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다 이야기
잔 루이지 파라키니 지음 | 명진출판
프라다 이야기
잔 루이지 파라키니 지음
명진출판 / 2010년 7월 / 280쪽 / 12,000원
1장 '프라다'라는 거대한 우주의 탄생모든 것은 외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미우치아 프라다의 외할아버지 마리오 프라다는 젊은 시절 호기심과 열정이 가득한 청년이었는데, 그는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다양한 문물을 보고 안목을 높인 다음, 밀라노에 최고급 가죽 제품 전문 매장을 열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드디어 1913년 봄, 그는 동생 마르티노와 함께 밀라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갤러리 안에 매장을 열고, 간판을 '프라다'라고 걸었다. 이 매장은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해, 1919년 이탈리아 사보이아 왕가의 공식 납품업자가 되었고, 이 소식이 입소문을 타면서 프라다의 고객 명단은 점점 더 늘어났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라다 매장에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1호점이 있던 에마누엘레 갤러리는 전쟁으로 폭격을 맞았고, 만초니가의 2호점 역시 운명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문을 닫게 되었다. 하지만 마리오는 열악한 상황이었음에도 로마에 프라다 매장 3호점을 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시대적 분위기가 한참 변해 있었다. 상류층이 대양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며 칵테일을 즐기던 시대는 이제 지나가버렸다. 더불어 프라다의 멋진 트렁크 가방도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마리오 프라다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고, 이후 여러 가지 병을 앓게 되어 1958년 세상을 떠났다.
마리오 프라다가 세상을 떠나고 나자, 프라다 매장을 누가 운영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마리오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가죽 매장을 물려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국 미우치아 프라다의 이모인 난다와 어머니 루이사가 사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마리아 미우치아 프라다는 1948년 5월 10일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프라다의 창업주 마리오 프라다의 딸 루이사와 해군이었던 아버지 루이지 비안키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미우치아 집안은 꽤 괜찮게 사는 중산층에, 전통을 굉장히 중시하는 완고한 기독교 가문이었다. 그런데 왜 아버지의 성을 따라 미우치아 비안키라고 하지 않고, 미우치아 프라다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사실 처음에는 두 가지 성을 모두 사용했다가, 프라다 집안이 더 번성하자 그 쪽 성을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2장 열다섯 살, 옷으로 시작된 반항
미우치아가 처음으로 반항하기 시작한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고 한다. 당시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메리 퀀트가 미니스커트를 출시했는데, 이는 곧 세계적인 유행이 되었다. 미우치아 역시 미니스커트에 열광했지만, 보수적인 집에서 미니스커트를 환영할 리 없었다. 급기야 미니스커트 금지령이 내려졌다. 옷으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열망이 넘쳤던 미우치아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할 수 없이 무릎길이의 얌전한 스커트를 입고 학교에 가야 했다. 하지만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미우치아는 사춘기 소녀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가방에서 실과 바늘을 꺼내 계단에 선 채로 입고 있는 스커트를 반으로 접어 바느질하기 시작했다. 스커트는 단 3분 만에 미니스커트로 변신했다. 한편 미우치아는 자유분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성격답계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완고한 프라다 집안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우치아는 할 수 없이 집 근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3장 반항만 할 순 없잖아
미우치아의 옷에 대한 관심은 확실히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 관심은 단순히 유행을 좇는 것이라기보다는 옷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예를 들면 스위스의 장크트 모리츠 스키장에 갈 때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연상시키는 나일론 소재의 티롤풍 스커트를 코디하는 식이었다. 그녀에게는 옷을 입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당시 소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은 단연 성숙한 여성미를 물씬 풍기는 스타킹이었다. 하지만 미우치아는 남들이 다 하는 유행을 생각 없이 따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대놓고 섹시함을 표방하는 스타킹은 좀 천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녀가 선택한 것은 목 짧은 흰색 양말이었다. 스타킹보다 하얀 양말이 소녀적인 아름다움을 훨씬 부각해준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하얀 발목 양말과 스커트는 이제 프라다 스타일이라면 무조건 따라 하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미우치아 룩으로 부를 만큼 유명해졌다.
예술에 대한 자기만의 관심과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넘쳤던 미우치아에게 인문계 고등학교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고집을 부려 예술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졸업 후에는 브레라 미술대학에 진학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그리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부모님이 '브레라'라는 도시를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시간을 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에게 뭔가 보상이 될 만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밀라노의 소극장 학교에서 진행하는 팬터마임 강좌에 등록했고, 곧 팬터마임에 푹 빠져들었다.
미우치아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를 고민하였다. 다방면의 예술적인 끼를 발휘하고 싶다면 연극학과를 가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예술대학에 가는 것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인생을 마임만 하면서 보낼 수는 없다는 데에 동의했다. 그래서 결국 밀라노 국립대학 정치학과를 선택했다. 왜 정치학과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이는 1970년대 초반 유럽의 시대 상황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당시 유럽에서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던 정치 문제들이 도마 위에 올랐었는데, 지금은 공산주의가 몰락했지만 당시만 해도 세계를 지배하는 두 이데올로기로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이 1959년부터 개입하기 시작한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반전운동이 한창이었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젊은이라면 이런 시대적 상황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고, 미우치아는 자신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수많은 물음을 정치를 통해 풀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정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고, 심지어 시골로 귀향해 농촌운동을 하겠다는 어울리지 않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4장 밀라노대학 정치학과에 들어가다
연극과 정치학 공부를 병행하던 시절에 미우치아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별로 없었다. 의미 있는 공부와 즐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한창 정치 공부를 하고 집회에 참여하면서도 미우치아의 옷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미우치아는 특히 플리마켓(벼룩시장)을 뒤져 찾아낸 빈티지한 제품들과 럭셔리 하우스 제품을 매치해서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요즘의 프라다 마니아들이 열광하는 헤어밴드나 꽃무늬 스커트, 발목 양말 등 '미우치아 스타일'이 대부분 이때 만들어졌다. 옷에 대한 콘셉트가 명확했던 미우치아는 정치 집회에 나갈 때도 패션에 꽤 신경을 썼다. 옷장에 피에르 가르뎅 옷이 가득한 부잣집 딸이면서 당원증을 가진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젊은 미우치아에게도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친구들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것도 당연했는데, 그들은 그녀를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다.5장 경제적 독립을 위해 할아버지 가게를 맡다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시대를 거리에서 보내며 미우치아는 밀라노 대학 정치학과를 마쳤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운영이 어려워진 매장 일을 도우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미우치아에게 어느 날 어머니가 말했다. "미우치아, 너도 이제 대학을 졸업했으니 뭔가 분명한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니? 네가 할아버지 가업을 잇는 게 어때? 나는 네가 어릴 적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있어. 어쩌면 너와 잘 어울리고 또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될지도 몰라.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지금 매장 사정이 매우 나쁘다는 거야. 하지만 네가 나서면 신선한 아이디어로 이 죽어가는 매장을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이모는 이제 힘이 부치는구나." 어머니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미우치아는 그 자리에서 선뜻 맡아보겠다는 대답을 할 순 없었다. '패션 사업이 인생을 바쳐서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일까?' 무엇보다 미우치아는 이 질문에 답을 얻어야만 했다. 미우치아에게는 모든 것이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 번쯤 쿨하게 따져보기로 했다. 그러자 매우 단순한 결론이 내려졌다. '내겐 지금 무엇보다 경제적인 독립이 필요해.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경제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세상과 한번 세게 부딪쳐보는 거야.' 생각을 아주 단순하게 정리한 미우치아는 어머니의 제안대로 가업인 에마누엘레 갤러리에 있는 프라다 매장을 물려받기로 했다.
미우치아는 곧 매장 운영과 제품 생산에 관여하면서 프라다를 변화시키는 데 몰두했다.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만큼 미우치아의 디자인 방식은 독특했다. '그녀는 상품을 개발할 때 우선 디자이너팀을 구성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디자이너들에게 말로 설명한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소재와 재단법을 디자이너들과 함께 찾는데, 가능하면 장식을 배제하고 심플하면서도 멋스러운 스타일을 창조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시제품을 만들어가며 결국 명품을 탄생시킨다.' 패션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미우치아에게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창조 에너지와 남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최대한 심플한 디자인을 구현하는 대신, 색다른 소재를 찾는 데 공을 많이 들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온 세계적인 히트 상품 중 하나가 바로 '프라다 가방'이다.
사람들이 프라다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나일론 소재로 만든 가방과 배낭 그리고 파카가 성공하면서부터다. 대학 때 공산주의 활동을 열심히 했던 미우치아는 할아버지가 만든 가죽 제품이 사치스럽고 비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가죽보다 실용적인 소재에 어느 옷에나 잘 어울리는 가방을 만들고 싶었다. 특히 패션을 전공하지 않은 그녀는 디자인은 심플하게 하되 독특한 소재로 승부를 보고 싶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포코노 원단이었다. 당시 포코노는 군대에서나 사용하는 천이었지 패션 소재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원단은 실크처럼 가벼우면서도 튼튼했고, 커피를 엎질러도 물수건으로 한번 쓱쓱 닦아내면 새것처럼 반지르르해지는 기특한 소재였다.
6장 스물아홉, 운명의 파트너 베르텔리와 만나다
1977년 6월 10일 금요일, 한 아가씨가 국제 피혁 박람회 미펠 전시장에서 "'Sir Robert' 부스를 찾고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할아버지의 명예로운 매장에서 제작하고 있는, 자신의 가족사를 대변하는 가방을 함부로 카피하는 사람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는 결의가 가득했다. 가방을 카피한 장본인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부스의 한 청년이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미우치아에게 다가온 것이다. "무슨 일이시죠?" "이 가방을 당신네가 만드나요?" "그렇습니다만?" "그러시군요. 저는 프라다의 수석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라고 합니다." "저는 '이탈리아 가죽 회사'의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 드리게 돼서 매우 유감입니다만, 당신네 회사 제품이 우리 제품과 너무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신기할 정도로요." 미우치아는 차분한 어조로 조목조목 따졌다.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렇죠?" 그러자 미우치아는 약이 바짝 올라 프라다 가방과 전시된 가방이 어디가 같고 어디가 다른지, 미세한 차이까지 조목조목 짚어가며 장시간 설명했다. 잠시 후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라는 청년의 말에 미우치아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청년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네 가방이 전통이 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이젠 시대가 달라졌어요. 다른 사업도 마찬가지지만 이 업계에선 언제 도태될지 몰라요. 미스 프라다, 더 이상 가방 제품에만 머물면 안 돼요. 정신 바짝 차려요. 이제는 시야를 더 크고 넓게 가질 때입니다." "당신이 프라다 사업에 대해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는 거죠? 그렇게 잘난 사람이 남의 디자인을 카피하다니, 참 아이러니하군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네 회사에 누가 되었다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말 잘 들어봐요. 당신네 같은 전통 있는 회사가 고작 가방 하나 만드는 걸로 자부심을 채우려고 하는 건 너무 겸손한 생각인 것 같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며 청년은 이 젊은 아가씨에게 자신의 사업에 대한 안목과 비전에 대해 신뢰감을 심어주기 위해 애썼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가 자신과 함께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납득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펠 전시장에서 첫 만남이 있고 나서 몇 주 후에 두 사람은 함께 일하기로 결심했다. 미우치아는 심사숙고 끝에 베르텔리와 일하는 것이 가업을 유지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베르텔리는 전도유망한 청년 사업가였다. 그가 창업한 'Sir Robert'는 1970년대 남성 스타일을 이끌어가는 영향력이 큰 회사로, 당시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몸에 딱 붙는 셔츠와 나팔바지, 높이 올려 맨 벨트가 1970년대의 대표적인 남성 스타일이었는데, 바로 이 바짝 올려 맨 벨트를 최초로 유행시킨 사람이 베르텔리였다.
7장 그 남자 베르텔리와 연애를
베르텔리와 미우치아가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것은 두 사람이 만난 지 2년 후인 1979년이 되어서였다. 두 사람은 미우치아의 밀라노 집과 토스카나 주 아레초에 있는 베르텔리의 집을 오가며 함께 살기 시작했다. 서로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두 사람은 아직 싱글이었다. 사업적인 면에서도 프라다와 이탈리아 가죽 회사는 여전히 분리된 채 운영되고 있었다. 연인 사이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베르텔리에게는 더 큰 목표가 있었다. "가죽이 있으니 신발도 제작한다. 앞으로는 프라다 가방과 신발이다." 이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미우치아는 그의 계획에 선뜻 동조할 수 없었다. 베르텔리의 능력과 사업적 안목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베르텔리가 아무리 설득해도 미우치아는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텼다. 사실 미우치아는 가방 사업 하나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텔리가 묘안을 짜냈다. 그는 전에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미우치아에게 말했다. "이제 신발 얘긴 더 이상 안 할 테니 안심해요. 신발 사업은 어차피 내 선에서 진행할 거고, 당신이 아니라도 할 사람은 많아요." 그는 미우치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작전을 썼고, 그 작전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베르텔리의 오만함에 자극을 받은 미우치아가 단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더니, 그와 동거를 시작한 지 일 년쯤 됐을 때 처음으로 여성용 슈즈 컬렉션을 연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초, 두 사람은 사랑싸움도 해가며 알콩달콩 행복하게 보냈던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을 발표했다. 둘이 사귄 지 8년 만에 하는 결혼식이었다. 1988년은 두 사람에게 대단히 중요한 한 해였다. 밀라노 패션쇼 기간 중 역사적인 프라다 돈나 첫 컬렉션을 열기도 했고, 그해 이 부부의 첫 아들 로렌초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두 연인이 가족이 되면서 미우치아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미우치아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이상 가정일에 소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2년 후인 1990년에 둘째 아들 줄리오를 낳았다. 베르텔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기 짚어내는 미우치아의 남다른 능력을 간파하게 되면서 옷을 만들어보라고 권했다. 결국 프라다는 의류 부문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8장 명품 신화가 만들어지다
미우치아는 처음 패션쇼를 연 1988년부터 세계 각지의 다양한 장소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패션 업계 관계자들은 매년 프라다가 어떤 디자인을 내놓을지 궁금해 하면서 기꺼이 프라다 패션쇼에 참가한다. 프란카 소차니는 프라다의 패션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미우치아는 단순히 옷을 만들고 컬렉션을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디자인을 발전시키고 있어요. 옷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미우치아의 사상을 드러내는 도구인 셈이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원단으로, 옷이 보여주는 환상으로, 그리고 옷에 담긴 이미지로 표현돼요. 프라다 컬렉션에 가보면 그걸 분명히 느낄 수 있죠. 그 느낌이 바로 컬렉션의 테마예요. 그래서 미우치아 쇼가 항상 논란이 되는 것 같아요."