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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신

파숙 퐁파이칫, 크리스 베이커 지음 | 동아시아
탁신

파숙 퐁파이칫, 크리스 베이커 지음

동아시아 / 2010년 10월 / 524쪽 / 18,000원



1부 정치 비즈니스



탁신의 등장


2001년 2월 태국에서 가장 부유한 경제인 중 하나인 탁신 친나왓이 총리로 선출되었다. 이는 태국 역사상 전혀 새로운 일로 평가된다. 태국에 직접 선거 제도가 도입된 이후 20년간 상당수의 재계 인사가 의회에 진출했지만 이들은 비교적 권력에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탁신은 달랐다. 그는 선거 때마다 지역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으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이전에는 태국 선거는 지방 토호의 영향력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 외신은 탁신을 포퓰리스트(populist)라고 묘사한다.

2001년 총선에서 탁신이 이끄는 타이락타이(TRT) 당은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의석수를 기록했다. 1997년 이후 한 정당이 전체 의석의 1/3을 차지한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성공이다. 이듬해 탁신은 향후 선거에 도움이 될 만한 주요 자원을 총동원하기에 이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새로운 정치였다. 전례 없는 새로운 정치 실험에서는 두 가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첫째는 탁신의 거대한 재산과 그의 사적 비즈니스와 관련된 사안이 언제나 내각 주변을 맴돌았다는 점이다. 둘째는 탁신의 포퓰리스트적 선거수단이 현실 정치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부자 총리의 등장'은 1997년 금융위기로 인한 비즈니스의 정치화에 따라 최근 10년간 태국에서 진행된 거대한 사업 기회를 반영했다.

1997년 금융위기는 태국 경제계에 두 가지 극적인 의식변화를 불러왔다. 첫째는 세계화는 더 이상 무조건적인 친구가 아니라 때로는 엄청난 위협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는 지난 20년간 발전되어온 태국의 금권정치 체제에 대한 불신이다. 이 같은 불신은 정치개혁에 대한 압력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1990년대 태국 사회의 또 다른 트렌드는 냉전과 군부 독재 종식에서 비롯된 정치 공간의 확장이다. 군부가 시민들의 거리 시위에 의해 실각하자 두 개의 민간 정치 운동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농촌 운동으로 이들은 농업경제의 쇠퇴와 도시 경제가 농촌 자원을 잠식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 다른 하나는 도시 중산층의 움직임이다. 이들은 정치 개혁은 물론 관료제, 언론, 사회복지, 시민권 등 여러 분야의 개혁을 요구했다. 이 두 가지 시민 세력의 상호작용은 1990년대를 거치며 새로운 공공 정치 공간을 형성하였다.

가족과 사업

탁신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태어나 굳건한 의지로 일어선 중국 이민자 1세대의 입지전적 인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 뒤에는 4세대에 걸친 중국 이민자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탁신의 증조할아버지 셍새쿠는 19세기 무렵 태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었다. 그는 동쪽 해변의 작은 항구에서 세금 징수원으로 일했고 태국 여성과 결혼했다. 그는 1908년 치앙마이로 이주하여 세금 징수원으로 일하다가 미얀마와 중국과의 국경무역에 뛰어들었다.

비단을 중계하는 무역으로 돈을 번 셍새쿠는 1932년 공장을 세우고 공산품 비단 옷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탁신의 할아버지이자 셍새쿠의 아들인 치앙은 열두 명의 아이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가족 사업을 도왔다. 치앙은 결혼을 통해 치앙마이에서 급부상하는 중국 태생의 상업 가문들과 연결고리를 만들었고, 결국 치앙마이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탁신의 아버지 릇 친나완은 1919년 태어났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정치에 뛰어들어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한다. 그는 1975년 군사 정부와 연관된 우익 정당에서 국회의원을 하다가, 사업이 어려워지자 출마를 포기한다. 이로 인해 탁신은 유년기에 지방에서 힘겨운 학교생활을 했다. 하지만 실제 탁신이 고난의 시간을 보낸 시기는 짧았다. 초등학교 3학년이 끝나자 탁신은 치앙마이의 값비싼 학교로 전학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마쳤다. 이후 국회의원인 삼촌처럼 사관학교로 진로를 택한다.

1969년 사관학교를 마친 탁신은 경찰학교로 진학했다. 1975년 탁신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총리실에서 정치와 관련한 업무 경험을 쌓았다. 1978년 경찰에 복귀한 그는 1981년 IBM 컴퓨터를 정부기관에 임대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987년 경찰을 퇴직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 그는 기술적 우위와 공격적 마케팅으로 빠르게 시장을 장악했다. 태국 찻차이 정권은 1988~1991년 사이에 22개의 통신 사업권을 허가했는데, 이 중 탁신이 7개의 사업권을 획득하였다. 탁신은 컴퓨터 임대 회사의 사장에서 몇 년 만에 태국 재계를 이끄는 거대 사업가로 급부상했다. 탁신은 자신의 사업이 성공한 비결에 대해 "경쟁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정부의 규칙과 규정을 이해함으로써 언제나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라고 말한다.

1994년 탁신은 소수당인 팔랑탐 당의 외무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사업과 정치를 구분하는 통념을 과감히 가로지르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1995년 선거에서는 방콕 중앙 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는 자신을 현대적 첨단 기술 비즈니스맨으로 치장한 덕에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치고 올라갔고, 부총리(연립 내각에서 소수 정당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자리)가 되었다. 1997년 차와릿 정부가 붕괴되었고, 태국은 금융위기를 맞았다. 바트화가 폭락하자 대외 채무가 많은 태국의 통신 기업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탁신이 이끄는 친나왓 그룹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 결과 친나완 그룹은 통신 시장에서 다른 경쟁자들보다 강력하게 부상할 수 있었다. 2001년 6월 탁신은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 부자 리스트 421위에 올랐고, 그의 재산은 약 12억 달러로 추정된다.

정치적 부상

1997년 후반, 탁신은 부유한 사업가임에 분명했지만 정치인으로의 변신은 실패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불과 3년 뒤 그는 총리가 되었고, 역사상 최대 득표수로 승리를 기록했다. 탁신의 정당은 전혀 새로웠고, 선거 캠페인은 혁신적이었다. 그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97년의 경제위기와 1997년 등장한 새 헌법이 자리 잡고 있다. 금융위기는 1990년대 들어 태국에서 가장 성공한 정당인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렸고, 탁신이 그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한편 새로 개정된 헌법은 사업적 기반을 둔 탁신의 정당에 유리하게 선거 시스템을 바꾸어 놓았다. 무엇보다 신헌법과 금융위기는 탁신이 지키겠다고 약속할 만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를 심어 주었다.

탁신은 1998년 7월 타이락타이(TRT) 당을 창당했다. 탁신이 세운 정당의 첫째 목표는 소박했다. 다음 번 선거 때까지 태국의 정치가 조금 달라지는 것, 그리고 당의 지상 목표로 '현 시기 위기 극복'을 꼽았다. 창당 후 2년 동안 TRT 당은 외환위기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한 대기업 경영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았다. 태국의 대기업을 이끄는 사업가들은 세계화로 인한 파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정치와 더 돈독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1999년 초까지 탁신의 TRT 당은 단순히 정치적 역량 늘리기만 계속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는 사업가들에게 정부의 편의를 제공하고, 특히 탁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친나완 그룹의 정치적 대리인 역할을 톡톡히 한 대가였다. 사업에서 정치 세계로 넘어온 탁신의 모험은 인허가권을 밑천으로 한 상당히 체계적인 사업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내세운 아젠다는 세계화와 자본 이동에 맞서 태국의 경쟁력 강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의 정당은 금융위기에서 살아남은 여러 대기업의 호감을 샀고, 그들 역시 정부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이는 정부 권력의 통제권에 가까이 다가설 필요성으로 정당화되었다.

1997년 이후 금융위기의 영향이 커지면서, 국가 경쟁력 강화에 대한 논쟁도 늘어갔고, 외국세력에 대한 분노도 높아갔다. 탁신은 이러한 조류에 부응하여 당의 이미지에 국가주의자 이미지를 덧씌웠다. 그러고는 중소기업의 빠른 위기 탈출을 위한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겠다는 정치적 공약을 내세웠다. 또한 태국 유권자의 대다수가 여전히 농촌에 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선거 유세에서 지방 유권자들에게 정당 정책을 직접 호소했다. 2000년 3월 탁신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가 부채에 대한 지불 유예(모라토리엄)를 주요 정책으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탁신은 IMF의 파괴적 정책에 협조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할 정부의 의무를 저버렸으며, 농촌 시위를 비하했던 민주당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면서 소규모 사업가들과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이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선거 결과는 민주당의 추락과 TRT 당의 대승리로 귀결되었다. 권력이 생기자 TRT 당은 지지자들에게 약속을 지키는 것 이상으로 보답했다. 선거가 끝난 후에도 국민들은 TRT 당의 공약이 '실행되기에 지나치게 이상적이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탁신의 지지도는 선거 후에도 수직으로 상승했다. 이는 그가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던 영향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국민이 느끼기에 탁신 행정부가 그의 선임자들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탁신은 국가적 위기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었던 셈이다. 과거 그 어떤 태국 지도자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로 올라간 탁신은 이 우월한 위치에서 태국의 경제와 정치를 바꾸기 위한 실험에 돌입했다.

탁신노믹스

탁신의 경제정책은 탁신노믹스라고 불린다. 이것은 개발주의 시각에 근접한 경제 철학으로 성장 경제에서는 정부가 선진국과 경쟁할 때의 불리한 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기업과 민간 부문을 보호하고 독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탁신노믹스의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GDP 성장이다. 이는 탁신노믹스의 모든 정책이 GDP라는 지상과제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TRT 정부는 과거 어떤 정부보다 GDP 수치에 집중했다. 탁신은 4년 집권의 제 2기에 해당하는 2003년 초반까지 GDP를 두 배로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궁극적 목표는 태국 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껑충 뛰어 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 국가가 곧 기업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탁신은 말을 들어보자. "기업은 국가다. 국가는 기업이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경영도 마찬가지다." 탁신은 자신을 CEO형 총리라고 불렀고 비즈니스적인 경영 방법이 기존의 관료나 정부의 전통적 방식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셋째, 수요의 자극. 탁신의 목표는 '동아시아 경제 모델'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동아시아 경제 모델은 값싼 노동력으로 생산되는 부가가치가 낮은 상품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경제 모델은 장기적으로 태국의 저소득과 국내 수요의 저하를 가져왔다. 탁신의 대안은 국내 수요를 촉진함과 동시에 국내 기업들 역시 팽창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태국이 가치 사슬의 상위로 이동하여, 서구 산업 국가들이 이룩한 부의 수준을 획득하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다. 넷째, 신용 감독. 탁신노믹스의 혁명적 측면은 신용대출의 할당에 있어 정부의 역할을 크게 증대시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태국의 국영은행들은 2001년 이후 붕괴한 민간 은행과 금융기관들을 인수하여 금융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가 되었다. 그리고 중소기업 및 기초 부문에 대출을 늘리도록 권고받았다.

다섯째, 경쟁력 배양하기. 탁신의 목표는 국산 제품을 세계적인 기술과 결합시켜 '가치 사슬의 위쪽'으로 이동 가능한 '새로운 기업가군'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태국 정부는 2002년 중반 관광, 패션, 음악, 컴퓨터 그래픽, 자동차 등을 경쟁력 있는 5개 부문으로 선정하였다. 하지만 이 목록은 경쟁력보다 내각 주위에 밀집한 이익단체 사이의 타협의 결과였다. 여섯째, 자본주의의 심화. 탁신은 농촌 주민들을 시장경제에 깊숙이 유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본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이 시장에 통합될수록 빈곤을 극복할 수 있고, GDP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이다.

탁신 정부의 경제적 의제는 강한 내부 논리를 갖고 있었다. 기업가 정신과 경쟁력을 자극하는 정책은 성장과 국내외 부문 사이의 더 나은 균형과 빈곤의 치료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야망은 태국경제의 장기적 현실과 금융위기의 유산과 마주해야 했다. 탁신의 경제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고 주장할 만하다. 2003년 GDP 성장률이 6.7%에 이르렀고 모든 사람의 기대치를 뛰어넘었다. 수천 개의 비즈니스가 되살아나고 증권시장도 위로 솟구쳤다. 그러나 탁신이 풍요와 자존의 개념에 대해 립 서비스를 했음에도 그의 경제 정책과 이에 대한 실제 감정은 명백히 반대 지점에 서 있다.

국가를 비즈니스와 동일선상에서 경영하는 것은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탁신노믹스는 세 가지 종류의 부채 위험을 갖고 있었다. 첫째, 가계 부채다. 탁신은 저축이 아니라 소비를 권장했고, 소비를 위해 빚을 얻으라고 권했다. 둘째, 정부가 비즈니스 신용대출을 할당하는 중대역할을 하였다. 문제는 태국이 선진국처럼 신용대출 수여자에 대해 높은 수준의 부채상환 체제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셋째, 정부 프로젝트의 준재정 파이낸싱이다. 이런 형태의 사업방식은 손실이 발생하면 정부 예산에 영향을 미치고 공공부채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부채 리스크와 함께 측근 리스크라고 부를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위험도 있었다. 태국은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비즈니스도 함께 관리하고 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치의 재구성

탁신과 TRT 당은 정권을 잡은 후 다음과 같이 새로운 방법으로 태국 정치를 재구성해 나갔다. 첫째, 헌법에 의해 설립된 주요 독립기구들을 무력화했다. 이러한 기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선거관리위원회, 부패방지위원회, 헌법 재판소였다. 탁신은 "한 줌의 사람들이 지명한 기구들이 수백, 수천만의 투표로 선출된 사람에 대해 사법권을 가져야 하는지에 모르겠다"며 의구심을 표했다. 그는 2001년 독립기구들을 통제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고, 2003년까지 이들 기구들을 권력의 통제 아래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견제와 균형이 축소하는 것에 대해 우려가 제기되자, 탁신은 이렇게 말했다. "국민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 대한 경보 체제로 제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둘째, 탁신은 군의 정치적 역할이 감소하는 것을 막고, 군부 내에서 개인의 인맥을 형성하여 나갔다. 탁신은 2대에 걸친 친나왓 가문의 꾸준한 군 진출로 인해 군 내부에 친족 커넥션을 갖고 있었다. 삼촌과 사촌 동생들이 장군 계급에 올랐으며, 이 중 한 명은 훗날 국방장관이 되었다. 탁신은 결혼을 통해 경찰 내에 핵심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렇게 탁신은 군과 경찰, 고위 관료층에 친인척과 사관학교 동기들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갖게 되었다. 탁신은 군대의 이익을 지키고 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 후원자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 답례로 강력한 지지 세력을 통해 안전성을 확보했다. 이는 정치계와 민간 사회의 압박으로부터 그를 지탱하는 부수적 힘이 되었다.

셋째, 관료적 행정조직의 전복이다. 탁신 정부는 지난 20년 동안 성장해온 정치체제를 뜯어 고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탁신은 공무원들이 차지하고 있는 법정기관에 많은 사업가들을 임명하고, 사무차관 같은 고위직에 비공무원을 지명할 수 있도록 법령을 수정했다. 정부는 정치인보다 공무원을 목표로 삼은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런 움직임의 성과로 탁신은 관료들이 TRT 당의 정치적 지시에 즉각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넷째, 지방 세력에 대한 압박. 태국 정치인들은 주로 자신의 지역적 위치를 발판으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지방 개인들은 파벌을 만들었고, 파벌은 선거 집단으로 모였고, 이런 집단이 정당으로, 정당은 연립정당으로 응집되었다. 이러한 정치 집단은 불안한 정치의 원인이 되었는데, 특히 사업가들이 이를 불편하게 생각하였다. 탁신은 이 구조를 뒤집었다. 정치개혁에 착수하여 정당 명부를 공개하고, 행정과 입법을 분리하고 내각 규모를 줄여놓았다. 그러자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내각에 참여하는 일이 크게 줄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탁신은 정치 자금의 흐름을 바꾸며 변화를 밀어 붙였다. 그 결과 태국의 농촌 주민들은 자신들의 지역 발전과 빈곤 탈출을 위해 지역 토호들이 아니라 중앙정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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