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보고 미래를 연다
신광순 지음 | 지상사
과거를 보고 미래를 연다
신광순 지음
지상사 / 2011년 4월 / 344쪽 / 18,000원
제1장 우리나라 초창기 식품위생 관리제도식품위생법의 공포와 그 역사적 배경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식품 관련 법규로는 1962년 1월 20일자로 동시에 공포한 식품위생법(법률 제1007호) 및 축산물가공처리법(법률 제1011호)을 들 수 있다. 1945년 8/15 광복과 1948년 정부 수립을 거쳐 1961년 5/16 군사혁명을 거칠 때까지 16년 동안은 일제 강점기의 법령을 그대로 적용해 온 셈이다. 그러다가 5/16 후의 비상시국에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실시한 대대적인 구법 정리 작업을 계기로 식품위생 분야도 비로소 법적인 체계가 확립되었다.
원래 우리나라 식품위생 행정의 태동은 1910년 한일 병합으로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경찰국에 위생과가 신설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일본의 법률인 '음식물 기타 물품 취체에 관한 건'(1900년 2월 24일 공포)에 근거한 '위생상 유해음식물 및 유해물품 취체 규칙'(1911년 11월)을 비롯하여 '조선우유 영업 취체 규칙'(1911년 5월) 등 총 7개의 잡다한 법규들을 적용한 바 있었다.
광복 후 미 군정 시에는 군정법령 제1호(1945.9.24)로 위생국 설치에 관한 건이 공포됨으로써 종전 경찰관서에서 담당한 위생 업무가 일반 행정부서인 위생국으로 이관되었다. 그 직후 위생국은 보건후생국으로 개칭되었고(1945.10.27), 다시 보건후생부로 승격되었다(1946.3.29). 보건후생부 산하에는 수의국, 예방의학국, 위생국 등 총 15국 47과의 기구를 두었는데, 미군 장교 50명, 미군 하사관 30명과 한국인 400명 등 총 779명의 방대한 인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비록 군정이지만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중요시하는 미국의 제도를 한국에 도입한 결과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형 보건행정 체제의 구축은 일시적이었고, 곧이어 1947년 5월 17일 남조선 과도정부가 수립되자 기구는 대폭 축소되었다. 그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보건후생부는 사회부로 개편되었다가 다시 1949년 3월 31일 보건부 직제가 공포됨으로써 독립했다. 그러나 1955년 12월 17일 또다시 보건사회부로 통합되면서 위생행정은 방역국 위생과에서 주관하였다.
이상과 같이 해방 후 5/16까지의 위생행정 제도는 많은 우여곡절과 변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1961년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강력한 개혁 정책 추진으로 과거 일제 강점기의 총독부령이나 해방 후의 군정법령 등 잡다한 법규들을 정리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부정, 불량식품 추방 지시와 위생관리관실의 탄생
정확히 1969년 6월 5일에 일어난 일이다. 이렇게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는 연유는 바로 며칠 전인 6월 1일자로 필자가 조사부 식품위생과장 직무대리로 발령받은 직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전임 박종공 과장으로부터 사무 인수도 받지 못하고 과장 책상으로 옮겨앉지도 않은 때에 일어난 일이라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정희섭 장관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지 3일이 지난 9월 5일 오후 4시경, 장관실의 호출을 받고 김탁일 보건국장과 같이 급히 장관실로 올라갔다. 장관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정, 불량식품을 비롯하여 부정약품, 부정의료행위를 추방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를 취하라는 청와대의 특별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당시의 사회악인 소위 보건 3대악을 뿌리 뽑을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것으로 특히 부정, 불량식품에 관한 대책을 내일 아침까지 책임지고 보고하라는 엄명이었다.
장관실을 물러난 김 국장과 필자는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어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식품위생과장으로 갓 발령받은 필자에게 김택일 국장은 크게 기대하는 눈치였다. 결국 필자가 책임지고 장관 브리핑 자료를 만들기로 하였다. 대신 국장실에서 조용히 작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필자가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던 것은 바로 6개월 전인 그해 3월경에 당시 중앙정보부의 협조 요청으로 극비리에 작업하여 제출한 '미래지향적 식품위생 정책 개선안'을 만든 경험 때문이었다. 그때 제시한 시안을 참고로 브리핑 자료를 만들어 장관에게 보고하고 결심을 받아 내면 되는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9시에 필자는 밤새 만든 '부정, 불량식품 근절 방안과 그 대책'에 대한 시안을 장관실에서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관께서는 출근하자마자 차관, 기획관리실장, 각 국장 등 간부 전원을 집합시키고 브리핑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개선안을 보고하면 그 시안을 놓고 의견을 교환하고 또 다른 개선안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진행하다 보니 무려 3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필자가 보고한 세 가지 시안을 중심으로 최종안이 확정되었는데, 그 핵심은 '식품위생관리 전담 기구의 설치'였다. 우선 정부조직법의 개정 작업이 선행되어야 보사부 조직을 개편할 수 있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따라서 우선 임시방편으로 보건국 산하에 위생관리관실을 신설하고 그 밑에 식품위생 식품지도 담당관실을 두기로 하였다. 이 결정은 당초 제안한 '위생관리 전담국의 신설과 신품위생 전담과의 설치' 안을 절충한 것이다. 곧이어 개선안의 집행을 위한 인사를 단행한바 위생관리관에 전원배 국립의료원 사무국장(장관 비서관 및 환경위생과장 역임)이 임명되었다. 필자는 식품위생과장에서 담당관으로 유임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당시 청와대의 특별 지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조직 자체도 과도기적인 성격이었다.
그 후 보건국 산하에 위생관리관실을 신설하고 환경위생, 식품위생, 위생지도 등 3개 담당관을 두는 직제 개편이 있었다(1970.1.5). 그러나 한 달여 뒤 공포된 직제 개편으로 위생관리관실은 보건국 산하에서 분리되었고 차관 밑에 위생관리관(2급)을 두었다(1970.2.13). 이 상태로 약 3년간 존속하다가 다시 위생관리관을 폐지하고 위생국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그 밑에 환경위생과, 식품위생과, 공해과를 두었다(1973.3.10). 이후 1996년 4월 6일 현 식약청 전신인 식품의약품안전본부가 창설되었다.
제2장 보건사회부 식품위생과 시절의 회고식품위생관리 사업의 초석을 세우다
1969년 및 1970년에 보건사회부 식품위생과에서 시행한 사업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공직자들이 기울인 노력이 식품위생관리의 초석이 되었음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먼저 1969년도의 업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법령 정비 및 제도 개선 실적
-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 '식품의 규격 및 기준' 개정(식품 51종, 1970년 1월 1일 시행)
- 부정식품 단속 및 지도 업무 전담 기구 설치
2) 우량식품 제조, 가공을 위한 조치
- 18종의 주요 식품에 인공색소 첨가 금지(1970년 1월 1일 시행)
- 7종의 당류 식품에 인공감미료 사용 금지(상동)
- 인공감미료 'Cyclamate' 사용 금지(1970년 2월 1일)
- 보건범죄 단속을 위한 국무총리 훈령(제79호) 제정
- 식품 등의 제조업소 및 소비자 계몽 사업
- 식품제조가공업자의 자율적인 활동 기풍 조성을 위한 '식품공업협회'의 설립
3) 조사 연구 사업
-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영양조사 실시(대상 1,000가구, 한국영양학회에 위촉)
- '장염비브리오균' 식중독 예방을 위한 조사(책임연구자: 이주식 서울대 사대 교수)
다음은 1970년도 시책 방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정책적 조정을 통한 제도 개선 대책
- 식품 제조 관계 법률 관할권의 일원화 대책
- 영세기업체의 통합 운영 적극 권장 및 보호 대책
- 영세 식품제조업자의 타 직업 전환 대책 강구(중앙 주도, 지방에 대책 지시)
2) 행정적 개선 대책
- 식품의 품질 및 기술관리 대책(식품위생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 시판 식품의 정기/수시 수거 감사제, 제품 허가 시 제조 및 시험방법 사전관리제, 식품 제조업소별 식품위생관리인의 임용 및 의무적 배치와 실험실 운영 규정(부령) 제정, 주요 식품 종류별 제조 공정의 규격화, 식품 제조 공정별 소요 시설 및 원료 첨가물 사용량 등의 기준 제정(별도 부령)
3) 제도적 개선 사업
- 시도에 위생과, 보건소에 식품위생 전담 기구 설치: 내무부에 협조 의뢰, 시도에 지시
- 식품위생감시원 복무 규정 제정(부령)
- 예방적 단속 활동을 위한 지역책임제 실시
- 불요불급 식품 및 부정식품 제조 가능 업종의 신규 허가의 제한
- 식품업소의 자율 위생지도원제 권장(자가 제품의 보호, 감시 목적)
- 자본, 기술, 시설 등 영세 식품제조업소의 연차적 정비와 식품공업의 대단위화 지원
- 유통 과정의 체계화
- 식품업소 시설 및 품질관리를 수준별로 차등화한 정기 및 수시감시 제도의 실시
4) 식품위생법의 개정 내용
- 식품 관계 업소의 위생등급제 실시
- 시설 미비 업소의 즉각적인 허가취소권 신설
- 식품 과대광고 금지 규정의 신설
- 부정식품 제조 목적으로 사용된 장비, 기구의 압류
- 무허가 식품 즉시 폐기 조항 신설
- 타법에 의한 허가 업소 위법 행위에 대한 행정처분 요구권 신설
이상으로 당시의 상황을 간단하게 소개한바 거의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과 비교해 봐도 많은 부분이 법적, 제도적으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아직도 사각지대에 있는 현안은 앞으로 검토할 필요성을 느낀다. 특히 식품위생 행정관리의 일원화를 위한 제도적 개선 등 정책적 현안은 심심할 때마다 대두되는 단골 메뉴로 자리 잡은 감마저 든다. 식품위생관리를 위하여 기울인 당시의 아이디어와 노력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활용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자랄 수 없듯이 역사의 흐름을 모르면 미래를 설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3장 1960~70년대 식품위생, 안전성 논쟁목장우유의 대장균 검출 파동
필자가 부정, 불량식품 단속의 실무책임자인 식품위생과장을 맡은 지 꼭 1년이 경과한 1970년 여름에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보건사회부는 여름철에 문제가 되기 쉬운 시판 식품들을 대상으로 단속을 강화하였다. 특히 목장우유의 경우 배탈이 나기 쉬운 식품으로 알려질 정도로 위생관리에 문제가 많았다. 그때 일어난 목장우유 대장균 검출 사건의 경위를 당시의 자료를 중심으로 밝히고자 한다.
당시 시중에 유통 중인 우유 검사를 위하여 동년 6월 17일부터 7월 6일까지 서울 일원과 인천 지역의 생산 공장, 하치장, 직매장, 다방 등에서 우유를 무작위로 수거하였다. 그리고 유통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울우유(7건)를 비롯하여 건국우유(5건), 인천우유(7건), 삼육우유(3건), OK우유(3건) 등 총 25건의 샘플을 국립보건원 미생물부에 보내 시험을 의뢰하였다.
그 검사 결과 대외비로 취급되어 당시 허용(許容) 보건원장이 직접 홍종관(洪鍾寬) 보사부차관에게 보고하였고, 다시 식품위생과장인 나에게 전달되었다. 내용을 분석해 보니 대장균의 경우 5개사 공히 생산 공장의 제품은 음성이었으나, 유통 단계의 제품은 전부 기준치(당시는 10이하/ml) 이상인 100~10,000/ml 범위였다. 또한 일반세균 수에서 기준치(당시는 5만 이하/ml)를 초과한 것은 서울우유 및 건국우유가 1건, 인천우유가 3건, 삼육우유 1건, OK우유 1건으로 서울우유가 시료 수에 비하여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보건사회부에서는 그 결과를 우유의 위생관리를 주관하는 농수산부 축산국 가축위생과에 통보하였다. 동시에 양 부처 합동조사반을 구성하여 전국에 소재한 우유처리장 25개소에 대한 일제 점검을 실시하고 필요한 시정조치를 취하였다. 그 일은 대외적으로 보안을 유지한 상태에서 진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성장 의지와 축산업 진흥 지원 정책을 감안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밀은 계속 지켜질 수 없는 법. 그 사실은 그 후 거의 20일이 지난 7월 말 보사부 출입기자단에 의하여 감지되었다. 특히 일간신문 기자단 간사였던 MBC 이득렬 기자(후에 사장 역임)가 사건에 불을 붙였다. 당시 MBC 아침 프로인 '오발탄'에서 "어제 오후 전원배 위생국장실에서 우유 검사 결과를 놓고 담당 과장과 국장이 말다툼을 벌였다. 국장은 발표를 지시했는데도 담당 과장이 이를 거부하니 소비자 건강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한 것이었다. 물론 그 방송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른 것으로써 일종의 압박 수단이었으며, 이름 그대로 오발탄이었다.
이런 일은 있은 지 며칠 후 필자는 결국 기자실에 불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 기자들이 이미 우유 사건을 기사화하기로 작정한 터라 필자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나는 교과서적인 답변만 하였을 뿐 사실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기자들이 임의로 작성한 기사가 8월 5일자 석간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물론 이들 기사는 실제 시험 결과와는 다른 내용으로, 우유를 상온에 보존할 때 시간의 경과와 세균 수의 증가는 비례한다는 보도였다. 즉 대장균이 2만~4만, 일반세균이 40만~60만이라는 보도였다.
문제는 목장우유에서 세균이 검출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소비자들의 우유 기피 현상이 발생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언론의 일방적 보도로 우유의 소비는 급감하였으며, 서울우유의 경우 상봉동 처리장에 들어온 원유를 중랑천에 그대로 쏟아 붓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시 젖소 목장과 유업계에 미친 타격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여파가 몇 달간 지속된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유 위생관리의 선진화에 큰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서울우유의 경우 이 사건을 계기로 오랜 과제였던 저유탱크의 설치와 탱크로리 집유차 구매를 위한 자금 지원을 농협중앙회로부터 받기도 하였다. 우유의 배달도 자전거로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시스템에서 탈피하여 지역별 보급소를 통한 단거리, 단시간 공급이 가능한 체계로 개선되었다. 결국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었으나 이 사건은 유업계 현안을 단번에 해결한 셈이 되었다.
제4장 제도 개선에 기울인 노력과 보람1987년 '식품관리청'의 필요성을 최초로 주장하다
다음은 필자가 그동안 나름대로 제기한 식품위생 관련 정책 및 제도 개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그 첫 사례로는, 1987년 12월에 문교부 학술연구 조성비에 의하여 보고한 '식품의 위생적 관리를 위한 행정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내가 1973년 공직을 떠나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대학에서 교수 연구 관련 공문을 보다가 필자에게 적합한 연구과제 하나를 발견했다. 당시 이 연구 사업은 정부가 중점적으로 다룬 프로젝트로 보건사회부에서 요청한 것을 문교부에서 연구과제로 채택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 주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식품위생 행정제도 개선에 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연구의 핵심 내용인 '식품의 위생적 관리를 위한 행정제도 개선 방안'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첫째, 현 식품위생 행정기구와 기능을 재정비, 강화하는 제1안이 있다. 식품의 질적 보증과 위생적인 안전성을 보장하기 위한 체제로 행정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 방안으로서 현 보건사회부의 위생국을 강화하여 식품관리 전담국(생활보건국)을 두되, 그 하부 조직을 기능적으로 분류(위생제도, 식품위생, 유육위생, 식품화학, 보건영양, 공중보건)하고 업무의 전문화를 기해야 한다. 또한 식품위생행정의 비중이 큰 일선조직을 강화하기 위하여 각 시, 도에 식품위생 전담과를 설치하고, 시, 군, 구에도 전담과를 두어 일선행정을 활성화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