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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매원 서명선의 귀농 경영

서명선 지음 | 지식공간
송광매원 서명선의 귀농 경영

서명선 지음

지식공간 / 2010년 11년 / 268쪽 / 14,000원



1장 낭만만으로는 귀농에 성공할 수 없다




30명이 식중독에 걸리면서 내 인생도 180° 바뀌었다

"네? 뭐라고요? 식중독이요?" "한 시간쯤 전에 단체 손님이 오셔서 음식을 드셨는데……." 일식당 사업이 번창하던 어느 날, 가맹점 한 곳으로부터 불의의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30명 정도의 단체 손님이 식사 후 복통을 일으키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전갈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핸들 잡은 손이 떨렸다. 신뢰를 쌓기 위해 좋은 재료만 엄선하고 위생에 신경을 썼다.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언젠가는 터질 문제였다.

그동안 제멋대로인 몇몇 가맹점 때문에 속병을 앓고 있었다. 처음에는 본사에서 정한 기준대로 좋은 음식 재료와 소스를 사용하더니 점차 비용을 낮추려고 값싼 식재료를 쓰기 시작했다. 식당 이미지는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눈물을 머금고 불량 가맹점 몇 곳을 정리했다. 동시에 직영점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다시 손님을 끌기 시작한 어느 날, 가맹점 식당으로부터 식중독이라는 폭탄이 날아든 것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사업의 토대가 다져질 것 같다고 여기는 순간, 지뢰를 밟은 것이다. 어렵사리 구축해놓은 고급 식당의 이미지가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식당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왔다. 단기적인 처방으로는 제2, 제3의 식중독 사태를 피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나는 무엇이 문제인지 복기하기 시작했다. '생선회는 비가열 음식으로 식중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익혀 먹는 음식은 조리과정에서 멸균되는 데 반해, 생선회는 무방비 노출 상태다. 관리만 잘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해답을 찾지 못하면 식당을 접으리라 각오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그러다 삼 일째 되던 날 저녁, 밥술을 뜨다 말고 벌떡 일어섰다. 일본인 친구와 함께 교토에서 회석요리(일본 정석요리)를 먹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회의 본고장인 일본도 식중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맞아! 답은 거기 있다!'

그날도 일본인 친구는 일본을 방문한 나를 데리고 교토의 한 음식점으로 갔다. 친구는 교토는 내륙지방이지만 회석요리만큼은 일본 최고 수준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하지만 고등어 회가 접시에 담겨 나왔을 때 나는 멈칫했다. '고등어 회는 갓 잡아서 싱싱할 때 먹는 것 아닌가?' 꽁치나 고등어 같은 생선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독소가 발생하기 때문에 날것으로 먹기에는 위험 부담이 있었다. 친구는 망설이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매실과 자소로 만든 장아찌 '우메보시'를 내밀었다. "같이 먹으면 괜찮아." 내가 못 미더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일본인 친구가 껄껄 웃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 우메보시가 답이다.' 나는 곧 매실의 효능에 대해서 샅샅이 찾아보았다.

일본에서는 거의 모든 비가열 음식의 조리에 매실과 자소를 사용한다. 우메보시는 살균 효과가 탁월하고 소화를 돕고 장을 깨끗이 청소해준다.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장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이유도 바로 매실을 많이 섭취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회를 내오기 전에 매실과 자소의 추출물로 횟감을 살균하고, 먹을 때도 우메보시를 곁들인다. 또 회를 다 먹은 후에는 매실·자소 주스를 마심으로써 마지막 단계까지 위험요소를 제거한다. 한마디로 매실 없이는 회를 먹지 않는다.

매실 관련 서적을 죽 읽으면서 나는 매실에 푹 빠져 들었다. 사업 구상도 떠올랐다. 우메보시를 국산화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마디로 매실에 미쳤다. 그 길로 곧 재료 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시장을 둘러보고 문의해 봐도 완숙매(황매)를 파는 곳이 없었다. 우메보시를 만들려면 매실이 노랗게 익었을 때 따서 바로 소금에 절여야 한다. 그러나 시장에서 유통되는 매실은 죄다 미숙과(청매)였다. 결국 우메보시를 담그려면 매실나무를 직접 재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며칠 고심 끝에 마음을 굳혔다. '그래, 직접 재배해보자. 내 손으로 재배해서 우메보시를 만들자!' 마침 일식당 직영 농장으로 쓰다가 방치했던 땅이 떠올랐다.

낭만만으로는 귀농에 성공할 수 없다

귀농을 선택하는 순간, 당신은 갑작스레 외톨이가 될지 모른다. 아내는 농사짓자는 내 말에 선뜻 답하지 못했다. 도시를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리라. 무엇보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이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귀농을 선택했다.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반대해 한순간 결심이 꺾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반대를 외치는 가족을 끌고라도 데려갈까 싶었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혈혈단신으로 칠곡의 허허벌판으로 내려갔다.

농사는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생소한 일이었다. 낫질부터 서툴다 보니 잠시도 허리를 펼 틈이 없었다. 그래서 내게는 휴일이 없었다. 대신 주말마다 아내와 아이들이 나를 찾아왔다. 아이들은 낯선 사람 대하듯 어색하게 인사했다. 넥타이를 매고 단정한 차림으로 다니던 아빠가 흙 묻은 작업복을 걸치고 나타났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내는 지친 표정으로 아이들 뒤에 서 있었다. 때로는 가족과 한자리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주말이면 일부러 일을 만들기도 했다. 갈수록 대화가 줄어들었다. 우리는 가족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긴 침묵 끝에 눈물을 흘리며 '이혼'이라는 말을 꺼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헤어져요.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아내로 하여금 '이혼'을 고민케 한 것은 나였다. 그러나 나는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 귀농을 접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가족과 귀농 가운데 하나를 요구했다. 나는 낭떠러지에 몰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날의 일은 봉합되지 못한 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제야 막 내가 할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려면 내가 가졌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귀농이란 이처럼 기존 생활과의 완벽한 단절일 수밖에 없는가. 아내가 '이혼'을 말하고 돌아간 날, 나는 혼자 있는 방안이 싫어 농장을 빠져나왔다. 딱히 갈 곳은 없었다. 사실 이 마을 사람들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귀농 첫날, 마을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시골의 정서를 미리 파악하기 위해 정착 전부터 경로당과 마을을 오가며 유지들에게 점수를 많이 따놓은 터라 그들은 나를 환영해주었다. 몇 차례 기분 좋은 술잔이 오갔다. 어르신들은 마을 발전을 위해 앞장서달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그렇게 즐겁고 좋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귀농을 결심하고 내려와서 처음 몇 주 동안은 세상 처음 자유를 맞본 수인(囚人)처럼 들떠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구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고립감은 커져만 갔다.

농협이나 면사무소 직원들은 만나면 이런 말을 던졌다. "언론사 부장까지 한 사람이 왜 이런 촌구석에 들어왔소?" 잘려서 오갈 데가 없으니까 온 것 아니냐는 소문도 무성했다. 문둥병에 걸린 환자처럼 나는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농장에 심어놓은 매실 묘목을 바라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매실은 내게 기회의 열매였다.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농업을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에게도 능력 있는 아빠, 좋은 남편이 되고 싶었다. 매실만 보면 그런 열망이 불타올랐다. 지금의 외로운 나를 장래의 행복한 나로 바꾸어 줄 것이 바로 매실이었다.

2장 해보기 전에는 안 된다고 생각지 마라



토종 매실 재배,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어떤 매실나무를 심을까?' 우메보시를 만들기 위해 매실을 직접 재배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곧 매실나무는 추위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귀농을 할 무렵, 국내 거의 모든 매실나무는 일본산이었다. 개량 품종도 모두 일본산이었고 매실의 효능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죄다 일본인이었다. 매실의 영어 표기 역시 재패니즈 애프리캇이었다. 매실이라면 일본산이 최고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일본 매실은 포근하고 비가 많은 지역에서 재배하기 적합한 품종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나 남해안까지가 재배의 북방한계선이었다. 한계선 위쪽에 위치한 칠곡에는 심을 수 있는 품종이 없었다.

물론 토종 매실을 생각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종 매실'은 열매가 작은 데다 씨까지 굵어 상품성이 떨어졌다. 토종 매실이 좋다고 말하는 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 역시 토종 매실은 쓸모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일단은 다른 농장의 매실로라도 우메보시를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곳에 문의를 했다. 그러나 우메보시에 필요한 황매를 파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면 청매를 사다가 후숙을 시켜볼까?' 그러나 후숙은커녕 매실이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대안을 찾던 어느 날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농장을 거닐고 있을 때였다. 농장 한곳에 탐스럽게 열매를 맺은 매실나무가 눈에 띄었다. '이런 나무도 있었나?' 이 매실나무는 매실의 '매'자도 모르던 시절, 대구에 들렀다가 엉겁결에 들고 온 것이었다. 아는 교수님이 아파트로 이사 가시면서 내게 준 것이었다. 버리기도 그렇고, 그냥 관상용으로 키워보자고 일식당 직영 농장 한곳에 심어두었는데 이렇게 훌륭히 자란 것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나무가 이렇게 잘 자라서 탐스런 열매를 맺었다니, 전율이 흘렀다. 열매를 따서 냄새를 맡아보니 향이 진했다. 한줄기 서광이 비쳤다.

토종 매실은 산이 풍부하여 신맛이 강하고 향도 진하다. 그래서 매실 엑기스를 만들면 일본 매실과 달리 맛과 향이 잘 우러난다. 약리 작용 역시 뛰어나다. 무엇보다 우리 땅에서 오랫동안 적응해 온 품종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기르기에도 딱 좋았다, 교수님은 이 묘목을 누구에게 얻었을까. 물어보니 토종 매실의 출처는 권병탁이라는 박사님이었다.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저 묘목이 필요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카랑카랑한 노인네의 목소리가 "안 됩니다" 하고 잘라버린다. 권병탁 박사님이었다. 요즘 매실 묘목을 심는 것이 유행이라 묘목이 귀한데다 또 예약된 물량이 있어 기다려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만나 뵙고 설득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권 박사님을 만났다. "제가 찾아뵌 이유는 다름 아니라 매실 묘목 때문입니다." "예약된 물량이 있어 판매할 수 없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으로 아는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박사님, 그 묘목이 아니면 안 됩니다. 단 몇 그루라도 좋습니다. 제가 왜 그 묘목을 필요로 하는지 한번 들어보시고 판단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자 권 박사님이 '그럼, 어디 얘기나 한 번 들어봅시다' 하고 눈짓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아 하나씩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식중독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실 관련 일본 서적을 탐독했던 이야기, 매실에 이런 효능이 있는 줄은 몰랐다는 얘기까지 이야기는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여기에 온 목적도 잊고 있었다. 단지 그 묘목이 내게 왜 중요한지 꼭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열을 올리다 보니 박사님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화는 무르익고 어느 새 매실의 효능과 사업 가능성을 놓고 즉석 토론회가 열렸다. 우리는 짝짜꿍이 잘 맞았다. 마치 짝을 잃은 반쪽짜리 거울이 제 짝을 만난 것 같았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서 사장님 매실 사랑이 대단하십니다. 내가 그동안 매실 때문에 많은 사람을 만나봤지만 서 사장만큼 애정이 깊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박사님이 바짝 앞으로 당겨 앉으시며 내 눈을 쳐다보셨다. "토종 매실 보급 사업을 맡아줄 수 있겠소?"

토종 매실 보급 사업은 권 박사님이 평생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온 사업이었다. 한마디로 '내 후계자가 되어 내 사업을 이어주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단지 묘목 몇 그루 구하러 온 내게는 뜻밖의 제안이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거리가 있어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러나 우리 농장에 딱 맞는 묘목을 구할 길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라. "좋습니다. 기꺼이 박사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법이다

현재 송광매원은 1년에 100여 톤의 생과 매실을 전국으로 유통시킨다. 우리가 직접 재배하는 매실은 전체 출하량의 20%로 나머지 80%는 계약재배 농가에서 재배한다. 나아가 작황이 안 좋을 때를 대비하여 타 지역으로부터 매실을 수매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 역시 갖추고 있다. 유통의 핵심은 안정적인 공급이다. 그래서 계약재배 농가를 늘리는 일이 중요해진다. 나는 재배 계약을 꾸려갈 때 세 가지 점에 유의했다. 매실에 대한 거부감 문제, 품질 유지 문제, 그리고 계약재배 농가의 불안감을 없애는 문제였다.

첫째, 칠곡군 지자체에서도 마뜩잖게 여기는 작물을 어떻게 해야 이웃 농민들이게 짓도록 할 것인가? 벤처농업대학 출신 가운데 매실 농사를 본격적인 벤처농업으로 육성한 것은 송광매원이 처음이었다. 벤처농업이란 농산물 재배에 그치지 않고 가공, 유통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한 농업을 말한다. 한마디로 1차 산업인 농업을 2차, 3차 산업으로 확대한 것이다. 그런데 벤처농업은 당시로서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런데다가 매실은 칠곡군에 낯선 작물이었다. 이 지역은 참외나 벌꿀 농가, 쌀 농가가 주류였다. 그래서인지 이웃 농민들은 매실 재배에 뛰어들길 꺼렸다. 그러나 다행히 그간 토종 매실 보급 사업에 꾸준히 힘을 기울인 결과 '송광매원'이 매스컴에 자주 보도되면서 판매량이 급속히 증가했다. 자연스레 취미 반, 농사 반으로 토종 매실에 도전하려는 예비귀농인들과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농사꾼들이 먼저 모여들었고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곧 전업농가가 뒤따라 동참했다.

둘째,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품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품질 문제는 일식당 경영에서도 겪었던 일로, 계약재배 농가가 품질을 지켜주지 않으면 전체 이미지가 추락한다. 반대로, 품질문제가 해결되면 농산물 판매의 규모를 넓힐 수 있다, 또한 선별비나 운송비용도 절감되므로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나아가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은 송광매원의 기술력 향상으로도 이어진다. 품질 문제의 해결은 지속적인 교육에 달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웃 농가를 교육시키려면 강사료 및 제반 경비가 수반된다. 이 돈은 어디서 마련해야 하는가? 나는 이런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지원 공모전에 참가했다. 이런 공모전에 당선되면 정부 차원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나중에는 신지식농업인에 선정되자 국가에서 교육을 지원해주었다.

셋째, 판매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재배에 임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농민들은 무조건 국가에서 보조를 해주거나 어떻게든 팔아주길 바라는 모럴해저드에 깊숙이 빠져 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정부 기관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부 대신 수확 작물을 판매할 수만 있다면 농가들이 안심하고 재배에만 집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기본적인 전략은, 매실 수확기가 되면 묘목 분양 데이터를 이용해 작황을 물어보고 수확한 매실을 수매하여 판매하는 것이다. 대개는 이런 방식으로 물량을 소화시켰는데 그러자 곧 계약 재배를 하고 싶다는 농가가 늘었다. 그런데 나를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든 것은 함량 미달인 매실을 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절대 그들을 빈손으로 되돌려 보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량 수매하고 몽땅 폐기처분한 적도 있었다. 재배 농가 한 곳이 아쉬운 판국에 굳이 등을 돌리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생소한 작물이었던 매실은 이와 같은 과정으로 칠곡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오랫동안 해오던 일을 버리고 낯선 일을 시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나라고 다 잘될 줄 알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떨리는 법이다. 인생을 미리 경험해보고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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