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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CEO 배혜정

배혜정 지음 | 창해


막걸리 CEO 배혜정

배혜정 지음

창해 / 2011년 3월 / 224쪽 / 12,000원



1장_ 장인의 정신으로 빚는 술




인생을 바꾼 제안

지금의 나는 내 이름을 건 '배혜정도가'라는 주류회사 CEO다. 기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곤 한다. "사업을 하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나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자칫하면 오해받을 수 있지만 난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시작한 게 아니랍니다. 제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가치 있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마흔이 되도록 무엇을 하며 살면 가치 있는 삶이 될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전통주, 막걸리를 우리 국민들에게, 나아가 세계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사랑받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가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질 좋은 다양한 막걸리를 세상에 내놓는 것, 그것이 내가 가치 있게 살기 위해 해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일본으로 발령이 난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5년 넘게 살다가 다음 발령지인 파키스탄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는 한국에서 백세주가 잘 팔리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백세주가 크게 반향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아버지께서 오빠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난 뒤였다. 또 다시 시간이 흘러 남편이 파키스탄 근무를 마칠 무렵이었다. 다음 근무지로 일본행이 거의 확정될 즈음 한국에 잠시 들렀다. 그때 아버지께서 나와 남편을 불러 말씀하셨다. "이제 너희들도 외국으로 떠도는 생활 그만 접고 사업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 혜정이 너, 이제 40대가 되는데 뭔가를 해야지. 외국 생활이야 젊은 시절에 견문을 넓히는 데는 좋지만……. 이제는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뭔가를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사업을 해보거라."

'뭔가를 시작할 때'라는 말씀은 마치 수업이 시작되는 종소리처럼 머릿속에서 '뎅뎅' 소리를 내며 울렸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순간, 내가 이런 말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업이라니…….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졌지만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사업이라니까 막막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 사업이지 내가 네게 하라는 게 무엇이겠느냐?" 잠시 틈을 두고 아버지께서 말씀을 이으셨다. "네가 막걸리를 빚어라. 내가 약주를 개발하고 연구해서 백세주가 세상에 나왔지만 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건 막걸리야. 막걸리야말로 우리 민족의 혼이 배어 있는 전통주잖니. 나의 꿈은 막걸리다. 막걸리에서 약주가 나오는 거니까." 아버지는 막걸리에 대한 애착이 유난하셨다. "물론 네 오빠와 동생에게도 막걸리를 하라고 했지만 네 오빠는 백세주 물량 맞추기도 힘든 지경이라고 하고, 막내도 새로 시작한 일들 때문에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막걸리는 네 몫인가 보다."

아버지 말씀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속으로 '그래. 한번 해보자. 나는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없지만 아버지가 옆에 계시니 기술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또 막걸리 사업은 설비비도 많이 들지 않으니 열정과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한다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남편과 의논한 뒤, 남편이 회사에 사표를 내고 우리 가족은 1999년 늦여름에 귀국했다. 남편과 나는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미생물연구소를 인수하여 (주)한국효소로 새롭게 시작했다. 막걸리를 만드는 게 최종 목표였지만 우선은 효소를 만드는 일부터 하기로 한 것이다. 일을 시작한 뒤로 나는 매일 아침 국순당 연구실에 들러 공부를 했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온몸으로 배우고 공부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아버지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강훈련을 받았다. 아버지는 특히 술을 빚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 원칙을 강조하셨다. "어떤 상황에서도 술 빚는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술은 당대에 명품으로 만들기 힘들고. 삼대쯤 되어야 명품이 나온다고 말씀하셨다. 백세주를 뛰어넘는 약주는 "너희들이 만들어야 할 몫"이라고 하셨다.

아버지께 훈련 받은 대로 매일 균을 배양하고, 키워내고, 조사하고, 시료지도 수차례 만들었다. 그렇게 아버지께 많은 것을 배운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이제 기본은 된 것 같다. 이제 네 술을 빚어라. 네 막걸리를 세상에 선보여라."

마침내 나는 한국효소 건물 한구석에 발효실을 만들고 기계를 들여놓는 등 막걸리를 빚기 위한 준비를 했다. 막걸리 사업은 아버지의 제안과 나의 내면의 갈망이 맞아떨어져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는 사업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 많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설비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내가 준비한 설비는 수동 단말기, 탱크, 수동 캠핑기 등 보잘것없는 기계 다섯 대뿐이었다. 그것도 살 돈이 없어서 국순당에서 사용하다 버린 것을 가져다가 고쳐서 썼다.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우선 나만의 막걸리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전국에 산재한 오래된 술도가들의 술맛을 보았다. 대다수 술도가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바로 주먹구구식 제조였다. 나의 기업 모델은 유럽에 있는 중소 규모의 치즈공장 같은 곳이다. 치즈처럼 막걸리도 미생물 사업이다. 잡균을 관리하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다면 균일한 품질의 막걸리를 생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되도록 전통 방식을 고수하되 위생과 제조방법을 과학화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양조장들의 위생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내가 그리는 막걸리는 그런 막걸리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막걸리를 맛보았지만 결국 나는 내가 만들어야 할 맛의 본보기라 할 만한 맛을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 말씀대로 나 스스로 나만의 막걸리를 창조해야 했다.

첫 작품의 실패

사업 초기에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최고의 재료'를 쓴다는 철칙으로 좋은 쌀을 계약하고 머리가 빠지도록 노력한 끝에 마침내 첫 막걸리를 만들었다. 국산 쌀과 국산 옥수수를 이용한 옥수수 막걸리였다. 술을 담을 용기도 고민 끝에 정했다. 새로운 용기를 마련하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되지 않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페트병에 술을 담기로 했다. 그렇게 하여 첫 작품인 6도짜리 페트병 막걸리, '새콤달콤 옥막걸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런데 온갖 고생을 해서 만든 막걸리가 팔리지 않았다. 처음 시작한 사업이니 전국에 팔 수 있는 능력도 없어서 한국효소의 도움을 받아 수원에 있는 술 도매상에 "이 술 좀 팔아주세요”라고 부탁해서 한 트럭을 먼저 보냈다. 하지만 완벽하게 외면당하고 말았다. 원래 막걸리 시장 자체가 워낙 좁은데, 그 좁은 시장에서조차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다. 솔직히 맛은 있었다. 현재의 '배혜정도가 생막걸리'의 옛 버전이라 할 수 있는 그 막걸리는 담백하고 고소했다. 감히 말하건데 그 당시 시중에서 맛보기 어려운 깔끔하고 정직한 맛이었다. 결국 나의 결정적인 잘못은 술은 비교적 잘 만들었지만 어디에 어떻게 팔아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하루는 제부도 유원지를 찾아갔다. 상인들의 구박을 받으며 한쪽 귀퉁이에 매대를 설치했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한 병도 팔리지 않았다. 해가 질 무렵 매대를 철수하면서 막걸리를 전부 공짜로 나눠주고 터덜터덜 돌아왔다. 자식 같은 막걸리가 그냥 버려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제 인정해야 했다. 어떤 핑계를 대도 내 술은 지역 막걸리에도 밀리는 신세임을. 그날 밤 발효실에서 내가 만든 막걸리를 바라보며 서럽게 울었다. 그것은 내가 생전 처음으로 좌절의 의미를 안 날이었다.

그러나 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좌절했다고 그 자리에서 포기할 일은 더욱 아니었다. 나는 제품을 싸들고 아버지께 가서 면담을 청했다. 술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맛보신 뒤 아버지의 첫 말씀은 이랬다. "작품이기 이전에 상품이다. 왜 좋은 재료로 만들어 놓고 싸구려 대열에 끼려 하느냐? 네가 보기에 그런 막걸리에 미래가 있더냐? "이것도 맛은 그럭저럭 괜찮다. 하지만 이렇게 해선 팔릴 리가 없다. 이도 저도 아닌 막걸리를 만들어서 지역 도가들과 경쟁할 생각이었느냐? 전국을 재패하고 세계에서 인정받아야 감히 최고의 막걸리라고 부를 수 있을 거다.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냐?"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막걸리를 만드는 것이요." "그래, 그런 막걸리를 개발하고 귀하게 상품으로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아야지. 좀 더디겠지만 네 목표점이 정확해야 한다. 인생이란, 쉽게 가려 하면 어려워지고 어렵게 가고자 하면 쉬워지는 법이다. 네가 원하는 지점을 더디게 만나더라도 최고의 막걸리를 만들겠다는 너의 소신을 지켜라. 그리고 맛을 냄에 있어 한 가지 힌트를 주마." 나는 다시 출발선에 선 심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힌트는 '합주(合酒)'였다.

합주는 예로부터 중류층 이상의 양반집에서 5월경부터 10월경까지 많이 마셨던 '단맛과 매운 맛이 강한 술'이라고 했다. 이것이 아버지의 의중이었고 내가 가야 할 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합주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합주는 막걸리 계열에 속하면서도 탁주와 만드는 방법이 약간 다른 고급술이다. 약주와 탁주의 중간에 위치하는 술이라고 보며 이화주, 사설주, 혼돈주 등은 기실 합주의 카테고리에 속한다. 합주는 도수가 높은 원주, 고급 탁주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양은사발에 한껏 따라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마시던 농주인 막걸리도 가치가 있지만, 궁중음식들이 즐비하게 차려진 수랏상에 올라도 격이 떨어지지 않는 합주의 재현 또한 의미 있는 일일 것이었다.

한국효소 공장의 귀퉁이에서 수많은 시료를 만들고 마시고 폐기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술에는 발효 기술 외에도 맛을 내는 조미 기술이 필요하다. 나는 1960년대나 1970년대에 마시던 텁텁하고 터프한 맛의 막걸리를 탈피해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합주의 맛을 끌어내보려고 우유회사에서나 사용하는 고가의 균질기도 사서 연구하고 마시고 버리고 또 연구했다.

합주에 대한 나의 끈질긴 노력은 마침내 '부자 16도'로 결실을 맺었다. '부자 16도'(부자)는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탁주로 통하고 아는 사람들에게는 합주로 통한다. 물을 타지 않은 원주로 도수가 16도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막걸리와 차이가 있다. '부자'는 2002년 발명의 날 특허청장 표창을 받는 명예를 안겨 주었다.

2장_ 사람살이, 그 속으로



더디지만 고집 있는 걸음으로

믿을 수 있는 음식은 믿을 만한 원재료에서 출발한다. 요즘처럼 환경오염이 문제가 되는 시대에는 국산이라 해도 중금속으로 오염된 땅에서 길러진 작물이 아닌지, 농약을 많이 써서 지칠 대로 지친 땅에서 난 작물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내가 막걸리를 만들겠다며 사업을 시작할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쌀로 술을 담그겠다고 결심하는 것 자체가 별난 짓이었다.

최고급 쌀과 기존 막걸리에선 볼 수 없었던 유리병을 만들어 '부자' 3,000병을 만들었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을 들여 귀하게 만든 '부자'는 팔리지 않았다. 생막걸리의 품질을 따로 생각하지 않던 시절에 광고나 홍보 없이 고급스러운 병 막걸리를 내놓았으니 안 팔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늘 새로운 것을 연구하고 만드는 아버지를 옆에서 보아왔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술을 경험해보았다. 그래서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나만의 독창적인 막걸리를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막걸리라면 플라스틱 병에 담겨져 있는 게 상식이던 그 시절에 병 막걸리를 만들었고, '왜 한 가지 도수의 막걸리만 먹어야 할까?'라는 의문 끝에 여러 도수의 막걸리를 만들었다. 또 이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생산자 입장이 아니라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 '막걸리' 하면 고릿한 냄새에, 트림 나오고, 자고 나면 머리 아프고, 누리끼리한 색깔에다 뭔가 부글부글 끊는 이미지만 갖고 있었다. 게다가 막걸리 자체에 대한 관심도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서 기존의 막걸리와 너무 다른 제품이 나오다 보니 보는 사람들마다 굉장히 낯설어 했다. 아담한 사이즈의 독특한 유리병에 맛도 기존의 것과 다른, 더군다나 도수도 16도로 높으니 편하게 마시는 막걸리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이게 무슨 막걸리냐.' 하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귀한 자리에서 대화와 함께 천천히 마시는 양반 막걸리라는 나의 콘셉트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악담에 시달렸다. 동종업계에서는 쌀누룩에 좋은 쌀을 써 백옥처럽 흰 색깔의 '부자 16도'를 두고, '표백제를 썼다더라, 우유를 탔다더라, 밀가루를 섞었다더라.'라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뿐만 아니라 대놓고 나를 비난했다. '막걸리가 막걸리지 왜 혼자 잘난 듯이 비싼 쌀을 쓰느냐, 부잣집 따님의 호사 취미가 아니냐, 싼 술에 무슨 고급화가 필요하냐?' 등 온갖 심한 말들이 들려왔다.

술이 팔리지 않으니 월말이 되면 줘야 하는 쌀값이 큰 스트레스였다. 쌀값 외에도 병값, 직원 월급, 행사 비용, 차량 유지비 등으로 한 달 지출은 몇 천만 원씩인데 들어오는 돈은 없는 상황이니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술 이름은 '부자'인데 그것을 파는 나는 나날이 가난뱅이가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금 압박을 받는 사업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매달 죽을 만큼 괴로운 날이 두 번 돌아오는데 그것은 바로 직원 월급날과 원재료값을 주는 날이다. 간신히 맞추고 나면 그때뿐이고 다시 다음 달이 돌아온다. 이때부터 고질적인 불면증이 생겼을 정도로 괴로운 날들이었다.

평생 겪어본 적 없던 가난을 등짐처럼 지고 휘청휘청 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좋은 제품은 좋은 원료에서 나온다는 나의 철칙은 매달 지출하는 어마어마한 쌀값에 자칫 무릎을 꿇을 뻔했다. '쌀을 한 등급만 낮춰볼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붙잡은 건 결국 초심이었다. 첫 작품인 '새콤달콤 옥막걸리'를 만들고 시장의 벽에 부딪쳤을 때 이도 저도 아닌 걸 만들면 망한다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지 않았던가. '고급화하기로 했으면 그 신념을 굽히지 말자. 타협을 하는 순간 내가 사업을 하는 의미는 없어진다.' 어쨌든 공을 들인 내 술이 팔리지 않으니 고민은 쌓여만 갔다. 그리고 힘든 고비를 겪을 때마다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사생활도 없이 24시간 매달리는데도 사업이 잘되지 않을 때는 더욱 더 그랬다.

그러나 막걸리를 만들면 만들수록, 시장이 외면하면 할수록 이 땅에 이런 술 하나 남겨야 한다는 묘한 책임감이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술이니 목숨을 다해 살려야 한다고 나 자신을 격려하고 달랬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든 술이 한국에 놀러온 관광객에게든 다른 나라 대통령에게든 "이것이 막걸리라는 한국의 전통주입니다."라고 부끄럽지 않게 내놓을 만한 품질을 갖춘, 건강에도 좋고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술을 만드는 것이다.

장인정신이 넘어야할 산, 유통

'부자'를 마셔본 사람들은 대부분 깊은 맛의 고급 막걸리라며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알음알음 늘어나는 개인 소비자에만 의존하는 것으로는 매출이 충분치 않았다. 술을 만들고 주문이 오면 직접 배달도 하는 등 두 명뿐인 직원과 나, 셋이서 전방위로 뛰는데도 매달 1,000만원에서 2,000만 원씩 적자가 났다.

틈날 때마다 고급 한정식집, 호텔, 대형마트 등을 돌며 홍보에 나섰고 그중 몇 곳은 입점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수요는 많지 않았다. 사실 납품에 성공해도 문제였다. 단 한 병의 배송도 받아주니 배송비도 적지 않게 나가는데, 술을 납품한 대가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버티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이 없으면 조용히 손을 들고 나와야 했다. 특히 대형마트는 행사해야지, 공짜로 나눠줘야지, 파는 것보다 나가는 것이 더 많았다. 게다가 유통기한이 임박할 때까지 팔리지 않거나 반품으로 돌아와서 멀쩡하지만 폐기한 술이 수억 원어치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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