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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과 싸우는 법

이기형 지음 | 링거스그룹
신화는 시작되었다



인재들이 모여들다

레인콤이 아이리버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에너지는 바로 인재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각 분야에서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양덕준 사장은 레인콤을 설립하면서 수호지의 양산박을 꿈꿨는지 모른다. 영웅호걸들이 모여든 양산박 말이다. 삼성 등 대기업에서 탈출한 기술력 높은 엔지니어, 영업 마케팅 전문가, 얼리어답터,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신입사원들, 바로 그런 외인부대의 힘이 레인콤의 신화를 이뤄낸 것이다. 양덕준 사장은 사람을 모으는 방면에서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말처럼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속속 회사에 합류했다. 그의 말에 의해 현혹돼서 온 게 아니었다. 삼성에 있을 때부터 많은 후배들이 그를 따랐다.



양 사장에게 레인콤은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양산박이었다. 레인(reign)은 지배한다는 뜻이다. 힘으로 정복하기보다는 스스로 울타리 밑으로 들어오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양 사장은 그곳에 사람들을 모여들게 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졌다. 그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배려', 그리고 자유로움 그 자체인 그의 사상이 레인콤을 존재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기반이 됐다.



양덕준은 1977년 영남대학교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삼성반도체에 입사했다. 그가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군대생활에서 접한 반도체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군 제대 후 마침 삼성에서 반도체 연구원을 뽑는다는 공고가 났다. 양덕준은 곧바로 지원, 삼성그룹에 입사를 했다. 그게 1978년이다. 하지만 막상 회사에 들어가 보니 반도체 연구원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선진국에 비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이름만 '삼성반도체'였지 기술 수준은 일본 트랜지스터를 보고 베끼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에 실망한 양덕준은 연구원에서 기획영업직으로 직무를 바꿨다. 양덕준은 그때부터 비메모리 반도체 영업을 시작했다. 양 사장은 대리 시절 4년간 미국주재원을 거쳐 홍콩지점장으로 근무하면서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비즈니스맨이었다. 국내 본사에 복귀해서도 수출부장, 수출 및 마케팅 이사를 맡았다.



삼성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양 사장이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은 삼성전자 수출부 과장으로 일하다가 양 사장보다 먼저 삼성에서 퇴직한 강호근이었다. 양 사장은 '옵티로직'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강호근을 찾아가 회사를 창업하는 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양 사장이 회사에 사표를 제출한 것은 1998년 6월이었다.



삼성을 떠나 레인콤을 설립하다: 양 사장은 1999년 1월 레인콤을 설립하고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갔다. 몇 군데 반도체 회사를 방문했다. 그중 '시러스로직'이라는 회사의 판권을 획득했다. 그 회사에서 만든 칩 중에 MP3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인 제품이 있었다. MP3를 작동하기에 최적화된 칩은 아니었지만 소프트웨어를 깔면 사용목적에 맞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양사장은 시러스로직의 칩을 쓰고, CD타입으로 해서 칩 마케팅을 하면 꽤 괜찮은 비즈니스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꿈 하나로 모인 레인콤 사람들: 다행스럽게도 레인콤은 CD타입 MP3플레이어를 만드는 데 있어서 뛰어난 기술 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바로 이래환 팀이다. 레인콤 창립멤버 중 한 명인 이래환 부사장은 아이리버 신화에 있어서 양덕준 사장 다음으로 가장 공헌한 인물로 꼽힌다. 특히 그의 추진력, 돌파력은 양덕준 사장과 보완을 이루면서 아이리버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레인콤 초기 MP3플레이어를 만드는 데 이 부사장의 공은 상당히 컸다. 이 부사장은 삼성에서 디지털미디어 즉 TV, 오디오, 비디오 등 상품 세트 쪽에서 개발을 하던 전문가로 CD플레이어, DVD 등 '동그란 것은 모두 만들어봤다'고 할 정도로 음향, 영상기기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 부사장과 같이 일한 엔지니어 중 첫 번째로 손꼽히는 사람은 이용현 이사다. 그를 '천재성을 가진 엔지니어'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2002년 2월에 레인콤에 영입돼 국내영업 및 해외마케팅에서 일했던 기성호 부사장이 기억하는 이래환-이용현 팀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콤비'다. 제품개발 측면에서는 세계적으로 이래환 팀을 따라올 수 없었다고 할 정도다. 이덕현 이사도 실력자 중 하나다. 이덕현 이사 또한 삼성전자에서 7년, 삼성전기에서 2년을 근무한 삼성 출신 엔지니어로 1999년에 레인콤에 합류했다. 이같이 레인콤에는 실력 있는 엔지니어들이 합류했다.



브랜드를 생각하다

첫 번째 주문, 삼성과의 거래를 끊어라: 삼성전자를 그만둔 양덕준 사장은 강호근 사장과 같이 일하기로 의기투합을 한 뒤 제일 먼저 강 사장에게 삼성과의 거래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강호근은 당시 옵티로직이라는 회사를 설립, 삼성전자 칩을 이용해 비디오 솔루션을 개발하는 등 삼성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현금을 창출할 수 있는 캐시카우 사업을 중단하라고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양 사장의 설명은 이렇다. "삼성에 의존해서는 사업이 커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삼성과 거래하는 한 그 거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실 삼성이라는 회사는 정말 요구하는 게 많은 회사다. 협력사와 윈윈하는 관계가 아니다. 얻는 것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지불해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게 삼성이다. 그렇게 가다가는 몸만 고생하고 꾸준히 돈이 들어오는 것에 안주하다가 새로운 것을 찾아보지도 못하고 굴러가게 된다. 나는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다. 기왕에 삼성에서 나온 바에야."



양덕준 사장은 사업을 시작한 만큼 큰 꿈을 꾸고 싶었다. 당장에 돈이 들어오는 비즈니스에 빠지면 거기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에 모인 두령들처럼 혁명을 꿈꿨다. 삼성에 기대어 무엇인가를 해볼 심산으로 삼성전자 임원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게 아니었다. 이 같은 행보는 레인콤의 아이리버 신화를 거둔 원동력이기도 했다.



삼성과의 반도체 칩 사업을 접고 레인콤이 시작한 일은 해외 루트를 뚫는 것이었다. 그 첫 단추가 미국 반도체회사인 시러스로직과의 칩 유통 판권 계약이었다. 이 칩을 유통하다가 MP3플레이어를 만들게 됐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MP3플레이어 샘플이 나온 것은 2001년 여름이었다. 제품 개발에 들어가면서 엔지니어들은 아예 개발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개발에 들어갔다. 밤을 새우다 졸리면 잤고, 일어나면 출근이었다. 모두 힘들었지만 모두 신나게 일하던 시기였다. 그들에겐 공유하는 꿈이 있었고, 믿고 따를 보스가 있었다.



소닉블루를 통해 미국시장에 진출하다: 미국 소닉블루 부사장이 이사를 대동하고 레인콤을 느닷없이 찾아왔다. 정말 '느닷없이 찾아왔다'는 표현밖에 쓸 도리가 없다. 양덕준 사장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비행기에서 내려 바로 회사로 왔다고 했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왔다. 제품을 보고 여러 가지 질의응답을 했다. 그러고 나서는 종이를 꺼내면서 계약을 하자고 했다. 비행기에서 계약서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소닉블루측이 제시한 계약서를 검토한 후 문구를 좀 수정한 뒤에 오후에 사인했다."



국내와 아시아는 아이리버 브랜드로 팔고, 미국, 유럽은 '리오볼트' 브랜드로 소닉블루에서 파는 조건이었다. 레인콤은 소닉블루와의 만남을 통해 MP3플레이어 생산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된다. 레인콤이 만든 MP3는 리오볼트 상표를 달고 미국시장에서 잘 팔려나갔다. 소닉블루와 거래를 시작하면서 매출액이 크게 늘어났다. 연말에 MP3 매출이 시작되면서 2001년 매출액이 533억 원으로 늘어났다. 영업이익이 74억 원에 달했다. 70∼80%의 매출이 소닉블루에서 나왔다. 레인콤은 소닉블루를 통해 미국시장을 뚫었고, 진출 6개월 만에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2000년 80억 원의 매출을 올렸던 레인콤은 2001년 소닉블루와의 만남으로 매출 500억 원을 넘어서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 레인콤은 이렇게 좋은 파트너였던 소닉블루와 바로 헤어지게 된다. 자체 브랜드를 가지고 가려는 레인콤의 전략과 소닉블루의 전략이 상충됐기 때문이다. 레인콤은 소닉블루를 도약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지, 계속해서 리오볼트로 제품을 팔 생각이 없었다. 이런 전략적 차이는 둘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없었다. 제품에 대한 컨셉에서 이견이 발생했다. 소닉블루는 계속해서 싼 제품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차이는 아이리버와 리오볼트의 결별 시점을 앞당기고 있었다. 레인콤은 소니 반열에 오르는 일류 브랜드를 갖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이미 그런 계획을 조금씩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양 사장은 소닉블루와의 결별을 각오했다. 그리고 아이리버 브랜드가 찍힌 슬림X를 들고 2002년 CES(세계가전박람회)에 제품을 들고 나갔다.



소닉블루가 미국에서 레인콤 제품을 리오볼트 브랜드로 판매하고 있을 때도 미국 유저들은 '리오' 사이트에 가지 않고 '아이리버' 사이트를 찾고 있었다. 유저들은 레인콤에서 나온 제품이라는 것과 아이리버 사이트에서 제품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이리버' 브랜드는 미국에서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다. 이제 레인콤과 소닉블루가 결별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슬림X 버전은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베스트바이를 뚫고 소니를 이기다: 레인콤은 소닉블루가 요구하는 행태로는 아이리버를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양덕준 사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002년 초, 서울은 월드컵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레인콤은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소닉블루와의 ODM 계약을 통해 리오볼트라는 브랜드로 해외로 수출되던 물량이 '올스톱' 됐기 때문이었다. 소닉블루를 대신할 새로운 매출처를 뚫어야 했다. 레인콤에는 이렇게 가다가는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레인콤이 소닉블루와의 ODM 계약을 포기하고 선택한 자체 브랜드 전략이 성공한 것은 미국 최대 양판점 베스트바이와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리버 브랜드가 실질적으로 힘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베스트바이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전 직원이 총력전을 펼친 끝에 레인콤의 첫 플래시메모리 타입제품인 '프리즘'을 8월 20일에 선적할 수 있었다. 물량은 계속해서 공장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운송되었다. 그 해 12월까지 12만 대가 팔려나갔다. 당초 10만 대 정도를 팔 것으로 예상했는데 공급물량이 모자랄 정도로 잘 팔렸다. 대성공이었다. 이익도 당초 예상을 크게 상회했다. 물량은 1년 동안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iFP-100 모델 프리즘은 베스트바이를 통해 전 세계 100만 개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로, 레인콤이 아이리버 브랜드를 글로벌화하는 기반이 된 제품이다. 이 모델이 소비자들의 인기를 끌면서 다른 거래처에서도 물건을 달라고 줄을 서기 시작했다.



프리즘으로 예상 밖의 대박을 터뜨린 베스트바이는 레인콤에 후속모델을 요구했다. 그 모델이 바로 iFP-300, 우주선 모양의 '크래프트'다. 이 모델은 프리즘보다 소비자들로부터 더 큰 인기를 얻어 150만 개 이상 팔려나갔다. 공장이 24시간 돌아갔고,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거래처들도 현금을 들고 물량을 공급받기 위해 모여들었다. 2002년 799억 원이던 매출이 2003년에는 2,259억 원으로 늘어났다. 영업이익이 540억 원에 달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규모이다. 이런 실적을 기반으로 2003년 12월, 레인콤은 코스닥시장에 상장했다. 첫날 공모가의 2배에서 시초가가 결정된 후 주가는 13만 5,000원까지 거침없이 올랐다.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평가액이 수억 원에 달했고, 컨테이너 박스가 오면 너도나도 달려나가 물건을 날랐다.



'Sorry Sony' 광고 카피가 실제 판매대에서 현실이 되었다. 처음에는 소니와의 비교 광고로 아이리버 제품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는데, 베스트바이 등 실제 판매현장에서 소니를 제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렇게 빨리 소니를 제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 '꿈이 이루어지듯', 꿈은 그렇게 레인콤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직원들은 "이제 못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에 가슴이 벅차왔다.



창의성, 자율성, 유연성을 지킨다

'아이리버의 성공신화'에는 자유로운 조직문화가 한몫을 했다. 레인콤은 경직된 조직이 아니었다. 대리가 사장실에 맘 놓고 들어갈 수 있었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면서 토론을 할 수 있는 문화였다. 임원들도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기보다는 직원들의 어려움을 보완해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였다. 누가 누구 위에 군림하고 강압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그것은 양덕준 사장의 조직운영 철학이기도 했다. 그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문화가 가능했다. 양덕준 사장의 자유로움에 대한 추구는 곧 개인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집단의 논리로 개인의 가치를 강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기업의 경쟁력은 바로 개개인의 창의성에 기반한다.



아이리버, 길을 잃다



혁신의 적은 관성이다

레인콤에게 2004년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2003년 놀라운 실적과 2003년 말 코스닥 상장으로 직원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주가의 급등과 성과급은 그들이 수년간 흘린 땀방울의 대가였다. 국내시장에서 시장점유율 50%를 넘어서며 독점적인 위치를 점했다. 아이리버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2004년에도 매출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2003년 매출 2,259억 원, 영업이익 540억 원을 올렸던 레인콤은 2004년 상반기에 매출 1,832억 원을 기록한다. 영업이익은 284억 원에 달했다. 놀랄 만한 성장세였다. 하지만 이익규모는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레인콤 직원들은 코스닥 상장으로 입사한 지 2년 이상 된 경우에는 대부분 수억 원씩 평가이익을 보고 있었다. 여기에다 2003년 실적에 대한 성과급이 지급되면서 직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직원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모든 직원들이 자신감에 불탔다. "우리는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분위기였다. 너무 강한 자신감 때문에 불안한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회사 누구도 이 같은 분위기에 초를 칠 수는 없었다. 되돌아보면 주변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양 사장도 불안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치고 올라왔는데 관성에 의해서라도 어느 정도 가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쉽게 내려가진 않을 테니 당분간은 그냥 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도 불타오르는 직원들의 자신감에 일부러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었다.



MP3 분야에서 레인콤은 이미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한 상태였다. 삼성전자조차도 저 멀리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설립한 지 5년 된 회사가 이룬 성과라고 보기에는 누구도 믿어지지 않을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레인콤은 새로운 제품을 계속해서 내놨다. 2004년 4월에 음악, 영화, 게임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휴대용 영상복합기를 출시했다. MP3업체에 안주하지 않고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선도기업으로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동영상이 가능한 휴대용 영상복합기의 시장이 MP3플레이어 시장의 2배에 달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복합기에 이어 내비게이션, 텔레메틱스 등이 탑재된 카오디오 시장에도 진출한다고 밝혔다.



배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편 시장을 감도는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삼성전자, LG전자, 소니 등 대기업들의 MP3 시장에 대한 공세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2004년 하반기부터 삼성전자가 MP3플레이어를 비롯한 디지털 오디오 사업부문에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아이팟을 앞세운 애플이 휴대성을 강화한 4GB 용량의 MP3플레이어 '아이팟 미니'를 국내에 출시하면서 경쟁이 가속화됐고,소니 역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한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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