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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성공 신화의 비밀

김정남 지음 | 황금부엉이
애플, 성공 신화의 비밀

김정남 지음

황금부엉이 / 2010년 12월 / 378쪽 / 15,000원




스티브 잡스 1.0 애플을 시작하다



잡스를 잡스답게 만든 부모님의 사랑 : 애플과 스티브 잡스는 결코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 우선 그의 가정환경 이야기를 해보자.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대학원생으로 동거를 하던 압둘파타 잔달리와 조앤 시블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혼모였던 그의 어머니는 스티브 잡스를 양육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 교육을 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시켰는데, 그들은 사랑을 담아 성심성의껏 스티브 잡스를 양육했다. 말썽꾸러기였던 스티브 잡스는 이런 저런 사고를 일으켰지만, 부모님은 뭔가를 강요하기보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도록 믿고 따라주었다.

또 한 명의 스티브, 워즈니악과의 만남 : 스티브 잡스는 학교에서 외톨이였지만, 전자기기에 대한 열정 덕분에 중학교에서 빌 페르난데스라는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 후 어느 날 잡스는 빌의 집에 방문했고, 그곳에서 마침 워즈니악이 만들고 있는 컴퓨터를 목격하게 된다. 잡스는 워즈니악의 컴퓨터와 전문 지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워즈니악 역시 자신의 말을 바로 이해하는 잡스가 마음에 들었다. 한편 1975년 1월 파퓰러 일렉트로닉스는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 알테어 8800(ALTAIR 8800)의 탄생을 대서특필하였는데, 당시 HP에서 공학용 계산기를 개발하고 있던 워즈니악은 그 기사를 꼼꼼히 읽으면서 자신도 알테어 8800 같은 컴퓨터를 직접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고, HP를 다니면서 틈틈이 개발에 몰두한 워즈니악은 단 3개월 만에 컴퓨터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만든 컴퓨터를 워즈니악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마이크로컴퓨터를 연구하고 기술을 교류하기 위해서 실리콘 밸리에서 결성된 모임)에 공개했다. 하지만 워즈니악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컴퓨터는 별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다. 사실 워즈니악 자신보다도 그의 컴퓨터를 더 높이 평가한 사람이 바로 스티브 잡스였다. 스티브 잡스는 워즈니악의 컴퓨터가 충분히 상업적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직접 컴퓨터를 판매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잡스는 평생에 한 번 정도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이라면서, 아예 회사를 창업해서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판매하자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마침내 워즈니악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물건이었던 HP의 공학용 계산기를 500 달러에 팔아서 회사 창업자금을 마련하게 된다. 잡스 역시 폭스바겐 자동차를 팔아서 창업 자금을 더한다. 둘의 역할분담은 명확했다. 워즈니악이 엔지니어로서 제품개발 전반을 책임졌고, 잡스는 그 밖의 모든 일들을 했다. 우선 그는 컴퓨터를 판매하기 위해 상점에 접근했는데, 그중 하나가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활동하던 폴 테럴이 운영하는 바이트 숍이었다. 결국 잡스는 폴 테럴에게서 100대의 컴퓨터를 주문받는다.

포기하지 않는 열정 : 애플Ⅰ 컴퓨터는 최종적으로 175대가 판매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첫 번째 상품인 애플Ⅰ 컴퓨터는 엄밀한 의미에서 완제품이 아니었다. 애플Ⅰ 컴퓨터는 케이스도 없는 기판의 형태로 팔았기 때문에 구입한 사람이 따로 모니터, 케이스, 키보드 등을 추가해야 비로소 전원을 넣고 컴퓨터를 작동시킬 수 있었다. 때문에 판매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스승 마이크 마쿨라 : 창업 초기 동아리 수준에 불과했던 애플은 마이크 마쿨라의 합류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1942년생인 마이크 마쿨라는 페어차일드와 인텔에서 근무했던 마케팅 전문가였는데, 잡스가 제시하는 비전과 열정에 반한 그는 회사 지분 3분의 1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9만 1,000달러를 투자했고, 은행에서 25만 달러를 융자받을 때 보증까지 섰다. 마이크 마쿨라가 합류함으로써 애플은 이제 정식으로 주식회사가 되었다. 꿈꾸는 두 몽상가에게 마이크 마쿨라는 멘토가 되어서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고, 잡스와 워즈니악이 프로가 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그 후 애플Ⅱ 컴퓨터의 판매량은 1978년에 7,600대, 1979년에 35,000대, 1980년에는 78,000대나 판매된다. 이러한 판매량 증가 덕분에 애플의 매출은 매년 100%씩 성장했고, 창업한 지 단 4년 만에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1980년 12월 12일 애플의 주식이 공개되자 한 시간 만에 460만 주나 되는 모든 주식이 팔렸고, 그날 하루 동안 주식가격은 32%나 상승한다. 덕분에 스티브 잡스는 하루아침에 2억 1,750만 달러를 보유한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스티브 워즈니악의 자산 역시 1억 1,600만 달러를 넘어섰다. 마이크 마쿨라의 주식 역시 2억 300만 달러의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이것은 그가 투자한 자금의 20,000%를 넘는 금액이었다.

애플 몰락의 길을 걷다



존 스컬리의 시대 : 애플 컴퓨터의 창업자로,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창조한 영웅으로 칭송받던 스티브 잡스였지만, 그가 온 전력을 쏟아 부은 매킨토시의 실적이 부진하자 함께 추락하기 시작한다. 매킨토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회사 사람들에게 스티브 잡스는 독선적인 행동들을 빈번하게 벌였고, 이 때문에 사내에 많은 반대파들을 만들었다. 급기야 스티브 잡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들이 결집하여 1985년 5월 31일 이사회에서 그의 모든 실권을 빼앗았다. 그러자 그는 1985년 9월 17일에 애플에 정식 사직서를 직접 제출하고, 애플 직원 중 여섯 명을 데리고 넥스트(NeXT)를 창업한 후 애플의 주식을 단 한 주만 남겨두고 모두 처분한다.

스티브 잡스가 떠난 후 존 스컬리가 애플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당면과제는 창업 후 처음 발생한 적자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였는데, 그의 골칫거리는 스티브 잡스의 뛰어난 선견지명 덕분에 해결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 있을 때 고품질 인쇄가 가능한 프린터와 소프트웨어 개발에 몰두하였는데, 이런 노력은 1985년 앨더스사에서 제작한 페이지메이커로 빛을 보게 되었다. 페이지메이커는 전자출판 혁명을 불러일으키며 추락하던 매킨토시의 컬러 소프트웨어가 되는데, 사람들은 페이지메이커라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하기 위해서 매킨토시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 후 어도비에서 포토샵이라는 이미지 처리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면서 매킨토시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도 사랑받는다. 존 스컬리는 이때 마진율 55% 정책을 고수하면서 회사의 수익을 극대화한다.

당시만 해도 매킨토시를 대체할 컴퓨터는 없었고, 매킨토시 사용자층은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존 스컬리의 선택은 옳은 듯했다. 즉 매킨토시는 1989년에는 300만 대 이상이 판매되어 어느덧 애플은 세계 1위의 컴퓨터 제조업체로 우뚝 선다. 하지만 90년대로 들어서자 문제점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그 시작은 존 스컬리의 판단착오 때문이었다. 매킨토시의 힘은 바로 독창적인 제품이라는 것인데, 마이크로소프트가 매킨토시를 베껴서 윈도우를 내놓았다. 1985년 11월 20일 윈도우가 세상에 공개되자 법적 소송까지 고려했던 존 스컬리는 이틀 후 라스베이거스에서 빌 게이츠를 만나서는 애플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되는 계약을 하고 만다. 당시 빌 게이츠는 윈도우 등장을 1년 정도 연기하는 조건으로 매킨토시에 사용된 애플의 고유 인터페이스를 마이크로소프트가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했다. 존 스컬리는 엑셀이 매킨토시 독점으로 1년간 묶여 있게 된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맥 OS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살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라이선스하는 계약을 했다. 그 뒤 윈도우 2.0이 나오자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를 고소하지만, 1985년 맺은 계약 때문에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판결을 받게 된다. 결국 윈도우 3.0은 1년 동안 무려 4백만 개가 판매되는 돌풍을 일으킨다. 이전만 해도 쓸 만한 그래픽 기반의 운영체제는 맥 OS밖에 없었지만 윈도우 3.0 이후 비로소 경쟁자가 생긴 것이다. 존 스컬리는 서서히 회사에서의 통제력을 잃어갔다.

길 아멜리오의 시대 : 잡스의 모든 실권을 빼앗아서 스컬리에게 전권을 주었던 애플의 이사회 멤버이자 벤처 투자가인 아서 록이 이번에는 스컬리의 해고를 통보했다. 그리고 후임자가 된 사람은 마이클 스핀들러였다. 스핀들러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진행한다. 또 한 자릿수로 떨어진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매킨토시의 운영체제인 맥 OS를 모토로라, 파워컴퓨팅, 유맥스 등 다른 하드웨어 업체에 라이선스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제 애플은 자신의 제품을 복제한 회사와 서로 경쟁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윈도우 95가 가세하면서 마이클 스핀들러는 직격탄을 맞는다. 매킨토시의 1995년 마지막 분기는 6,800만 달러의 적자가 났는데, 이런 실적으로는 더 이상 스핀들러가 회사에 머무를 수 없었다.

스핀들러의 후임으로는 길 아멜리오가 임명되었다. 길 아멜리오는 회사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했고, 운영체제가 가장 문제라는 것을 발견했다. 윈도우 95가 발매된 이후 시장을 급속도로 확장하는 동안 애플은 이에 대응하는 어떤 제품도 내놓지 못했다. 회사 내에서는 도저히 운영체제를 만들 능력이 없으니 외부에서 사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소식들이 스티브 잡스의 회사인 넥스트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었다. 그래서 넥스트의 개발자들은 스티브 잡스 몰래 애플과 접촉한다. 애플 관계자들이 넥스트의 사무실을 방문해서 개발 중인 운영체제를 직접 테스트했고, 흡족한 결과를 얻었다. 충성스런 넥스트의 개발자들 덕분에 스티브 잡스의 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길 아멜리오는 3억 7,750달러의 막대한 현금과 150만 주에 이르는 주식으로 넥스트를 인수하고, 스티브 잡스를 애플의 고문으로 영입하게 된다. 잡스가 고문으로 애플에 돌아왔지만 회사는 아주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길 아멜리오가 CEO로 재직 중일 때 애플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6%에서 3%로 떨어졌고, 교육 시장점유율은 41%에서 27%로 하락하면서 실적은 계속 추락 중이었다. 또 주식은 10년 내 최저로 떨어져 있었다. 결국 이사회는 길 아멜리오의 후임을 선택하기 위해서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에게 SOS를 쳤다.

스티브 잡스 2.0의 시대 : 애플로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그동안 아무도 건들지 못했던 이사회 멤버를 갈아엎었다. 그중에는 누구도 함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마이크 마큘라도 있었다. 그리고 애플에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과거보다 훨씬 더 강력해져 있었다. 그는 기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회사인 픽사를 경영하면서 창조적인 인재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즉 항상 주도권을 가지고서 모든 것에 참견하던 그가 픽사를 경영한 이후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하직원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 특히 좀 더 겸손해졌으며 무조건적인 기술과 하드웨어 지향주의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애플 부활하다



돌아온 황제, 애플의 르네상스를 열다 : 돌아온 스티브 잡스 역시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었다. 결국 50여 개가 넘는 프로젝트 중 단 10개만이 살아남았다. 또 제품 라인업과 제품 개발 방식에도 칼을 대었다. 그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애플의 미래를 불안하게 보는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것이었는데, 애플을 부정적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이크로소프트였다. 1994년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는 매킨토시용으로 MS 오피스를 내놓지 않았다. 결국 스티브 잡스는 라이벌 빌 게이츠에게 SOS를 칠 수밖에 없었다. 맥 OS를 참고해서 윈도우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원죄처럼 따라다닌데다가 마침 애플이 내놓은 동영상 처리 프로그램인 '퀵타임'의 소스를 무단으로 윈도우에 도용한 문제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소송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자질구레한 조건을 내걸지 않고 바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과감한 결단 덕분에 두 회사는 일사천리로 협상을 진행하여 몇 가지 합의를 이끌어냈다. 우선 MS 오피스가 매킨토시 버전으로도 계속해서 발매될 것을 약속받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주식구매를 통해 애플에 1억 5,00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또 잡스는 델처럼 효율적인 생산과 관리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팀 쿡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영입했는데, 팀 쿡이 합류한 후 애플은 놀라운 변신을 이뤄낸다.

애플에 돌아온 잡스를 가장 당황시켰던 것 중 하나는 애플의 브랜드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애플의 브랜드 파워를 되살리는 것이 시급했다. 잡스는 우선 매킨토시의 복제품 판매 계약을 취소시켰다. 또 대규모 캠페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잡스는 치아트 데이의 디렉터 리 클로와 접촉한다. 애플의 시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광고를 원한다는 말을 들은 리 클로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창의적인 생각으로 20세기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등장하는 광고를 생각해냈다.

광고 캠페인의 주제는 'Think Different'였다. 광고는 토머스 에디슨, 아인슈타인, 존 레논, 무하마드 알리, 밥 딜런 등의 모습이 흑백영상으로 지나가면서 다르게 생각해서 결국 세상을 바꾸어 놓은 인물들을 찬미하는 자유시 'Here's to the Crazy ones'가 음성으로 소개되었다. 구조조정으로 비용을 절감하고 외주생산으로 제조의 효율성을 구축하였으며 다르게 생각하기로 브랜드 이미지를 재구축한 애플을 부활시키기 위한 마지막 단계는, 결국 다르게 생각하기를 통해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마침 애플 이사였던 래리 앨리슨이 네트워크 컴퓨터, 즉 NC를 들고 나왔다. NC는 부수적인 기능을 최대한 제거하고 오직 네트워크에 최적화시킨 저가형 컴퓨터였다. 이 제품을 개발하면서는 디자인팀에 좀 더 힘을 실어 그들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도록 했는데, 이는 잡스가 애플의 디자인팀에서 조너선 아이브를 발견한 덕분이었다. 기대에 부응하듯 조너선 아이브는 컴퓨터 역사에 가장 획기적인 디자인을 내놓았는데, 바로 '아이맥(iMac)'이었다. 아이맥의 가격은 다른 제품에 비해서는 비쌌고, 특히 플로피 디스크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이맥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들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시장에 나온 후에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팔려 애플이 부활했음을 확고히 알릴 수 있었다.

아이팟의 탄생 : 2001년 2월 애플 내부에 비밀팀이 하나 결성됐다. 비밀팀의 임무는 MP3 플레이어 시장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새로운 MP3에 대한 아이디어를 애플의 경영진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후 시제품을 보고 MP3 플레이어 시장에 진출할 결심을 한 스티브 잡스는 개발자들에게 크리스마스 시즌 안에 제품을 완성하라고 엄명을 내리고, '아이팟'이라는 이름을 최종 결정했다. 그 후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2001년 10월 23일 처음으로 아이팟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아이팟이 처음부터 큰 히트를 친 것은 아니었다. 2001년에는 12만5,000대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열혈 애플 마니아들이 아이팟을 구입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내면서 판매량은 서서히 달아올라, 발매된 지 2년 만에 130만 대가 넘게 판매되면서 인기 제품의 반열에 올랐다. 한편 애플이 아이팟으로 음악 산업 전체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애플에서 만드는 제품은 오직 매킨토시에서만 돌아간다는 정책을 폐기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인터넷 서비스를 하나로 결합하는 삼위일체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아이팟의 성공으로 애플은 PC가 아닌 소비자 가전업체로 변신할 수 있었다.

아이폰이라는 이름의 혁명 : 애플의 휴대폰 개발은 내부의 기술과 아이디어로 시작했지만, 외부 시장의 변화 역시 한몫했다. 아이팟 덕분에 엄청난 순이익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휴대용 MP3 플레이어 시장에는 한 가지 위험요소가 있었다. 바로 휴대폰에 MP3 재생 기능을 탑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휴대폰에서 MP3 음악 파일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면 아이팟을 구입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변화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애플은 휴대폰 시장에 진출해야만 했다. 한편 아이폰은 필연적으로 이동통신사와 함께 일해야 한다. 그런데 애플의 중요한 사업원칙은 스스로 통제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휴대폰 업계는 이동통신사의 통제를 받는 것이 관행이었다. 다행히 미국의 이동통신업체인 AT&T는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 아이폰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애플이 제시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을 수용하였다. 대신 애플은 AT&T에게 5년 동안 독점판매권을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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