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김종희(金鍾喜)의 기업가 정신

전범성 지음 | W미디어
김종희(金鍾喜)의 기업가 정신

전범성 지음

W미디어 / 2010년 6월 / 510쪽 / 20,000원



가난한 소년

“종희가 이번에 자기 학교에서 1등 했다는 게 사실이여?” 경기도립상업학교(道商)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종희(金鍾喜)가 이번 1학기에 학급에서 1등 했다고 해서 마을 어른들의 화제가 되었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전차 종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자하문 기슭에 자리 잡은 도상은 학교의 입지조건이 좋고, 자연환경이 수려할 뿐 아니라 시설 또한 동양 제일을 자랑했다. 김종희는 지금도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의 감격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집으로 배달된 합격통지서의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보는 순간 그의 몸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좌우간 네가 열심히 해서 붙었으니 보내주긴 보내줄 거여. 그렇지만 아예 첨부터 딴 집 아이들처럼 서울에 가서 하숙하고 공부할 생각은 말어.” “그럼 어떻게 해유?” “매일 새벽마다 천안역에서 떠나는 통근기차 있잖나 뵈. 기차통학을 하려면 다니고, 안 그럴라면 진작 그만둬버려.” 종희는 기차통학도 감지덕지했다. 그렇게 고달픈 기차통학이었지만 종희는 1,2학년 내내 결석 한 번 한 적이 없었으며, 학교 성적 또한 학급에서 항상 5등 이내를 유지했다.

4학년 2학기 중반인 11월 어느 날, 종희는 학교수업을 끝내고 어둑해진 효자동 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제2고보(현 경복고) 옆 골목에서 패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도상 4학년의 럭비부 일본인 학생 4명과 조선인 학생 3명이었다. 열세에 몰린 조선인 학생들을 보는 순간 종희는 앞뒤 생각 없이 무조건 조선인 학생 편에 가세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학생들은 그날 밤으로 학교 측에 인도되어 조사를 받고 밤늦게야 귀가할 수 있었다.



억울한 퇴학처분

다음날 오전 9시, 조회 단상에 오른 마츠시마 교장은 어젯밤에 패싸움을 벌인 학생 8명 전원에게 ‘퇴학처분’을 내린다고 선언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아! 얼마나 어렵게 들어온 학교인데… 나의 장래는 이로써 끝장이란 말인가?’며칠 후, 구성금광에서 돌아오신 당숙 봉서 공이 종희의 퇴학 사실을 알고 물었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김종희는 그제서야 퇴학이라는 비운이 살 속에 저며드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다. “당분간 집에 들어앉아 자중하면서 자습이나 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봉서 공은 어떻게 해서라도 종희를 상업학교까지는 졸업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졸업을 1년 남짓 남겨둔 지금 와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면 그동안 어렵게 공부해온 보람이 하나도 없게 된다. 한 달 후, 김종희는 봉서 공의 부탁과 원산 경찰서장 고이케 쓰루이치의 노력으로 원산상업학교 4학년에 편입될 수 있었다. 그러던 초여름의 어느 날, 고이케가 김종희를 불렀다. “내가 원산에 없더라도 열심히 공부하기 바란다.” “알겠습니다.” “졸업 후 내년 봄에 다시 경성에서 만나자!”

김종희가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2년 12월 21일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김종희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 당숙 집에 들렀다. “잘 왔다. 널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당장 경기도 경찰부로 고이케 경부를 찾아가 만나도록 해라!”김종희로서는 고이케도 어차피 한 번은 인사차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고이케 보안과장이 김종희를 반갑게 맞이했다. “김 군! 졸업을 축하한다. 집에서 들었겠지만 너의 취직은 이미 결정되었다.” “화약을 파는 회사라고만 알고 있는데….” “음! 지난 12월 1일에 발족한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다. 회사가 설립된 지 아직 한 달도 안됐지만 조선에 있는 유명한 4대 화약제조회사와 2개의 화약판매회사가 통합된 회사이기 때문에 회사 규모도 클 뿐 아니라 장래성도 매우 밝은 직장이다.”



화약 입문

“김 군!”취체역 마쓰무로 부장이 불렀다. 그는 조선유지 인천화약공장 공장장을 역임한 동경제대 화약과 출신으로, 화약공판의 구매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김 군! 다이너마이트가 무슨 의미인지 아나?”“아니요….” “최초의 다이너마이트는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흡수시켜 만든 규조토 폭약이었다. 규조토 폭약은 액체인 니트로글리세린보다 훨씬 안전하고, 또 종전의 흑색화약보다 폭발력이 다섯 배나 강하다. 그래서 노벨이 규조토 폭약에다 그리스어의 ‘힘’이라는 뜻을 가진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인 거야.” 그 당시 초화공실 토제 앞을 걸으면서 마쓰무로 취체역과 나눈 대화들을 김종희는 잊을 수 없었다.

김종희가 화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바로 숙소를 홍제동 기숙사로 옮긴 다음부터였다. 일요일이면 그는 자연히 연구소의 각종 시설을 돌아보게 되었고, 또 마쓰무로 취체역의 사택으로 놀러갔다가 화약이 근대산업에 끼친 영향이라든가 화약의 본질이 어떻고, 화약의 역사가 어떻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되었던 것이다. 마쓰무로 취체역은 화약이야말로 인류 문명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동양의 3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라고 설파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항해술을 발전시킨 나침반의 발명이요, 다른 하나는 동양문화를 꽃 피운 활자의 발명이고, 마지막이 정치· 군사· 경제 발전에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한 화약이다.” 마쓰무로 취체역은 화약 얘기만 시작하면 신들린 사람처럼 열변을 토하곤 했다.

태평양전쟁은 바야흐로 패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는 ‘실로 측량할 수 없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무고한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는 전대미문의 폭탄’이 투하됐다. 마침내 8월 15일 정오, 전국의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쓰무로 취체역의 태도는 평소처럼 태연하고 침착했다. “김 군! 다행히 너는 지난 4년간 화약을 제조하는 기술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화약공판 구매부와 생산부에 근무해오면서 화약이 무엇이며, 화약이 어떤 경로로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너희 조국 조선을 사랑하거든 우리 일본인이 조선을 떠난 후에라도 너만은 화약계를 떠나지 말아 다오! 이것이 너에 대한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김종희는 아무 말 없이 마쓰무로 취체역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미군과의 인연

맥아더 사령부가 남조선에 미군정을 선포한 것은 9월 7일이며, 8일에는 하지 중장 휘하의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9월 12일은 화약공판에서도 자치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한 날이었다. 김종희를 위원장으로 뽑자는 공론은 자치위원회를 결성하자는 움직임이 일 때부터 나온 이야기였다. 조선인 사원들은 김종희에게 화약공판 업무를 인계하기로 한 중역회의의 결정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으며, 모든 일본인 사원들은 중역들과 함께 9월 23일자로 총퇴진하고, 김종희 지배인 중심의 새로운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 체제가 들어섰다. 김종희는 앞으로 화약공판을 이끌어갈 일이 큰 걱정이었다. 김종희는 미군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당연히 필요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약공판이 보관 중인 다이너마이트 3.7톤이면 적은 물량이 아니다. 흑색화약은 나중에 광산용으로 따로 팔기로 하고, 우선 미군에게 다이너마이트라도 고시가격대로 팔게 되면 엄청난 돈이 된다. 그런데 판로가 막막하다. ‘미군 사령부로 찾아가서 직접 얘기해 봐?’김종희는 이판사판으로 용산에 있는 미군 사령부를 찾아갔다. 김종희가 안내된 곳은 사령부 군수참모실이었다. 스미스 군수참모실 장교는 대뜸 재고량을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종희는 언제든지 화약고를 안내할 용의가 있다고 대답했다.

11월 5일, 미군들이 화약고를 돌아보고 간 지 1주일째 되는 날 오후였다. 스미스 대위와 통역관 조지 야마다가 큼직한 레이션 박스를 하나 안고 화약공판 지배인실로 찾아왔다. “사원들의 월급이다.” 미군은 화약공판이 보유하고 있는 화약을 어떤 방법으로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추후에 결정하기로 하고, 먼저 사원들의 급료를 미군 측에서 지급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김종희는 각 지방영업소장들의 밀린 월급을 전액 지급하고, 전 사원에게 월급 이외에 월급의 50%에 해당하는 물가 수당을 따로 지급하기까지 했다.



사명

어느 일요일 아침, 김종희가 살고 있는 사택으로 운전기사 이병목이 황망한 걸음으로 뛰어왔다. “지배인님! 지배인님… 라디오에서 그러는데 북한군이 쳐들어왔대요!” “언제?” “방금 8시 뉴스에서 그랬어요! 우리도 어떻게 피난 갈 준비를 해야죠, 지배인님!” “화약고의 화약은 어떻게 할 거야?” “화약고에 있는 화약이야 무슨 일 있겠어요?” 김종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녀! 나는 화약을 지켜야 해!”그 무렵 홍제동 화약고에는 지난 5월에 들여온 다이너마이트 3천 상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 위험물을 방치한 채 일신의 안전만 생각하고 피난길을 떠난다는 것은 화약인으로서의 양식이 허락하지 않았다. 피난민의 틈을 헤집고 무악재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은 김종희 하나뿐이었다.

마침내 9월 28일 서울을 완전히 탈환한 유엔군은 그 여세로 38선을 돌파하고 10월 19일에는 평양에 입성했다. 김종희는 부산 서면에 있는 미8군 병참기지의 스미스 소령을 찾아갔다. 김종희는 군수용 화약의 관리용역을 맡고 싶다고 제의했고, 스미스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하면서 적극 검토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며칠 후, 스미스 소령은 화약관리 용역사업 제의를 서면으로 제출해줄 것을 요구해 왔 다. 김종희는 업무수행을 위해 상공부에서 자신을 화약공판 관리인으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미 김종희가 화약공판 업무를 집행해온 사실을 아는 상공부로서도 그를 관리인으로 기피할 이유가 없었다. 이로써 김종희는 6 ․ 25전쟁 동안 한국 화약계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듬 해 10월에 출범하는 한국화약주식회사의 발판을 굳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화약주식회사

정부로서는 종전 후에 폭발적으로 일어날 화약 수요의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1단계 조치로서 화약 공급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 화약공판을 매각하여 민간기업으로 육성하고, 2단계에는 해방 이후 국방부 산하의 제2조병창으로 관리되어 오는 인천화약공장을 상공부 관할로 이관시켜 본래의 화약공장으로 그 기능을 회복한다는 방침을 확정하게 되었다. 정부는 이미 1949년 12월 ‘귀속재산을 유효 적절히 처리함으로써 산업부흥과 국민경제 발전을 기할 목적’으로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 공포하고, 6 ․ 25전쟁 직전인 6월 22일에 1차로 귀속재산 매각입찰을 실시한 바 있었으며, 그 후 부산에서도 입찰을 계속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1951년 6월 12일, 김종희는 관재청에서 실시한 화약공판 매각입찰에 단독으로 응찰해 입찰내정가보다 3만 원이 많은 23억4천568만 원에 낙찰을 보았다. 화약공판을 매각한다는 것은 여태까지 정부 관리 하에 운용되어 오던 화약업무가 앞으로는 민간에 의해 자율적으로 독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화약공판은 장차 화약의 수입은 물론, 제조· 판매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사업계획을 추진해나가면서 화약계 발전에 기여해야 할 책임을 떠맡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약공판을 인수할 새로운 회사법인을 설립할 필요가 있었다.

1952년 10월 9일, 김종희는 마침내 대망의 한국화약주식회사를 발기하면서 회사의 목적사업을 다음과 같이 진취적으로 설정했다. ① 화약류 및 공업약품류의 제조 판매, 보관, 수출입 ② 기계공구류 및 총포류의 제작, 수리, 판매, 수출입 ③ 농산물, 공산물, 기타 공업제품의 생산, 가공, 판매, 수출입 ④ 기타 이에 부수되는 일체 사업. 회사의 자본금은 5억 원, 발행주식 1만주(액면가 5만 원)였다. 김종희의 화약사업은 그야말로 화약처럼 폭발적으로 번창해 갔다. 한국화약(주)의 창업 첫해(1953) 8천493만7천 환이던 총매출액이 불과 1년 사이에 무려 1억9천811만8천 환으로 증대되어 233%라는 놀라운 신장세를 보였던 것이다.



불모지대

“사장님! 내일 아침 10시까지 광업국장이 좀 들어와 달래요.”상공부 광업국장은 수입화약의 판매가격을 승인해주는 주무국장이다. 아직은 주무국장이 들어오라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김종희였다. 다음날 10시, 김종희가 상공부에 들렀을 때, 낯익은 여비서가 반색하며 맞았다. “김 사장님 오시면 바로 장관실로 모시랬어요.”현재의 상공장관은 지난해 7월에 기용된 강성태 장관이다. 강 장관을 중심으로 김종희와 광업국장이 소파에 마주 앉았다. “우리 박 국장 말을 듣자니까 화약공장을 세우려고 천안에다 공장 부지를 마련했다던데…?” “예! 화약을 좀 만들어볼까 하고요.” 이어 강 장관은 새로 공장을 건설하는 것보다는 공장시설을 복구하는 편이 빠르지 않겠느냐면서 인천화약공장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어쨌든 내일이라도 한 번 가보고 복구계획을 세워봐 줘요! 그 대신 내가 장관자리를 걸고 약속하리다. 대한광업협회에서 내는 계획서와 김 사장이 내는 계획서를 전문가들에게 검토시켜 김 사장 계획서가 낫다는 결론이 나면 김 사장이 인천공장을 맡아가지고 화약생산을 할 수 있게 해주겠어요!” 인천화약공장은 문자 그대로 폐허였다. ‘이 지경이었으니까 대한광업협회에서도 손을 댈 수가 없었겠지. 그렇다고 나까지 여기서 물러선다면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이 화약공장이 영 폐허가 되고 말 것 아니냐! 무슨 방법으로든지 이 화약공장은 꼭 복구되어야 한다.’ 그는 인천화약공장을 복구해야 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수행해야 할 화약인으로서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약 20일 동안 철야작업을 하다시피 해서 7월 31일자로 상공부에 제출된 한국화약(주)의 <인천화약공장 1차 복구계획서>는 설계도 및 설계서 등 무려 4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이었다. 한국화약(주)이 제출한 인천화약공장 복구계획서를 들고 경무대로 올라간 강성태 상공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화약 국산화 계획을 설명했다. “계획서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더 중요한 법인데, 이 계획서를 만들어낸 김종희라는 사장이 성실한 인물이오, 강 장관?” “예! 아주 성실할 뿐 아니라 추진력도 강하고 패기가 넘치는 청년입니다.” “그렇거들랑 강 장관이 직접 재무장관과 협의해서 복구비 전액을 보조해주고 잘 감독해서, 내년 안에는 반드시 우리 손으로 만드는 화약이 나오게 해서 장차 국방에 필요한 화약까지 국산 화약을 쓰게끔 노력하시오!”

다음날, 석간신문을 받아본 김종희는 뒷골이 당겼다. ‘법무· 상공· 체신 3부 장관 돌연 경질’이라는 활자가 정치면 머리기사 제목을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관이 바뀌면 정책까지도 바뀌게 마련이었다. 그래도 김종희는 새로 임명된 상공장관이 김일환 전 국방차관이라는데 다소 안도할 수 있었다. 김일환 장관이 취임한지 1주일째 되던 날, 장관실에 불려간 김종희는 뜻하지 않은 제의를 받는다. “인천공장을 김 사장이 불하해 가지고 소신껏 의욕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 대신 복구공사에 필요한 돈은 대통령께서 재가하신 사항이니까 얼마든지 융자해주도록 하지요. 융자 받는 돈이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김 사장 마음대로 복구공사에 쓸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장관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다이너마이트 김

5· 16 군사혁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김종희도 한국화약(주)이 화약 하나에 연연하고 있을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화약은 아무한테나 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고 다만 살 수 있는 허가를 받은 사람에게만 팔아야 하는 상품이므로 상품 선전을 한다든가 해서 화약회사 자체가 수요를 창출할 수 없는 시장의 제한성 때문에 기업이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

김종희가 한국화약(주)의 사업 영역을 정밀화학 분야로 넓혀 가려고 생각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10월 하순부터는 혼미를 거듭하던 정국이 안정권으로 진입하고, 박정희 의장이 방미 일정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한 11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난데없이 김종희에게 내일 오전 10시까지 최고회의 의장실로 나와 달라는 연락이 왔다. 다음 날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박 의장이 말했다. “내가 이번에 미국 갔을 때, 백악관 만찬 석상에서 맥그루더 장군을 만났습니다. 나는 그분이 처음에 ‘다이너마이트 김’을 아느냐고 물어서 농담을 하는 줄로 알았어요. 마침 김 사장을 이렇게 만나고 보니, 김 사장 체구에서 풍기는 다이내믹한 맛도 있고… 다이너마이트 김! 아주 잘 어울리는 닉네임이에요.” “감사합니다.” “내가 김 사장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김 사장도 아시겠지만 요즘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정부가 추진하는 기간산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화약에서도 뭔가 하나를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렇잖아도 현재 저희 회사 기획실에서도 여러 분야로 사업성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