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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마 리턴

롤프 헤르베르트 페터스 지음 | 브레인스토어


푸마 리턴

롤프 헤르베르트 페터스 지음

브레인스토어 / 2011년 9월 / 368쪽 / 15,000원



1. 다슬러 형제: 한 명문가의 성장과 몰락




형제가 함께

루돌프 다슬러는 1898년 4월 독일 서부에 있는 헤르겐초아우라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두 직공이었고 어머니는 세탁소를 운영했다. 형제자매로는 누나 마리아, 형 프리츠, 동생 아돌프가 있었다. 루돌프는 15세부터 신발 공장에서 신발 만드는 법을 배웠다. 호감을 주는 외모에 인기가 많았던 그는적응력이 뛰어나서 친구들에게 퓨마(아메리카 표범)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16세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후 도자기 공장과 가죽 도매상점에서 비즈니스 경험을 쌓았다. 한편 그의 동생 루돌프는 빵을 만드는 일을 하다가 19세 때 어머니가 하던 세탁소 자리에서 작은 신발 공장을 만들고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세일즈 전문가로 성장한 루돌프가 동생이 설립한 신발 공장의 판매와 경영을 맡으면서 형제가 힘을 합친 사업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1923년 루돌프는 사업 공동체를 정식 회사로 등록하고 스포츠화 개발과 제작에만 집중하기로 하였다. 형제는 운동화 바닥에 미끄럼을 방지해 주는 스터드를 박아 고정한 운동화를 개발했다. 새로운 운동화는 엄청난 호응을 받았고 독일 전체가 경제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928년 형제는 독일 육상 대표 팀 감독 요제프 바이처와 함께 러닝화를 개발했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 중 절반 이상의 이들의 상품에 깊은 신뢰를 보냈다. 선수들 사이에는 "다슬러 신발 = 승리의 신발"이라는 공식이 탄생했다. 이때부터 형제의 상품은 경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첨단 장비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1928년 루돌프는 여자친구 프리들과 결혼했고 첫째 아들 아르민 아돌프가 태어났다. 루돌프는 가문과 회사를 이을 후계자가 태어난 것에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으면서 다슬러 형제의 신발 사업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의 일상이 스포츠가 아닌 반 군대식 교육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축구화 생산량이 줄고 수출이 막힌 상태에서도 형제는 신발 종류를 늘려갔다. 그러다가 히틀러가 전쟁 준비를 하면서 독일 경제는 호황기에 접어들었고 스포츠 업계에도 호의적인 바람이 불었다. 군사적 미덕을 함양하는 데 스포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치 정권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유치했고, 히틀러는 엄청난 국민 세금을 스포츠에 쏟아 넣었다. 이는 형제의 공장에 폭발적인 매출로 돌아왔다. 다슬러 형제는 기업을 번창시키기 위해 나치의 늪에서 얌전하게 헤엄쳤다. 루돌프는 출세를 위해 자신의 카리스마를 십분 발휘했고, 동생 아돌프는 기술적으로 정교한 상품을 만들어 내고자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치명적인 사건

1939년 2차 대전이 시작되자 형제의 공장은 군수용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바뀌었다. 1940년에는 루돌프와 아돌프가 군대에 소집되었다. 아돌프는 생산과정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인정되어 3개월 만에 군사적 의무를 면제받았다. 반면 루돌프는 계속 군대에 복무하다가 1945년 1월 러시아군이 진격해오자 나치의 항복을 예상하고 탈주하였다. 그는 탈주범으로 체포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과거 나치에 가입하여 활동했던 것이 체포의 이유였다. 그는 1946년 친분이 있는 미국 신발 사업 관계자의 도움으로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풀려난 루돌프에게는 동생 아돌프가 군 복무를 면제받고 자기 대신 회사의 경영권을 가진 것이 큰 상처였다. 석방 이후 루돌프는 동생이 나치에 대한 무기 생산을 지원했다고 비방하는 보고를 탈나치화 위원회에 전달했다. 이는 형제간의 싸움으로 커졌고 결국 두 사람은 관계를 끊기에 이르렀다. 다슬러 형제의 분열은 반드시 나치 정권하에 생긴 형제간의 불신 때문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사실 형제의 분열은 훨씬 오래 전에 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1940년대 초에 루돌프가 동생의 부인인 캐테 다슬러와 금지된 관계를 맺은 일이 그것이다. 가족 간의 불화가 일어나면 이어지는 절차가 있다. 바로 재산 분할이다. 1948년 형제는 기업을 둘로 나누었다. 아돌프는 가족이 살던 빌라와 큰 공장을 차지했고, 루돌프는 1936년 사들인 아우라흐 강 상부 뷔르츠부르크가의 작은 공장을 차지했다. 아돌프는 회사이름을 아디다스로 바꾸었고, 루돌프는 '푸마 루돌프 다슬러 신발 공장'이라는 상호로 바꾸었다.

독일 한 여름밤의 꿈

홀로 서게 된 루돌프는 신들린 사람처럼 일에 몰두했다. 그는 해가 갈수록 고집스럽고 변덕스런 사람으로 변해갔다. 푸마는 일차적으로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생산했다. 처음에는 조깅화를 많이 생산했고 나중에는 예더만 슈즈(모두의 신발이라는 뜻)가 추가되었다. 한편 강 반대편에 있는 아디다스는 점핑부츠를 통해 큰 격차로 푸마를 앞서나가고 있었다. 아돌프가 형보다 한 단계 높은 기술적, 창의적 재능을 갖춘 데다 스포츠 관계자나 선수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온 덕분이었다. 아디다스는 이미 1950년부터 삼선 로고가 박힌 상품을 해외에 수출하고 있었다.

1951년 독일 축구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했던 헤르베르거가 루돌프에게 독일 국가대표팀과 푸마와의 파트너십을 중개하겠다면서 거액의 자문료를 지급해 줄 것을 요구했다. 루돌프는 이를 거절한 반면 동생 아돌프는 헤르베르거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이는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아디다스와 독일 축구 대표팀 파트너십의 기반이 되었다. 그 결과 1954년 독일 축구 대표팀이 스위스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머쥔 그 순간 푸마 축구화를 신은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월드컵 후원 전쟁에서 동생에게 쓰라린 패배를 맛본 루돌프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결국 1958년 스웨덴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 선수들의 발에 푸마 신발을 신기는 데 성공하였다. 브라질 팀에는 당시 17세였던 축구 황제 펠레도 있었다. 당시 브라질 선수들은 수제품으로 만든 자국 제품만을 선호했기 때문에 푸마 제품을 신을 생각이 없었다. 이에 푸마는 선수들에게 몇 백 달러씩 사례금을 쥐어주고는 그 신발 위에 폼 스트라이프를 새겨 넣는 데 성공하였다. 새로운 차원의 축구 경기 상업화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다.

루돌프는 아들 아르민이 회사에서 전문 경영인으로 자리를 잡자 1962년 아르민을 오스트리아로 보내 자회사를 설립하게 하였다. 아르민 옆에는 예쁘고 자신감 넘치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루돌프가 1956년 고용한 이레네 브라운이다. 루돌프는 그녀를 며느릿감으로 마음에 들어 했다. 실제로 아르민과 이레네 사이에는 로맨스가 싹텄고, 두 사람은 1964년 결혼식을 올렸다. 1962년 푸마 오스트리아에서 축구화 생산이 시작되었다. 초창기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사업이 번창하자 아르민은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날 준비를 하였다. 그는 푸마 오스트리아를 새로운 브랜드로 등록하고 고유 로고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신발에 캥거루 가죽이 아닌 말가죽을 사용하면서 '오스트리아 산악 말가죽을 특수 무두질하여 만든 제품'이라고 광고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는 산악 말이라는 품종 자체가 없다. 어쨌든 이 제품은 미국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한편 아르민에게는 게르트라는 이름의 동생이 있었다. 그는 군 복무 후에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27세에 아버지 회사에 입사했다. 루돌프는 게르트를 프랑스로 보내 푸마 프랑스를 설립하게 하였다. 게르트는 형을 따라 새로운 신발 개발에 나섰다. 6년 후 게르트는 프랑스 1부 리그 축구팀 3군데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막강한 경쟁 상대인 아돌프 다슬러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호르스트 다슬러가 그 지역에 아디다스를 이끌고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이룬 업적이었다.

스포츠 마케팅의 시작

50년대 들어 푸마는 화려한 발전을 이룩했다. 푸마는 폴리아마이드나 나일론으로 만든 축구화와 러닝화를 내세우며 세계 시장을 점령해갔다. 푸마는 발 냄새 억제 기능이 있는 안티 박테리아 슈즈를 개발하고 신발골도 축구화에 맞게 개조하였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폼 스트라이프를 도입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 푸마의 브랜드 로고가 되었다. 독일 프로축구 리그에서 루돌프의 지위는 상당했다. 하지만 아돌프는 언제나 루돌프보다 한 발 더 앞서 나갔다. 아디다스와 함께 국제 시장으로 진출한 것이다. 아돌프의 아들인 호르스트는 경기장에 나타나서 아디다스 제품을 선수들에게 나누어주고 선수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스포츠가 돈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루돌프는 로마 올림픽이 개최된 1960년이 되어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루돌프의 아들인 아르민의 경기장 출입이 잦아졌다. 1965년 포르투갈 축구 선수 에우제비오는 푸마 축구화를 신고 영국 월드컵에서 9골을 기록하면서 슈퍼 히어로로 부상했다. 월드컵이 끝난 후 그는 푸마와 함께 '에우제비오 킹' 컬렉션 개발에 참여했다. 이 축구화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스포츠용품에 손을 뻗지 않았다. 그들이 사는 것은 이미지였다. 이때부터 푸마의 컬트 마케팅이 시작되었다. 루돌프는 시대 흐름을 정확히 파악했고 흐름에 동참했다. 푸마는 축구황제 펠레와도 성공신화를 만들었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펠레는 푸마 축구화를 신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펠레의 이름을 따서 제작한 '킹 펠레' 축구화는 스포츠 시장에서 대히트를 기록했다.

스니커즈, 소리없는 아우성

1967년 6월 이란 국왕의 방문에 항의하는 독일 대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대학생들과 함께 거리에 나온 것은 청바지와 이름 없는 운동화 한 켤레였다. 이는 기득권에 대항하는 투쟁의 반획일주의자를 상징하는 유니폼이 되었다. 또한 경제 성장으로 아이들의 비만이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독일은 전 국민에게 스포츠를 권했다. 스포츠용품 업체들은 이러한 트렌드에 반응했고 푸마는 탄력성이 강한 '헬란카' 트레이닝복을 생산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을 6일 앞두고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이스라엘 올림픽 대표 숙소로 잠입하여 선수들을 살해하고 인질로 잡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는 놀라운 PR 이벤트가 되었다. 인질구출작전에서 경찰 저격수들이 선수로 위장을 하였는데 푸마 상품을 입은 저격수들의 모습이 전 세계 미디어에 비추어진 것이다. 1974년 독일은 월드컵에서 우승을 했지만 푸마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루돌프의 인생이 막을 내린 것이다. 그의 사망 이후 아르민이 45세의 나이에 푸마 신발 공장 루돌프 다슬러 합자법인의 지분 60%를 소유하여 경영권을 손에 쥐었고, 게르트는 부사장을 맡았다.

몸값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르민은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뛰었다. 바로 아디다스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 열렸을 당시 스포츠화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50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시장을 장악한 것은 아디다스였다. 푸마 역시 최상위권이었으나 시장 점유율은 높지 않았다. 미국의 경쟁 업체들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아디다스의 아돌프는 이제 선수 개인이 아닌 모든 참가팀에 아디다스 상품을 협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또한 그는 캐나다올림픽 조직위원회와 계약을 체결하고 모든 올림픽 관계자에게 아디다스 스포츠화와 의류를 입혔다.

삼촌의 이러한 행보에 아르민은 적잖이 놀랐지만, 곧 냉정함을 되찾고 개별적인 스타 선수 및 협회와 접촉하는 데 몰두했다. 하지만 푸마의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경쟁 업체들이 늘어나면서 스포츠화와 의류 가격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이에 아르민은 1977년 다수의 주요 공장을 해외로 옮겨 원가를 절감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르민은 브랜딩 개념을 알지 못했지만 어떻게 해야 돈 많은 사람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까지 푸마 상품을 이용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매출의 5~7%를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1980년대 들어 푸마는 계속 성장했고 매출 10억 마르크를 돌파했다.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했기 때문에 수익성에서도 호전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독일과 미국 시장에서 푸마는 아디다스보다 낮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만심으로 무장한 클럽

아르민이 사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회사 건물 뒤뜰에서 회사 건물 관리인의 아들인 13살 소년 로타어 마테우스가 매일 축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가 연습을 할 때마다 아르민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다른 곳에서 연습하라고 꾸지람을 했다. 축구 재능이 비상했던 로타어는 19살에 푸마와 계약을 맺었고 20세에 독일 국가대표팀에 들어갔다. 아르민은 푸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그를 친아들처럼 대했다. 아르민은 1984년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테니스 라켓을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테니스는 큰 인기를 끄는 스포츠였고, 세기의 테니스 스타인 2명의 독일 선수가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보리스 베커와 슈테피 그라프이다. 1985년 푸마는 세계 랭킹 100위에 불과했던 17세 소년 베커와 계약을 했다. 6개월 후 베커는 윔블던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그의 손에 든 테니스 라켓에는 푸마 엠블렘이 새겨져 있었다.

나락으로

1985년 푸마 경영진은 투자 활성화를 위해 회사를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독일 전역이 보리스 베커라는 마약에 취하면서 푸마 주식에 대한 투자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투자자들은 연간 20~30%에 달하는 매출 증가를 놀랍게 여겼다. 그러나 아르민은 지난 몇 년간 저가 전략으로 시장점유율을 확대했기 때문에 푸마의 수익성은 높지 않았다. 회사가 상장된 후 아르민은 CEO 자리에서 물러나고 은행장 출신인 빈첸츠 그로트가가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그로트가가 사장 자리에 앉자 푸마 본사에는 갑자기 회계사와 애널리스트가 붐비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회사를 경영했고 주주들에게 회사 상황을 알리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여기에 푸마의 미국 사업 쪽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미국 시장에서 무너진 것은 아디다스도 마찬가지였다. 푸마와 아디다스는 나이키와 리복에 대해 소비자들이 보여준 열광을 과소 평가했다. 리복은 당시 미국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던 에어로빅과 피트니스 운동화에 집중했다. 나이키는 상품이 아니라 쿨(Cool)한 인생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을 팔았다. 스포츠화의 가격이 성능과 비교해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회사가 위기에 빠지자 아르민과 게르트는 자신들의 지분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회사에 쏟아부었다. 1987년 그들은 경영권을 다시 잡았지만 푸마에 대한 외부의 신뢰는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혼란

다슬러 형제는 대출의 대가로 도이체 방크 대표에게 푸마의 지배권을 다시 넘겨주게 되었다. 도이체방크는 푸마의 주채권자로서 회사를 장악하고 경영을 시작했다. 은행이 경영권을 쥐고 나서 푸마는 6년 동안 유례없는 하락세를 기록했다. 회사는 파산을 향해 내달렸다. 다슬러 형제는 경영권을 잃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 틈을 타서 스웨덴의 스포츠용품 회사인 아리트모스가 푸마에 대한 지분을 80%까지 늘렸다. 아르민은 그의 사무실에서 푸마의 몰락을 지켜보았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미국 사업과 금융기관과의 협상은 삶의 기쁨을 앗아갔다. 암에 걸린 그는 1990년 10월 61세의 나이에 자신의 집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미스터 푸마의 죽음이 알려지자 푸마 본사에는 충격의 파도가 밀려왔다. 편협한 경영 방식으로 기업을 파멸의 끝자락으로 몰아넣었던 그의 과거는 모두의 기억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2. 푸마의 귀환



모범생

1990년 요헨 차이츠라는 26세의 젊은 청년이 푸마에 입사했다. 그는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했고 미국 기업 콜게이트에서 마케팅 업무를 한 경력이 있었다. 당시 푸마의 경영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29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푸마의 공식 마케팅 책임자가 되었다. 책임자가 되고 나서 그는 회사 로고를 통일하고 '로고를 망가뜨리지 마시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그는 로고 색깔을 빨간색으로 바꾸고 직원들에게 매장에서 판매를 촉진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는 상품진열대부터 포스터 액자에 이르는 매장 내 모든 요소를 '푸마스럽게' 꾸미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는 마케팅 전략도 세웠다. 하지만 소비자의 감정적 측면을 공격하는 차이츠의 마케팅은 채권단인 은행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당시의 푸마의 경영 상황은 심각했다. 사업성과는 부끄러운 수준이었고 푸마는 시대 흐름과 맞지 않는 고루한 상품 브랜드로 전락했다. 대주주인 아리트모스까지 경영난에 시달리면서 악재가 더해졌다. 결국 아리트모스는 스웨덴 회사인 프로벤투스에게 인수합병되었다. 1993년 프로벤투스는 요헨 차이츠의 능력을 높이 사 그를 푸마의 새로운 CEO로 임명했다. 푸마라는 기업 역사에 하나의 획이 그어졌다. 역사상 처음으로 주주들이 노련한 기업 리더가 아닌 풋내기에게 구조조정을 맡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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