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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3.0 이야기

이채윤 지음 | 북오션


삼성전자 3.0 이야기

이채윤 지음

북오션 / 2011년 3월 / 312쪽 / 15,000원



1장 삼성전자와 반도체 신화



창업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은 1936년 마산에서 정미소를 차리면서 사업경험을 쌓기 시작한다. 그는 식산은행에서 거액을 대출받아 부동산 회사와 운수회사를 차렸다가 중일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가 삼성이라는 대기업을 일으키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첫 사업에 실패한 그는 1938년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삼성그룹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사업의 첫 발을 내디뎠다. 무역업으로 기반을 닦은 그는 제분업, 운수업, 부동산업, 정미업, 양조업 분야로 영역을 넓히면서 사업을 확장했다.

한국전쟁 동안 삼성은 설탕, 비료, 종이, 양모, 나일론, 의약품 등을 수입하고 일본과 동남아에 고철, 오징어, 쌀을 수출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훗날 삼성이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있게 해 준 부의 기반이 다져지기 시작한 것이다. 1953년 휴전이 되자 삼성은 산업자본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한 것이다. 물자가 부족했던 그 시절에 삼성 공장에서 만든 물건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이병철은 한국 최고 부자 자리에 올라서면서 최초로 재벌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후 삼성은 천일증권, 한국타이어, 동일방적을 인수하면서 한국 제일의 재벌로 입지를 굳혔다.

당시 이병철은 그 유명한 도쿄구상을 통해 일본의 앞서가는 기업들을 벤치마킹하면서 삼성을 재계 1위의 기업을 이끌었다. 그는 1959년부터 해마다 연말연시를 일본에서 지내면서 일본 언론이 특별 기획한 경제전망 프로그램을 보면서 사업구상을 정리하곤 했다. 일본의 공업화는 이병철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벤치마킹의 교과서였다. 그는 당시 앞서가는 일본 기업의 노하우를 자기 나름대로 소화해 냈고,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렇게 해서 선정된 업종이 훗날 삼성의 주력 기업이 된 매스컴, 보험, 전자, 중공업, 석유화학 등이었다.

1960년대 이병철은 경공업 중심으로는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분야로 진출을 모색했다. 1968년 그는 신규 유망 종목으로 전자 산업을 선택한 뒤 미국, 일본 전자 업계와의 제휴를 모색했다. "전자공업은 앞으로의 성장 분야이다. 지금 미국이 최첨단을 가고 있지만 삼성도 여기에 나서고 싶다." 1969년 이병철은 삼성전자를 설립했고, 이후 삼성은 라디오, TV에서부터 반도체, 컴퓨터 등의 첨단산업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중화학 공업과 방위산업 등에도 발 빠른 행보를 계속하면서 삼성의 세계화를 위해 진력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삼성전자는 1969년 자본금 3억 3천만 원, 직원 36명으로 시작되었다. 설립 당시 전자 산업에 대한 기술은 전무한 상태였다. 삼성전자는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핵심 부품을 전량 일본에서 조달하여 조립만 하는 형태로 제품을 생산했으며, 제품과 품질 모두 열세에 있었다. 그렇다면 삼성의 명운을 가른 반도체 투자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삼성의 반도체 산업은 이병철의 도쿄 구상에서 나온 작품이 아니라 이건희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이건희는 1973년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자원이 없는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건희는 당시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회사를 자신의 사재를 털어 인수하고 삼성반도체를 설립한다. 이것이 삼성반도체 사업의 씨앗이 되었다.

하지만 인수한 반도체 공장은 말이 반도체 공장이지 트랜지스터 웨이퍼를 겨우 생산할 정도의 조악한 시설을 갖고 있었다. 이건희는 공장 규모를 키워 일본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반도체 회사로 만들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은 장치산업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사업을 하려면 4천억 원의 투자가 필요했다. 당시 삼성그룹 전체 시설 투자 규모가 연 8천억 원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투자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30년 전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밝게 전망하는 사람은 삼성 안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병철도 아들이 반도체 얘기를 꺼내면 핀잔을 주었다. "그 돈이면 TV를 몇 백만 대나 더 만들 수 있는데 그 쪼그만 것 만드는데 쓰겠다는 거냐?" 하지만 이건희는 끊임없이 미래 산업의 변화상을 설명하면서 아버지에게 선진 감각을 불어넣었다. 1979년 이병철은 반도체 사업을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당시 삼성전자 가전, TV 생산담당이었던 김광호 이사를 반도체 사업부로 보내서 사업을 정상화시키라는 특명을 내렸다. 김광호는 삼성반도체를 삼성전자에 인수 합병시키는 한편 시계 칩 시장을 집중 공략하여 흑자 회사로 변신시켰다.

반도체 사업 진출에 있어 두 번째 결단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이병철은 아들의 성화로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으나 곧 그 사업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다. 당시 삼성이 반도체에 사운을 건 투자를 하기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선진국과의 기술격차, 막대한 투자 재원 조달, 고급 기술 인력의 확보, 불투명한 시장 전망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조건이 없었다. 그러나 이병철은 반도체 산업을 포기하면 삼성이 첨단 기술을 보유한 일등 기업이 되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은 선진국의 길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신념에서 운명을 건 대 결단을 내렸다.

1983년 2월 이병철은 도쿄 선언을 통해 64K D램 기술 개발 착수를 선언했다. 그러자 일본과 미국의 첨단 기술 회사들은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병철은 반도체 사업을 진두지휘하면서 한국 반도체의 신화를 이끌어 내었다. 당시 삼성은 기흥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면서 설계와 속도를 병행하는 속전속결 전략을 펼쳤다. 그리하여 1년 반 걸리는 공사를 6개월 만에 완공했고 제품 생산을 2년 단축했다. 반도체 기술이 전무한 회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삼성전자는 공장을 건설하면서 가장 똑똑한 엔지니어들로 팀을 짜서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기술 파견을 보냈다. 엔지니어들은 기본적인 반도체 공정 교육만을 받을 수 있었고,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첨단기술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퇴근 후에 숙소에 모여앉아 그날 배운 기술을 토론하고, 낮에 사진 찍듯이 열심히 살펴본 마이크론의 반도체 라인들을 조합하여 그림으로 그려내고 실시간으로 기흥공장에 도면을 만들어 넘겼다. 기흥에서는 이 도면을 받아 반도체 라인을 하나씩 만들면서 최첨단 반도체 장비들을 구입해서 설치했다. 이것이 삼성전자가 경쟁자들이 2년 넘게 지은 공장을 6개월 만에 만들어낸 비밀이다. 이렇게 전력투구한 결과 삼성전자는 64K D램 개발 착수를 발표한 지 10개월 만에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반도체 신화

삼성의 사운을 건 반도체 사업은 이병철의 생전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삼성은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후 13년 동안 연속 적자를 내야만 했다. 그런데 수익에 민감했던 이병철은 반도체 사업의 적자에는 관대했다. 반도체 산업만이 첨단 산업을 꽃 피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묘하게도 삼성반도체는 이병철이 작고한 다음 해인 1988년에 이르러서야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건희의 입지를 공고히 굳히고, 그가 선친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룹 총수의 자질을 검증받게 해 주었다. 1988년 3천억의 경이적인 흑자를 기록한 삼성은 1992년 세계 메모리 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메모리에서 벌어들인 돈은 삼성전자가 향후 LCD, 휴대전화 시장을 키울 든든한 자금이 되었고, 이러한 투자가 빛을 발해 결국 오늘날 세계 1위 IT 기업 탄생이라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모든 사업의 성공에는 선견지명과 운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지금 삼성이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플래시 메모리는 한 천재의 전문적 안목과 직관력, 그리고 운이 따라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1988년 당시 삼성전자 상무 황창규는 매주 월요일 열리는 경영위원회에서 낸드(Nand) 플래시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래시 메모리는 노어(Nor)와 낸드(Nand)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당시는 인텔이 노어 방식을 일찍 개발해서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낸드 방식은 개발 초기 단계에 있었다. 노어 플래시는 읽기 속도가 빨라서 소량의 핵심 데이터를 저장하는데 많이 사용되었고, 낸드 플래시는 좁은 면적에 셀을 수직으로 배열할 수 있어서 용량을 늘리기 쉽지만 속도가 다소 느렸다 그러나 황창규는 낸드 플래시의 개발 가능성과 시장 확대를 내다보고 있었다. 낸드플래시가 휴대용 정보기기에 적합한 제품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의 예측대로 1999년 이후 플래시메모리 시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삼성은 이 분야에 재빨리 기술 개발에 나서 1998년 128메가, 1999년 256메가, 2000년 526메가 제품을 연이어 선보였다. 삼성이 빨리 성장하자 2001년 도시바가 삼성에 낸드형 플래시 메모리 합작 개발을 제안했다. 당시 도시바는 낸드 시장을 45% 점유한 선두 업체였다. 합작을 제의한 배경은 삼성의 자금을 활용하는 동시에 삼성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미래 경쟁자를 사전에 제어하겠다는 포석이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솔깃한 제안이었으나 황창규는 독자개발을 주장하며 이건희가 도시바의 제안을 거절하도록 만든다. "지금은 도시바에 비해 기술 수준이 조금 뒤지지만 1년 안에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애플의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각종 MP3 기기나 휴대 장치에 없어서는 안 될 부품으로 자리 잡은 삼성의 낸드 플래시 메모리가 태어난 것이다. 천재적 엔지니어와 선견력을 가진 오너의 결단이 반도체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순간이었다. 그 후 삼성은 도시바의 견제를 완전히 따돌리고 낸드 플래시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D램 신화에 이은 플래시 메모리 신화의 시작이다.

2장 삼성전자의 현주소



후계자 이건희

이건희 체제로 들어서면서 삼성전자는 반도체 분야 세계 1위로 도약한 후 LCD, 휴대 전화 등 20여개 품목에서 세계 1등 제품을 만들어 냈다. 삼성전자가 이 같은 실적을 올리기까지는 삼성호의 키를 이어 받은 새로운 선장 이건희의 리더십이 필요했다. 이건희는 삼성호의 키를 물려받기까지 아버지에게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사람에 대한 공부를 가장 많이 해라", "말을 삼가고 반복해 캐묻고 경청하라.", "검을 들되, 휘두르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라." 등의 가르침을 남겼다. 이건희가 훗날 시대를 앞서가는 경구를 말하고, 시대를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공부와 정신적 단련을 했기 때문이다. 이병철은 경영 일선에 이건희를 동반하고 다니면서 늘 그 자리에게 '직접 해보라'며 많은 일을 주문했다. 하지만 그 어떤 일도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건희는 "어느덧 현장을 통해 경영을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아버지의 엄격하면서도 독특한 교육은 이건희에게 삼성그룹을 지금의 재계 1위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1988년 46세의 나이에 삼성호를 물려받은 이건희는 삼성이 국내 제일의 기업이지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 2의 창업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지만 50년 동안 굳어진 삼성의 체질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삼성이 3류 기업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던 이건희는 1993년 LA 시내의 가전제품 매장을 둘러보다가 아연실색했다. 매장 중심에는 GE, 월풀, 소니 등 세계적 브랜드의 상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삼성 제품은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이다. 이건희는 삼성의 현 주소를 거기서 읽었다.

그는 삼성전자 사장단을 불러들여 LA에서 '전자부품 수출품 현지 비교평가 회의'를 열었다. 그는 사장단이 보는 앞에서 삼성제품과 경쟁사 제품을 하나하나 분해하면서 제품의 기능과 부품들의 차이점을 지적해 나갔다. 그 결과 삼성 제품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도출되었고 사장단은 이건희의 지적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삼성은 지난 1986년에 망한 회사입니다. 지금은 잘해보자고 할 때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때입니다. 2등 정신을 버리십시오. 세계 제일이 아니면 앞으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건희는 어떻게 전자제품을 하나하나 분해하면서 제품의 기능과 부품들의 차이점을 지적할 수 있었을까? 그는 어려서부터 직접 전자제품을 분해하고 조립해보는 취미를 가진 덕분에 오디오, VTR, 심지어 자동차까지 조립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세계 어느 경영자보다 과학 기술을 중시하는 사람이고, 엔지니어 정신에 투철한 경영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회장으로 취임한 이래 삼성전자는 자연스럽게 엔지니어 CEO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그 후 삼성전자는 강진구, 김광호, 윤종용으로 이어지는 테크노 CEO들의 활약으로 반도체, 휴대전화, LCD로 이어지는 월드베스트 상품을 만들어내 세계 초일류 기업의 대열에 들어가게 된다.

이건희 식 신경영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켄벤스키 호텔에 난데없이 200명의 삼성 경영진이 몰려드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비상경영회의장에 비장한 모습으로 이건희가 등장하자 참석자들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이건희는 경영진에게 ‘신경영 선언’을 하고 ‘질(質) 경영’에 대한 그의 경영 철학을 설파하며 열변을 토했다. "21세기에는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나부터 변하자’,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 ‘양을 버리고 질 위주로 가자’는 취지의 이 신경영 선언은 삼성조직 전체에 대한 대폭적 수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의 신경영 선언은 삼성인들이 국내 일등에 만족하며 희희낙락하던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일깨우는 새로운 비전 제시였다. 이는 곧 삼성을 철저하게 변혁시켰다. 그는 단순한 비전 제시에 그치지 않고 숨 쉴 틈 없이 가시적 실행조치를 내렸다. 7시에 출근하고 4시에 퇴근하는 ‘7.4제’, 불량품이 나올 경우 라인을 세우는 ‘라인스톱제도’ 등 새로운 규범이 삼성인들을 강타했다. 이건희는 신경영의 핵심 키워드를 ‘질을 높이는 경영’으로 잡았고, 질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불량품이 나올 경우 몇 개월이 걸리더라도 라인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신경영 선언 당시 그가 쏟아낸 말들은 ‘이건희 회장 신드롬’이라 불리며 우리나라 경제계 전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세계 일등 기업 벤치마킹에 들어갔다. 취약점을 보강하려면 일등에게 배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성은 일본과 미국의 선진 기업들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확정하고 산업 부문별 벤치마킹과 경영 기법별 벤치마킹에 나섰다. 이어 삼성은 대대적인 내부정비에 들어가서 1993년 그룹 창립 이래 최대인 299명의 임원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이 조치는 조직 전체에 개혁 분위기를 확고하게 심어주었다.

이건희는 신경영 정착을 위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재를 뽑아야 하고,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성과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상한다는 ‘인재, 성과 중심 경영’을 신경영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또한 이건희는 삼성 제품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삼성의 기술 수준을 파악한 후, 이를 세계 초우량 기업의 수준과 비교해 격차를 측정하고, 그 격차를 조기에 축소하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았다. 수천 명의 임원과 엔지니어들이 세계 각지를 돌면서, 핵심 일등 기업에 대한 벤치마킹을 실시해 그들의 앞선 운영 시스템을 도출하는데 주력했다. 삼성의 신경영은 한국 경제가 사상 초유의 혼란에 빠졌던 IMF 시기에 극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IMF 사태로 한국 경제 전체가 휘청거릴 때 삼성도 잠시 허둥대기는 했지만. 다른 기업에 비해 의연하게 그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신경영을 통해서 이미 구조조정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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