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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실패하라

제임스 다이슨 지음 | 미래사
제임스 다이슨 지음

미래사 / 2012년 4월 / 455쪽 / 17,000원



1 자신을 발명하기



내 고향 노퍽은 매우 목가적인 지역이다. 중세풍 교회와 거대한 습지가 있고, 파란 하늘 아래 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다. 나의 집은 노퍽의 그래셤스라는 크고 오래된 학교에 붙어있는 빅토리아 양식의 집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아이들과 함께 럭비를 하거나 학교 곳곳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놀았다. 집 근처 바닷가에는 크고 작은 모래 언덕들이 있었는데, 나는 친구들과 작은 보트를 갖고 놀기를 좋아했다. 마치 아서 랜섬이 쓴 『제비호와 아마존호』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모험에 푹 빠져들었다.

고전 담당 교사였던 아버지는 내가 9살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배우와 연출자를 꿈꾸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BBC에서 입사 통보를 받았다. 아버지가 배우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절대 내가 하기 싫은 일에 끌려가지 않으리라." 어린 시절 나는 분에 넘치는 일에 도전한 적이 많았다. 그중 최고의 재앙은 바순을 배운 일이다. 바순은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 가운데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악기이다. 나는 녹초가 되도록 바순을 연습하여 5단계 시험까지는 통과했지만 가장 어려운 시험은 통과하지 못했다. 바순을 배우던 무렵 나는 내가 장거리 달리기를 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달리기 시합에서 우승한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나는 학교 성적이 그저 그런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는데, 다른 아이들의 콧대를 꺾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전국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9살 때 그림을 통해서이다. 1957년 열린 회화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이다. 부상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받았고 동시에 성공의 단맛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다. 14살 때부터 나만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물감을 진하게 마구 바른 후 단숨에 긁어내서 모양을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아주 느리게 조금씩 알아주는 사람이 생겼다. 하지만 그 시절 예술은 존경받는 분야가 아니었다. 어머니나 형은 내가 고전문학 연구자나 학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가족들이 기대한 대로 풀리지 않았다. 내 학교 성적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런던에 있는 비얌쇼 예술 학교로 진학했다. 이곳에서는 당대 가장 유명한 옵아트 작가들이 강의를 했다. 그들에게 나는 사물의 형태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눈을 익혔고,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것은 물체의 외곽을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과 기능을 반영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디자인 그리고 공학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이 시기에 사물의 형태를 보는 눈을 키운 덕분이었다. 학교가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디어드리 힌드마시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가 바로 나의 아내이다. 비얌쇼에서 1년을 보낸 후 나는 왕립예술학교로 진학했다. 나는 학교 곳곳을 기웃거리면서 영화 제작, 조각, 산업 디자인 같은 다양한 분야를 경험했고, 각 분야의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왕립예술학교에서 내 상상력을 자극한 것은 인테리어 디자인이었다. 휴 카슨 경이 주임 교수를 맡아 자동차, 배, 비행기, 식당 등의 실내 디자인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졌다. 실제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를 디자인한다는 점이 내 관심이나 열정과 맞아 떨어졌다. 나는 나무보다는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스틸 같은 현대적인 소재로 작업하는 것이 젊은 디자이너의 의무라고 여겼다. 그래서 공학 분야에 발을 디뎠다. 전공을 바꿀 때마다 나는 더 넓은 범위로서의 예술에 대해 배웠고, 과학자와 예술가를 나누는 작위적이고 파괴적인 시도에 저항하려 노력했다.

1967년 나는 연극 영화 기획자 조앤 리틀우드를 알게 되었다. 조앤은 런던에서 빈민들을 위한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조앤을 도와 축제에서 아이들이 마구 부딪치며 뛰어놀 수 있는 탄성 있는 벽을 만들어 주었다. 벽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언론 인터뷰도 했다. 이 일로 나는 단순한 재료에서 멋과 기능을 끌어내는 내 능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어서 나는 조앤이 새로 지으려고 하는 극장의 설계를 맡았다. 나는 알루미늄 대를 이은 버섯 모양 건물을 만드는 계획을 세우고 건축 자금을 구하기 위해 로토크사의 CEO이자 백만장자 기업인 제러미 프라이를 찾아갔다. 나는 프라이와의 첫 만남에서 디자인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라이는 극장 건설을 위한 후원은 거절했지만 나에게 자신과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사실 그때 프라이는 다른 극장을 짓는 일을 계획 중이었다. 나는 공연장과 객석 디자인을 하는 임무를 맡아서 매일 저녁, 주말, 방학 동안 일했다.

당시 나는 대학 교정 밖의 스승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인테리어 디자인 대신 산업 디자인 강의실을 기웃거려 봤지만 학교에서는 혁명적인 분위기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프라이는 달랐다. 함께 프랑스에 갔을 때 그는 나에게 수상 자전거와 자기 딸이 물 위에서 걸을 수 있는 놀이기구를 디자인해 보라고 말했다. 초짜 디자이너로서 나는 멘토들의 경험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야 했다. 프라이의 경우, 내가 빨아들일 것이 바닷물처럼 넓고 많았다. 프라이는 무언가를 만드는 데 관심 있는 공학자였다. 그리고 그가 만든 것들은 디자인이 훌륭할 뿐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정밀했다.

2 첫 상처



1968년 프라이는 선체가 유선형이 아닌 평저선인 보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다. "내가 지금 만드는 보트는 나무로 만들어져 판매할 수가 없어. 자네가 이걸 유리 섬유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게." 나는 1년 동안 실험한 끝에 유리 섬유의 특성과 수력학적인 측면, 양쪽 모두에서 최적화된 십자형 구조물을 만들어냈다. 시보트의 원형이 완성된 것이다. 이후 나는 틈만 나면 학교에서 빠져나가 조선소로 달려가 제작을 감독했다. 1969년 특허 신청을 할 때가 되자 프라이가 CEO로 있는 로토크에서 내 디자인에 대해 300파운드를 지급하고 시트럭 판매를 담당할 자회사를 세웠다. 1970년 6월 나는 왕립 학교를 졸업하면서 사람들이 군용 기습 상륙정이라 부르는, 시속 40노트의 매끈한 고속 선체(시트럭)를 졸업 작품으로 제출했다. 졸업과 동시에 나는 로토크에 들어갔다.

회사에서 나는 학생 때 디자인했던 시트럭을 판매하는 책임을 맡았다.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린 결과 사업은 순조롭게 풀렸다. 시트럭을 파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제품을 팔 때 침을 튀기며 우리 보트가 좋은 제품이라고 말하는 대신 이 보트가 소비자들의 생활에 어떻게 들어맞을지를 설명했다. 만약 소비자가 뭘 원하는지 안다면 당신이 제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소비자가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학생 때 나는 처음 물에 젖은 합판 조각에서 시작하여 정교한 폴리우레탄 상륙정을 개발했다. 회사에 들어간 이후에는 상륙정 250대를 팔아 수백만 파운드의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영업은 내가 원래 하고자 했던 일이 아니었다. 로토크에서의 4년은 온전히 내 것인 무언가를 기다린 시간이었다.

1972년 나는 영원히 런던을 떠날 생각으로 코츠월드에 농장을 샀다. 농가로 이사를 한 나는 직접 손수레를 밀면서 일을 했다. 그리고 이 장비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깨달았다. 바퀴는 펑크가 나기 쉬웠고, 무거운 짐을 옮길 때는 불안정했다. 무른 땅에서는 곧잘 빠졌고, 잔디 위에 바퀴 자국을 남겼다. 뾰족한 몸체 때문에 다리와 몸에 상처가 나는 경우도 잦았다. 그즈음 나는 회사에서 시트럭을 개량한 튜브 보트를 실험하고 있었다. 거기서 구멍이 나지 않으면서 밀도가 낮은 폴리에틸렌 공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당시 나는 오랜 영업 일에 지친 상태였고 무언가 다른 것을 찾고 있었다. 나는 플라스틱 공을 제작하는 방법을 농가의 손수레를 만드는 데 이용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개발된 것이 볼배로(ballbarrow)이다. 농가의 손수레에 플라스틱 공 제작 방법을 활용하여 혁명적인 바퀴를 장착한 새로운 제품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볼배로를 개발한 나는 1974년 회사를 그만두고, 스튜어트 커크우드와 공동으로 '커크-다이슨'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1979년 3월 시제품을 개발하고, 5월에는 볼배로를 처음으로 출시했다. 자전거 바퀴처럼 생긴 기존 수레바퀴를 플라스틱 공으로 바꾼 제품이다. 처음에는 제품이 잘 팔리지 않았다. 건축업자와 정원용품 유통 업자들이 볼배로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문에 광고를 내자 일반 대중들이 주문서와 수표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결과는 멋졌다. 구매고객이 늘어나면서 사업은 흑자를 거두기 시작했다. 생산량도 하루 30대로 늘어났고, 우리는 고객에게 우편으로 볼배로를 보냈다. 그때부터 사업은 눈덩이 굴리듯 커져갔다.

볼배로가 알려지면서 우리는 새로운 판매 전략을 세워야 했다. 새로 영입된 영업 이사는 직접 판매를 중단하고 도매상을 통해 물건을 공급했다. 그 결과 성공의 기본 조건인 소비자와의 접촉이 중단되었다. 여기에 경제 상황까지 나빠졌다. 도매업자들과 수입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에 이익이 줄어든 것이다. 현금이 부족해졌고 빚은 늘어 갔다. 이사회는 사업 확장으로 대응했다. 새로운 설비를 사들이고 공장을 임차하면서 빚이 크게 늘었다. 우리는 조지 잭슨이라는 투자자를 영입하고 회사 지분 1/3을 넘겼다. 1977년 우리 회사의 시장 점유율은 70%에 달했다. 볼배로는 개당 25파운드로 일반 손수레보다 3배 이상 비쌌지만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빚이었다. 당시 우리 회사는 빚이 너무 많았다. 이자율이 연 25%인 상황에서 빚 때문에 이자로만 매년 5만 파운드가 빠져 나갔다.

1977년 우리는 미국에 볼배로 라이선스를 팔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글라스코라는 회사에서 볼배로의 복제품을 만들어 판매했다. 글라스코는 광고 문구까지 도둑질해 썼다. "여기 볼배로가 있습니다." 이사진은 당장 글라스코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나는 이사진을 상대로 회사에 부채가 많은 상태에서 값비싼 법정 투쟁을 벌일 수는 없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사진은 내 얘기를 듣지 않았고 결국 1년 동안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법정 소송을 하게 되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글라스코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패소한 것이다. 미국 회사에 라이선스를 팔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회사는 여전히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대주주 세 명이 각자 자기 지분을 팔아 빚을 갚을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다른 두 명은 나의 제안을 내켜 하지 않았고, 1979년 1월 이사회를 열어 나를 쫓아내기로 결정했다. "친구, 자네가 회사에서 나가 줘야겠네." 내가 떠나자마자 주주들은 볼배로를 다른 회사에 팔았다. 제품에 대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빚을 갚은 셈이다. 대신 공장과 기계는 그대로 유지했고 볼배로 특허를 사들인 회사에 부품을 공급해 매출을 올렸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던 것은 볼배로 특허를 내 앞이 아니라 회사 앞으로 해 놓은 일이다. 나는 내 발명과 몇 년에 걸친 노력에 대해 아무 권리도 없었던 것이다.3 사이클론에 눈을 뜨다



1978년 나는 집에서 진공청소기로 청소를 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먼지가 찬 봉투를 끼운 채로 청소기를 돌리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 새로 산 먼지 봉투를 달면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나는 실험을 통해 청소기 성능이 떨어지는 이유가 먼지가 먼지 봉투의 미세한 구멍을 막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원래는 먼지 봉투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공기가 빠져나가야 하는데 청소를 하다 보면 먼지와 오물이 구멍을 막아 청소기의 흡입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나는 진공청소기 제조업자에게 분노를 느꼈다. 쓰자마자 당장 막혀 버리는 먼지 봉투를 지난 100년 동안 팔아먹었다니!

진공청소기의 문제 해결에 대한 힌트를 준 것은 볼배로였다. 볼배로 제작과정에서 에폭시를 볼배로 뼈대에 뿌리는 작업이 있는데, 이때 빗나간 에폭시 알갱이는 대형 진공청소기 같은 장치를 이용하여 빨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 기계는 한 시간마다 기계를 끄고 천에 붙은 에폭시 알갱이를 털어 내야 한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대형 천 스크린도 진공청소기의 먼지 봉투처럼 한 시간가량 쓰고 나면 알갱이가 천의 구멍을 막아 흡입력을 잃었던 것이다. 한 시간마다 기계를 멈추는 일은 비효율적이고 작업손실도 막심했다. 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으로 제재소에서 사용하는 사이클론을 모방한 기계를 만들었다. 원뿔형의 구조물을 만들고 그곳으로 에폭시 알갱이가 섞인 공기를 회전시켜, 알갱이만 원뿔 아래쪽에 모으는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1978년 10월 어느 주말 나는 집에서 주방용 가위와 마분지를 가지고 내가 공장에서 만든 사이클론의 축소판을 만들었다. 사이클론 겉면에는 절연 테이프를 감아 공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다. 사이클론을 청소기 몸체에 매단 뒤 청소기 플러그를 꽂고 조심스럽게 전원 버튼을 켰다. 몇 분간 청소한 뒤 전원을 끄고 사이클론을 분리했다. 원추형 사이클론 바닥에는 먼지가 수북했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나는 세계 유일의 먼지 봉투 없는 진공청소기를 가진 남자가 된 것이다.

흥분된 주말을 보낸 나는 커크-다이슨 사무실을 찾았다. 앞서 말한 여러 갈등 때문에 회사 이사들과의 관계가 소원했지만 이 발명이면 온갖 문제들이 단번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사진의 반응은 차가웠다. "제임스, 그렇게 좋은 진공청소기가 있다면 후버에서 진작 내놓지 않겠어?" "제임스, 더 이상 물건을 개발하지 말게. 멍청한 아이디어야." 이사진은 제품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빌어먹을 물건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옛 친구인 제러미 프라이가 2만 5천 파운드를 투자했다. 여기에 내 돈과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에어 파워 진공 청소 회사'를 차렸다.

나는 3년 동안 사이클론 개발에 매달렸다. 마구간을 작업장 삼아서 혼자서 시제품을 만들었다. 그동안 아내가 미술 교실을 열어 돈을 벌었다. 3년간 개발 자금은 바닥이 났고 대출금은 계속 늘어갔다. 종일 마구간에서 실험을 한 뒤 늦은 밤 먼지 범벅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1982년 후반 드디어 이중 사이클 원리를 적용한 완벽한 시제품이 나오기 까지 만들어 본 시제품 수만 5,127개였다. 시제품은 완성되었지만 그동안 은행 대출이 너무 많아져서 생산을 위해 추가 대출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제품 생산에 매달리는 것보다 제도판 앞에 앉아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나는 제러미 프라이와 협의한 끝에 직접 제품을 생산하는 대신 다른 회사에 제품 특허 사용권을 팔기로 결정했다.

특허 사용권을 판다는 것은 제조업체들에게 독점적으로 우리 특허를 이용하여, 일정 기간 동안, 특정 지역에 한해 제품을 생산해 팔고, 이익 가운데 일정 비율을 우리에게 준다는 뜻이다. 내가 첫 번째 판매 대상으로 생각한 기업은 당시 최대 진공청소기 제조업체였던 후버였다. 하지만 말 그대로 생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은 내 기술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미국과 유럽의 많은 유명한 가전업체들과 접촉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사람들은 기술에 대해 만족했지만 누구 한 사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자기네 제품을 지키는 데에만 관심을 쏟았다. 1983년까지 3년간 세계 곳곳을 다녔지만 나는 사이클론으로 단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어느 날 에이펙스라는 일본의 명품 수입업체가 잡지에 실린 사이클론 시제품 사진을 보고 연락을 해 왔다. 나는 파산상태였지만 일본에 가야 했다. 왜 일본 회사가 일본인들이 절대 쓸 것 같지 않은 진공청소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 채 말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나는 일본인과 협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에이팩스는 내가 하려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했고 어떻게 팔아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협상 시작 3개월 만에 우리는 특허 사용 계약서에 사인했다. 매출당 10%의 로열티를 받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청소기가 바로 지포스(G-Forc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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