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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로렌 스토리

마이클 그로스 지음 | 미래의창


랄프 로렌 스토리

마이클 그로스 지음

미래의창 / 2011년 3월 / 527쪽 / 19,000원



1장. 약속의 땅으로 건너온 사람들




미국으로 건너온 동유럽 유대인

누가 랄프의 할아버지인 샘 리프시츠(슐로모 잘만 리프시츠)의 초상화를 그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실로, 알 수 없는 곳에서 그야말로 빈손으로 건너온 이름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실은 흔하다. 동유럽 유대인 이민자 출신의 대부분이 그들의 선조에 대해 아는 바는 별로 없다. 2차 대전 후, 대부분의 기억은 사라졌다. 유대인들과 그들이 살았던 지역은 홀로코스트에 의해 말살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그들은 "러시아", "폴란드", "민스키-핀스키"와 같은 아주 광범위하면서도 모호한 지역들의 이름을 댄다. 여기서 말하는 "민스키-핀스키"는 오늘날 벨라루스에 속한 지역으로 광대한 늪지대를 매립하여 만든 곳으로 "페일 거주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고향을 떠난 리프시츠 가족은 그야말로 뉴욕의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 일자리를 찾아 거리와 거리를 전전하였다. 샘의 큰아들인 에이시크가 1913년 미국에 도착하여 뉴욕 시청에 신고한 내용을 보면 막스 빌레브스키라는 회사에 다닌다고 적혀 있는데 빌레브스키는 '세일즈' 회사였다. 그는 로워 이스트사이드 즉, 유대인 동네에 살았다. 어쨌든 1923년 미국 국적을 취득한 해에 그의 등록지 주소는 브롱크스로 되어 있다.

뉴욕 변두리의 리프시츠 가족

랄프가 태어났을 때, 리프시츠 가족은 스투벤 애비뉴 3220번지의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다. 오늘날은 흑인과 히스패닉 이민자들이 주로 살고 있는 그 건물에 당시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다. 샘의 아들이며 랄프의 아버지인 프랭크와 어머니인 프리다는 서로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였다. "그들은 서로를 늘 칭찬했습니다. 그 집에서 풍기는 느긋하고 여유 있는 분위기가 부러웠죠." 주변 사람들의 말이다. "조용하고 또 창의력을 권장하는 집안의 분위기가 일종의 예술적인 토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자를 꿈꾸던 꼬마 "랄피"

리프시츠네 아이들은 모두 그림을 잘 그렸다.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한 누나 셀마가 가장 재능이 뛰어났으며 다른 아이들도 대체로 감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술가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썩 괜찮은 직업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7년,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랄프는 이렇게 말했다. "없이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압니다." 이웃들은 집 앞 현관에서 마냥 시간을 보내던 말이 없고 졸린 눈을 한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 몸이 허약했던 랄프는 거의 집에만 있었고 언어장애가 약간 있어서 자기가 하는 말을 매우 의식했다. 형인 제리와 레니, 누나 셀마는 학교에서 오면 "랄프는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고, 늘 현관 앞 계단에 앉아있던 그를 발견했다. 랄프는 나중에 언어치료를 받았다.

꼬마 랄피,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한번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 물었다. 그러자 꼬마 랄피는 이렇게 말했다. "부자요." 이것만큼은 다른 아이들과 생각이 같았다. 그 동네 아이들은 모두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건너온 이민 1세대는 모두 자식만큼은 자신보다 더 잘 살기를 바랐다. 아이들은 2차 대전 후의 경제적인 번영기에 살면서 큰 고생을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모두 부모 세대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그들의 부모는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누구나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꿈꿨다.

2장. 리프시츠에서 로렌으로



"랍비"가 되고 싶진 않아요

1947년 11월, 랄프 리프시츠는 마지못해 예시바 랍비 이스라엘 살란터에 들어갔다. 프리다는 아들을 랍비로 키울 계획이었고, 랄프는 이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다. 1920년대 할렘에 설립된 예시바 살란터는 열렬한 유대교도들이 세운 정통 유대학교로 1926년, 브루클린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생들은 거기에서 종일 성경 공부를 하면서 매일 오후 1시간씩 영어 과목을 공부했다. 살란터는 개개인의 능력 개발을 중요시했지만 랄프에게는 이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히브리어나 이디시어를 잘하지 못했던 랄프는 살란터에서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심지어는 자기보다 어린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듣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아주 독실한 유대교도들이었고 나머지는 종교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옷을 유독 잘 입었던 아이

1950년 가을, 랄프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프리다가 어떻게 랄프의 요구를 수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랄프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인 엄마를 설득해서 살란터를 나올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랄프는 활기를 되찾았다. 랄프를 매력적으로 보았던 동창생, 수잔 길버트 레빈이 말한다. "모두가 랄프를 알아봤어요. 그는 항상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어요." 살란터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옷차림은 주목을 끌었다. 매일 랄프와 고급 미술반 수업을 들었던 닐 베턴은, 랄프가 스케치를 잘 하기도 했지만 그의 진짜 예술은 옷을 잘 입고 다니는 것이라고 말한다. "래글런형 외투가 나왔을 때 인근에서 처음 입은 사람이 랄프였어요. 정말 멋져 보였죠."

장래 꿈은 "백만장자"

1953년 9월, 랄프는 작은형 제리의 뒤를 이어 맨해튼 탈무디컬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그해 2월, 입학 지원서를 작성하면서 랄프는 아버지의 직업을 인테리어 장식가라고 썼고, 과외 활동란에는 자신이 살란터 농구팀의 주장이라고 썼다. 살란터에는 농구팀이 없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듯하다. 랄프에게 그런 욕구가 한때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 더 이상은 랍비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영웅, 스타, 유력인사가 되고 싶었다. 랄프의 꿈은 말할 때마다 매번 바뀌었다. 그는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나는 믹키 맨틀이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죠. 내 꿈은 담장 너머 몇 개의 홈런을 쳐 넘길까, 멋지게 공을 잡아내고, 뒤로 넘어지면서도 공을 꽉 잡고 있는 그런 것이었어요."

부자들의 세상을 접하다

랄프는 어디를 가든 그의 형들의 명성에 가렸다. 브롱크스에서 형들의 그림자를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당시 큰형인 레니 리프시츠는 숙박 캠프인 캠프 루즈벨트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유대인어린이들을 위해 1920년에 세워진 수십 개의 캠프 가운데 하나였다. 레니는 카운슬러가 되었고 후에는 캠프의 유명인물이 되었다. 랄프도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스티브 벨과 함께 1956년에 웨이터의 일자리를 구했다. 캠프 루즈벨트는 랄프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대부분의 캠프 참가자들은 중산층이었지만, 일부는 호텔 소유주, 부동산 소유주, 신문 대리점 운영자의 자녀들로 부유한 편이었다. 그들의 옷차림을 보면 단지 워너비가 아닌, 진짜 프레피였다. 그때까지는 이방인의 세계였던 그들의 세계가 갑자기 그의 손안에 들어오는 듯했다. 랄프는 드디어 자기가 어떤 세상에 속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패션에 대한 랄프의 열정은 그를 운명적으로 부자들의 패션 비결인 '검소함'으로 이끌었다. 그는 사립학교 학생이 아니었기에 진짜 프레피룩은 어려웠다. 번번이 새 옷을 살 수 없었기에 사더라도 오래 가는 옷들만 골라서 샀다. 그것은 영국인들의 스타일이기도 했다. 그들은 옷이 많지 않지만 모두 오래가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트위드 같은 것이 그렇다. 랄프의 사촌 심 스토크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언제나 그런 옷들에 시선을 두었죠. 그리고 거기에 스타일을 접목시켰고 그렇게 랄프 로렌의 역사가 이루어졌죠."

"리프시츠"에서 "로렌"으로

1957년 여름, 랄프는 자신을 되찾았다. 18세의 랄프는 리프시츠라는 자신의 성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느꼈다. 그해 여름 랄프는 성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마음에 든 '랄프 로렌'과 '랄프 런던'에 대해 친구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로만이 말한다. "우리 모두 로렌 쪽에 표를 던졌던 것 같아요. 랄프는 좋아하지 않았죠…" 나중에 새 이름으로 명성을 얻은 후 랄프 로렌이 이름을 바꾸었던 이야기는 그전의 성인 리프시츠만큼이나 민감한 화제가 되었다. 랄프는 진짜가 아니라고 부인 할 때, 사람들은 리프시츠라는 이름을 주로 증거로 들이댔다. 그리고 랄프도 성을 바꾼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랄프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건 작은형인 제리의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3장. 모든 것은 타이에서 시작되었다



개성이 넘치는 젊은 세일즈맨

랄프 로렌은 1960년 12월 30일, 미 육군에 소집되어 야전포병대의 곡사포 대대에 배치되었다. 군대에 가서 그는 이름을 바꾼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병 중에 리프시츠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그는 늘 조롱을 받았던 것이다. 랄프는 그가 뉴욕시립대학이나 얼라이드 스토어를 싫어했던 것만큼 군대를 싫어했다. "거기서는 당신은 얼굴도 없고, 사람도 아니고, 그냥 로봇이죠." 다시 집으로 돌아온 22살의 랄프는 길을 걷다가 예전에 같이 일했던 에드 브란다우를 만났다. 당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갑 메이커인 다니엘 헤이스에서 세일즈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만약 랄프가 장갑을 팔면서 다니엘 헤이스 제품까지 판다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랄프는 장갑과 함께 다니엘 헤이스 제품인 '지자니'라고 부르는 남성용 향수도 같이 팔기 시작했다.

랄프는 특히 영국적인 것에 심취했다. 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돈을 모은 그는 그간 모은 돈으로 희귀한 영국제 스포츠카인 모건Morgan을 한 대 샀다. 모건은 서스펜션이나 쇽 압소바 등이 허술하고 잘 나가지도 못했으며 더구나 목재 프레임을 한 허술한 차였으나, 스타일만큼은 끝내주는 차였다. 랄프의 모건은 진한 초록색에 아주 긴 가죽벨트의 후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랄프는 그 차를 이를 데 없이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자동차가 전부는 아니었다. 어느 날 밤, 랄프는 브란다우를 맨해튼 동부에 사는 그의 집까지 태워다 준 적이 있는데 그 집에서 영국제 앤티크 수집품을 보고 매우 놀랐다. "언젠가는 저 모든 것을 가지고 말 테야." 랄프는 다짐했다.

리키 로렌

1964년, 랄프는 몬테피오 병원의 안과를 찾아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녀(리키 앤로우-비어)를 만났다. 그녀는 당시 병원의 접수원이었다. 랄프는 그녀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눈부신 금발에 샤프한 이미지, 창백한 푸른색 눈동자, 호리호리한 몸매는 딱 그가 원하는 바였다. 그녀는 옷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랄프가 그녀에게 어떤 진 재킷이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옷을 하나 고르고 왜 그것을 좋아하는지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대단해'라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제게 청혼을 했습니다." 온실 속의 화초 같이 자란 리키는 한 번도 랄프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곧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랄프는 정말 천재야." 스물다섯 살의 랄프는 1964년 12월 20일, 리키와 결혼했다.

첫 번째 타이가 만들어지다

랄프는 이미 남자들의 패션에 뭔가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는데 그것은 보다 귀족적인 것으로, 예를 들어 유럽 남자들은 굉장히 폭이 넓은 넥타이를 매고 다녔다. 랄프는 사장에게 트렌드를 앞서가야 한다며, 그런 타이를 만들어 팔자고 제안했다. 넥타이 업계는 주로 모자를 쓴 늙은이들이 주도했는데 이미 죽은 사업이었다. 적어도 랄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는 적어도 JFK와 캐리 그란트, 대학교수 등을 한데 섞은 그런 신화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랄프가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결국 사장은 랄프를 불러서 그의 불편한 심사를 말했다. 랄프는 회사를 떠나야 했고, 그가 사업을 제대로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 했다.

"폴로"의 탄생

랄프의 사업에 '폴로'라고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제리라는 말도 있다. 나중에 랄프는 그들이 뭔가 우아하면서도 스포티한 느낌을 동시에 풍기는 이름을 찾고 있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름은 폴로, 플레이어스 그리고 몇 가지 더 있었는데 랄프는 그를 처음으로 폴로 경기에 데려다준 워렌 헬스타인에게 의견을 물었다. 브랜드 이름을 짓는 것은 전적으로 포지셔닝과 관계가 있었다. "'폴로'는 뭔가 국제적인 느낌, 유럽의 느낌, 게다가 우아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추앙하는 것이죠. 글래머러스하고, 세계적이며 또 플레이보이적인 면을 살짝 풍기는 것. 폴로 경기에 가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점잖고 고귀합니다. 이것이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4장. 도약에서 위기로



그것은 단순한 "타이"가 아니었다

그의 넥타이들은 회색 일변도인 기존의 넥타이들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인도 스위스 영국산 원단을 소재로 한 그의 넥타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수를 놓아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는데, 통상적인 좁은 넥타이들과는 달리 볼록한 병처럼 폭이 넓음에도 불구하고 수를 놓은 부분이 전혀 울지 않도록 정교하게 바느질되어 있었다. 랄프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안에 있는 작고 창문이 없는 사무실의 책상 위에 그 넥타이들을 유유히 펼쳐놓으며, 지난 수 년 동안 세일즈맨으로 구매자를 설득하면서 터득한 방식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애썼다. 랄프는 말한다. "그것은 단순한 타이가 아니었습니다.그것은 중요한 성명과도 같았습니다." 그 시점에 그의 사업은 팔리지 않은 넥타이들이 서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랄프는 자신의 독자적 브랜드를 밀어붙일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확보했고, 드디어 폴로 상표가 여러 상점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뉴욕의 렉싱턴가에서 의류점을 운영하고 있는 릴리안 오웬, 베벌리힐스의 에릭 로스, 보스턴의 루이, 그리고 브롱크스에 있는 의류점 앨빈 머레이에도 넥타이를 판매했다. 앨빈 머레이의 공동 경영자인 앨빈 콘은 이렇게 회상한다. "제리 로렌은 스타였어요. 패션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지요. 랄프 로렌은 형인 제리보다 더 앞서 나갔고 계속해서 발전했습니다. 우리들은 둘 다 새로운 전통이라는 발상에 뜻을 같이 했지요. 우리는 잘 해냈습니다. 하지만 랄프가 더 훌륭했지요."

타이에서 의류로

다른 많은 젊은 디자이너들과 마찬가지로 랄프의 재정상태는 불안했고 가까스로 사업 자금을 조달하고 있었다. 적은 자본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디자이너가 패션계에서 성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패션계의 특성상 심지어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들조차 종종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모조품은 패션업계의 일부 행태일 뿐이다. 대형 백화점들은 폴로와 같은 소규모 제작업자들에게 계속 주문하는 것을 전제로 '가격 인하'와 판매되지 않은 제품에 대한 환불, 각종 벌금과 지불거절 같은 일방적인 규칙을 적용하였다. 그러나 랄프에게는 그런 것들이 통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업의 전환점이기도 했는데, 모조품은 곧 그가 성공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후원자인 네드 브라우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랄프가 시장이 좁은, 폭 넓은 넥타이가 포화 상태인 것을 걱정하며 이제 다른 의류제품 시장으로 진입할 시점인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도, 브라우어는 여전히 랄프가 넥타이에 너무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며 투덜댔다. "랄프는 수트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수트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그가 넥타이를 만들기 위해 쏟아 부은 열정을 셔츠, 바지, 스웨터, 그리고 신발에 바칠 수는 없을까?" 라고 말했다. 랄프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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