽까지 코드 작성하기, 숙소로 돌아가서 잠자기, 일정이 빡빡할 때는 회사에서 샤워를 하기도 했다. 최고 경영자인 맥스 레브친도 예외일 수가 없다. 집에 가지 않고 회사에서 샤워하고 새 티셔츠로 갈아입고 계속 일을 했다. 하지만 야근이 잦다고 곧 회사 환경이 나쁘다고 볼 수 없다. 대부분 자유로운 관리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프로젝트가 급하게 돌아갈 때는 자발적으로 야근을 하는 것이다.

1999년은 레브친이 아직 실리콘 밸리의 전설이 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일리노이 대학에서 그는 이미 전설로 불리고 있었다. 그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스티브, 운영체제와 네트워크 협력이 전문이라지? 그런데 이제 웹 분야의 업무를 맡아주면 좋겠어." 나는 페이팔의 톱20 엔지니어 중의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고 아이템 개발에 대해 언제든지 발언할 권리를 주었다.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간섭한 적도 거의 없었다. "우리의 엔지니어는 세계 일류입니다." 레브친은 언론 매체와 투자자들에게 늘 이 점을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언론과 투자자들이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었고, 그의 칭찬 덕에 엔지니어들은 늘 든든하면서도 행복했다. 페이팔이 크게 성장하기 전, 나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긴밀하게 협력하는 이곳의 방식을 좋아했다. 우리는 새로운 기능이 생각날 때마다 주저 없이 디자이너들에게 제안했고 디자이너들은 그에 따라 설계 화면을 만들고 다시 엔지니어들과 의논하곤 했다. 이런 메커니즘 속에는 어떤 새로운 기능도 3~4일이면 현실화될 수 있었다.

한동안 페이팔은 이베이와 기술 전쟁을 벌였다. 온라인 결제 시스템의 우열을 놓고 벌인 싸움이었다. 당시 이베이에도 자체 결제 시스템이 있었지만 페이팔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페이팔의 시스템이 이베이보다 훨씬 빠르고 편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가 일하던 사무실 앞에는 작은 햄버거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이곳에는 168달러짜리 햄버거가 있었다. "언제쯤 저 햄버거를 맛볼 수 있을까?" 우리는 늘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햄버거 가격표를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언젠가 페이팔이 상장하면 저 햄버거를 사 먹자." 2002년 2월 마침내 페이팔은 나스닥에 상장되었고, 상장 첫날 주가는 단번에 54.5%나 올랐다. 인터넷 거품이 꺼지던 시기에 드문 현상이었다. 이후에도 페이팔은 거품 경제의 몰락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은 기업으로 시장의 호평을 받았다. 회사가 상장되자마자 우리는 그 햄버거 가게로 갔다. "사장님 제일 비싼 햄버거 있죠?" 그날 그 가게의 최고가 햄버거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페이팔은 나를 백만장자로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좋은 친구들을 알게 해주었고, 실리콘 밸리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페이팔이 막 창업했을 때 우리 멤버 20명은 '레브친의 아이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나중에 《포춘》에서 환상적인 별명을 지어주었다. '페이팔 마피아'. 초창기 페이팔은 일정한 조직 형태가 없었고 그저 서로의 친구일 뿐이었다. 우리는 밤새워 함께 일했고 엄청난 스트레스에 직면했다. 누군가는 해커를 상대해야 했고 누군가는 이베이에 맞서야 했다. 우리는 페이팔 이외의 생활을 상상할 수 없었다. 같이 밥 먹고, 야근하고, 함께하는 짧은 휴식을 소중히 여겼으며, 놀 때도 함께였다. 하지만 페이팔이 이베이에 매각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두 창업자가 떠나면서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갔다. 창립 멤버들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강한 연대감이 피어올랐다. 우리들은 자주 모임을 가졌고, 격의 없는 만남에서 많은 창업 아이디어들이 거론되었다. 우리들은 서로 투자하면서 서로의 창업을 도왔다. 이렇게 연결된 회사만 7~8개가 넘었고, 내가 유튜브를 창업한 것도 그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공동창업자인 채드, 나, 자웨드 카림은 모두 페이팔의 초기 멤버였기 때문이다.



3 행복하지 않았던 이베이 시절



2002년 7월 이베이가 페이팔을 인수했다. 인수가 이루어지고 나서 레브친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페이팔을 떠났다. 페이팔의 핵심 운영진이 떠나자 이베이는 새로운 운영진을 배치했다. 경영진이 전부 이베이 출신으로 바뀌었고 페이팔 출신의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관리 방식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베이로 바뀐 회사에서 나의 직책은 매니저였다. 엔지니어도 아니고 딱히 관리 직책도 아니었다. 더욱 어색했던 것은 프로젝트 관리 방식이었다. "이베이가 자동차라면 너는 작은 나사이고, 이베이가 공장이라면 너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 있는 일개 노동자일 뿐이야!" 이베이의 관리 방식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페이팔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그중에서 판이했던 것은 엔지니어의 발언권이 없어지고 단지 위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베이에서 일하면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이베이의 관리방식 탓이었다. 나는 운영진이 개발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혁신 없는 조직의 모습을 이베이에서 확인했다.

2004년에는 페이팔의 중국 진출 프로젝트(베이바오 프로젝트)를 위해 몇 달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다리던 프로젝트의 기술 요원을 확보하고 기쁜 마음으로 업무를 분담하려는 찰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중국 시장의 불확실성과 미국 시장과의 차이점을 고려해서 중국 프로젝트를 잠시 미루기로 결정했다." 대체 이게 몇 번째 변덕인가?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직속 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2주 정도 지나면 확실한 소식이 올 거야!" 이 대답에 나는 중국 프로젝트를 뒤로한 채 바로 다음 날 유럽으로 떠나는 비행기 표를 끊어버렸다. 계획에 없는 즉흥여행이었다. 나는 2주 동안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유럽 각국을 돌아다녔다. 2주 후에 실리콘 밸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자 최신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이바오 프로젝트 확정.'

베이바오 프로젝트에서 나는 엔지니어 팀을 책임졌지만 그 외에 품질테스트 팀, 상품 팀, 디자인 팀, 비즈니스마케팅 팀이 따로 있었다. 구성원들이 모두 전문가 출신이어서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조직이 너무 많고 서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회의만 했다 하면 1시간 이상 걸렸고, 회의가 끝난 후에도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더 큰 문제는 서로의 책임만 강조하는 관리 태도였다. 만약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났다면 다들 남의 책임이라며 떠넘기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모두가 숲이 아닌 나무만 보면서 상대를 질책하고 책임을 전가하려 들었다. 전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점이 나를 힘들게 했다.

베이바오는 내게 잠재력은 컸으나 재미도 없고 성공했다고 자신하기도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게다가 직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업무만 생각했다. 회의감이 들었다. 여기에 있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05년 초 페이팔의 동료였던 케이스 라보이스가 내게 창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셜 네트워크 회사에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하버드 대학생이 창립한 건데 이름이 페이스북이야." 페이스북은 대학가 165번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흥미를 느낀 나는 페이스북에 가보기로 했다. 물론 정식 면접은 아니었다.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와 숀 파커를 만났고 우리는 책상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 기억 속의 마크는 젊고 고집이 강하고 말수가 적은 청년이었다. 페이스북은 상호연동적인 소셜 채널이었는데 절묘한 아이디어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짠 코드는 그렇게 높은 수준이 아니었고, 데이터 보안 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2005년 초 나는 이베이를 떠났지만 페이스북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후회는 없다. 그때 심정으로는 내가 스스로 사장이 되는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내가 창업을 결정한 데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페이팔을 그만두고 결혼한 후 시애틀로 이사한 채드 헐리가 가족을 데리고 실리콘 밸리로 돌아온 것이다. "야! 나 돌아왔어! 뭘 좀 하고 싶어! 넌 안 그래?" 그가 내게 전화를 했다. "물론이지. 안 그래도 뭔가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야." 나는 그의 귀환이 너무 기뻤다.



4 유튜브 창업의 진실



창업한 지 1년이 지난 2006년 어느 날 저녁 나와 채드는 2시간 동안 화이트 보드에 새까맣게 적어가며 그럴듯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바로 유튜브 창업 이야기인데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스토리는 이렇다. "2005년 봄 어느 날,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의 친구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모임이 끝난 후 함께 찍은 동영상을 공유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일이 전달하기 너무 귀찮았던 우리는 차라리 직접 동영상 사이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모임은 존재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런 동영상을 찍은 적도 없다.

모든 성공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어떤 엄청난 계기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나 작은 필요에 의해 충동적으로 시작되고 지속적인 보완과 개선의 과정을 거친다. 유튜브의 시작도 그랬다. 2004년 말 채드의 전화 한 통은 내 마음속에 잠재된 창업 열망에 불을 지폈다. 우리는 페이팔의 이전 멤버들에게 연락을 취했고 2005년 초 드디어 같이 일할 사람을 확정했다. 채드, 나, 자웨드 카림이었다. 나와 자웨드는 엔지니어여서 사이트 설립 초기에 필요한 개발 작업을 감당할 수 있었고, 채드는 웹 디자이너로서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엔지니어와 디자이너의 결합은 실리콘 밸리에서 전형적인 창업 방식이었다. 중요한 것은 창업의 방향이었다.

2004년 2월 1일 슈퍼볼 하프 타임 공연에서 재닛 잭슨의 가슴 노출 사건이 있었다. 10월 15일에는 코미디언 존 스튜어트가 CNN 생방송 쇼에서 사회자를 엄중히 꾸짖는 사건이 있었다. 12월 26일 푸켓에서 31세의 스위스 자동차공 토미는 쓰나미를 만나 도망치는 와중에 휴대전화로 그 영상을 촬영했다. 재닛 잭슨과 존 스튜어트의 영상은 순식간에 인터넷을 달궜다. 그것은 곧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방영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쉽게 그것을 감상하고 공유하길 원한다는 뜻이었다. 한편 토미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TV 기자와 감독이 될 능력과 기회가 있음을 증명했다.

나는 놀라운 동영상과 그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을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당시에 인터넷상에서 사진 공유는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동영상은 그렇지 못했다. 두 가지 단계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관련 소프트웨어를 다운받아야 했다. 그리고 길고 긴 콘텐츠 심사를 거쳐야 한다. 사실 이런 문제의 해결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실천하는 곳은 없었다. "우리가 그걸 해결해 주면 얼마나 많은 동영상 애호가들이 우리한테 고마워할까? 진짜 재미있겠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유튜브이다. 사실 여기에는 3가지 행운이 작용했다. 2005년부터 브로드밴드 기술, 플래시 기술, 동영상 촬영 설비와 기술이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창업의 성공은 행운이라는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가장 중요한 점은 '그 행운을 잡았느냐 못 잡았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업자는 기술 동향을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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