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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No 5

틸라 마쩨오 지음 | 미래의창
틸라 마쩨오 지음

미래의창 / 2011년 9월 / 344쪽 / 15,000원



PART 1. 샤넬 No. 5 이전의 코코샤넬



오바진, 그리고 향기에 담긴 비밀암호


지난 한 세기 동안, 샤넬 No. 5의 향기는 우리에게 화려하고 감각적인 세상으로 유혹하는 속삭임을 보내왔다. 그것은 우아한 방종의 조용한 바스락거림이자,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세계로부터 불어오는 향기이다. 1온스에 거의 400달러에 달하는 가격 때문일까? 샤넬 No. 5가 오직 '럭셔리'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샤넬 No. 5가 곧 사치를 상징한다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은 쉽게 지울 수 없다. 사실 이 유명한 향수 이야기는, 단 하나의 향수가 '광란의 1920년대, 미국과 서유럽에서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다이나믹한 변화가 일어난 1920년대를 일컫는다'에 역동적으로 변하는 세상을 아무런 근심 없이 살아가던 젊은 부자들을 어떻게 사로잡았는가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이 세상에 전재하는 상상력과 욕망을 어떻게 지배해 왔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샤넬 No. 5와 그것을 창조한 사람의 유년기는 우리가 이 향수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모든 이미지들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다. 샤넬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향수의 이미지와 그 역사가 비롯된 기원 사이에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샤넬 No. 5는 모든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감정들을 불러일으키지만, 정작 그런 감정들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장소에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을 놀랍게 한다.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을 담고 있는 이 향수는 사실 비참한 가난과, 폐부를 찌르는 것과 같은 상실의 아픔 속에서 탄생했다.

가브리엘 샤넬은 프랑스 남서부 깊숙한 시골 태생이었다. 일과 출산으로 지쳐버린 그녀의 어머니 잔느 샤넬은 천천히 그녀를 좀먹어 온 결핵으로 1895년에 생을 마감했다. 가브리엘의 아버지 알베르는 떠돌이 행상인이었는데, 아마도 그는 다섯 명의 어린 자녀들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몰랐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알베르는 아무런 말없이 세 자매를 마차에 싣고서 코레즈 시골 언덕 마을에 있는 '오바진Aubazine'이라는 이름의 수도원에 그들을 버렸다. 후일 코코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소녀가 자라난 곳이 바로 이 고아원이었다. 어린시절에 버림받은 아픔에서 오는 깊은 상실감과 상처는 코코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아로새겨져 샤넬 No. 5의 이야기에 얽힌 테마가 되었다.

오바진은 코코 샤넬의 순수함과 미니멀리즘에 대한 강박적인 미학을 형성하는 핵심이었다. 오바진에서는 숫자 '5'를 항상 특별하게 여겼다.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적인 운명의 숫자였다. 단지 수도원을 설립한 수도승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라고 할지라도, 이것들의 중심에는 숫자 '5' 혹은 오각형이 있었다. 고대로부터 이어진 카톨릭 분파에서 숫자 '5'는 사물이 지닌 본질의 순수함과 완벽함을 구현한 특별한 숫자, 즉 숫자의 정수였다. 이는 또한 흙, 물, 바람과 불로 이루어진 물질적 세계에서, 영기靈氣 혹은 정신과 같이 물질적이지 않은 어떤 신비롭고 손댈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고대 철학에서 말하는 제5원소를 오바진 시절의 그녀는 숫자 5가 특히 여성에 관한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오바진의 고아 소녀들은 세상을 버리고 수녀가 될 것이 아니라면 18살에 수도원을 떠나야 했다. 이 모험심 강하고 놀기 좋아하는 젊은 여성에게 종교적 생활이 어울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런 환상을 품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대도시를 꿈꿨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오바진을 떠난, 아직 코코 샤넬이 아니었던 소녀는 스스로 향수를 만들게 되리라는 생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패션 디자이너가 될 것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여러 가지 향의 기본적인 목록들과 나중에 그녀를 정의하게 되는 숫자와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품은 채 이 작은 마을을 떠났다.

어여쁜 조향사

20세기 초 프랑스 상류사회는 아직 암호와 종교의식의 세계였고, 시골 촌부의 자식이었던 소녀 코코 샤넬은 제9보병연대의 장교였던 에띠엔느 발상과 지내면서 그 세계에서 완벽히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이 암호들 중에서 그녀가 가장 빨리 이해한 것은, 바로 향기만큼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존경 받는 명망가와 반대쪽 세계 사이에는 미묘한 경계선이 있었고, 심지어는 다양한 종류와 다양한 수준의 동거녀들이 있었다. 향수는 그들을 구별해내는 근본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향수는 역사 초기부터 여성의 관능미와 연관을 맺어 왔고, 코코 샤넬은 에띠엔느의 동거녀로 사는 동안 여성이 관능미를 드러내는 데 있어 향수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배웠다.

머스크, 재스민, 수선화나 용연향을 베이스로 하는 농밀하고 나른한 향의 향수들은 19세기에 귀족들 사이에서 대유행했다. 1810년대 조세핀 황후 역시 나폴레옹을 깨우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 내의 모든 것에서 동물적인 머스크(Musk, 사향)의 은밀한 향이 나도록 만들었다. 20세기가 밝아오던 시기에는 향이 나타내는 의미가 명료해졌다. 이런 종류의 향들은 단지 한 가지와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매춘부들이나 헤픈 여인들에게서 나는 향기'였다. 사람들은 '무거운 동물 향을 기반으로 한 …… 또는 재스민 향기'는 '매춘이나 정부들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고 여겼다. '교양과 사회적 신분'을 갖춘 여성들은 정원에서 재배하는 꽃 한 가지에서 아로마를 추출한 '아주 단순한 꽃 향'을 뿌렸다.

언젠가 코코 샤넬은 여인을 두 종류로 규정하는 보수적인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모든 여성들이 뿌릴 수 있는 완벽한 향수를 창조할 것이다. 그것은 현대적이고 우아하며 섹시함을 규정할 수 있는 향이 될 것이다. 언젠가……,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배신의 향기

코코 샤넬이 이 향수를 처음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렀다. 아마도 1911년쯤으로, 당시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에띠엔느의 친구 아더 '보이' 카펠로 영국 출신의 부호)의 정부가 되어 있었다. 에띠엔느는 코코의 사업이 기분 전환용 오락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러나 이듬해 겨울, 코코의 사업이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코코가 사업 확장을 위해 돈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에띠엔느는 이를 거절했다. 전직 쇼걸인 애인을 두었다는 것은 자극적이고 보헤미안적인 가십거리였지만,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정부가 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적어도 그가 속한 프랑스 상류사회에서는 그랬다.

코코 샤넬이 1911년 여름에 향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나름의 근거가 있는 이야기이다. 향수는 순간을 이야기한다. 그해 6월, 파리 전체가 향기에 대한 이야기로 들썩였다. 향수가 나폴레옹의 먼 후예인 코르시카 출신의 젊은 기업가 프랑수아 코티를 이미 프랑스 최고 부자 중 하나로 만들어 준 것이다. 그의 풍요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가십들이 연일 신문을 가득 채웠다. 그렇지만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가장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였던 폴 푸아레Paul Poiret가 같은 해 여름 새로운 향수를 출시하면서 도시 전체를 놀라게 한 것이다. 이로써 폴 푸아레는 꾸뛰리에(맞춤복 디자이너)로서는 역사상 최초로 시그니처(개인적인, 개성적인) 향수를 만든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은 향수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한쪽으로 미뤄놓고, 대신 보이 카펠과의 로맨스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나 1919년, 코코와 거의 10년간 뜨겁고 강렬한 사랑을 나눠온 보이 카펠이 그녀와는 절대 결혼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속내를 비친 이후로 코코는 고통과 혼란에 몹시도 괴로워하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유명하다는 사실만으로 코코가 상류층에 어울리는 고귀한 존재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코코가 속하고자 했던 사회는, 그 어떤 것이라도 유명하다는 사실만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늦은 밤, 자동차 사고가 일어났다. 아마도 샴페인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자동차 타이어가 터진 줄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12월 22일, 생 라파엘에서 칸느로 가는 길에서, 보이 카펠은 살아남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코코가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큰 상처였다. 그리고 그녀는 향수에 몰두했다.

현대 전설의 탄생

모든 전설에는 시작이 있으며, 샤넬 No. 5의 탄생 스토리는 그 어떤 전설보다 더 매혹적이고 복잡미묘하다. 1920년 여름에 바야흐로 전설이 시작되면서 왕자(러시아의 드미트리 왕자)와 조향사(에르네스트 보), 그리고 패션 디자이너(코코 샤넬)의 만남은 다가올 새로운 시대의 향수 역사, 그리고 럭셔리의 역사를 바꾸었다. 그들의 조합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고 운도 기막히게 잘 따랐다. 그해 여름, 코코 샤넬은 에르네스트 보에게 그녀의 상상 속에 있는 시그니처 향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바로 유혹적인 신선함을 담아낸 향수였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선뜻 승낙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당시 꾸뛰리에를 위해 향수를 만드는 것이 그리 인정받을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 코코 샤넬이 시그니처 향수를 출시한다면 향수 산업을 개척하는 역사상 세 번째 디자이너가 될 것이었다. 향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얻은 오바진 시절부터, 그 감각을 다듬으며 향수 산업의 기초부터 모든 것을 공부하는 데 바친 시간을 보답받을 때가 온 것이다. 실험실에서 며칠 동안 코코와 함께 향수의 콘셉트에 대해 고민한 에르네스트는, 코코가 자신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움직였다. 코코의 진심에 설득된 에르네스트는 그 임무를 수락했다. 두 사람이 상상 속에서 함께 만들어 낸 향을 디자인하기 위해, 그는 몇 달이고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창조해 낸 향수들을 시향하기 위해 코코가 실험실에 초대받는 날이 왔다.

그날 코코 샤넬은 저울, 비커, 약병들에 가득 둘러싸인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셔 조향 실험실의 향기를 맡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중 한 가지 향을 맡았을 때, 그녀의 감각들 중 무언가가 그 향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코코 샤넬은 마침내 미소지으며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넘버 5." 이윽고 그녀는 이 향기에 대해 말했다. "네, 이것이 바로 내가 기다렸던 거예요. 바로 이 향수예요. 여인의 향을 간직한, 여자의 향수죠."

PART 2. 사랑과 전쟁



No. 5의 탄생


코코 샤넬과 에르네스트 보가 출시할 향수를 선택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패션계의 이목을 끌어오는 일이었다. 칸느에 있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시그니처 향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파티를 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을까? 코코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향수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일지 굉장히 궁금해 하면서, 자신의 테이블 주위에 향수 샘플을 살짝 뿌려 놓았던 것인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사람들은 바로 샤넬 No. 5의 향기에 도취되었다. 저녁을 먹으러 레스토랑에 온 행운의 주인공들은 지나던 길을 멈추고 어디선가 풍겨오는 이 향기를 너무도 궁금해 했다. "이 향기가 무엇인가요?" 이에 대해 코코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테이블 옆을 지나가던 모든 여자들이 멈춰 서서 공기에 배인 향을 맡았어요. 우리는 모르는 체했죠."

게릴라적으로 샤넬 No. 5를 출시한 이 아이디어는 당시 향수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프랑수아 코티의 전략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1900년대 초, 코티는 막 개발한 라 로즈 자끄미노를 팔기 위해 파리의 유명 백화점 레 그랑 마가장의 매니저 앙리 드 비유므쌍을 설득하려고 비슷한 수법을 사용했다. 실수로 향수를 바닥에 떨어뜨리게 해 번잡한 매장 한복판에 그 향기가 한껏 풍기게 한 것이었다. 라 로즈 자끄미노의 향기를 맡은 고객들은 마법에 홀린 듯 향수를 구매해 갔고, 코티는 자신의 향수를 처음으로 백화점을 통해 유통할 수 있게 되었다. 코코 샤넬은 향수로 성공해 세계적인 갑부가 된 거물의 성공기에서 한 페이지를 빌려온 것이었다.

명성을 지닌 향기

코코가 이 다음에 한 행동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샤넬 No. 5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샤넬 No. 5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처분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정은 이후 그녀의 삶을 크게 뒤바꿔 놓았고, 그녀 자신과 그 전설적인 제품이 서로 점점 더 얽혀 들어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면적인 관계야 어찌되었든, 코코 샤넬은 통찰력 있는 사업가로서 가장 현실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에르네스트 보는 그리스에 연구실을 갖고 있었지만 제조업자는 아니었기에 향수를 양산할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제조 설비를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당시만 해도 패션 디자이너를 위한 시그니처 향수를 만드는 것은 굉장히 선구적인 기획이었기에 에르네스트는 코코 샤넬을 위해 샤넬 No. 5를 딱 100병만 생산했던 것이다.

1923년 봄, 상류층의 사교 모임 장소로 애용되던 도빌의 경마장에서 20세기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기업간 미팅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코코 샤넬과 세계 최대 향수 제조, 유통 회사 중 한 곳의 소유주인 피에르와 폴 베르트하이머 형제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이 협상을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너무도 간단하게 합의되었다. 코코 샤넬은 그녀의 향수를 제조해 세상에 판매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기에 유통 과정에 대한 권한은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코코 샤넬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하다면 회사를 만드세요. 하지만 나는 당신들의 사업에 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내 권리를 이양하고 주식 지분 10%에 만족하겠어요. 하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내가 결정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곧 그녀가 주도하는 흥정이었다.

미니멀리즘 마케팅

1924년, 베르트하이머 형제는 소액 주주인 코코 샤넬과 함께 '레 파르팡 샤넬'을 창립하면서 샤넬 No. 5의 국제적인 유통망을 출범시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자 했다. 이 모든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향수가 되기 위한 샤넬 No. 5의 변화는 광대한 미국 시장의 개방과 함께 일어날 것이었다. 1920년대의 미국은, 역사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역사상 소비할 수 있는 최고의 잉여 가치가 여성에게 주어진" 시대였다. 에르네스트 보를 향수 부서의 책임자로 고용한 '레 파르팡 샤넬'의 목표는 샤넬 No. 5를 문화의 주류로 만드는 것이었고, 《보그》와 같은 패션지를 읽고 파리에서 전해 온 스커트 패턴을 따라하는 여성들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코코 샤넬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매혹적인 디자인의 병 모양을 일찌감치 결정하고 있었다. 코코 샤넬은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아름다움은 절제에 있다." 샤넬 No. 5의 병 모양은 추억과 도전의 발현이었다. 병 모양을 어떻게 만들지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코코 샤넬 이전의 대부분의 향수병들은 병 안의 향수만큼이나 장식적이고 꽃을 많이 사용해 야단스러운 색상과 디자인으로 한껏 멋을 부리며 장식되었다. 하지만 코코가 원했던 것은 단정한 선의 느낌을 살린 또렷하고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코코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세세한 것들에 대해 주의를 놓치지 않았다. 향수에 대해 공부하면서 경쟁자가 될 회사들을 연구한 그녀는 시류를 잘 파악하는 재능을 발휘해 당시 업계에서 새롭게 떠오르던 세련미를 반영한 디자인의 병을 택했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볼 때 샤넬 No. 5의 업적은, 그 패키징이 전체적으로 혁명적이었다기보다는 아방가르드적이되 좀 더 무난해서 사람들이 부담감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요소를 추가했다는 것이다. No. 5의 하나의 상징이 된 병의 디자인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어쩌면, 오히려 수년에 걸쳐 변화를 겪으며 이 병이 유명해졌을 수도 있다. 샤넬 No. 5에 사용된 제일 초기의 병은 오늘날 럭셔리 세계에서 가장 알아보기 쉬운 아이콘 중 하나로 각인된 현재의 모습과는 조금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의 디자인이 등장한 것은 1924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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