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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신격호(辛格浩)

서진모 지음 | 이지출판
청년 신격호(辛格浩)

서진모 지음

이지출판 / 2010년 7월 / 268쪽 / 15,000원



제1부. ‘성공’이란 문을 두드린 청년 신격호




가난한 농가의 맏이로 태어난 소년

1922년, 경남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문수산 아래 ‘둔터’마을의 새댁이었던 ‘진티댁’은 만삭의 몸을 뒤틀며 긴 산고 끝에 탐스럽고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영산(靈山) 신씨(辛氏) 양반 가문으로 시집을 와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 첫 울음을 토한 아기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롯데그룹 총수 신격호 회장이다.

당시 농가의 맏이는 숙명적으로 가난의 설움을 받아들여야 했고, 소년 신격호 역시 고난과 역경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어쨌거나 당시 4년제 삼동보통학교를 마친 소년은 큰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왕복 30리가 넘는 언양의 6년제 언양공립학교로 편입했으며, 먼 길을 통학해야 했다. 책보자기를 어깨에 메고 울퉁불퉁한 들판길과 신작로를 마치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며 공부를 해야 했다.



문수산을 넘어 일본 후지산을 향해

큰아버지(신진걸, 辛鎭杰)는 당시 그 고장에서 알아주는 곧은 선비였고, 재산도 상당한 중농 이상의 부자였다. 지금의 초등학교격인 ‘둔기의숙’이라는 야학을 세웠으며, ‘근농조합’이라는 농협과 비슷한 금융기관을 만들어 어려운 향인들을 돕기도 했다. 장조카인 ‘격호’를 유달리 사랑하고 생각했던 큰아버지는 당시의 면의원이던 소년의 아버지인 동생 신진수(辛鎭洙) 씨에게 “쟈(저 조카)는 농사보다 공부를 시켜라” 하고 자주 타일렀다고, 지금도 인근의 팔순 넘은 노인들이 전하고 있다.

농사일과 온갖 집안일을 다하던 열아홉 청년 격호는 어느 날 가출을 한다. 사촌 형님이 아버지 모르게 마련해 준, 당시 면서기의 두 달치 봉급인 83엔을 손에 쥐고 울산 문수산 언저리를 넘어 일본 후지산을 향해 청년 신격호는 발길을 재촉했다. 기대와 두려움이 함께 엉킨 긴 한숨 한 줄기가 망망대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창씨개명(創氏改名)에서 비롯된 오해

지금부터 70여 년 전, 조선총독부는 친족 및 상속관계법을 개정한다는 구실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성명(姓名)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氏名)제로 바꾸는 이른바 창씨개명 정책을 실시하였다. 정말이지 자의(自意)가 아닌 순전히 타의(他意)에 의하여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성씨도 바꾸고 이름도 바꾸지 않으면 학교도 갈 수 없고 취직도 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소년 신격호도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80세 이상 되신 어르신들은 모두 똑똑히 증언할 것이다. 그 시대 속에 태어나고 자란 소년 신격호도 시대의 상황에 따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어쩔 수 없이 ‘시게미쓰 다케오’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호사가들은 사실과 다른 말을 만들어낸다. 역사의 진실은 일본인 ‘시게미쓰 다케오’가 아닌 자랑스러운 한국인 ‘신격호’로 다시 부르고 있다. 그는 남달리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소공동 롯데호텔에 있는 한식당 이름도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라고 지었는지 모른다. 이제 그를 더 이상 ‘일본인’으로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고마운 일본인 하나미쓰 선생

절치부심 후 들어간 와세다고등공업학교(화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도 징집되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 나갈 우려가 있을 만큼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그를 눈여겨보던 고물상 주인이 찾아왔다. 하나미쓰라는 60대 남자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잠시 인연을 맺었던 격호 청년을 대단히 신임했다. “군수용 커팅 오일이 품귀 상태라네. 자네 시게미쓰(신격호) 군이 공장을 차려 제조해 보겠다면 5~6만 엔 정도 출자할 용의가 있네. 수요처는 물론 내가 주선해 주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생각지도 않은 스폰서의 출현에 격호 청년은 흥분했다. 당장 도쿄 오오모리 지구에 적당한 공장건물을 얻었다. 그러나 신격호의 첫 사업은 불운했다. 공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도 전에 미군기의 폭격을 받아 공장이 불타고 말았다. 그는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런데 미군기의 공습으로 공장이 폭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난감하더군요. 자금을 밀어준 하나미쓰 씨가 ‘이것도 운명이다. 너도 살 길을 찾아라. 나는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고 살겠다’고 위로했지만, 어떻게든 돈을 벌어 그 어른의 고마운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화장품 제조로 다시 일어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구축 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청년 신격호는 일황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을 하치오지의 폐허 속에서 들었다. 그러나 당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미쓰 노인에게 빌려 쓴 6만 엔의 차용증서뿐이었다.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그런 그의 가슴속에는 ‘나 신격호의 인생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라는 문구가 불꽃처럼 일었다. 공장 입구 기둥에다 직접 붓글씨로 쓴 간판 하나를 척 내다 붙였다. ‘히카리(光) 특수화학연구소’하지만 이름은 거창했으나 보잘것없는 그의 숙소 겸 공장이었다. 1946년 5월의 일이었다.

“시게미쓰, 자네 굉장한 간판을 달았군. 공장이면 공장이지, 연구소라니? 자네 속셈이나 한 번 들어보세.”신격호의 대답은 진지했다. “패전 직전까지 선반용 기름을 만들어 판 경험이 있거든. 바로 그 커팅 오일로 이번에는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 작정이야. 지금 생활물자가 극도로 부족하니까 만들어 놓기만 하면 잘 팔릴 테니 두고 봐.” 그가 만든 화장품은 비록 고급품은 아니었지만 물자가 부족한 시대여서 날개 돗친 듯 팔려 나갔다. 납품과 수금을 하기 위해 하루 2백 군데의 상점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녀야 할 정도였다.

화장품 제조사업으로 신격호는 일본인 은인 하나미쓰 시에게 빌린 돈 6만 엔을 공장 가동 1년 반 만에 모두 갚았다. 그렇게 팔렸다는 것은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향한 여성들의 본능적인 염원은 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청년 신격호는 자신의 새로운 도전 정신과 아이디어로 돈을 벌었다는 사실도 기뻤지만, 사업의 묘미를 터득하게 되었다. 즉 사업의 승패를 결정짓는 관건은, 첫째 시의적절한 상품 개발, 둘째 수요를 기민하게 읽는 시장 파악력, 셋째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추진력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추잉껌과의 운명적인 만남

청년 신격호에게 껌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다가오고 있었던 걸까? 미국제 추잉껌을 흉내내어 풍선껌을 만들고 있는 친구가 찾아왔다. “시게미쓰상, 화장품으로 재미 보는 모양인데, 껌 제조도 사업으로선 아주 쏠쏠해. 한 번 해 보면 어떨까?” 전쟁 후 기호품의 부족에 착안한 업자들이 껌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풍선껌은 원료 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마솥과 요리칼만 있으면 누구라도 간단히 제조할 수 있었다.

그런데 4월경 신격호는 추잉껌 원료로 외국 제품에 사용되는 남미산 천연수지가 소량이지만 일본 국내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사에 완벽주의자인 그는 약제사 한 명을 고용했다. 원료 조제의 정확성과 사람들의 건강문제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로는 일본에서 가장 품질 좋은 껌이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에서 완성되었던 것이다.

“시게미쓰상의 공장에서 만드는 껌이 최고로 좋아!” 이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도쿄 일대에 확 퍼지자 과자점 주인들이 줄을 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청년사장 신격호와 약제사, 그리고 종업원 대여섯 명인 작은 공장이지만 생산이 수요를 쫒아갈 수가 없었다.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는 비록 수동식 제조공장에 불과했지만, 이것은 오늘날 대 롯데그룹의 모체가 되었다. 청년 신격호가 사업의 의미를 터득한 곳도 이곳이었고, 오늘날 롯데그룹 사훈이 된 정직· 봉사· 정열이라는 경영이념 역시 이곳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재일동포 1세, 그 자화상

재일동포는 일제 식민통치의 산 증인으로, 세월이 흘러도 지울 수 없는 역사의 일부이다. 일본에 둥지를 틀고 낯선 환경과 온갖 차별대우의 설움을 겪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조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겁의 세월이 흘러도 그들은 뼛속까지 한민족이었으며,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조국 사랑은 식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청운의 꿈을 가지고 도일하여 고학을 하면서 금의환향을 꿈꾸곤 했다. 이런 꿈들이 있었기에 훗날 귀향하여 조국에 기업을 세우는 등 나름대로의 꿈이 실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격호 회장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당시 청년 신격호의 가슴에는 누가 뭐라고 하든 묵묵히 참고 견디며 남달리 열심히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이나 개미는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격언처럼….



‘성공’이란 문을 두드린 시기

그는 일찍이 성공의 첫 번째 요소는 경제적 자유라고 생각했다. 경제적 자유란 돈이 충분해서 돈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악의 뿌리는 돈의 부족이라고 생각한 한국 청년이었다. 청년 신격호는 원하는 경제적 목표를 명확히 그린 다음 열심히 노력하고 시스템을 잘 이용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미래의 모습을 명확히 그려보는 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실천했기에, 그리고 그는 이런 점을 충실하게 지켜냈기에 훗날 크게 성공하게 된 것이다.



제2부. ‘샤로테’의 영혼이 담긴 롯데의 탄생



운명을 바꾼 한 권의 책

20대 중반, 신격호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망향의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독서에 심취해 있었다. 그때 세계명작을 모조리 독파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그의 심금을 울린 책이 한 권 있었다. 그것은 전쟁 영웅 나폴레옹의 손에서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이 소설은 당시로부터 200년 전에 출간되어 각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을 탐독하면서 젊은 사업가 신격호도 이 책의 주인공 샤로테에 흠뻑 빠져 있었다.

괴테가 이 소설을 쓴 배경은 청년 신격호가 겪었던 패전 이후의 삭막한 도쿄와 닮아 있었고, 뼈저리게 느꼈던 고독과 소외, 잦은 공허감에 처해 있던 그는 괴테와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작품 속의 여주인공 ‘샤로테’의 뛰어난 미모와 인자하고 우아한 인품에 폭 빠져들지 않았을까? 청년 신격호는 무릎을 치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의 ‘샤로테’의 이름을 따서 자신이 창업한 브랜드의 이름을 ‘LOTTE’로 결정하게 된다. 지금 전국의 롯데백화점 문화공간에는 ‘다시 보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독서 코너를 마련해 두고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자신이 애독하던 책 속의 주인공의 영혼을 자신이 창업한 기업의 동반자로 삼아 평생을 함께 하는 기업인은 유례가 없는 독특한 일이라고 국내 여러 평론가들은 말하고 있다.



껌의 언덕을 넘어 초콜릿 고지로

추잉껌으로 성공한 청년 신격호는 1960년대 일본에서 한창 사업을 번창시킬 때 ‘초콜릿을 손에 쥔 자가 과자업계를 손에 쥔다’는 슬로건을 내걸며, 소비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이 시기야말로 초콜릿 생산의 적기라고 생각했다. 과연 그는 예민한 사업가 기질의 소유자라 일컬을 만하다. 한 시대를 읽는 데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초콜릿 시장 제패에 나선 신격호 사장은 롯데의 중견 간부인 노나카와 오토모리를 유럽에 파견하며 이렇게 말했다. “껌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달성했다 할지라도 추잉껌만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어요. 껌만으로 사업을 유지한다는 것은 향후 5년 정도가 고작일 것이오.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초콜릿 시장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국제 수준의 신제품을 만들어 메이지와 모리나가를 눌러야 해요.”

‘맛의 예술품’이라 불리는 초콜릿 기술은 참으로 까다로우며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다. 원료인 카카오두豆, 카카오 버터, 밀크, 설탕의 조합, 그 변화에 의해서 같은 이름의 초콜릿이라도 천변만화의 맛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콜릿은 어느 메이커에서든 노하우는 최고 기술자와 최고 간부밖에 모른다. 또 신제품이 나올 때는 포장에서 라벨 디자인까지 정말 섬세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1961년 11월, 노나카와 오토모리는 신 사장의 지시를 받고 관광을 빙자한 업계 시찰을 떠났다. 롯데 직원들도 노나카와 오토모리의 출장 목적을 잘 몰랐다. 당분간 초콜릿 생산 계획을 비밀에 붙이라는 신 사장의 지시 때문이었다. 둘은 휴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으로 기술자와 기계 설비를 물색하기 위해 분투하였다.

롯데가 초콜릿 진출에 나서기로 한 다음해(1962년), 메이지와 모리나가 제과는 기술 스태프를 유럽에 파견하였다. 은밀히 일을 추진하던 메이지와 모리나가는 이미 ‘이상한 일본인’들이 다녀갔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상세하게 알아본 바로는 선수를 친 것은 다름 아닌 롯데였던 것이다. 두 회사 경영진은 깜짝 놀라서 즉시 응전에 나섰다. “롯데라니! 말도 안 돼. 롯데가 나서지 못하도록 초장에 붙들어야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 시게미쓰 다케오, 그 양반 무서운 사람이야!”경쟁사들은 이처럼 불꽃 튀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청년 신격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메이지와 모리나가의 견제를 받으며, 초콜릿 신제품의 열쇠를 쥔 기술자의 스카우트는 결국 6개월 이상이나 경과한 1962년 7월에야 매듭지어졌다. 그는 스위스 출신의 ‘막스 브락크’를 스카우트하였다. 막스 브락크는 신 사장보다 한 살 위인 취리히대학 기계학부 출신이었다. 또한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지의 유명 초콜릿 공장 기사로 활약했고, 공장장 경험도 풍부했다. 유럽 초콜릿 업계에서 ‘무슈 브락크’하면 최고기술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브락크는 초콜릿 제조 문제 외에도 최신예 기계설비 도입문제에 있어서도 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아직 유럽에서도 가동되지 않은 최신예 기계설비에 관한 연구를 끝내놓고 있던 참이었는데, 기계설비를 부품상태로 도입하여 일본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거뜬하게 해결했다. 신격호 사장으로서는 브락크의 스카우트로 최신예 설비까지 손에 넣은 셈이 되었다.



롯데, 세계 최고의 초콜릿 생산

최신예 기계설비가 갖추어진 다음, 가장 큰 일은 새로운 초콜릿 제품의 개발이었다. 유럽의 맛을 담으면서도 일본인의 입맛에도 꼭 맞추는 것이 관건이었다. 몇 차례 시제품 시험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1964년 1월 첫 작품을 완성했다. 이름은 ‘롯데 가나 밀크초콜릿’ ‘가나’라면 세계에서 제일 양질의 카카오콩을 생산하는 나라이다. 상품명 앞에는 신격호의 아이디어를 살려 ‘스위스의 맛’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이뿐이 아니었다. 80년대 말에 롯데는 연간 140억 엔의 매상을 올리는 대히트 제품 ‘VIP초콜릿’을 발매했다. 롯데는 수분이 다량 함유된 생크림으로 VIP초콜릿을 만들어냈다. 당시 일본 과자업계에서는 수분이 3%이상 포함된 것은 초콜릿으로 부를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롯데는 이 같은 불문율을 무시했고 오히려 그것이 일본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또한 그 후에는 ‘헬시초콜릿, 스킷토 소카이’를 개발했다. ‘스킷토 소카이’는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아침식사를 거르는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스킷토 소카이’에는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키시로올리고당과 인체에 유익한 비피더스균 등이 배합되었기 때문에 노인병에도 좋다고 한다. 신격호 사장이 선장으로 있는 ‘롯데호’의 항해는 ‘세계 최고’라는 목적지를 향해 순항하였고, 일익번창에다 일취월장이란 두 깃발을 펄럭이며 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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