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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가장 수익률 높은 공장 에이원 이야기

우메하라 가쓰히코 지음 | 지식공간


일본에서 가장 수익률 높은 공장 에이원 이야기

우메하라 가쓰히코 지음

지식공간 / 2011년 3월 / 203쪽 / 12,800원



37년 연속 경상이익률 35%의 비밀




목숨 걸고 기본을 지키는 회사

37년 연속 35%의 경상이익률을 달성한 회사가 있다고 하면 당신은 '합리적으로 경영되는 인터넷 혹은 IT 관련 회사',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하는 회사', '강력한 마케팅 능력을 보유하고, 탄탄한 재무전략으로 고수익을 창출하는 회사' 등을 상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37년간 경영해온 주식회사 에이원정밀은 최첨단 하이테크 기업도 아니요, 인수 합병을 통해 규모를 키워온 IT 기업도 아니다. '정말?' 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에이원정밀은 공작기계 부품을 가공하는 마치코바, 즉 동네 공장이다.

우리 회사는 규모가 작은 일개 마치코바에 불과하지만 주력 상품인 콜릿 척(collet chuck) 분야에서 6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해외까지 포함하면 1만 3천여 개의 회사와 거래하고 있으며 자스닥(일본 장외증권 거래 시장)에도 상장했다. 창업 이래 37년 동안 경상이익률은 35% 밑으로 내려간 적이 한 번도 없다.

넉넉한 자금이 있어서 시작한 회사는 아니다. 자금력이 풍부한 모회사가 뒤에서 버텨준 것도 아니다. 나는 없는 돈으로 회사를 차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경기도 나빠졌다. 회사를 설립하자마자 석유파동(1970년)이 터졌다. 플라자 합의(1985년)에 따른 엔화 절상으로 갑작스럽게 불황이 닥쳤고, 이어서 버블 붕괴(1990년대)마저 찾아왔다. 최근 몇 년간은 디플레이션의 영향으로 대기업의 가격인하 요구가 거세졌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고수익을 거두었다.

우리는 기본기가 튼튼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고수익을 달성할 수 있었다. 우리는 기본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주먹구구식 동네 공장이 아니었다. 제조업의 기본은 뭘까? 높은 품질, 적정한 가격, 짧은 납기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의 기본을 우직하게 실천했다. 그 결과 마치코바로는 처음으로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게다가 37년 연속 경상이익률 35%를 달성했다.

다시 말해 이 세 가지에 소홀한 기업은 설령 대기업이더라도 지속적으로 이익을 거두지 못한다. 가격만 해도 그렇다. 일을 따내기 위해 가격을 뚝 떨어뜨리는 기업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이익을 남길 것인가.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만드는 것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고객은 언제나 최고의 품질을 원한다. 납기일도 마찬가지. 납품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엄격한 공정관리도 부질없다. 고객은 곧 여러분의 회사를 외면하고 다른 기업을 고개를 돌릴 것이다.

물론 기본을 지키는 일은 귀찮고 번거롭다. 그러나 만일 내가 37년 전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이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실히 지켜갈 것이다. 그렇게 일하는 가운데 장기적인 고수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기본만큼은 반드시 사수한다!"그 외에 다른 비결을 나는 모른다.



경영자에게는 딱 1번의 결정이 중요하다



내 인생의 첫 번째 결정, 10년간 익혀온 기술을 버리다

나는 12살 때부터 10여 군데의 작은 공장을 돌며 경험을 쌓았다. 20살이 갓 넘었을 무렵에는 녹로(토기, 목공품 등을 성형하는 데 사용하는 기구, 회전반)를 마치 내 손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 기술을 인정받아 후추에 위치한 오오모리전기공업에 입사했다. 그때가 22살이었다. 이곳은 현재 도쿄 증권거래소 1부 상장기업인 미츠미전기공업의 하청기업으로 제법 규모가 큰 회사였다. 신입 동기 중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도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 입사한 친구도 있었다. 내 나이는 대졸 신입사원과 같았지만 10년의 경력과 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의 대우도 달랐다. 당시 대졸자의 초봉은 12,000엔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 두 배가 넘는 2만 5~6천 엔을 받았다.

나는 오오모리전기공업에서 녹로를 이용해 나사의 시험 제품을 만들었다. 당시 나는 완성제품의 미세한 오차(0.05mm)를 손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감각이 발달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녹로 기술자로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내 밑으로 20~30명의 부하직원이 있었다. 내 인생의 전환을 맞이한 것은 이때쯤이었다. 최고급의 기술력을 가진 녹로 기술자가 소형자동선반이라는 기계를 만나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주산왕이 전자계산기를 처음 마주한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내 내 솜씨가 뛰어나다고는 해도 손끝의 감각에 의존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미세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소형자동선반에서는 캠이라는 장치로 칼날을 자동으로 제어했다. 요컨대 기계 다루는 법만 익힌다면 누구나 같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10년간 쌓아온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허탈감을 느낄 틈도 없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내게 찾아온 기회일지 모른다. 소형자동선반으로 사업을 일으키면 어떨까.'

당시 나는 몸값이 비싼 일류 장인이었다. 그러나 사장이 되겠다는 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사장의 꿈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곧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었다. 당장 사장에게 달려갔다. "월급을 깎으셔도 좋습니다. 자동선반 일을 맡겨주십시오." 마침 사장도 이 새로운 기계를 맡길지 고심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자네라면 녹로에 대한 지식도 풍부하니 안성맞춤이군. 잘 부탁하네."

소형자동선반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나는 곧 시대가 바뀌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제 녹로의 시대는 끝났다. 소형자동선반을 쓰면 정확도 높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계에 부착하는 캠만 바꾸어도 다양한 모양의 제품을 깎아낼 수 있다. 나는 이 캠을 주시했다. 당시에는 소형자동선반의 제조업체가 캠을 제조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고 납품도 더뎠다. 고객사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보다 저렴하고 보다 빠르게 캠을 공급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캠을 사업화하겠다는 구상은 점차 또렷해졌다. 하지만 당장 뛰어들기에는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다.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1965년이었다. 당시 일본은 고도 경제성장의 급류를 타고 있었다. 세탁기, 냉장고 할 것 없이 만들어 내놓기만 하면 팔리는 시대였기 때문에 소형자동선반용 캠의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눈만 감으면 광대한 캠 시장이 펼쳐졌다. 나에게는 선반제조업체에서 만든 캠보다 훨씬 품질 좋은 캠을 제작할 기술이 있었다. '시장도 있고, 기술도 있다. 지금 독립해서 캠 제조회사를 세우면 꿈에 그리던 사장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가로막는 게 있었다. 나는 사장이 되고 싶었지만 실패했을 때 어떤 결과가 기다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파산을 경험한 탓이었다. 회사가 도산한 이후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지 않았던가.

또 한 가지 나를 주저하게 한 것은, 같은 직장에 다니던 여성과의 결혼이었다. 이대로 회사를 다니면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된다. 그러나 독립을 한다면 신혼생활을 즐길 수 없고, 만약 잘못해서 사업이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게 되면 아내에게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운명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결혼식 전날, 한자리에 모인 친척들 앞에서 '언젠가 캠을 만드는 회사를 차리고 싶다.'고 지나가는 말을 던졌는데 마침 그중 한 사람이 '그렇다면 내가 자금을 대겠다.' 하고 나섰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렇게까지 나를 밀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무얼 망설이겠는가. 그저 나의 성공 가능성을 믿어준 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결국 회사에 사표를 냈다. '틀림없이 시장은 있다. 용기를 갖고 도전한다면 꼭 성공할 것이다.' 갖가지 변수를 검토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마침내 나는 26살에 '미츠와제작소'라는 소형자동선반용 캠 제조회사를 차렸다. 드디어 꿈꾸던 사장자리에 올랐다. 에이원정밀의 뿌리도 여기에 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결정, 월 매출액보다 13배 비싼 첨단 기계를 구입하다

미츠와제작소의 경영은 형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자동차 면허를 갖고 있는 형에게 영업을 맡기고, 나는 제조에 전념하기로 했다. 창업 당시에는 일거리가 없었다. 불안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조급해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이 분야의 비전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묵묵히 주문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치 비가 쏟아지기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말이다. 한두 차례 빗방울이 얼굴위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곧 빗줄기가 메마른 대지를 적셨다. 역시 캠 시장은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장은 생각보다 훨씬 광대했다. 경영은 곧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아직 캠 제작방법이 완전히 손에 익지 않았던 탓인지 어느 정도는 감으로 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완성품에 다소 차이가 생겼다. 완구나 문구 등을 만드는 자동선반용 캠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시계와 같은 정밀기계의 부품을 만드는 캠은 그렇지 못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어느 날이었다. 뉴스에서 시티즌 시계사의 자회사에서 소형자동선반에 부착하는 캠을 제작하기 위해 'NC캠 연삭판'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까지 장인의 감과 경험으로 만들던 것을 전부 수치화하여 입력하면 제품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깎이는 기계였다.

기술 개발 속도는 참으로 놀랍다. 얼마 뒤 나는 캠 성형기 수리 때문에 시티즌 시계를 찾아갔다. 그때 우연히 최신 NC캠 연삭판으로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수년전 소형자동선반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 그대로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숫자를 입력하기만 해도 똑같은 제품을 제작할 수 있다니, 마치 눈앞에 마술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형에게 내 뒤통수로 핵폭탄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지금부터는 NC기야! 우리 회사도 NC기를 들여놔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그러나 형은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간신히 경영이 틀을 갖춰 가는 마당에 난데없이 무슨 투자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돌이켜보면 형의 그런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미츠와제작소는 한 달 매출이 약 150만 엔 정도로 약간의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NC기는 1대에 2,000만 엔이 넘었다. 500만 엔만 있으면 도쿄 시내에 집을 살 수 있었던 시절이니 2,000만 엔이 얼마나 큰돈인지 짐작될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와 같은 작은 공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현실적이고 신중한 형과는 반대로, 나는 전형적인 긍정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어쩌면 고집불통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누가 뜯어말려도 뜻을 굽히지 않는다. 소형자동선반용 캠의 수요는 이제부터 점점 증가할 것이 확실하다. 나는 감각적으로 그 냄새를 맡았다. 퀄리티에 대한 고객의 요구도 점점 커질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정확도 높은 제품을 1분 1초라도 빨리 제작할 수 있는 NC기가 업체의 주류가 될 것이 분명했다. 마침 NC기는 이제 막 세상의 빛을 보았다. 아직 업계 전체로 보급되지 않았다.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임에 틀림없었다. 경쟁사보다 한발 앞서 도입한다면 점유율을 순식간에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형을 설득할 수 없었다. 부득불 직원 8명 가운데 3명을 데리고 나와 새로운 회사 '에이원정밀'을 차렸다. 그때가 1970년으로 석유파동의 충격으로 전 세계가 출렁이던 시절이었다. 형으로부터 독립한 나는 우선 NC기를 설치할 공장부터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NC기와 같은 정밀기계는 먼지가 가득한 공장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이 예민한 기계를 위해 깨끗한 환경부터 갖추어야 했다. 곧 도쿄도에 있는 후추시에 토지와 건물을 구했다. 단순히 토지만 구입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공장을 짓는 일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공장부터 짓기로 마음을 먹는 것은, 내가 얼마나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는지 증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NC기를 구입하려면 자금을 융자받아야 했다. 여러 군데 금융기관을 돌아다니며 서류를 보여주고 입이 닳도록 설명했다. "시장 규모는 현재 이 정도에 이르고 있고 여전히 확장일로입니다. 만일 NC기를 도입하면 앞으로 3년간 이만큼의 매출이 예상됩니다." 내 요지는 '어떻게 해서든 캠 시장에서 세계 1위의 기업을 만들 테니 투자하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열을 올려 설명하면 이해해 주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금융기관 담당자도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대출 이야기로 들어가면 동네의 조그만 공장에 대출하기에는 액수가 너무 크다며 난색을 표했다. 몇 차례 거절을 당하자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일단 건물부터 짓기로 했다. 눈앞에 실제 공장을 보여주면 내가 말뿐인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 끝에 결국 어느 대형은행에서 융자를 받았다. 딱히 담보도 없었다. 아마도 내 의지를 높이 산 것이리라. 덧붙여 말하자면 사업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지갑 속이 텅 비어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자. 돈은 늘 주위 어디엔가 있다. 신념으로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돈은 반드시 따라온다. 세상만사는 얼마만큼의 신념을 갖고 있느냐, 얼마나 정신력이 강인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돈의 많고 적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영자는 진심으로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NC기의 구입비용을 융자해주었던 은행은 지금까지도 에이원정밀의 주거래은행이 되어 관계를 맺고 있다.

내 인생의 세 번째 결정, 캠 사업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금을 빌린 뒤 곧 NC기를 도입해 캠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에이원정밀에서 제작하는 캠은 정밀도가 높고 납품이 빠르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문이 폭주했다. 첨단기계의 효과는 놀라웠다. 품질은 높아지고 생산성은 3~4배가 상승했다. 결국 시티즌 시계가 판매한 4대의 NC캠 연삭판은 무두 우리가 구입했다.

경쟁사와의 차이는 더욱 벌어졌고 에이원의 점유율은 경이적인 속도로 상승했다.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연간 매출 7억 엔을 달성했다. 나는 회사가 잘 나가고 있을 때 다음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아니 다음 사업에 눈을 돌려야만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지금은 NC기로 소형자동선반용 캠을 제작하고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소형자동선반은 캠에서 NC로 바뀔 것이 뻔했다. 요컨대 더 이상 캠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캠의 수요는 급전직하할 것이다. 아무리 현재 매출이 좋더라도 계속해서 캠만 제작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깎는 일 자체는 수요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회사의 주력 상품을 NC소형자동전반의 부품으로 전환한다면 사업은 지금보다 더욱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캠과 마찬가지로 높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심 끝에 떠오른 것이 바로 콜릿 척(collet chuck)이었다. 콜릿 척이란 가공물을 단단히 고정시키는 부품을 말한다. NC선반은 고속으로 대상물을 회전시키며 가공하는 기계이기 때문에 기계와 가공물의 형태에 꼭 맞는 콜릿 척을 장착해야 정밀한 가공이 가능하다. 콜릿 척을 제조하면 캠을 구매하는 고객이 재구매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판매망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러나 캠 시장에서 앞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하는 에이원정밀이라도 아직 콜릿 척 실적이 전무한 실정. 새로운 시장에 도전하는 것은 큰 결단이 필요했다. 모든 것을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1976년 콜릿 척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소형자동선반의 주류는 캠에서 NC선반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콜릿 척 시장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우리는 우선 빠른 납기에 주력하면서 차별화를 이루었다. 매출은 점점 상승했다. 콜릿 척 제조를 시작한 지 13년 후인 1988년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콜릿 척의 비중이 마침내 캠을 앞질렀다. 현재 에이원정밀은 일본 콜릿 척 시장에서 점유율 60%의 톱 브랜드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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