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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 하늘을 날다

이상직 지음 | 고즈윈


촌놈 하늘을 날다

이상직 지음

고즈윈 / 2011년 12월 / 236쪽 / 11,800원



1부 꿈과 도전, 상상이 현실이 된다




비행기 한 대를 띄우기 위하여

어느 금요일 늦은 오후, 사무실에 "이스타항공 비상탈출 시현을 12월 28일에 하겠습니다."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 국토해양부로부터 걸려 온 전화의 내용을 보고받은 뒤, 내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왔다. 항공사를 운영하려면 누구나 국토해양부로부터 항공운항증명(AOC)를 받아야 하는데, 비상탈출 시현은 인가를 위한 마지막 관문인 셈이다. 드디어 비상탈출 시현 날, 한쪽에는 카메라가 세팅되고 직원들은 시간을 쪼개 가며 해 왔던 훈련을 되새기면서 테스트 준비를 했다.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이스타항공의 비행기는 보잉사의 최신 기종인 737NG인데, 앞쪽 좌우와 맨 뒤쪽 좌우에 총 네 개의 패신저 도어가, 양쪽 날개 쪽에 네 개의 비상탈출용 도어가 있다. 우리는 15초 안에 패신저 도어와 비상탈출용 도어를 열고, 슬라이드 앤 리프트를 내렸다. 그리고 부풀어 오른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감독관들은 만족한 얼굴로 "이스타항공, 합격입니다!" 라고 외쳤다. 직원들 모두 환호하며 감독관에게 물었다. "이제 날 수 있는 겁니까?"



촌놈, 하늘을 꿈꾸다

나는 김제 원평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끝도 없이 펼쳐진 안개 속의 평야를 바라보며 신비로운 기분을 만끽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두두두두, 하늘을 가르는 거친 소리와 함께 헬기 한 대가 논두렁을 가로질러 내가 누워 있는 쪽으로 곧장 날아오는 게 아닌가. 신기하고 황홀했다. 헬기가 보이지 않을 무렵, 이번엔 '진짜' 비행기가 나타났다. 1970년부터 1974년까지 군산공항과 김포공항 사이를 운항하던 비행기가 때마침 고향 마을 위를 지나간 것이다.



그날 이후 친구들과 들판에서 뛰어놀다가도 비행기가 지나가는 낌새라도 보일라치면 잽싸게 언덕 위로 올라가곤 했다. 그러던 언제부턴가 비행기가 더 이상 솟아오르지 않았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1차 석유파동으로 1974년 군산공항이 폐쇄되면서 운항이 중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생텍쥐페리의 작품을 좋아했다. 생텍쥐페리는 비행가라는 직업도 가지고 있었다. "사막은 아름다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해." 김제의 너른 평야에 살던 평범한 소년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 난 뒤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어린 왕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나만의 세계에서 '사막의 우물'을 찾고 싶다"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고향 하늘에 비행기를 다시 띄우고 싶다는 소망의 다른 표현이었던 듯하다.



누군가 "비행기 한 대가 뜨기 위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우선 비행기를 띄울 꿈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항공사를 일구어 갈 인재를 찾기로 했다. 몇몇 사람에게 계획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대부분 불투명한 사업 같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보다 먼저 저비용 항공사로서 도전장을 내밀었던 한성항공과 영남에어가 연달아 문을 닫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머지않아 근거리 항공 시장은 저비용 항공사가 장악할 것이라 생각했고, 이스타항공그룹의 성장동력으로서도 저비용 항공사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국민 항공사를 만들자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2007년 10월, 이스타항공은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김포공항 근처 방화동에 있는 작은 사무실 하나가 전부였다.



일 년 뒤, 이스타항공은 보잉737NG 제트기 한 대를 들여왔다. 곧 비행기는 여섯 대가 되었고, 국내뿐 아니라 멀리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태국 방콕, 일본 도쿄, 중국 연길 등에도 날아올랐다. 누군가 내게, "비행기 한 대가 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고 또다시 묻는다면, 이번에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꿈과 노력.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노력하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짜릿한 가격을 선물하라

현대증권에 근무하던 시절, 직접 투자했던 몇몇 기업들이 산업 전망이나 기업 펀더멘털과는 달리 쉽게 망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 경영주의 도덕 불감증 때문이었다. 그런 기억 때문이었는지 내가 기업을 맡게 된다면 나는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이스타항공을 설립하면서 기업 윤리와 더불어 효율적 경영을 중요시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있으면 된다는 젊은 시절의 효율적 삶이 몸에 밴 탓이기도 하지만, 설립 당시부터 '비행기를 이용하는 고객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의 만족을 전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큰 숙제였다.



저비용 고효율 경영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기존 항공사는 비행기 한 대당 필수 인원이 100명 정도인데, 우리는 60여 명 수준으로 인적 구성을 마쳐야 했으므로 나는 더욱 숙제에 집중했다. 그때 떠오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얼리 버드(early bird) 요금제'다. 얼리 버드 요금제는 항공권을 빨리 구매한 사람이 정상 가격보다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합리적 요금제다. 이 요금제의 기저에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금융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일정을 미리 계획한 고객은 저렴한 가격에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기업은 항공권을 미리 팔기 때문에 자금 유동성이 커진다. 미리 확보된 자금 덕분에 은행에 낼 이자 비용이 줄어드니 항공 요금을 낮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흐가 반한 비행기

보잉737NG 1호기를 처음 들여왔을 때, 몇몇 직원들과 활주로에 나가 비행기를 감상했다.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비행기 내부를 둘러보다 보니, 비좁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김포공항에서 제주공항 정도의 짧은 거리를 비행한다면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해외 여러 나라를 장시간 운행하다 보면 승객이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계속하던 중 비행기 외부 디자인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왕 디자인을 하는 마당에 비행기 내부도 좀 더 넓어 보일 수 있도록 디자인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다. 모두가 공감했다. 하지만 비행기 내부는 흰색(비행기 내부는 대부분 흰색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워낙 강해 쉽게 다른 생각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결정을 미룬 채 나는 예정된 해외 출장을 떠나야 했다. 디자인만 생각하던 중이라 그런지 공항에 도착해서도 온통 비행기 디자인만 눈에 띄었다. 비행기가 이륙한 뒤 복잡한 마음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땅에서와 달리 시야가 탁 트이면서 천천히 움직이는 하늘빛이 닫혀 있던 나의 마음을 두드렸다. 시원했다. 하늘을 보고 있자니 이렇게 조그만 창문 말고 더욱 큰 창으로 하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 천장에 하늘을 그리면 어떨까?'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회의를 소집했다. 생각을 말하고는 직원들의 반응을 살폈다. 대부분 하늘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내 의견을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구체적으로 도안을 해 보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비행기 한 대에 그림을 그리는 데 무려 1억 원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자 '단순히 디자인을 바꾸는 데 드는 비용치고는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비용을 들이려면 항공료를 올려야 합니다.'라는 반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들에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승객의 입장에서 볼 때 답답한 비행기를 참고 탄다는 것 역시 문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내 디자인 비용을 승객에게 물리는 것 역시 맞지 않았다. 생각을 바꿨다. 승객들이 기내 디자인으로 인해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다면 1억 원의 비용은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 고객들이 이를 통해 이스타항공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된다면 굳이 항공료를 올리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임직원을 다시 설득했고 오랜 논란 끝에 의견이 모아졌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새로운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다른 의견들도 속속 올라왔다. "비행기에 이름을 다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승객들이 나중에라도 자기가 탄 비행기에 이름이 있고, 각각의 이름에 저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행을 추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자정이 넘어서까지 직원들은 자기가 가진 하늘에 대한 이미지를 내어놓았다. 이스타항공 1호기 '스카이호'는 이렇게 탄생했다.



나는 가끔 행주산성 앞에 있는 단골 국수집에 들러 식사를 하곤 한다. 20년이 넘도록 잔치국수 하나만을 파는 식당인데,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일품이다. 국수 가게에서 국수의 맛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나는 이 고유의 맛을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스타항공의 가치는 무엇일까? 이스타항공의 가치 창조는 항공사가 단순히 교통편을 제공하는 회사라는 통상적인 생각을 넘어서면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객에게 추억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데서 출발했다.



후발 주자에겐 설움이 있다. 탑승구 위치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공항 기여도가 적다는 이유로 김포공항과 인천공항에서 공항 건물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탑승동을 사용해야 했다. 사용 비율이 낮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이기도 했지만, 승객들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승객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낸 것은 비행기 동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등의 추억 여행 이벤트였다. 이스타항공은 탑승할 때 레드 카펫에서 비행기를 배경으로 승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승무원들은 비행기 내부 디자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거나, 가위바위보 등의 게임으로 즐거운 분위기를 유도한다. 그리고 사진은 승무원들이 직접 고객에게 이메일로 보내 주기도 하는데, 이스타항공의 카페에 여행 사진이나 글을 올리면 추첨을 통해 연극 관람권이나 항공권을 주기도 한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에는 승객들의 짐에 일일이 초콜릿이나 사탕을 달아 준다. 이렇게 하면 수하물 칸에서 짐을 찾던 승객들에게 생각지 못한 추억을 선사하게 된다. 이스타항공이 스스로 추억이 되는 것이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승객들도 이제는 이런 이벤트를 즐기는 단골 승객이 되고 있다. 행주산성의 국수집이 변함없는 고향 어머니의 손맛으로 손님들이 원하는 가치를 창조하였듯이, 이스타항공을 이용하는 승객들도 우리가 펼치는 추억 여행을 통해 추억이라는 가치와 함께하길 바란다.



2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여행




아버지와 큰형, 그리고 나

2009년 빌 게이츠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게임기 X박스에 자개를 붙여 선물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 방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자개장롱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1960년대에는 집집마다 큰 자개장롱을 들여놓는 게 유행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전칠기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다. 1970년대 초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한 큰형에게 나전칠기 유통 사업을 물려주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었다. 큰형이 물려받은 뒤에도 한동안 나전칠기 사업은 잘나갔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가구 시장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고급스런 자개장롱에 매료되어 있던 소비자들이 점차 실용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의 서양식 목재가구를 선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몇몇 업체들은 재빨리 변화를 받아들였지만, 큰형은 전통 가구의 힘이 지속될 거라 믿으며 이 같은 변화에 개의치 않았다. 결국 번창하던 사업은 창업 2세대에서 큰 실패를 맛보게 되었다.



친구 그리고 불사조의 추억 / 81학번의 비애

1978년 봄, 나는 전주고에 입학했다. 당시 전주고는 경기고, 경북고, 부산고, 광주일고 등 다른 명문고들이 대부분 평준화되면서 비평준화 고교 가운데서 최고 명문고로 뽑혔다.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집단이었기에 더 그랬을까. 학교 분위기는 신학기부터 냉랭했다. 자기만이 최고이고 자기만이 우선이어서, 3년 내내 시험 점수 1, 2점에 얽매이고 말았다. 치열한 경쟁에서 나는 조금씩 지쳐 갔다. 담임선생님이 출석 체크를 하고 나면, 책상과 의자를 맨 뒤로 빼 두고는 담장을 넘기도 했다.



수업을 가끔 빠지기는 했지만 공부마저 놓은 것은 아니었다. 자율학습 시간이 되면 나름의 방식으로 공부에 집중했다. 그런데 1980년 7월 30일, 나와 친구들은 라디오를 통해 "대입 본고사를 전격 폐지한다. 예비고사 성적과 내신 성적을 합산하여 대학 입시를 치른다."라는 정부의 교육 개혁안을 접했다. 나는 커다란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본고사 위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해 왔고, 일명 스카이(SKY)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가출하면서 학교 시험을 치르지 않아 나의 내신은 꼴찌 등급이었다. 결국 나는 점수에 맞춰 전북대학교 농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대학 생활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국 모악산의 옛집에 들어가 다시 몇 달을 준비했고, 그 결과 어느 정도 학력고사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바라는 대학에 가기에는 무리였다. 고등학교 때 얻은 최하 등급 내신 성적이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항공대를 1차 진로로 생각하고 복수 지원을 준비했다. 어릴 적 꿈, 파일럿이 되기 위해서는 항공대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력 때문에 항공운항과에 갈 수 없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고 대신 항공 경영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마지막 시련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까지 가는 교통비가 부담스러워 한 친구에게 지원서를 전달하며 대신 접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원서를 대신 접수해 주겠다던 그 친구가 믿음을 저버리고 말았다. 황당하게도 그 친구는 항공대 지원 비용을 술값으로 날려 버리고, 동국대 경영학과에만 원서를 접수한 것이었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친구의 어이없는 변명에 할 말을 잃었다.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친구 덕(?)에 동국대 경영학과의 결과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다행히 등록금을 면제 받는다는 조건까지 덧붙여 합격 소식이 전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를 마냥 탓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등록금 면제로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숨통을 틔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대학 도전기는 새로운 대입 제도, 재수, 모악산에서의 생활, 그리고 친구 술값으로 사라져 버린 항공대 원서 등으로 나름 파란만장하게 점철돼 있다.



3부 꿈이 있다면 도전하라




주식시장, '정글'로 뛰어들다

졸업이 임박해 나는 현대그룹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그리고 연수를 마친 후 나는 현대증권에 지원했다.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게임의 승률이 좋았고, 수리에 밝은 내 적성에 잘 어울리는 분야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회사에 입사한 뒤, 고된 야근 운운하며 불평하던 일부 신입 사원과 달리, 스물네 시간을 일만 생각했다. 마치 영화 〈황야의 무법자〉처럼 재야의 고수를 찾아 홀로 떠나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먼 지방일지라도 투자의 고수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찾아가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나의 이런 노력이 좋은 성적으로 이어졌다. 증권 연수원 시험에서도 1등을 했고, 갓 개설된 점포에 배치되어도 곧 전국 1등 점포로 만들었다. 당연히 성적만큼이나 이름도 두드러져 '이상직'이라는 이름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였다. 반면 그만큼 시기와 질투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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