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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는 있어도 마침표는 없다

임수열 지음 | 지상사
임수열 지음

지상사 / 2011년 10월 / 298쪽 / 13,500원



제1막 게릴라정신, 개천에서 용이 나는 법



탈출


꿈과 희망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만약 그날 명동성당 어귀에서 낡은 일본 잡지 한 권을 주워들지 않았다면 나도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인생을 마감했을지 모른다. 명동 중국대사관 옆 골목에는 외국 잡지를 파는 서점들이 늘어서 있다. 내 눈에는 일본 잡지들 속에 숨은 결혼정보시장에 대한 자료들만 보였다. 시장의 규모가 어떻고, 발전 가능성은 어떻고, 한국 실정과는 얼마나 다른지 열심히 파악하던 명동 뒷골목의 허름한 노숙자는 사업 가능성을 확신했다. 내 몸보다 내 미래가 먼저 노숙자 신세로부터 탈출했다.

노숙생활 6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시작이다!' 결심 앞에 현금은커녕 선배에게 빌려준 5,000만원의 대출 빚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아직은 쓸 만한 (압류 당하지 않은) 중고 승용차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친구에게 팔아 500만 원을 마련했다. 물론 전 재산 500만 원은 일을 시작하기에 턱도 없었다. 하지만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자신감이 넘쳤고, 두려울 게 없었다.

종로3가에 보증금 없이 선 월세로 60만 원을 주고 사무실을 얻고 그 길로 세무서에 가서 사업자등록까지 마쳤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결혼정보회사라고 하면 대개 음습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나는 결혼정보회사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부터 바꾸고 싶었다. 내가 추구하는 결혼정보회사는 더 나은 배우자를 찾으려 사람들이 모이는, 밝고 긍정적이며 즐거움을 주는 모임이었다. 그러자면 사람들에게 나의 뜻을 전하고 신뢰를 얻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상식적으로 엄청난 홍보비용이 필요했다. 수중에는 사무실을 얻고 남은 400만 원 남짓한 돈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첫 번째 불가능한 계획을 세웠다.

한강 둔치 유람선 안에 레스토랑을 꾸며 놓고 클래식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으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최고급 유람선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1인당 식사비가 4만 5천 원 정도였다. 그 배를 450만원에 통째로 빌리기로 했다. 그리고 미래 고객 100명을 초대해 우리 회사의 창업 식을 겸한 '사랑의 유람선' 파티를 열기로 했다. 물론 내 계획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극구 말렸다. '왜 가진 돈 전부를 남들 밥값으로 지불하려고 하느냐?' '한 푼도 없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런 일은 돈 많은 대기업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충분히 공감이 가고 예상할 수 있는 반응들이었다.

"돈이 없으면 지혜를 보이고, 지혜도 없으면 땀을 더 흘려라." 일본 교토 상인들의 가르침 중에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 힘을 주는 문구다. 비록 나에게 충분한 돈은 없지만, 지혜롭게 더 많은 땀을 흘린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계획이 사업의 성패를 결정짓는 일이라 판단한 즉시 난 주위의 걱정과 만류를 뿌리치고 일을 추진했다. 레스토랑에는 한 달 후 토요일 저녁에 사용하기로 하고 계약금 300만원을 건넸다. 사업의 시작과 동시에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들을 머릿속으로 차례차례 그려나갔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따금 노숙자인 채로 안주해버린 내 모습을 상상해보면 끔찍한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그날 명동 주변을 배회하지 않았다면, 일본 잡지를 누군가 먼저 집어 들었다면, 그리고 그 잡지를 보고도 내게 아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1997년 봄, 운명은 나를 두드렸고, 나는 그 운명에 응답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미래를 좇아 내 몸은 노숙자로부터 완전히 탈출했다.

결혼정보회사 벤처 1호 되다

다양한 이슈로 언론에 알려지면서 오프라인에서는 우리 회사 인지도가 크게 쌓였지만, 온라인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1998년에서 1999년으로 이어지던 당시, 모든 사업의 미래는 인터넷을 활용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었다. 나는 커플매니저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남성과 여성을 연결시켜주던 것에서 컴퓨터시스템을 통해 더욱 정확하고 편리하게 커플이 이루어질 수 있는 만남을 주선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IT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우리 고객명단을 검토해 IT관련 일하는 분들을 만나 솔직하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온라인매칭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가장 큰 통신사들인 천리안과 하이텔, 유니텔 등에 우리의 회원정보를 제공하는 IP사업을 시작했는데, 불과 몇 개월 만에 수천만 원의 매출로 돌아왔다. 이 일을 통해 온라인의 매력과 비전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온라인매칭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온라인 미팅과 채팅을 주력 서비스로 제공하는 웹진 'OKLOVE.NET'를 개설했다. 여기에 온라인상에서 더욱 재미있게 자신을 표현하도록 자신만의 아바타를 임의대로 만들 수 있는 '몽타주 기법'을 최초로 시도했다. 또한 영화배우 유지태 씨를 시작으로 유명 인사들을 직접 인터뷰해 그들의 사랑과 연애를 주제로 한 이야기들을 웹진과 사보에 실었다.

새로운 시도들은 연일 대단한 관심과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단기간에 수만 명이 사이트에 가입했다. 우리는 곧바로 완성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중소기업청에 기술평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두 달 후 결혼정보회사로는 최초로 중소기업청 지정 벤처기업으로 등록되었다. 벤처 1호가 주는 의미는, 선두기업이라는 이미지도 있지만, 최첨단 시스템을 갖춘 결혼정보회사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조바심, 낙관론, 그리고 실수의 이유

"자본금 500만 원으로 1인 창업, 결혼정보회사 벤처 1호 인증, 창업 4년차인 2000년 코스닥 상장 시도" 짧은 시간 동안 눈부시게 성장한 듀비스는 IT와 결혼정보서비스를 접목한 최첨단 결혼정보서비스회사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내 꿈의 종착지가 아닌 시작일 뿐이었다. 좀 더 넓고 큰 시장에서 활동하고 싶었고,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사실, 우리가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던 2000년은 모든 결혼정보회사들이 어려운 시기였다. 당시 나는 결혼정보서비스를 각 기업,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서 고액의 회원가입비 대신 실비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사회공익사업으로 전환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미혼 남녀의 정보와 네트워크 등을 공유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많은 대중들, 아니 국민들이 금전적인 부담 없이 공신력 있는 결혼정보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지자체나 대기업들을 통해 이 생각이 실현된다면, 나 역시 고객을 확보하는 데 들어가는 마케팅 비용이 발생하지 않아 최소한의 비용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

결혼정보회사를 공익사업으로 전환하면 수익은 어디서 얻느냐고 고개를 갸웃할 수 있다. 나는 그 수익을 웨딩사업에서 얻고자 했다. 웨딩과 관련한 정보를 제공하는 웨딩전문 온라인백화점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많은 업체들이 자유롭게 입점해서 자신들의 서비스와 상품을 제시하고, 소비자가 더 좋은 조건의 업체를 찾아서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장터 역할을 하고 싶었다. 마치 극장의 예매 상황을 온라인으로 쉽게 확인하는 것처럼, 예식장도 웹상에서 예약 스케줄을 확인하고 자신이 결혼할 날을 정하거나 가능한 날의 예식장을 찾을 수 있게끔 만들고 싶었다.

예식장뿐만 아니라 미용, 가구, 가전, 예물, 부동산, 신혼여행 등을 원스톱으로 편리하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 사이버 웨딩플래너서비스를 구축하는 일까지 꿈꾸었다. 내가 생각한 사이버 웨딩플래너는 결혼을 경험한 주부들을 훈련시켜 과정을 수료한 주부들이 자신의 거주 지역에서 웨딩플래너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웨딩산업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키고 나아가 일자리 창출까지 가능한 사업이었다. 그래서 우리 회사가 전국적으로 많은 커플들을 탄생시키고 결혼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자연스럽게 많은 대중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국민적 기업이 되길 원했다. 한편으로는 웨딩과 관련된 사업으로 수조원의 매출을 이루는 새로운 웨딩비즈니스를 꿈꿨다. 나는 실현 가능성과 성공 가능성 모두를 확신했다. 그렇게, 살면서 가장 큰 실수 하나를 저지르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거대한 프로젝트는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단기간에 그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다. 조급증이 발동한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산과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단시간에 훌륭한 결과가 생길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1차로 전국에 수십 개의 지점망을 구축하고, 코스닥에 상장해서 더 큰 공신력을 얻고, 이 사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큰 규모의 자금을 공모하기로 마음먹었다.

윤다훈 씨를 홍보모델로 영입한 이후 회사의 모든 자금은 웨딩사업 광고와 웹 프로그램 개발 및 서버 확충에 집중했다. 주요 일간지에 전면 컬러광고를 내보내는 등 파격적인 아이디어로 대공세를 펼쳤다. 당시 우리 회사를 보고 신문과 잡지사의 광고 책임자들이 어느 재벌3세가 사업을 시작한 줄 알았다고 얘기하며 회사를 찾아올 정도였다. 그동안 큰돈 들이지 않은 게릴라정신으로 홍보마케팅을 해 큰 효과를 보며 꾸준히 성장을 해오다가 갑자기 수십억의 자금을 웹 시스템과 지점 확보를 위한 홍보마케팅에 쏟아 부은 것이다. 나는 내가 계획한 사업 플랜에 대해 너무나 자신 있었고, 그것을 알게 되면 누구나 나와 함께 그 꿈에 동참해 줄 것이라는 기대와 착각을 동시에 했기 때문이다.

추락은 순식간이었다. 전국에 적어도 50여개의 지점망은 손쉽게 구축될 것이라 기대했는데, 결과는 단 10개에 그치고 말았다. 더구나 가지고 있던 모든 자금을 신규프로젝트에 쏟아 부었는데, 부진한 결과와 함께 당시 금융게이트 사건으로 투자가 위축되면서 투자가 중단되었고, 회사는 엄청난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부도 상황으로 몰렸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루려고 서둘렀던 조급증과 무조건 잘 될 거라는 대책 없는 낙관론을 가졌던 나 자신을 보며 뼈저리게 반성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사고가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과 시도를 할 수 있었고, 내 앞에 기다리던 또 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사라져도 회사는 남기다

한때 승승장구하던 모습과 당장 직원들 급여까지 못 주는 모습이 오버랩 됐다. 불과 4년 만에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완전히 추락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3개월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눈앞의 현실로 닥쳤다. 부도 상황에 이르자 나를 믿고 지원해주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을 실망시켰다는 자책감과 미안함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어떻게 해서든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투자자들을 찾아다녔다.

절박한 심정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뛰어다녔다. 투자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결국 부산의 한 사업가에게 신규투자를 조건으로 내 지분 전부를 무상으로 넘겼다. 그러는 사이 정들었던 직원들도 여럿 떠나고 회사의 이미지도 크게 떨어졌지만, 어떻게든 회사가 다시 일어서기만을 바랐다. 그날 저녁 괴로움에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한 나는 어느새 회사 앞에 서 있었다. 건물 외벽에 부착된 '(주)듀비스'란 간판을 보며 저 이름을 만들기 위해, 저 로고를 만들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열심히 뛰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현실로 인해 멍하니 여러 시간 그렇게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제2막 임수열이 만난 사람들



뻔뻔할 정도의 당당함


이제까지 다양한 개성과 장점을 가진 사람들과 일하면서 때로는 좋은 장점들을 때로는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교훈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마치 학교 선생님처럼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분들이 있다. 그 중에 '당당함'이란 과목을 가르치셨던 선생님 떠오른다. 결혼정보회사를 창업한 후 궤도에 오른 2000년 초 영입해 나를 도와 일하셨던 박 이사님이시다. 사실 그 분은 내가 노숙자로 생활하기 이전에 다니던 회사의 상사였다. 나보다 20년이나 더 인생을 경험하신 50대의 박 이사님, 그 분을 생각하면 2000년 말 회사가 갑작스런 자금난에 빠져 부도 상황에 몰렸을 때가 떠오른다.

부도 상황이라는 정보가 퍼지자 채권자 몇 명이 회사로 찾아왔는데, 큰 덩치에 머리를 짧게 자른 건달 여러 명이 동행했다. 돈을 제때 주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며 협박을 했다. 가만히 서서 노려보며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건달들로 인해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때 내 방으로 박 이사님이 들어오시더니 오히려 그들을 야단치시는 게 아닌가?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런 양아치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까? 우리가 돈을 숨겨놓고 고의로 안 주는 것도 아니고, 잘 해보려고 시작한 일이 계획대로 안 돼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먼저 함께 의논하고 방법을 찾는 게 순서 아니요? 다짜고짜 조폭 같은 사람들을 데려와서는 협박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박 이사님이 너무나 당당하게 말씀하셔서 나도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인상을 쓰고 있는 건달들에게까지 호통을 치셨다. "젊은 사람들이 말이야, 이런 건장한 몸도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곳에나 따라다니는 게 말이나 됩니까? 부끄러운 줄 아세요!" 박 이사님이 너무나 당당한 자세로 호통과 야단을 치자 살기등등하게 협박하던 채권자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더니 미안하다며 내게 사과까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권자들이 모두 돌아간 후 박 이사님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힘내요, 임 사장. 로마를 세계 초강대국으로 이끌었던 시저 역시 오랜 세월 로마 제일의 빚쟁이였다는 말을 들었어요. 로마 제일의 권력자가 되기까지 얼마나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겠어요? 수십 년간 그 비용을 빚으로 충당했다니 말입니다." 박 이사님이 해주신 시저의 이야기는 실의에 빠진 내게 분명한 힘을 주었다. 이후에도 시저는 채권자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많은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하는 기막힌 뻔뻔함까지 보여주었다.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분명히 갚을 수 있다는 시저의 뻔뻔한 정도의 당당함에 채권자들은 다시금 돈을 빌려 주었다. 그리고 그는 끝내 목표를 달성했고 모든 빚을 갚았다.

시저와 박 이사님이 내게 보여준, 아니 가르쳐준 '뻔뻔할 정도의 당당함'은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상황들, 특히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 당당함이 바로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자세요." 지쳐 있는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씀하시던 박 이사님과 그분의 말씀이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지푸라기를 놓다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산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 지푸라기를 놓고 나서야 새로운 기회를 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2000년 12월, 듀비스를 완전히 넘긴 후 두 달 가까이 실의에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그저 술로 밤을 지새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다시 맨주먹, 빈털터리가 된 나는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고, 이런 상황에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했다. 그러다 문득 수년 전 노숙자 생활을 하며 최악의 절망을 느꼈던 그때가 떠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차에 현재의 내 상황을 잘 아는 이전 거래처 사장이 투자자 한 명을 소개했다. 박 회장이라 불리는 그 투자자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카리스마가 넘치고 아주 화통한 사람이었다. 박 회장은 첫 만남부터 자연스럽게 말을 놓으며 나를 여러모로 테스트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호감을 표하며, 내가 너무 마음에 들어 동생 삼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임 사장, 아니 동생. 얼마면 되겠나?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제부터 자네도 나보고 회장님이라 하지 말고 형님이라 불러.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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